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9) – “근대 이후 서당의 운명”
| 결국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서당이 근대 이후 밟아온 역사적 궤적을 되돌아봄으로써 현대교육사의 흐름을 또 다른 시각에서 조망해 봅니다. |
1950년대 말에 초등 의무교육제가 형성되면서 우리 사회에서 국가교육체제로서의 근대교육은 그 실질을 갖추어 명실상부하게 정착했다. 그리고 오랜 역사를 지니며 존속해 온 또 하나의 전통적인 초등교육기관, 서당이 최종적으로 소멸되었다. 결국 소멸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던 서당이 근대 이후 밟아온 역사적 궤적을 이 시점에서 되돌아보는 것은 현대교육사의 흐름을 또 다른 시각에서 조망해 보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특히 일본과 타이완에는 우리의 서당과 유사한 전통적인 초등교육기관이 존재했었다. 일본의 데나라이주쿠(手習い塾)―또는 데라코야(寺子屋)― 그리고 타이완의 서방(書房)이다. 근대교육이 부상하면서 이 세 교육기관의 역사적 추이는 크게 달라졌다. 일본에서 데나라이주쿠는 메이지유신 이후 단기간에 근대적인 소학교로 재편되거나 소멸되었고, 일본제국의 식민지였던 타이완과 조선에서는 한동안 서방이나 서당이 근대적인 형식의 식민지 교육기관과 병존했다. 한편, 타이완과 조선 간에 흥미로운 차이점도 확인된다. 타이완에서 서방은 근대적 학교인 공학교(公學校)와 한동안 공존하다가 서방의 신설이 금지된 1932년 이후 급격히 쇠퇴했고 1939년 이후에는 공식적으로 전폐되었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에는 식민지 말기가 되어도 적지 않은 서당들이 보통학교와 공존했다. 심지어 해방 이후에도 서당은 일정 규모로 존속했다. 한국 사회에서 서당이 실질적으로 소멸된 것은 1950년대 말 의무교육제가 실현된 후였다.
우리 사회에서 전근대적 교육기관인 서당이 왜 그렇게 근대 이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았을까. 근대 한국 사회에서 서당의 사회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서당을 교육적인 맥락만이 아니라 보다 거시적인 사회계층 구조의 변화라는 맥락 속에서 포착할 때 제대로 규명될 수 있다. 후술하겠지만 근대 이후에도 유지된 서당 교육의 요체는 ‘실용적 기능’보다는 ‘유교적 교양’에 있었으며 그것을 정체성의 근거로 삼은 주요 계층은 ‘양반’이었다. 1894년의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된 후에도 우리 사회에서 양반층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았다. 근대 이후 향촌사회를 중심으로 한 양반층의 동향과 그들에 의해 유지되던 ‘양반문화’의 추이는 서당의 사회적 의미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맥락이 된다. 사회사 분야에서 축적된 ‘양반층’ 관련 연구, 특히 근대 이후 ‘양반화’ 현상을 다룬 연구들은 서당의 사회적 의미를 밝히는데 시사를 준다. 여기서 다루는 시기는 개항 전후에서부터 1950년대 말까지가 될 것이다.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의무교육의 실현은 서당 교육 존립의 기반을 철저히 해체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근대의 서당
1902년 무렵, 대한제국에 이탈리아 영사로 와 있던 카를로 로세티(Carlo Rosetti)는 그가 목격한 서당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좁은 방안에 30명 가량의 장미빛 옷을 입은 소년들이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소리 내어 책을 읽으면서, 큼직하게 씌여진 중국 문자가 가득한 책을 앞에 놓고 천천히 몸을 흔든다. 그들 앞에는 아름다운 구식 흰 옷을 입은 사람이 머리에 가벼운 정자관을 쓰고 앉아 있다. ··· 그 사람이 선생님이다. 그는 말없이 앉아 기다란 곰방대로 담배를 피운다. 그의 옆에 막대기가 있는데, 때때로 책을 읽지 않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학생이나 움직이지 않고 있는 학생의 머리 등을 그 막대기로 때린다. 그러면 그들은 즉시 태엽에 감긴 것처럼 다시 재빠르게 몸을 흔들고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를 지른다. 글자를 틀리게 발음하는 학생 역시 회초리로 등을 맞는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에게 정확한 발음을 다시 일러 준다. 이것이 한문을 읽도록 교육시키는 한국의 제도이다.1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서당의 교육 형식이 20세기 초에도 여전히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소년들 여럿이 한 사람의 훈장 아래서 각기 자신의 수준에 맞는 서로 다른 한문 경서를 소리 내어 읽으며 암송하고, 그 옳고 그름을 훈장으로부터 교정받는 방식으로 한자 및 한문 문해 능력을 익혀가는 서당의 교육 방식이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에도 온존했던 서당은 식민지기에 접어들어 변화를 겪게 된다. 조선총독부의 서당 관련 정책은 1918년을 분기점으로 변화되었는데, 총독부는 그 이전까지는 서당에 대해 기본적으로 온존하는 방침으로 일관했다. 이른바 “무해유익한 서당을 폐지하면 아동 취학의 길을 잃게 할 뿐만 아니라 서당 교사의 의식주를 궁핍하게 하여 인심을 불안하게 하니 총독부가 취할 바가 아니다”2라는 것이었다. 사립학교에 대해서는 탄압으로 일관했던 총독부가 서당에 대해서만큼은 ‘무해유익’하다는 이유로 온존책을 취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조선의 기존 엘리트층인 양반층의 생활 기반을 이루는 서당을 폐지할 경우 이른바 식민지 지배를 위한 ‘협력 메커니즘’의 형성에 지장이 초래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서당의 교육내용인 유교로부터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말하는 맹자의 ‘왕도정치(王道政治)’와 같은 이른바 ‘경세(經世)의 학’을 발골하기만 한다면, 현상질서 유지(statuo quo)를 위한 윤리로 유교를 이용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이런 조건 하에서 1910년대에 서당이 급증하게 된다.
