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바꾸는사람들

칼럼 검색
칼럼 모아보기
ERICK squareal Research & Innovation Center of Korea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8) – “1950년대의 교육 팽창”

#1433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2026.01.07
1950년대는 초등교육의 ‘의무교육제’가 실현된 시기로, 1950년대에 학교교육이 어떤 팽창 양상을 보였는가를 검토하는 일은 의무교육제의 실현 과정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1951년에 한국의 학제가 6·3·3·4제로 개정된 이후, 한국 교육은 본격적인 팽창의 궤도에 오르게 된다. 특히 1950년대는 초등교육의 ‘의무교육제’가 실현된 시기다. 따라서 1950년대에 학교교육이 어떤 팽창 양상을 보였는가를 검토하는 일은 의무교육제의 실현 과정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의무교육(compulsory education)’은 특정 단계의 학교교육을 위해 취학이 한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법적으로 ‘의무’로 부과되는 제도를 가리킨다. 동시에 그것은 의무적인 취학을 가능하게 하는 실질적 조건, 즉 충분한 학교 설립과 교원 확보 및 교육비용의 무상제 등의 확보가 국가에 의무로 부과되는 제도이기도 하다. 의무교육제는 근대교육의 가장 중핵적인 제도의 하나다.

 

우리 사회에서 의무교육제는 언제 어떻게 구상되고 어떤 방식과 내용으로 실현되었을까. 여기서 간단히 한국 의무교육제의 역사를 약술해 보자. 해방 이전까지 의무교육제에 대한 다양한 주장과 요구가 분출되기는 했으나 그것이 제도로서 실현되지는 못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정기에 조선교육심의회에 의해 의무교육 실시가 천명되었지만 법제화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비로소 헌법과 교육법 제정을 통해 의무교육이 법제화되었다. 그리고 그에 기반하여 1950년 6월 1일부터 초등교육 6년간의 의무교육제 시행이 정부에 의해 발표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이 계획은 일시적으로 좌절된다.

 

3년에 걸친 파괴적인 전쟁 후에 휴전이 성립하자 의무교육제 시행이 다시금 궤도에 올랐다. 이승만 정부에 의해 ‘의무교육 완성 6개년 계획’(1954-1959)이 성안, 발표되면서 의무교육제 실현이 본격화된다. 애초의 계획 목표는 1959년까지 국민학교 취학률을 96.13%까지 끌어올리는 것으로 설정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취학률 96.4%를 기록함으로써 애초의 목표를 상회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문교 예산 전체에서 의무교육비에 투여하는 비중을 75% 이상으로 늘리는 등 국가의 집중적인 정책적 노력이 전개된 결과였다.1 이 계획은 ‘우리나라 교육계획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집행된 사례’로까지 평가되기도 하며,2 문교사에서도 1950년대의 의무교육제 실현은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 의지가 빚어낸 놀라운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3

 

[그림 1] 1950년 4월 5일 국민학교 입학

출처: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

 

특히 의무교육제 실현은 다음과 같은 어려운 사회경제적 상황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예컨대 1955년 한국의 1인당 소득은 65달러로서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스리랑카보다도 낮은 수준이었으며 아프리카 57개국의 평균 1인당 소득보다도 낮은 수준이었다.4 1950년대 한국 정부의 재정은 한국전쟁의 참화로 인한 궤멸적인 파괴의 잿더미 위에서 미국의 경제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1950년대에 6년여라는 극히 단기간에 6년제 의무교육제가 거의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외적인 사례다.

 

그런데 한국에서 의무교육제는 위로부터의 국가 재정 지원에 의해서만 실현된 것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서 의무교육은 법제상으로는 ‘무상’교육이었으나 실제로는 ‘유상’교육의 방식을 취하며 실현되었다. 따라서 수업료라는 형식은 아니었을지라도 취학을 위해 학부모들은 다양한 형식의 재정적 부담을 질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학교 설립과 영선 비용에서부터 교원의 급여와 학교교육의 일상적 운영에 필요한 경비 조달에 이르기까지 민간의 적극적인 기부와 지원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민간의 재정 부담은 1950년대 의무교육제 형성의 특질을 규명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측면이다.

 

의무교육제 실현에서의 민간의 자발적인 재정 부담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기본적으로 의무교육제는 학령 아동의 ‘아동노동금지’와 한 쌍으로 맞물려 진행될 수밖에 없는 제도이기 때문에 그것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아동노동(child labor)’에 대한 의존도가 큰 하층민에게 경제적인 타격이 가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세계교육사의 맥락에서 볼 때, 이전까지 부모의 친권으로 간주되었던 아동교육의 권한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회수하고 아동노동을 불법화하는 의무교육제의 실현에 대해 민중들이 저항하거나 아니면 중도 자퇴나 장기 결석 등의 방식으로 취학을 기피하는 경우도 다른 나라의 의무교육사에서 흔히 확인되는 현상들이다.5 따라서 의무교육제를 둘러싸고 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행위를 전개했는가는 교육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주제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점에서도 한국 교육의 특질이 확인될 것이다.

 

 

의무교육제의 전사

 

한국에서 의무교육제의 법제화는 1948년의 헌법 제정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 제헌헌법(1948.7.17.) 제16조에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고 규정되면서 의무교육제가 법제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와 연동하여 교육법(1949.3.31. 제정)에도 의무교육과 관련된 구체적인 조항들이 담기게 되었다. 제헌헌법의 의무교육 관련 조항은 제3공화국 헌법(1962.12.26.) 제27조 제2항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어린이에게 초등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 및 제3항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로 계승되었고, 제4공화국 헌법(1972.12.27.) 제27조 제2항 “모든 국민은 그 보호하는 자녀에게 적어도 초등교육과 법률이 정하는 교육을 받게 할 의무를 진다”로 발전하여, 중학교까지의 의무교육제 확장이 법제화되기에 이르렀다.6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의무교육’의 역사가 1948년을 기점으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의무교육의 ‘전사’로서 식민지기의 의무교육 관련 담론 및 1940년대 초 조선총독부의 ‘의무교육정책’,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군정기에 구상된 ‘의무교육정책’이 존재한다. 이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식민지기 특히 삼일운동 이후 시기부터, 조선인들은 교육 기회를 민족적으로 차별하고 제한하는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에 대항하여 적극적으로 교육 기회 확장을 요구하는 정치적 운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자제를 보통학교에 적극적으로 취학시키는 개인적 차원의 행위를 전개했으며 나아가 보통학교 설립과 학급 증설, 학년 연장을 위한 기부금 조성 등의 운동을 전개했다.7 그 일환으로서 의무교육제의 도입은 1920년대 이래 대다수 조선인들의 일관된 정치적 요구이기도 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동아일보』의 사설을 보자.

 

조선의 현실은 여하하냐. 민도 민력을 운운하고 의무 교육 실시를 천연함은 위정자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하물며 같은 조선에 잇서서 일본 아동에게는 의무 교육을 실시하고 조선 아동에게는 이것을 실시치 않음에랴. 당국은 일일이라도 속히 조선 아동에 의무 교육을 실시하라.8

 

위의 사설에서 동아일보는 조선에서의 의무교육제 미실시를 민족 차별의 증거로 간주하여 조속한 실시를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조선인의 적극적인 의무교육제 실시 요구는 1939년에 의무교육제와 관련된 총독부의 입장을 밝힌 당시 학무국장 야기 노부오(八木信雄)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최근 반도동포들 사이에 교육열이 비상한 기세로 발흥하고 있음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로서, 그 안에는 교육의 보급을 열망한 나머지 의무교육제도의 즉시 단행을 요망하는 자가 적지 않은 것이다.9

 

이렇게 의무교육제 실현이 조선인의 요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는 학교 설립 및 운영에 드는 임시비와 경상비의 증대, 교원양성 문제 등을 근거로 식민지기 내내 의무교육제 도입에 대한 부정적 입장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식민지 말기인 1942년에 갑자기 의무교육제도실시계획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의무교육제 실시 계획 책정의 배경에는 침략전쟁의 수행을 위한 병력 자원 확보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조선에서의 징병제의 시행 등이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계획은 6년간의 의무교육제를 1946년부터 실시하기로 하고, 그 초년도의 취학률 목표를 남자 학령아동의 약 9할, 여자 학령아동의 약 5할로 한다는 것이었다. 의무교육제의 재정과 관련해서는 ‘국민학교’―1941년부터 국민학교령이 실시되어 종래의 ‘소학교’(이전의 보통학교)는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증설 및 유지에 필요한 경비는 설립 단체의 부담으로 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은 총독부의 극비 자료10에 따르면, 1946년부터 실시될 의무교육제는 무상이 아닌 유상제였다. 의무교육제 유지에 필요한 경비 확보 방법 중에는 수업료 수입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 외에도 재정의 상당 부분을 조선인의 부담으로 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11 식민지기 조선총독부가 구상한 의무교육제 계획에서 ‘의무’ 교육의 원리와 ‘무상’ 교육의 원리는 분명히 분리되어 있었다.

 

1945년 일본제국의 패전과 식민지배의 종식으로 인해 조선총독부의 의무교육제 정책은 실시에 들어가지 못한 채 종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기의 의무교육제와 관련된 역사적 경험은 해방 이후 한국 교육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의무교육제는 일제의 식민지적 억압과 차별로 인해 ‘좌절된 꿈’ 혹은 ‘숙원(宿願)’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해방 이후에 들어서게 될 국가가 의무교육제 실현을 다른 어떤 것보다도 우선하여 실현해야 할 교육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게 만든 강력한 역사적 조건으로 작용했다. 또한 그것이 식민지기의 정책 내용과 마찬가지로 ‘무상’이 아닌 ‘유상’의 형식으로 실현될 가능성도 역사적으로 배태되어 있었다.

 

1945년 8월, 마침내 해방이 찾아왔고 한국교육사에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의무교육제 실현은 미군정 학무국 안에 만들어진 조선교육심의회에서도 당연히 가장 시급한 과제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심의회가 구상한 의무교육제 계획은 적극적인 교육재정 확보와 결합되지 못하여 구상의 차원으로 끝났고 따라서 의무교육제 실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의 과제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12

 

 

1950년대의 의무교육 정책

 

우리 사회에서 의무교육제의 본격적인 역사는 1948년의 제헌 헌법 제정과 1949년의 교육법 제정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6월 1일부터 6년제 초등 의무교육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이 날을 기하여 대통령 이승만은 다음과 같은 훈시를 발표했다.

 

민주국가는 백성이 해 가는 나라이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의 교육이나 사상 정도가 낮아 가지고는 그 나라가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민주국가의 제일근본문제는 교육정책을 의무교육제에 두는 것이다.13

 

국가에 필요한 국민 만들기라는 맥락에서 의무교육제 도입 취지를 규정한 이승만은 동시에, “학교 교실이 부족해서 학생을 수용할 수 없는 것이 한편으로 어려운 문제이나 동시에 우리가 가장 기뻐하는 바는 우리 청년들의 교육에 대한 성심이 남의 나라 사람들보다 더욱 풍부한 것”이라며 국민들의 ‘성심’에 기대어 낙관적 전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낙관적 전망과는 반대로 ‘교실 부족’과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 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헌법에 규정한 대로 ‘무상’ 의무교육제를 실시하는 것으로 법제화되었으므로 수업료 징수는 1950년 이후에는 ‘위헌’이 되었다. 그러나 학부모들이 초등교육의 경제적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는 않았다. 더 이상 수업료를 내지는 않았지만 대신에 종전보다 더 많은 경제적 부담을 지면서 자제를 ‘의무교육’ 기관에 취학시킬 수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8일자 조선일보 기사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대망의 의무교육은 실시되었다 하나 과중한 부담에 못 이겨 취학을 못한다면 누구의 잘못일까? 문교부에서는 ··· 의무교육의 부대조건인 월사금 면제는 이를 이행하고 있으나 숫재 월사금을 받는 게 낫지 월사금의 몇 배 몇십 배나 되는 찬조금이니 후원회비니 하는 학비의 징수는 이 땅에서 처음으로 실시되는 의무교육에 크나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가난한 일부 학부형들의 짧은 재정에 자극을 주어 의무교육 실시에 커다란 암영을 던지고 있다.14

 

1950년 6월 초의 상황은 헌법과 교육법이 규정하고 있는 ‘무상의무교육제’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다. ‘2부제, 3부제 도입을 통한 교실 부족 문제에의 대응’이나 ‘월사금 즉 수업료를 대신하는 찬조금과 후원회비의 징수’는 당시의 ‘의무’교육제가 설사 한국전쟁과 같은 돌발적인 사변에 조우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유상’의 방향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음을 보여준다.