[그림 1] 1905년 서당의 학습 풍경
(『寫眞帖 朝鮮』, 朝鮮總督府, 1921)

그러나 1918년의 「서당규칙」(총독부령 제18호) 제정을 기점으로 총독부는 서당에 대한 견제에 들어간다. 서당 설립에 신고제를 채택하고, 사립학교가 서당의 이름을 빌려 지속되지 못하도록 하며, 공립보통학교장이 해당 지역의 서당을 감독하게 하고, 서당에서 사용하는 교재를 “천자문(千字文), 유합(類合), 계몽편(啟蒙萹), 격몽요결(擊蒙要訣), 소학(小學), 효경(孝經), 사서(四書), 삼경(三經), 통감(通鑑), 고문진보(古文眞寶), 명심보감(明心寶鑑), 문장궤범(文章軌範), 당송팔가문독본(唐宋八家文讀本), 동시(東詩), 당시(唐詩), 법첩(法帖), 조선총독부편찬교과서” 등으로 제한하는 것 등이 그 내용이었다. 이 정책은 결과적으로 서당이 근대적 교육기관으로 전환되는 길을 실질적으로 차단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나아가 1929년에는 「서당규칙」을 개정(총독부령 55호)하여 서당의 설립과 폐지를 도지사의 인가제로 전환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서당에 대한 견제를 강화했다.
그렇다면 식민지기에 서당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취학했을까. 식민지배 초기인 1912년에 서당의 학동 수는 169,077명(인구 만 명당 116명)이었으나 반면 보통학교의 경우는 학생 수가 41,509명(인구 만 명당 28명)에 불과했다. 보통학교에 비해 서당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심지어 사립각종학교의 학생 수 55,333명(인구 만명 당 38명)의 3배 이상에 달하는 규모였다. 그런데 식민지 말기인 1943년이 되면 서당의 학동 수는 153,784명(인구 만 명당 60명)이 된 반면, 국민학교(보통학교는 1938년의 제3차 「조선교육령」 개정으로 소학교로 개칭되었으며, 1941년의 「국민학교령」 제정으로 국민학교로 다시 개칭되었다)의 경우 학생 수는 2,089,668명(인구 만 명당 809명)으로 급증했다. 보통학교가 서당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놓쳐서는 안 될 것은 서당이 식민지 말기에도 여전히 15만 명 정도의 취학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3
그렇다면 서당의 구체적인 규모는 어떠했을까. 1912년에 조선에는 18,238교의 서당이 있었고 교사 수는 18,435명, 학생 수는 169,077명이었다(남학생 168,728명, 여학생 349명). 대체로 한 명의 훈장이 하나의 서당을 운영하는 규모였고 서당 한 곳의 학생 수는 9.3명 정도여서 매우 영세한 규모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910년대에 서당 취학자가 증대되어 1921년에 295,280명으로 최고조에 달한다. 서당 수도 1920년에 25,482곳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정점으로 하여 이후 점차 줄어들어 1942년에는 서당 수가 3,052곳으로 줄어들었고 취학자도 153,784명으로 축소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변화는 서당 한 곳의 학생 수는 무려 50.4명으로까지 늘어나 서당이 대규모화되었다는 것, 그리고 교사 수가 3,729명이 되어 한 서당에 2인 이상의 교사가 있는 서당들이 나타났다는 것, 또한 취학자의 거의 1/3에 육박하는 47,751명의 여학생이 서당에 취학했다는 것 등이다.4 1910년대에 식민지배 초기의 2배에 가까운 정도로까지 서당 취학자가 늘었으나 1920년대에 접어들어 보통학교의 우위가 확정적이 된 배경에는 1919년 3·1운동의 발발이 있었다.
그렇다면 식민지기 서당은 어떤 성격의 교육기관이었을까. 1933년의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조선 서당 수 9,208개소(1931년 통계치) 중 1,200개소가 조선어, 일본어, 산술 등 근대적 교과도 가르치는 ‘개량서당(改良書堂)’으로 승격했다고 되어 있다.5 즉 1931년도에 전통서당의 비율은 87%에 달하는 셈이다. 1933년에는 전라북도 소재 전체 서당 233교 중 전통서당이 183교로 78.5%를 차지했다는 보도가 있고,6 같은 시기 경상북도 소재 전체 서당 400교 중에서 전통서당은 310교로 전체의 77.5%를 차지했다는 보도도 있다.7 1935년도 경기도의 경우, 전체 서당 570교 중 392교가 전통서당으로 전체의 68.8%를 차지하였다. 경기도 자료에서는 서당 교원에 관한 자료도 확인할 수 있는데, 전체 서당 교원 600명 중 한학 전공자가 426명으로 71%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초등교육 이수자 152명(25.3%), 중등교육 이수자 20명(3.3%) 그리고 전 보통학교 교원 2명의 구성이었다.8 요컨대 식민지기 전체를 통틀어 개량서당보다는 전통서당 쪽이 일반적이었다. 식민지기 서당은 근대적인 교육기관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실현시키기보다는 전근대적인 내용과 방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전통서당이 식민지기 내내 완강하게 지속되었을까. 그러한 지속의 원인은 무엇일까.
여기서 식민지기 보통학교 취학과 서당 취학 간의 관계를 검토해 보자. 한편으로 서당은 조선의 민중들에게 보통학교 교육을 대신하는 ‘대체재(代替財)’적 성격을 지닌 교육기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떠했을까. 흥미로운 점은 보통학교 취학자 중에서 서당 수학 경험을 가진 학생들의 비중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컨대 1910년대의 경우, “70〜80% 내외의 입학아동이 서당을 거친 것으로 나와 있고 1921년을 고비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1928년에 이르면 약 35%까지 떨어진다”9는 보고가 있다. 한편, 1930년대 초에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실시한 학교 입학자 조사자료에 따르면, 1932년에 보통학교 전체 입학자 중 26.6%가 서당에서 수학한 경험이 있었다.10 1933년에는 그 비중이 32.9%,11 1934년에는 32.4%였다.12 이는 서당 수학이 보통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취학전 교육으로 자리매김하거나, 적어도 양자의 교육경험을 배타적으로 보지 않고 ‘공히’ 필요로 하는 조선인들이 적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서당 교육을 보통학교 교육의 ‘대체재’라기보다는 ‘보완재(補完財)’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간주해 양자를 함께 추구했다는 뜻이다.
식민지기에 서당 취학 행위에 작동한 동기 중 얼마만큼이 ‘대체재’적 성격을 지니는지, 혹은 ‘보완재’적 성격을 지니는지를 확정하여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통학교에 자제를 취학시키면서도 동시에 서당 취학 경험을 갖게 하는 조선인들이 보통학교에 기대하는 효과와 서당에 기대하는 그것은 서로 다르면서도 ‘병행’ 가능한 것으로 인식했음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들이 보통학교가 아닌 서당에 대해서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근대 이후 서당의 사회적 의미를 밝히는 작업을 요구한다.
현상적으로 보면, 서당에서의 수학 경험이 보통학교에서 배우는데 일종의 ‘전이효과’를 발휘하거나 적어도 ‘취학전 준비교육’의 효과를 발휘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음 자전적 자료를 보자. 1918년생인 김규민의 서당과 보통학교 취학 경험 기록이다.
국민학교 4학년이면 9살, 10살인데 나는 그 나이까지 서당에 다녔습니다. 다니면서 논어, 맹자 다 읽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외삼촌이 청성보통학교에 선생으로 부임했습니다. 외삼촌은 그래도 새 교육을 받고 했으니까 어느 날 오셔서 우리 할머니나 엄마 앞에서 애 고등관 시킬라면 보통학교 가야 고등관도 되고 다 되지 서당엘 보내선 아무것도 안 된다고 그러니까 우리 어머니나 아버지가 그러면 네가 맡아서 공부 시켜라 해서 청성보통학교를 갔습니다. ··· 청성보통학교에서는 갑자기 4학년에 들어갔는데 외삼촌이 4학년 담임이라서 그랬습니다. 그 뭐 아, 이, 우, 에, 오 그 일본말 하나도 모르지만 1학년에 넣을 수도 없고 하니까 자기가 데리고 공부시킨다고 4학년에 넣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외삼촌이 교과서 한 세트를 사다주셨고 나는 서당에 다녀 한문은 능하니까 그까짓 것은 문제 아니었고 아, 에, 이, 오 몇 자 배우니까 4학년 책을 하룻밤에 다 읽었습니다.13
서당에서 익힌 한자·한문 문해능력이 동일하게 한자를 활용하는 일본어 교과서를 이해하는데 일종의 전이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보통학교와 서당은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 여기서 보통학교 편입제도가 활용되었다. 「보통학교규정」 제74조에는 “제2학년 이상으로 입학을 허락할 수 있는 자는 상당 연령에 달하고 전 각학년의 과정을 마친 자와 동등한 학력을 가진 자로 해야 한다. 전항 입학자의 학력은 전 각학년도의 정도로 그 각 교과목에 관한 시험에 의해 검정해야 한다”고 되어 있어 중간 학년으로의 편입이 허용되었다.14 또 의무교육제가 실시되지 않았던 식민지 조선에서는 보통학교 입학 연령 자체도 엄격히 제한되어 있지 않았고 다만, “제72조 아동을 입학시켜야 하는 시기는 학년 시작부터 30일 이내로 하고 단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에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 보통학교에서는 그 해 4월 1일에 연령 6년에 달하지 않은 자는 그 학년 중에 입학시킬 수 없다”고 하는 연령 하한 규정만이 있었기 때문에, 서당 교육을 받은 후에 뒤늦게 보통학교에 입학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907년에 태어나 서당을 다닌 공병우의 다음 회고를 보자.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서당 공부를 하는 관계로 늦게 보통학교(지금의 국민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도 13살이 되어서야 나의 고향인 평안북도 벽동군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갔다.15
서당 수학이라는 취학전 교육 경험을 가진 후에 보통학교에 진학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은 역시 서당 교육의 ‘보완재’적 성격을 방증하는 사례다.
해방 이후의 서당
서당에 관한 국가적 수준의 공식 통계 보고는 식민지기로 종식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국가나 문교부 등에 의한 공식적인 서당 조사 통계자료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따라서 해방 이후에 서당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자료들에 의존하여 추정할 수밖에 없다.
해방 이후에 남한에 들어선 미군정 정부도 그리고 1948년에 성립한 대한민국 정부도 서당에 관한 공식적인 제도적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큰 흐름에서 보면, 미군정 하에서의 교육개혁 구상 안에 초등 의무교육제의 실현이 담겨 있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선포된 헌법을 통해 초등 의무교육제가 법제화되었던 만큼 서당의 쇠퇴는 예정된 운명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식민지 시기와는 크게 달라진, 서당 존폐를 좌우하는 구조적 조건의 변화였다. 그러나 서당이 그리 간단하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몇몇 신문 기사에 의거하여 해방 이후 서당의 잔존 규모를 확인해 보자.
1950년 4월의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전국에 서당이 497개소 남아 있으며 5,650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다고 보고되었다. 그 대부분은 국민학교가 부재한 산간벽지에 개설되어 있고, 국민학교 및 중학교를 중도퇴학한 자나 학비부담 능력이 없는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교육내용은 천자문, 소학, 맹자, 논어, 계몽편, 명심보감 및 한글이어서 전통서당에 한글이 추가되는 정도였다.16 식민지 말기의 15만 명(남한만이 아닌 전체 조선의 수치이기는 하나)에 가까운 취학 규모에 비추어 볼 때 현격한 쇠퇴라고 할 수 있다.