 

의무교육제 실시 이전과 달라진 의미 있는 변화라면 국민학교 입학시험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식민지기에는 보통학교에 취학하려면 이른바 ‘멘탈테스트’라는 이름의 입학시험에 통과해야만 했고, 취학을 원하는 조선 아동 모두가 취학하지는 못했다.15 이제 의무교육제가 실시되자 취학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다. 대신에 월사금보다 ‘몇 배 몇십 배나 되는’ 돈을 내야 할 정도로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는 대가를 치루었다.

 

이런 상황에서 1950년 6월 하순,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2대 문교부장관 백낙준은 “일반은 의무교육을 무상교육인 줄로 생각하는 모양인데 국가 재정이 부족한 우리나라로서는 무상교육을 실시할 수가 없다”16며 의무교육과 무상교육의 분리를 공개적으로 시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기사가 게재된 6월 27일자 경향신문의 1면에는 「찬! 아군 용전에 북괴군 전선서 패주중」이라는 머리기사가 동시에 실려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한국전쟁은 의무교육제의 실현을 지체시키는 대대적인 물리적 피해를 야기했다. 문교사 서술에 따르면, “6.25 사변 전에 보유한 교실 총수는 대학을 포함하여 42,478개 교실이었는데 전파가 약 23%인 10,018개 교실, 반파가 약 11%인 4,969개 교실, 기타 파손이 약 30%인 13,971개 교실이나 되었다. 이 외에 실업 교육에 관계된 제반 시설은 전국적으로 약 85%가 파괴된 것으로 추산”17되었다.

 

전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천연되기는 했으나 ‘의무교육제’는 조속히 재개되어야만 했다. 휴전 이후 이승만의 문교부는 의무교육제 실현에 가장 우선적으로 정책적 역량을 집중했다. 그것은 ‘의무교육6개년계획(1954〜1959)’ 발표와 집행으로 나타났다. 이 계획의 목표는 학령아동 취학률 목표를 계획 초년도인 1954년의 88.44%에서 달성 연도인 1959년에 96.13%로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이었다.18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그 목표를 착실히 초과 달성하였으며, 명실공히 완전 취학의 목표를 거의 달성하였’19다고까지 평가되었다. ‘의무교육6개년계획’ 실현은 이승만 정부의 문정을 대표하는 것이었고, 1950년대 교육 팽창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의무교육제의 실현 과정은 이렇게 일면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는 어려운 복잡한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그 내실을 좀 더 따져보자.

 

 

의무교육제의 내실

 

문교부의 일관된 정책 추진으로 국민학교 취학률이 애초의 계획 목표를 상회할 정도로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이를 위한 국민학교 및 학급 증설도 착착 진행되어 1952년 3,923교였던 국민학교는 계획 완성연도인 1959년에는 4,576교로 117%가량 증설되었고 학급수에서도 39,351학급에서 62,310학급으로 158%가량 늘어났다.20 신설된 학교의 거의 대부분이 사립이 아니라 공립 국민학교였다는 점도 국가가 초등교육 팽창을 주도했음을 보여주는 근거다. 다만 증설된 학급수와 교실 수 간에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 실제의 정규 교실 수는 1952년의 19,009실에서 1959년의 35,251실로 증설되는데 그쳤다. 달리 말해 교실 수는 실제 학급수에 비해 2만 7천여 실이나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는 1950년대 말까지 국민학교 학급당 하나의 교실도 할당되지 않아, 하나의 교실을 두 개 이상의 학급이 함께 사용하는 이른바 ‘2부제’ 또는 ‘3부제’ 수업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당연히 학급당 학생 수도 초과밀 상황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52년에는 39,351학급에 2,399,776명이 재학하고 있어 학급당 학생 수가 61.0명에 달했는데 이런 상황은 1959년에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그 해에 전국 국민학교 62,310학급에 3,549,610명이 재학하여 학급당 학생 수는 여전히 57.0명에 달했던 것이다.

 

교원 1인당 학생 수에서도 1952년에는 66.5명이었고 해가 흐르며 조금씩 줄어들기는 했으나 1959년에도 58.1명에 달하여 교사의 교육적 부담은 엄청난 것이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부 재정의 부족과 국가의 경제력 빈곤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경제적 요인의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그와 같은 초과밀학급은 1950년대의 국제적인 초등교육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예외적인 특이 사례에 속하는 것이었다. 대한교육연합회와 중앙교육연구소가 조사한 1957〜1958년 초등학교 교사 1인당 학생 수의 국제 비교 수치에 따르면, 일본은 37명, 타이완은 46명 수준이었으며 개발도상국이던 태국은 35명, 필리핀은 37명, 인도는 34명에 불과했던 것이다.21 이상과 같은 ‘2부제수업’이나 ‘초과밀학급’은 높은 취학률에도 불구하고 의무교육의 내실을 안에서부터 손상시킬 가능성이 컸다.

 

한편, 의무교육제가 모든 학령아동에 대한 통일적이고 균질적인 교육의 제공을 내용으로 하는 제도라고 이해할 경우, 그 내실을 침해하는 또 다른 측면이 1950년대에 존재했다. 그것은 국민학교에서의 ‘학교차’ 문제였다. 이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1950년대 말에 이른바 ‘양단 치마’22 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서울에서 이른바 ‘명문’ 국민학교로 소문이 나 있던 덕수국민학교 학생들의 상당수가 다른 학구에서 왔고, 그 학구 위반 학부모들이 고급 치마인 ‘양단 치마’를 입는 유력층의 부인이었다는 사실이 보도되어 사회문제화되었다.23 덕수국민학교는 당시 중학 입학 성적이 양호한 곳으로 이름나 있었다.