몇 년 후에는 다소간 늘어난다. 1954년 10월의 기사에 따르면, 전국의 한문 서당이 1,005개소에 취학자는 9,329명이며 그 외에도 한글과 한문을 병용하는 서당, 말하자면 개량서당이 전국에 509개소 존재한다는 것이다. 양자를 합하면 천오백여 서당이 한국전쟁 이후에도 잔존한 셈이다.17 이 1954년은 문교부에 의해 「의무교육완성6개년계획」(1954-1959)이 시행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그림 2] 1959년 대관령의 서당(국가기록원 자료)
초등 의무교육제의 실현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듯이 서당은 급격하게 쇠퇴하지만 그럼에도 산간벽지에는 여전히 일부의 서당이 남아 있었다. 1958년에는 전국의 서당이 555개소며, “옛날의 서당과 다른 점은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을 비롯하여 사서삼경 외에 한글과 영어, 수학 등 현대인의 필수과목을 아울러 가르치고 있는 점”18이라는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의 서당은 의무교육제가 실현되지 못한 지역에서의 ‘대체재’적 교육기관으로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의무교육6개년계획」이 종료되는 1959년에도 전라남도의 150여 곳의 서당에 2천여 명의 학생이 취학하고 있다는 보도19 및 경상북도의 70여 곳의 서당에 953명의 학생이 취학하고 있다는 보도20도 있다.
1960년대 이후 서당에 관한 보도 기사는 주로 서당을 시대착오적인 특이사례로 희화화하는 것들만 드물게 발견될 뿐이다. 예컨대 1962년에는 “신학을 배운 일 없으니 그 진리가 어떠한 것인지 알 길이 없으며 오직 구학의 진리만을 믿고 산다”는 훈장이 여전히 상투를 틀고는 한학을 가르치는 대관령 횡계리 산골 서당에 관한 보도21가 실리는 식이었다. 한편, 국민학교를 마치고 난 후 가정 형편으로 인해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나름의 필요에 따라 서당을 활용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2 1960년 보도에 의하면 전북 장수군의 서당에 다니는 학생들은 “대개 소졸 학생들이라 하며 일년에 쌀 한가마쯤 내면 되므로 중학에 못 보내는 대신 이곳을 택한다는 것이다”.23
서당 교육은 해방 이후 뚜렷한 쇠퇴의 경로를 밟을 수밖에 없었지만 여전히 한 동안은 지방에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것은 국가 권력에 의해 강권적으로 폐지되거나 다른 교육기관으로 대체된 것이 아니라 의무교육제가 실현되면서 자연스런 도태와 몰락의 길을 밟아갔다. 그나마 남아있던 소수의 서당도 의무교육제 실현의 사각지대에서 주변적으로 가느다란 명맥을 유지하는데 불과했다.
그렇기는 하나 우리 사회가 19세기 말에 근대에 접어든 이후에도 왜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서당이 완강하게 유지되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일단 서당 교육의 내부로 들어가 거기서 전개된 교육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유력한 참조 대상이 되는 것은 유사한 전근대적 교육기관이었던 일본의 데나라이주쿠, 그리고 타이완의 서방 교육이다.
데나라이주쿠, 서방과 서당의 비교
근대 이전에 중국 중심의 한자 문명권에 속해 있던 동아시아의 교육 세계에서 한자·한문의 문해능력 취득을 위한 초보적인 교육기관으로 일본에 데나라이주쿠, 타이완에 서방, 그리고 조선에 서당이 있었다. 일본의 데나라이주쿠부터 살펴보자.
근대 이전 일본 사회에서 ‘데나라이(手習)’란 한자 읽고 쓰기의 초보를 손으로 익힌다는 의미였고 그것을 배우는 교육기관을 데나라이주쿠(手習塾)라 했다. 일본의 근세, 즉 에도(江戶) 시대에 데나라이주쿠는 ‘가속화하는 문자 사회의 성립을 배경으로 하여 주로 서민 자제가 읽고 쓰기의 초보를 배웠던 교육조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를 가리키는 또 다른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우리 학계에서도 널리 쓰이는 ‘데라코야(寺子屋)’라는 명칭이 있으나 이는 주로 교토와 오사카 등 일본의 간사이(關西) 지역에서 사용된 것24이므로, 이 글에서는 인용문에서 쓰인 표현을 제외하고는 데나라이주쿠로 통칭하고자 한다.
데나라이주쿠 발전의 사회적 배경은 어떠했을까. 무사 계급과 평민 계급의 거주 자체가 분리되어 있던 일본 근세의 이른바 ‘병농분리(兵農分離)’ 체제 하에서는 지배자로서의 무사가 평민에게 내리는 지시와 명령이 문서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민중 측에 일정한 문해능력이 요구되었을 뿐 아니라,25 특히 도시 지역에서 상업에 종사하는 평민들, 즉 조닌(町人) 계급의 경우 노동 자체가 문서의 읽고 쓰기 능력과 계산 능력을 필요로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에 필요한 실무적 능력을 기르는 교육기관으로 데나라이주쿠가 발전했다. 또 화폐경제의 발달은 단지 상인 계층만 아니라 상품 생산과 유통에 개입하는 농민층을 증대시키면서 동시에 데나라이주쿠의 수요층도 확대시켰다.
데나라이주쿠 교육의 성격을 보여주는 가장 주된 근거는 활용된 교재의 성격이다. 그것은 ‘오라이모노(往來物)’로 불렸다. 오라이모노란 말 그대로 ‘가고 오는 서한문’의 사례를 편집한 텍스트다. 오라이모노 중에서 가장 광범하게 보급된 것이 “『데킨오라이(庭訓往來)』(작자불명, 14세기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됨)다. 『데킨오라이』는 일 년 열두 달의 오라이모노 24통에 윤달 한 통을 더한 합계 25통의 편지문 사례집으로서 각 편지에는 의식주, 직업, 산물, 정치, 종교 등 사회 전반의 사물에 관한 단어가 열거되어 있어 무사나 서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학습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26 오라이모노는 지역별로 그리고 교육대상별로 학습자의 수요에 부응하여 다양하게 편집된 실용적 텍스트였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 데나라이주쿠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생활이나 노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된’27 것이었다. 야쿠와 도모히로(八鍬友廣)는 오라이모노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근세 오라이모노의 특징은 모두 상품 경제나 유통·교통의 발전이라는 근세 사회의 모습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 거대한 사회 변동은 그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지리적 공간 인식의 확대와 지역 간을 이동하는 방대한 물건에 대한 지식, 강력한 자기규율에 의해 결합된 강고한 인격 등을 요구했던 것이다. 근세 오라이모노는 이러한 필요성을 주요한 기반으로 해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28
그는 오라이모노를 가르치는 데나라이주쿠 교육을 노동과 생산에 필요한 실용적 훈련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일면적이라고 덧붙인다. “보다 상층의 민중 중에는 노동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문자 문화의 세계에 참여하는 것을 처음부터 목적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가령 노동의 필요에서 이루어진 학습이라 할지라도 이를 통해 형성된 문해능력이 문자 문화 세계와의 연결 고리가 되어 그것에 접근할 수도 있었다”29는 것이다.
다만, 데나라이주쿠의 기본적 성격은 어디까지나 그 실용성에 있었다. 이른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통해 군자(君子)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상거래 등 실생활과 노동에 요구되는 문서를 쓰는 데 필요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 데나라이주쿠에 다닌 것이다. 이는 조선의 서당과 크게 다른 점이다. 조선의 서당은 민중의 노동과정과 관계없는 초보적인 유교적 교양의 전수기관이었다.
일본의 데나라이주쿠 자체는 근대 이후 급속하게 교육사에서 모습을 감추면서도 근대교육으로의 이행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미라하 도루(海原徹)에 따르면, “데라코야 교육이 활발한 지방일수록 대체로 신교육의 출범이 빠르고 또한 뚜렷했는데 이는 구교육이 직접적으로 신교육으로 이어지지는 않아도 신교육을 물심양면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준비해 가는 강력한 토양이 될 수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30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당은 “조선 사회에서 오랜 전통을 지녔으면서도 근대학교로 발전할 기회를 잃고 비근대적인 양상만이 식민지 시대에 지속되었다. 이 사실은 서당에 대한 민중의 관심과 참여가 근대학교로 발전할 가능성 내지는 그 요소를 단절하고 그 대신에 동화교육 중심의 공립보통학교를 창설하고 이를 추진한 조선총독부의 식민주의 교육정책 때문이었다”31고 평가된다.
다음으로 조선의 서당과 타이완의 서방을 비교해 보자. 덧붙여 말하자면, 식민지기 조선의 보통학교에 대응하는 식민지기 타이완의 그것은 공학교라 불렸다. 1895년에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청국에 의해 타이완이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할양된 이후, 타이완에서도 한자·한문 문해능력을 위한 전통적 교육기관인 서방과 타이완 총독부에 의해 식민지 교육기관으로 만들어진 근대적 초등교육기관, 공학교 간에 경합 구도가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서방의 비중이 공학교에 비해 컸으나 10년도 되지 않은 1904년에 공학교 학생 수가 서방의 그것을 능가하게 되었다. 타이완 총독부는 1898년에 「서방·의숙에 관한 규정」을 발포하여 서방 설립에 신고제를 도입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온존책을 견지하였다. 조선에서와 마찬가지로 서방 역시 전통적인 엘리트 계층인 향신층(鄕紳層)의 생활기반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폐지하는 데 상당한 정치적 부담이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대치하는 공학교 설립 또한 재정적 부담이 있었기 때문이다.32 그러나 1919년에 「타이완교육령」이 발포된 이후 식민지 교육체제의 형성에 중점이 두어지면서 서방에 대한 총독부의 견제가 점차 강화되었다. 동화정책이 본격화되는 1930년대 이후 서방의 쇠퇴가 가속화된다. 1932년에는 서방의 신규 개설을 금지시켰으며, 1939년에 초등교육 6년 의무교육제의 타이완 시행(1943년부터 실시)계획이 발표되면서 서방을 전폐하는 방향이 취해졌고 이후 서방은 공식적으로 타이완 교육사에서 사라지게 된다.33
서방의 주된 교육내용은 조선의 『천자문』에 상응하는 한자 교본, 『삼자경(三字經)』에서 시작해 사서오경에 이르는 독서였으며 습자와 작문 등도 아울러 가르쳤다. 구레 고메(吳宏明)의 연구에 따르면, “서방의 목적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생활이 필요한 타이완어―후젠어(福建語)―의 읽고 쓰기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둘째 목적은 과거 고시의 준비라는 것이다. 첫 2, 3년간 기본적인 읽고 쓰기 능력을 배울 때에도 과거 고시에 나오는 내용과 관련된 것을 배운다. … 서방에서는 데라코야와 마찬가지로 읽고 쓰기, 편지 쓰기, 또 매우 드물게는 주판을 가르쳤다. 그러나 데라코야와의 가장 큰 차이는 서방에서는 희망하는 아동을 위해 장시간에 걸쳐 과거제 준비를 시켰다는 것이다”.34
즉, 타이완의 서방은 한편으로는 과거제 준비라는 점에서 조선의 전근대 서당과 유사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데나라이주쿠(데라코야)와 유사하게 생활에 필요한 타이완어의 읽고 쓰기, 편지 쓰기 등을 가르치는, 말하자면 실용적인 교육기관이기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방의 교육은 타이완어의 교육이기도 했다.
타이완에서 수업은, 한민족계 타이완인이 대부분 후젠성(福建省)에서 이주해 왔기 때문에 후젠어로 행해졌다. 텍스트를 읽을 때에는 후젠어 발음이 사용되었다. 한자 발음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백화음(白話音)’과 문어상의 발음인 ‘문언음(文言音)’이 있는데 서방 선생이 가르친 것은 이 후젠어의 문언음이었다. 그러나 아동들은 한자의 문언음을 배울 때 동시에 그 한자의 백화음도 학습했다. 예를 들어 ‘山’은 문언음으로는 “san”, 백화음으로는 “soan”으로 발음하는데 아동들은 山=“san”으로 배울 때 동시에 山=“soan”이라고 자연스럽게 배운 것이다. 때문에 타이완인이 구어를 한자를 매개로 하여 전승, 보지할 때 서방교육이 담당한 역할은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5
서방 교육을 통해 타이완인이 단지 한자·한문에 대한 문해능력만이 아니라 일상어로서의 타이완어를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은 식민지기 서방의 존속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식민지배 이후 과거제와의 분리가 결정적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방이 일정한 규모를 유지했던 이유는 서방을 통한 타이완어 학습이라는 실용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의 서당은 사정이 달랐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서당에서 한자·한문 문해 학습은 그것이 모어 학습이 되기 어려웠다. 예컨대 식민지기 서당에서 이루어진 한문 문해 교육의 내용과 방법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보고를 보자.