 

이러한 학구 위반 현상은 균질적인 교육을 제공해야 할 의무교육기관인 국민학교가 중학 입학 성적에 따라 서열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경기중학교와 같은 이른바 ‘명문’ 중학교에 합격생을 많이 내는 국민학교는 ‘특A’로 분류됐다.24 덕수국교 외에도 50년대 말에는 서울사대부속국민학교가 새로운 명문으로 부상하여 치열한 입학 경쟁이 일어났다. 예컨대 1960년 3월에 서울사대부국에서는 ‘남녀 각 75명 모집에 남자 850명, 여자 557명 계 1,470명이 응모하여 남자가 11대 1강, 여자가 7대 1강의 경쟁’을 보였다. 이 경쟁률을 보도한 기사는 이 학교가 ‘귀족학교’로 비난받고 있다는 평가도 덧붙였다.25

 

[그림 2] ‘학구위반-드라이브하기에 꼭 알맞는 거리입니다’

출처: 「사회만평」 『동아일보』 1959년 5월 11일 조간.

 

중학교 입학 성적에서의 국민학교별 차이에서 비롯된 학구 위반 학생의 출현이 사회문제화되었다. 1959년에는 서울의 덕수, 교동, 재동, 수송 등 세칭 일류 국민학교마다 다수의 학구 위반 아동이 적발되었는데, 예컨대 덕수국민학교에서는 1957년 당시 학구 위반 취학아동이 전체의 75%에 달했다고 하고,26 교동국민학교 1학년 아동은 인구비례로 볼 때에는 정원이 약 500명밖에 되지 않음에도 실제로는 785명이 재학하고 있어 정원의 절반이 넘는 285명이 학구를 위반해 편법으로 입학했었다.27

 

한편, 의무교육제 실현의 재정적 조건은 어떠했을까. 1950년대 이래 정부는 의무교육제의 조속한 실현을 위해 우선적으로 문교예산을 배정하였고 그 결과 단기간에 완전 취학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종래 여겨져 왔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로 문교예산에서 의무교육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언급된다. 문교예산에서 의무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전술한 ‘의무교육완성6개년계획’의 초년도인 1954년에는 64.1%였으나 그 완성연도인 1959년에는 81.9%로 늘어났다.28 또 1958년 8월부터 교육세법이 공포되고, 12월에 의무교육재정교부금법이 제정되면서 정부 예산에서 문교예산이 점하는 비중이 비약적으로 높아지고 안정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의무교육제 실현에서 학부모들이 져야만 했던 재정적 부담은 국가의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교사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지는 않아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볼 수 있다.

 

1950년도의 문교예산은 정부예산 242,060원, 문교부예산 총액이 13,822,202원으로서 5.7%였으며, 이 중에서 의무교육비는 10,230,648원으로서 문교예산의 74%가 계상되었다. 그러나 이 예산은 초등교육에 소요되는 예산의 30%에도 미달되는 형편이었다. 여기에는 교실 신축, 수용비, 후생비 등의 70% 이상을 학부형이 부담하고 있었다.29

 

즉 1950년 의무교육제 출범 당시에도 의무교육비의 70% 이상을 학부형이 부담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이후 이 학부모의 부담은 어떠한 추이를 보였을까. 그런데 이와 관련된 체계적이고 일관된 통계 자료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주된 이유는 학부형이 수업료를 대신하여 학교에 납부하는 제 비용은 문교부의 예산으로 공식적으로 계상되지 않아 신뢰할 만한 전국적 통계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편적인 자료들에서 확인되는 학부모의 비용 부담 관련 정보를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

 

1953년도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로, ‘1953년도 사친회비 및 후원회비 등으로 학부형들이 부담한 교육비는 1952년도 국비일반조세수입액의 약 47%, 53년도에는 무려 59%’에 달하며, 학생 부담금 지출은 52년의 경우 교직원 후생비의 72%, 학교 유지 경영비의 17%, 학생을 위한 지출의 6%, 그리고 53년도의 경우는 교직원 후생비의 64%, 학교 유지 경영비의 21%, 학생을 위한 지출의 7%가 학부형의 부담이었다는 보도가 있다.30 1952년 당시 의무교육비의 가장 큰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교원 인건비의 2/3 이상을 학부형이 직접 부담했다는 것이다.

 

의무교육제 완성연도 한 해 전인 1958년도의 경기도 교육위원회의 관련 자료에 따르면, 당시 국민학교 교원 한 사람의 한 달 최저생활비는 인천이 35,000환, 수원이 30,000환, 기타 경기도 내 읍면이 25,000환이었지만, 정부의 지급액은 9,600환에 불과했다. 따라서 나머지 부족액은 사친회비로 충당해야만 했다. 예컨대 인천은 25,400환(전체의 71%), 수원은 20,400환(전체의 68%), 기타 읍면은 15,400환(62%)을 사친회비로 충당해야만 했는데 도내의 각 학교는 이를 학생 수별로 환산하여 개인에게 할당했다. 이 외에도 학교 운영비에 해당하는 수용경비, 그리고 책걸상 구입 등 시설비도 학부모에게 부담시키는 구조였다.31 국민학생들의 사친회비 부담은 노래로 풍자되기도 했다. 1950년대말 당시 국민학교 여학생들이 줄넘기 놀이를 할 때, “어머니 사친회비 주세요-난 몰라 난 몰라 내일 모레 가져갈테야-이년아 이년아 또 돈이냐-”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32

 

 

1950년대 중등교육의 팽창

 

1950년대 교육 팽창에서 문교부의 주된 정책 초점은 국민학교 증설과 취학률 제고에 있었으며, 상대적으로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대학(교) 팽창과 관련하여 정부는 한국전쟁 당시에 각 도에 국립대학 신설에 착수하는 등 일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적극적 자세를 취하거나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에도 중등 및 고등교육은 꾸준히 팽창하였다.