내지인(일본인을 말한다-역자주)은 한문을 읽을 때 한자 중에 음독할 것은 음독하고 훈독할 것은 훈독하거나 또는 전환시켜 읽고, 또는 글자를 생략하여 읽은 후 바로 그 뜻을 해석할 수 있지만 조선인은 한자는 반드시 이를 음독하고 문장의 곳곳에 토를 넣어 위에서 밑으로 읽어 내리므로 노한학자가 아니면 뜻을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예를 들어 ‘父母在不遠遊遊必有方’을 일본독으로 읽으면 ‘父母イマセハ遠ク遊ハス遊フ必ス方アリ[부모가 계실 때는 멀리 가지 않고 가면 반드시 알린다]’라고 일독하여 그 뜻이 저절로 명료해 지지만 조선독으로 하면 ‘부모재 어시든 불원유 이며 유필유방 이시니라’가 되어 세번 네번 읽어도 거의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기 어렵다. ··· 서당의 한문 교수에서는 이처럼 한자의 음을 중시하고 훈을 경시하기 때문에 학동은 겨우 문자의 형체와 발음을 알아도 거의 그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며 문자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글 안의 사리를 요득하지 못하여, 소위 논어를 읽고도 논어를 모르는 폐에 빠질 수밖에 없다.36
물론 이러한 혹평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한문현토제(漢文懸吐體) 즉 한문 문장 사이사이에 ‘토(吐)’를 달아 읽는 암송이 먼저 진행되고, 이후에 문장의 뜻에 대한 이해를 위한 ‘강역(講譯)’이 진행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만큼 서당 교육에서 조선의 모어 학습이나 생활 상의 유용성과의 관계가 희박해질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컸다. 동시에 경서에 담긴 한문을 통째로 음독 암송하게 하는 교육 방식은 경서 자체에 대한 외경의 태도를 강화시킴으로써, 그 담지자인 훈장을 비롯한 양반층이 지닌 유교적 교양의 권위를 유지하고 재확인하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식민지기 서당에 관한 조사 자료에 따르면 교재는 활용 빈도로 제시하면 『천자문』, 『통감』, 『소학』, 『계몽편』, 『맹자(孟子)』, 『당시』, 『논어』, 『대학』, 『명심보감』, 『고문진보』 등이었다.37 이 교재들은 전근대 서당의 교재와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이들 경서를 그러한 방식으로 가르치고 배우는, 전근대의 서당과 매우 연속적인 성격의 교육이 식민지기 심지어 해방 이후까지 유지된 이유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그 답을 우리 사회의 특유한 사회계층으로서의 ‘양반층’의 근대 전후의 동향에서 찾아보자.
서당 교육과 양반화
조선 후기의 교육사적 특징 중 하나는 “서당과 같은 사적인 교육기구의 보급이 확대되고, 이를 통해서 유교적 교양과 지식이 양반 사족층 이외의 다른 신분층에 확산되어 간다는 점”38이었다. 이러한 서당 확대의 경향은 개항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선 사회의 지배층으로 간주되는 ‘양반’이라는 계층의 특질부터 밝혀야 한다.
조선사회에서 양반이라는 계층은 “법제적인 절차를 통해서 제정된 계층이 아니라 사회 관습을 통해서 형성된 계층이요, 따라서 양반과 비양반과의 한계 기준이 매우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39이었다. 양반을 양반답게 만드는 것은 제도적·법제적인 틀이 아니라 ‘유교적인 행동원리’ 또는 ‘유교의 수양’을 바탕으로 하여 맺어지는 인간관계였다. ‘유교적 행동원리’의 실천과 ‘의례의 준수’ 여부가 가문의 격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그것이 양반-상민이라는 사회성층의 범주를 초래했다. 양반이 되는 조건을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과거 합격자, 또는 과거에 합격하지는 않았지만 당대를 대표하는 저명한 학자를 조상으로 모시고 있을 것이며 그와 함께 그 조상으로부터의 계보 관계가 명확할 것. 2) 여러 대에 걸쳐 동일한 집락(集落)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을 것. 이런 대대의 거주지를 세거지(世居地)라고 하는데, 세거지에서는 양반 가문이 동족 집락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3) 양반의 생활 양식을 보존하고 있을 것. 양반의 생활 양식이란 조상 제사와 손님에 대한 접대를 정중히 행하는―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 동시에 일상적으로는 학문에 힘쓰고 자기 수양을 쌓는 것이다. 4) 대대의 결혼 상대, 즉 혼족(婚族)도 1)에서 3)의 요건을 충족시키는 집단에서 고를 것.40
이들 조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것들이 세습적, 귀속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가변적이고 성취적이며, 문화적인 측면을 지닌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들 조건은 양반이 되고자 하고 양반을 자칭하는 사람들을 18세기 이후 폭증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18세기 이후에 조선 사회에서 이른바 ‘유학(幼學)’을 자칭하며 그것을 호적에 기록해 놓는 사람들이 증가한다. ‘유학’이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학문을 닦으며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선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사 지낼 때 돌아가신 조상의 지방(紙榜)에 ‘〇〇학생부군신위(學生府君神位)’라고 쓸 때 그 ‘학생’의 의미가 바로 ‘유학’이다. 그것은 “양반 계층 이외의 사람의 양반 계층을 향한 상승 지향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고, 양반적인 가치관·생활관이 하위 계층에까지 침투하고 있었음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41 미야지마는 심지어 유교의 예가 일반 민중에까지 보급된 18, 19세기 조선의 교육적·문화적 변화를 근거로 “한국에서도 전통적인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인 근대에 들어와 소멸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되는 면도 보인다”42고 하는 매우 인상적인 명제까지 제시한다.