 

먼저 1959년 문교부의 『문교행정통계표 4292·4·30』에 의거하여, 1950년대 중등교육 팽창의 규모를 확인해 보자. 중학교의 경우 1952년 609교였으나 1959년에는 1,203교로 2배 가까이 늘어났으며, 학생 수에서는 같은 기간 291,649명에서 471,757명으로 늘어나 162%가량 팽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9년에 전체 중학생 중 여학생은 109,587명에 불과하여 그 비중이 23.2%에 불과했다. 중학교 취학에서 심각한 성차별 구조가 존재했음을 뚜렷이 보여준다.

 

인문계 고등학교33, 실업계 고등학교, 사범학교 등을 합한 후기 중등교육기관의 팽창 규모를 보면, 1952년에는 344교였으나 1959년에는 641교로 2배 가까이 늘어났고, 학생 수에서는 같은 기간에 133,884명에서 274,150명으로 늘어나 205%가량 팽창했다. 그러나 중학교와 마찬가지로 후기 중등교육기관의 취학에서도 성차별 구조가 뚜렷하여 1959년 후기 중등교육기관 전체 학생 수 중에서 여학생은 67,050명에 불과해 그 비중이 24.5%에 불과했다.

 

한편, 단선형 학제를 표방하는 6·3·3·4 학제 안에서 실질적인 복선형적 성격이 내장되어 있는 후기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고등학교 안에서의 인문계와 실업계 계열의 구성을 살펴보자. 학생 수 면에서 인문계와 실업계(농업고, 공업고, 상업고, 수산고의 합산)의 구성을 보면 1952년에는 전체 고등학생 123,627명 중 인문계는 59,421명, 실업계는 64,206명으로 그 비율은 48.1% : 51.9%였다. 대체로 대등하나 실업계 쪽이 오히려 약간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59년이 되면 전체 고등학생 263,198명 중 인문계는 162,433명, 실업계는 100,765명으로 그 비율은 61.7% : 38.3%가 되어, 인문계가 실업계보다 크게 우위를 점하는 구성으로 현격히 변화했다. 실제로 1959년에 대부분의 실업계 고등학교가 모집 정원을 채우지 못하여 입학생이 정원의 71%에 불과했는데, 농업고교는 모집 정원의 53%, 수산고교는 36%를 채우는데 그쳤으며 그나마 모집 정원에 가깝게 지원자를 입학시킨 곳은 상업고교(90%), 공업고교(91%)였다.34

 

문교부는 일관되게 중등 실업교육의 중요성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학부모와 학생의 선택은 한국전쟁 이후 뚜렷이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둔 ‘인문계’ 고교로 향했다.35 이것이 대학 학력의 사회이동 효과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거나 혹은 산업구조 혹은 직업구조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1950년대 한국의 경제구조가 1960년대 이후의 그것에 필적할 만한 변화를 이루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학 진학 지향은 아마도 한국전쟁기에 경험한 대학생의 ‘전시학생증’이 발휘한 징병 유예 효과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대학 교육의 팽창을 보면, 종합대학교, 단과대학교, 초급대학을 합한 고등교육기관 총수는 1952년의 42교에서 1959년의 61교로 늘어났고, 학생 수에서는 같은 기간에 32,542명에서 79,551명으로 230.4% 급격히 증가했다. 그러나 취학에서의 성차별 구조는 뚜렷하여 1959년에 전체 대학생 수 79,551명 중 여대생은 13,703명으로 전체의 17.2%에 불과했다.

 

이상과 같은 1950년대 중등 및 고등교육의 팽창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주도되었다기보다는 주로 사학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다. 예컨대 해방 이후 1950년대 말까지 새롭게 신설된 공립 중등학교는 그 수가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그 대부분은 예컨대 식민지기의 일본인 전용 경성중학교를 해방 이후 서울고등학교로 전환했듯이, 식민지기에 재조선 일본인을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던 일본인 학교를 전용한 것들에 불과했다. 따라서 중등 및 고등교육기관의 팽창은 거의 대부분 사학에 의존한 것이었다. 사학에의 의존은 부족한 재정적 여건 하에서 단기간에 교육 팽창을 이룰 수 있다는 순기능도 발휘했지만, 학교교육 내에서 사학이 차지하는 거대한 비중 탓에 오히려 사학과 관공립학교 간의 구분을 애매하게 만들어 사학의 특장을 무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사학의 부패와 비리가 고질적인 병폐로 오랜 기간 지속되는 역기능을 낳기도 했다.

 

1953년에서 1961년까지의 각급 교육기관의 학생 수에서 사립학교 학생 수가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중학생은 1953년에 전체 324,114명 중 사립중학교 학생 수가 100,124명으로 그 비중이 30.9%였으나, 1961년에는 620,520명 중 사립중학교 학생 수가 267,945명으로 그 비중이 43.2%로 현격히 늘어났다. 이런 경향은 고등학교에서 더욱 현저했다. 고등학생은 1953년에 전체 160,266명 중 사립고등학교 학생 수가 46,221명으로 그 비중이 28.8%였으나, 1961년에는 177,601명 중 사립고등학교 학생 수가 90,113명으로 그 비중이 50.7%로 부쩍 늘어났다. 대학생의 경우는 1953년에 전체 45,344명 중 사립대학생이 25,080명으로 그 비중이 55.3%였으나, 1963년에는 4년제 대학의 경우 전체 115,505명 중 사립대학 학생이 82,033명으로 그 비중이 71.0%, 2년제 초급대학의 경우 전체 10,958명 중 사립대학 학생이 8,238명으로서 그 비중이 75.2%가 되었다.36 고등교육의 경우 사학의 비중이 1950년대에 급증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대 중등 및 고등교육기관에서의 사학 비중 증가는 일차적으로 1949년에 거행된 ‘농지개혁’이 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해방 이후 신설된 많은 사립대학 재단들은 지주들의 농지 자산을 기반으로 하여 만들어졌는데, 이들은 일찍이 1948년 8월에 ‘사학재단연합회’를 결성했고 1949년 6월에는 그것을 ‘사단법인 문교재단연합회’로 개편하여 농지개혁에 관한 입법 과정에서 사립학교 재단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결과적으로 사학재단들은 농지개혁 과정에서 ‘문교재산’ 소유 농지에 대한 특별보상 등의 경제적 특혜를 받으며 1950년대에 꾸준히 성장해 나갈 수 있었다.37