실제로 17세기 말까지만 해도 호적 상으로 양반이 극소수(8.3%)에 불과했으나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양반의 비중이 26.3%로 증가했고 19세기 중엽 이후는 65.5%로 급증했다는 견해도 있다.43 전체 인구의 2/3 가량이 지배계층이 된다고 하는 일견 이해하기 어려운 명제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이는 객관적, 실체적으로 양반의 규모가 늘어난 증거로 보기는 힘들지만 적어도 양반을 자칭하는 사람들이 급증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 양반 계층을 향한 상승 지향을 ‘양반화’로 개념화할 수 있다. ‘양반화’란 스에나리 미치오(末成道男)에 따르면, “행동양식 등을 양반의 이상형에 가깝게 함으로써 일족의 사회적 랭크를 상승시키고 양반으로서의 스테이터스를 공고히 하며 나아가 더욱 높은 랭크를 추구하는 현상”44으로 정의된다. 그 정의를 계승하여 오카다 히로키(岡田浩樹)는 양반화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층의 양반이나 유림 등의 유교문화 보급자들이 ‘교화’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사람들에게 ‘양반이 되는 자의 규범’ 즉 사회경제적인 승진의 규범을 가르치는 것이다. 대다수 민중은 그러한 규범을 자진하여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양반화를 꾀한다. 나아가 그 규범을 철저히 행함으로써 양반으로서의 지위 유지와 상승을 추구한다.45
양반이 교화하는 ‘유교문화’를 민중이 자진하여 받아들여 양반화를 꾀함으로써 상승을 추구하는 경향이 곧 ‘양반화’인데, 그 유교문화의 핵심 중의 하나가 ‘봉제사(奉祭祀)’로 대표되는 유교의례의 실천이다. 이토 아비토(伊藤亞人)에 따르면,
주자학이 중시한 인륜도덕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이 유교의 의례다. 특히 『문공가례(文公家禮)―주자가례(朱子家禮)』를 기초로 조선에서 편찬되어 민간에 유포된 『사례편람(四禮便覽)』은 관혼상제의 네 인생의례를 규정한 것으로서, 이 형식을 충실하게 밟는 것이 인륜의 실천의 기본으로 간주되고 사회적인 위신을 평가하는 하나의 단서가 되었다. ··· 예전에 양반이라는 사회적 지위에 있던 지방의 명문씨족들 사이에서는 서로 위신을 걸고 이러한 규정을 따르려고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풍을 반영하여 독자적인 형식을 고수해 왔다.46
‘양반화’ 경향은 무엇보다도 유교의 의례형식에 충실하게 바탕을 둔 인륜을 실천하고 그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확인받으려는 행동의 확산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은 동아시아 세계 안에서도 주자학이 국학으로서 오랜 기간 독점적인 권위를 누리며 생활 곳곳에 침투한 사회, 유교적 이상이 중국보다도 더욱 철저하게 추구된 사회였다. 그런 점에서 근대 이후에도 지속된 양반화에 필적할 만한 현상을 동아시아의 다른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근대 이후 사회계층구조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물론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면서 양반의 재생산 메커니즘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양반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방 향촌 사회에서는 재지 양반층이 동족부락에 세거하면서 여전히 헤게모니를 발휘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양반 신분은 가계의 위신에 대한 사회적 평판 또는 인정으로 규정되는 사회적 신분이었다. … 일상생활에서 양반의 생활양식을 유지하는 것이 사회적 인정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이때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사회적 인정의 기준은 족보를 소유하고 그에 걸맞는 양반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는 것이었다”.47 그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어 “천민신분은 법제적 신분으로서 1894년 갑오개혁 시 신분제 폐지 법령으로 법적으로는 없어진 신분이었지만, 일제시기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어 해방 직전까지도 유제가 강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비문서 없는 노비’로서 인구의 최하층을 이루면서 양반 신분의 생활양식을 유지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48
향촌 사회에서 지속되던 양반문화가 우리 사회에서 해체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양반 문화가 해체되어 간 중요한 계기들은 조선 후기 사회신분제의 동요, 개항과 서구 자본주의의 침투, 갑오농민전쟁의 신분제 폐지 운동과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 법령, 조선왕조의 몰락, 일제의 식민지정책, 해방, 농지개혁과 한국전쟁 등을 들 수 있다”.49 이러한 계기들이 발생하고 전개되어가는 장기적인 시간만큼 ‘양반화’ 경향이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양반화’ 경향은 서당의 지속과 어떻게 관련되는가.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양반화’ 경향의 바탕에서 작동하는 동기가 계층 상승 욕구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전근대적인 교육기관인 서당 및 그와 관련된 선발장치인 과거제를 대신하여 새로운 학교 중심의 근대적 계층 상승의 기재가 만들어지면, 계층 상승 욕구가 그 새로운 학교 쪽으로 방향을 트는 것이 자연스런 흐름이 될 것이다. 바꿔 말해 식민지기에 보통학교 중심의 새로운 교육제도가 형성되고 그것이 기존의 과거제를 대신하여 관료나 교육자, 기타 근대적 부문으로의 이동에 필요한 학력 취득의 수단으로 작동하게 되면 서당은 구조적으로 주변화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근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서당이 상당한 규모로 여전히 유지되었다. 식민지기에도 보통학교로 향하면서도 일종의 보완재로서 서당 교육을 활용하는 조선인들이 적지 않게 존재했으며, 심지어 해방 이후에도 그런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양반화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서당은 어떤 의미였을까.