 

 

1950년대 교육 팽창의 성격

 

우선 1950년대에 실현된 의무교육제에 초점을 맞추어 그 특질을 살펴보자. 가장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은 한국의 초등 의무교육제 실현 과정에서 ‘의무’는 누가 져야 하는 어떤 내용의 의무였는가 하는 보다 근본적인 의무성 원리의 문제다. “의무교육에서의 의무성 원리의 제도적 측면은 … 취학 의무·학교 설치 의무·취학 보호 의무 등 세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한다.”38 여기서 말하는 취학 의무의 담지자는 학부모나 친권자 등이 되며, 그 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미취학의 경우에 지게 되는 법규적인 처벌을 동반하게 된다. 둘째인 학교 설치 의무 및 셋째의 취학 보호 의무의 경우, 그 의무의 담지자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등 국가다. 국가는 완전 취학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충분한 학교를 설치해야 하며, 그 학교에 별다른 장애 없이 실질적으로 취학할 수 있도록 학령아동과 그 학부모를 보호해야 할 의무, 즉 수업료 무상과 교과서 무상 제공 등 무상교육제도를 실시해야 한다. 이 세 원리에 비추어 볼 때 1950년대 한국의 의무교육제 형성의 특질은 어떠했을까.

 

먼저, 부모의 취학 의무와 관련하여 검토해 보자. 이 점과 관련하여 함께 고려해야 할 주제는 ‘아동노동’ 문제다. 근본적으로 부모의 취학 의무는 현실에서는 아동을 노동시킬 권리와 모순될 수밖에 없다. 서구나 아니면 가까운 일본의 경우에도 의무교육제가 도입되는 초기에는 그것이 아동노동에 대한 의존도가 강한 하층 가정의 가계에 단기적으로 손실을 초래한다는 이유에서 의무교육제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을 야기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서구에서와 같은 의무교육제와 아동노동 간의 모순과 충돌의 사례를 좀처럼 확인하기 어렵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의무교육제의 실시가 아동노동금지법과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진행되지도 않았고, 1952년에 제정된 근로기준법 안에서의 13세 미만 아동 노동 금지 조항이 의무교육제 실현 과정에서 중요한 문제와 차질을 야기하지도 않았다. 물론 아동노동으로 인해 착취당하는 아동들의 존재에 대한 문제 제기 사례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본격적인 사회적 이슈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 사회의 경우 본격적인 산업혁명 이전에 국가에 의해 의무교육제가 실시되었다는 사정에서 찾아야 한다. 아동노동이 문제시되는 경우에도 그것이 언급하는 사례는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주변 부문의 불완전고용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 대상자들도 적었다.39 이는 달리 말하자면 2차산업의 정규 노동직 고용은 그 기회 자체가 절대적으로 제한되어 있어 우선적으로 성인들에게 그 기회가 배분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농업 부문에서의 아동노동은 아예 문제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다음으로 국가의 ‘학교 설치 의무’를 보자. 앞서 본 것처럼 1950년대 문교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초등교육의 취학률 제고와 완전 취학을 위한 학교 설치에 두고 예산을 배분하고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국가는 한국전쟁과 절대적인 재정 부족이라는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학교 설치 의무’를 지고자 했으며 그것은 상당한 정도로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학교의 보수와 영선 등의 재정 중 상당 부분이 학부모들에 의해 충당된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다.

 

끝으로 국가의 취학 보호 의무는 어떠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사실상 형해화된 원리였다. 국가의 취학 보호 의무 원리는 현실에서는 ‘무상제’를 통해 실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의 초등 의무교육제는 ‘무상’이 아닌 ‘유상’의 방식으로 실현되었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예컨대 한국 교육 팽창의 특질로 ‘유상 중등교육의 팽창’을 지적하는 경우40는 있었으나 초등 의무교육의 유상성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는 많지 않았다. 원리상 ‘의무’교육과 ‘무상’교육은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유상’의 형태로 ‘의무’교육이 실현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을 넘어서는 시점에서 세계적으로 의무교육은 무상제를 동반하는 제도로 일반적으로 정착해 있었다. 즉 의무교육은 기본적으로 무상제를 동반하나 그 무상의 범위에 수업료, 입학금 외에 교과서나 급식, 학용품비, 통학비, 치료비 혹은 교육수당까지 포함시키는가 여부에 따라 나라별로 차이가 있었지만, 적어도 의무교육제가 수업료 유상제를 동반하는 제도로 인식되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의무교육의 ‘유상성’은 제헌헌법 16조의 ‘적어도 초등교육은 의무적이며 무상으로 한다’에 비추어볼 때 애초부터 그 위헌성이 지적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실제로는 어떻게 인식되었을까. 사실 이 문제는 헌법 제정 당시부터 민감하게 의식되고 있었다. 제헌 헌법안을 기초한 유진오는 국회에서의 독회 과정에서 한 의원이 당시에도 국민학교에서 징수되고 있던 후원회비를 거론하며 ‘무상의 범위’가 무엇이냐고 질의하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수업료를 면제한다는 의미가 되겠읍니다. 무상이라고 하면 외국 예 중에는 혹은 학용품 같은 것을 국가가 무상으로 학동에게 대주는 그러한 것까지 포함되여 있읍니다마는 여기서 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학교에서 받어들이는 수업료를 면제한다는 말이고, 후원비까지는 정식으로 학교에서 받어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형식상으로는 그것을 학교에서 받어드리는 것이 되어 있지 않고 각 학교의 후원회가 받어드리는 형식으로 되겠습니다.41

 

다시 말하면, 의무교육에서의 ‘무상’이란 학교가 수업료를 징수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며, 후원회비는 학교가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후원회가 징수하는 것이므로 위헌적이지는 않다는 식의 법리로 응수한 것이다. 그러나 민중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법리적인 위헌성 여부가 아니었다. 의무교육인 국민학교 취학을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 월사금이나 수업료에서 후원회비, 사친회비, 기성회비 등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민들은 그것을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취했다. 지속적으로 학부모의 사친회비 부담 문제를 제기해 왔던 언론조차도 그 부담액의 과중이나 교사에 의한 직접적인 징수 방식이 빚어내는 부작용, 모든 학생에 대한 일괄 부담의 문제 등 부분적인 문제를 지적하는데 그쳤을 뿐, 유상 의무제의 ‘위헌성’을 문제 제기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다음 사설을 보자.

 

국가의 재정이 극도로 빈약하여 국가에 필요불가결의 국방·치안조차도 우방의 원조 없이는 불충분한 이 때, 공연히 헌법의 의무교육 무상의 원칙만을 고집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교육을 시키느냐가 문제이요, 헌법의 무상원칙을 고집하다가 교육을 중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42

 

그런데, 왜 이처럼 의무교육제의 도입에 대해 저항하기는커녕 그것이 실현되는데 필요한 경제적 부담을 기꺼이 지려 했을까. 식민지기에 의무교육제가 조선인의 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민족 차별로 인해 그 실현이 저지되었다고 하는 사실, 해방 이후의 새로운 사회와 그 안에서의 삶에 대한 기대가 교육 기회의 확대로 집중되었다는 사실, 그를 위한 선결 조건으로 초등 의무교육제의 조속한 실현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는 사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끝으로 중등교육의 팽창과 관련하여 1950년대가 지니는 의미를 간단히 살펴보자. 요컨대 1950년대에 중등교육은 전기인 중학교, 후기인 고등학교를 모두 포함하여 그 취학이 대중화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다. 1959년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아동 412,943명 중 중학교에 응시한 사람은 246,976명으로 그 비율은 59.8%에 불과했는데 그 응시자들 모두가 중학교에 진학할 수는 없었다. 같은 해에 중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한 271,814명―여기에는 이른바 중학교 입학 재수생도 포함된다― 중 합격자는 178,342명에 불과해 합격률이 65.6%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거칠게 계산해 보더라도 국민학교 졸업생 중 60%가 중학교에 응시하나 그중 진학에 성공한 사람은 66%에 불과하니, 결과적으로 1950년대 말의 시점에서도 국민학교 졸업생 중 40% 남짓한 아동만이 중학교에 진학한 셈이다.

 

다만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의 진학은 중학교로의 진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용이하여 1959년, 고등학교 입학시험 응시자 103,615명 중 84,039명이 합격해 합격률은 81.1%에 달했다.43 이는 예전에 같은 학교에 속해 있었으나 1951년 학제로 인해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된 학교, 예컨대 식민지기의 경성제일보통학교가 1951년 이후에 경기고등학교와 경기중학교로 분리된 예와 같은 학교에서는 고등학교 입학생의 상당수를 같은 뿌리의 중학교에서 무시험으로 진급시키는 관행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

 

중등교육의 대중화는 1950년대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국민학교의 의무교육제가 일단 실현된 1959년 시점에서도 그 졸업자의 60% 가까이가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거나 혹은 진학하지 않았다. 고액의 교육비―중학교의 경우 수업료만이 아니라 입학금, 거기에 더하는 학도호국단비, 사친회비 등의 부대 경비가 필요했고, 사립중학교는 공립보다도 더 많이 징수하고 있었다―44가 중등학교로의 진학에 경제적 장애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으며, 중등 이상의 학교교육 기회는 성별로 현저히 차별적으로 배분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등교육 팽창에 소극적이었던 국가의 방침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또 한편으로 중학교의 뚜렷한 서열화와 학교차, 치열한 입학시험 경쟁이 민의 교육열을 부분적으로 냉각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1950년대에 대중화될 정도로 충분히 중등교육이 팽창하지 못했다는 것은 당시의 중학생, 고등학생의 자의식 및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기대가 오늘날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을 것임을 추측케 한다. 1960년 4·19의 주역이 중등학생이었던 것에서도 드러나듯이 1950년대의 중학생 및 고등학생은 오늘날과는 다른 학생문화를 공유하며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글을 달리하여 다룰 것이다.

 

중등교육이 대중화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실현되기 전에 선결되어야 할 과제가 있었다. 초등교육의 의무제조차 실질적인 유상제의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초과밀 학급에서의 2부제, 3부제 수업을 내용으로 하여 실현되었다고 하는 여러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초등 의무교육제의 실현조차 1959년의 ‘의무교육6개년계획’ 달성으로 완료될 수는 없었다. 한국전쟁 종료 이후 우리 사회에 출현한 새로운 세대, 즉 ‘베이비부머’가 이윽고 학령아동기에 도달해 국민학교로 거대한 해일처럼 몰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응은 1960년대 이후의 과제로 남겨질 수밖에 없었다.

 

끝으로, 교육을 둘러싼 국가와 민의 관계라는 시각에서 1950년대 교육 팽창을 고찰해 보자. 1950년대 초등교육의 의무제 실현과 중등교육의 팽창은 국가에 의해 위로부터 전면적으로 주도되고 실현되었다기보다는 아래로부터 민이 사친회비 또는 수업료의 형태로 부담하는 막대한 교육비용에 의거하여, 그리고 중등의 경우는 사학에 의존하여 실현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교육 팽창의 메커니즘이 교육을 둘러싼 국가와 민의 관계를 변화시켰을까.