1945년 이후에도 강원도 지역에서 서당에 다녔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구술사 자료에 근거하여 피정만은 다음과 같이 중요한 발견을 제시한다. 해방 이후에도 서당에 취학한 동기로는 가정의 빈곤 등으로 인한 학교 진학의 어려움, 신학문에 대한 반대 등의 요인도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한자 및 한문 학습의 필요성이었다고 한다. 즉, “한문을 배우기 위하여 다니는 경우이다. 이는 한문과 당시 생활에 필요한 예의 규범, 축문, 지방 쓰기 등을 포함한다. 서당에 다닌 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였다. 축문, 지방 쓰기는 자신들이 서당 교육에서 얻은 큰 성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50는 것이다. 축문(祝文)과 지방 쓰기는 양반 다운 생활양식의 핵심을 이루는 봉제사(奉祭祀)의 기본이며 그를 위해서는 한자, 한문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양반 가문의 일원임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기록인 족보(族譜)를 판독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 능력이 필요했다. 그것은 ‘양반화’의 문화적 요건인 유교적 교양의 필수적인 기본 요건이었다. 근대 조선(한국) 사회에서 오랜 기간 전통적인 서당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이와 같은 ‘양반화’ 및 그와 관련된 서당 교육의 효과에 있었다.
동일한 맥락에서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서당의 급격한 쇠퇴 또한 양반화 개념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다.
해방과 농지개혁이 신분제 유제를 해체시키는 시발점이었다면 한국전쟁은 그것을 결정적으로 해체시킨 계기였다. 한국전쟁이 신분제 유제를 해체시킨 힘을 작용한 것은 그것이 기본적으로 시민전쟁의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 초기 인민군 점령 하의 토지개혁을 비롯한 ‘혁명사업’과 대규모의 인구 이동, 사회적 총동원 등은 사회 전체를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해방 직후의 이러한 격렬한 계급투쟁과 사회변동으로 인해 이제 양반문화는 기본적으로 해체되고 그 잔영만이 남게 되었다.51
그런 의미에서 “신분제 해체는 해방보다는 전쟁이었다. 전쟁 후에는 양반이 하인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52는 것이다. 위로부터의 의무교육제의 실현이라는 요인만이 아니라 밑으로부터의 양반문화의 해체가 서당 존속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와해시켰다. 우리 사회에서 서당의 운명은 양반층 및 양반문화의 위세의 운명과 평행하여 전개되었다.
구조적으로 볼 때 서당의 소멸은 필연적으로 예정된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서당의 소멸은 그것이 근대 국민국가가 교육에 요구하는 ‘국민 만들기’ 기능, 근대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양식과 규범을 사회화시키는 ‘노동력 훈련’ 기능, 그리고 근대인이 교육에 요구하는 ‘상향적 사회이동’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가피했던 역사적 과정이었다. 서당에는 스승에게 예로서 가르침의 시작을 청하는 ‘속수례(束修禮)’는 있어도 ‘애국조회’는 없었다. 서당에는 『천자문』 다음에 『사자소학(四字小學)』 하는 식으로 배워야 할 경서의 순서는 있었지만 ‘시간표’도 ‘학교종’도 없었다. 서당에서는 한 권의 경서를 마친 후 ‘책거리’라는 관행을 통해 그것을 기념했지만, 어디서나 통용되는 증명서로서의 ‘졸업장’은 주지 않았다.
그런데 서당의 소멸을 목격하면서 또 한편으로 이런 질문도 갖게 된다. 서당의 소멸과 함께 ‘양반화’라는 욕망 자체가 완전히 우리 사회에서 사라진 것일까. ‘양반화’라는 우리 사회에 특유한 끈질기고 완강한 욕망은 서당이 소멸된 이후에도 어쩌면 그 실현의 통로와 양상을 바꿔가며 여전히 우리 사회 교육열의 근저에서 복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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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로제티, 까를로 (1996), 서울학연구소 역, 『꼬레아 꼬레아니―백년전 이태리 외교관이 본 한국과 한국인』, 숲과나무, 287-288쪽[Rossetti, Carlo (1904), Corea e Coreani, Istituto Italiano d’Arti Grafiche.].
- 幣原坦 (1919), 「朝鮮敎育論」, 渡部學, 阿部洋 編 (1990), 『日本植民地敎育政策史料集成(朝鮮篇)』, 第25卷, 東京: 龍溪書舍, pp.236-237.
- 1912년도 朝鮮總督府 (1914), 『大正元年統計年報』, 朝鮮總督府. ; 1943년도 南朝鮮過渡政府 (1948), 『朝鮮統計年鑑(西紀1943年)』, 南朝鮮過渡政府.
- 이상의 서당 통계는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각년판에 의거함.
- 「原始書堂 全朝鮮에 散在한 八千十餘個所」 『東亞日報』 1933.11.1.석간.(3).
- 「全羅北道 書堂과 講習所를 改良 補充 敎育擴充에 努力」 『東亞日報』 1933.12.1.석간.(3).
- 「慶尙北道 一面一校와 竝行으로 三百餘書堂을 改善」 『東亞日報』 1933.12.1.석간.(3).
- 「書堂敎育再檢討 振興에 積極的 努力」 『東亞日報』 1935.1.24.석간.(3).
- 한우희 (1998), 「식민지전기의 보통학교」, 우용제 외, 『근대한국초등교육연구』, 교육과학사, 90쪽.
- 朝鮮總督府學務局 (1932), 「昭和七年度官公私立學生生徒入學狀況表」, 『朝鮮總督府調査月報』, 10月, pp.123-162.
- 朝鮮總督府學務局 (1933), 「昭和八年度官公私立學生生徒入學狀況」, 『朝鮮總督府調査月報』, 10月, pp.49-92.
- 朝鮮總督府學務局 (1934), 「官公私立學校學生生徒兒童入學狀況」, 『朝鮮總督府調査月報』, 7月, 113-150.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1999), 『격동적 지식인의 세 가지 삶의 모습』,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쪽.
- 朝鮮總督府學務局學務課 (1938), 『朝鮮學事例規』, 朝鮮總督府學務局學務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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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