 

식민지기에 주요섭(朱耀燮)은 식민교육의 모순의 하나로, 보통학교 교육을 둘러싼 중앙정부와 민의 관계가 지닌 특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일천구백십년 중앙 집권을 철저히 맨든 이래로 초등 교육의 방침까지 중앙 정부에서 직접 관할하게 되엇다. 더욱이 중앙 정부는 자기의 세운 방침과 계획을 끗까지 관철시키기 위하야는 교육에 관한 일체 권리를 학부형의 손으로부터 수람해버리고 말엇다. 그러면서도 이상한 일로는 공보의 경비만은 그냥 전인민 특히 학부형의 부담에 맛기엇다.45

 

조선총독부가 중앙집권적인 식민교육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도 보통학교의 설립과 운영 경비를 조선인 학부형에게 전가하는 모순된 체제에 대한 지적이자 교육을 둘러싼 국가와 민의 왜곡된 관계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기형적 관계는 1950년대 교육 팽창의 과정에서 변화되었을까. 그렇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물론 식민지기에는 실현될 수 없었던 ‘교육자치제’가 1949년의 「교육법」 제정으로 법제화되었고 그것은 1950년대 내내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식민지기의 교육행정체제와는 크게 달랐다.

 

그럼에도 50년대의 교육자치제는 ‘일반행정으로부터의 교육행정의 독립’을 주된 핵심으로 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학부형으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민들이 자신의 교육관과 요구를 교육행정과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틀로 작동하지 못했다. 1950년대 민들의 교육적 요구는 앞서 언급한 ‘양단 치마’나 ‘학구 위반’과 같은 원자화되고 심지어 탈법적인 행위의 차원에서만 발현되었을 뿐, 그것이 학교교육의 운영에 반영되는 차원으로까지 집약되고 조직화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1950년대 교육을 둘러싼 국가와 민의 관계는 식민지기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하기 어려웠고,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 관계는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 필자의 저작권 보호를 위해, 기존의 PDF 파일을 제공하던 서비스를 중단합니다. 대신 아래의 ‘인쇄(Print)하기’ 클릭한 후, ‘Ctrl + P’를 누르시면 칼럼 내용을 인쇄할 수 있습니다.

🖨️ 인쇄(Print)하기

각주

  1. 韓國敎育三十年編纂委員會 (1980), 『韓國敎育三十年』, 文敎部, 88-89쪽.
  2. 金鍾喆 (1989), 『韓國敎育政策硏究』, 敎育科學社, 97쪽.
  3. 中央大學校附設韓國敎育問題硏究所 (1974), 『文敎史』, 中央大學校出版局.; 韓國敎育三十年編纂委員會 (1980), 앞의 책.;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文敎40年史』, 文敎部.; 교육50년사편찬위원회 (1998), 『교육50년사』, 교육부.
  4. 이영훈 (2004), 『대한민국역사』, 기파랑, 254쪽.
  5. 世界敎育史硏究會 編 (1977), 『義務敎育史』, 世界敎育史大系 28, 東京: 講談社.
  6. 정현승 (2002), 「의무교육제도에 대한 법적 고찰」, 『교육법학연구』, 14(1), 대한교육법학회, 148-149쪽.
  7. 오성철 (2000), 『식민지 초등교육의 형성』, 교육과학사. 2장 참조.
  8. 「社說 未就學學齡兒童二百萬-速히 義務敎育을 實施하라」 『東亞日報』 1931.12.15.(1).
  9. 八木信雄 (1939), 『學制改革と義務敎育の問題』, 京城: 綠旗聯盟, p.45.
  10. 朝鮮總督府 (1943), 「極祕 學制臨時措置案說明資料(一問一答)」, 『外務省茗荷谷硏修所舊藏記錄 I門』 [11], 7릴 7, 東京: 外務省外交史料館.
  11. 佐野通夫 (2003), 「朝鮮植民地支配末期の教育政策ー義務教育制度実施を中心に」, 姜德相先生古希退職記念論文集刊行委員会 編, 『姜德相先生古希退職記念日韓関係史論集』, 東京: 新幹社, pp.439-457.
  12. 최병택 (2016), 「해방 이후 의무교육 요구와 정책의 전개 방향」, 『대구사학』, 125호, 대구사학회, 209-241쪽.
  13. 「義務敎育制에 李大統領 訓示內容」 『京鄕新聞』 1950.6.2.(2).
  14. 「隘路많은 義務敎育」 『朝鮮日報』 1950.6.8.(2).
  15. 오성철 (2000), 앞의 책, 3장 참조.
  16. 「義務敎育에 白文敎長官談」 『京鄕新聞』 1950.6.27.(2).
  17.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앞의 책, 133-134쪽.
  18.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앞의 책, 151쪽.
  19.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앞의 책, 16쪽.
  20. 문교부 (1959), 『문교행정통계표 4292·4·30』, 문교부.
  21. 大韓敎育聯合會, 中央敎育硏究所 (1963), 『義務敎育의 諸問題와 그 解決方案』, 大韓敎育聯合會, 9쪽. 이 보고서에 제시된 국제비교 수치는 UNESCO, World Survey of Education에 의거한 것으로 인용되고 있다.
  22. ‘양단 치마’란 당시 외국에서 수입된 최고급 비단, 즉 ‘양단(洋緞)’으로 만든 치마를 의미했는데, 실제로는 자녀 교육과 관련하여 국민학교에 드나들며 촌지(寸志)를 뿌려대는 일부 계층의 극성스러운 자모를 가리키는 일종의 시사용어였다.
  23. 「餘滴」 『京鄕新聞』 1957.2.3.(1).
  24. 「유행어에 비친 세태만상」 『京鄕新聞』 1989.10.6.(23).
  25. 金明勳 「民主敎育은 어디로?(上)-特殊한 校風을 시정하자」 『東亞日報』 1960.3.9.(4).
  26. 「餘滴」 『京鄕新聞』 1957.2.3.(1).
  27. 「學區制위반兒童이 許多」 『東亞日報』 1959.5.11.조간.(3).
  28.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앞의 책, 155쪽.
  29.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앞의 책, 158-159쪽.
  30. 「어마어마한 學父兄負擔金 總租稅收入의 47%」 『京鄕新聞』 1955.7.20.(3).
  31. 경기도 (1956), 「시구교육감및공사립중고등학교장회의지시사항」, 경기도교육청관리국총무과, 『교육구및시교육위원회관계소멸예규철2』, BA0199923, 79-132쪽.
  32. 「餘滴」 『京鄕新聞』 1962.12.1.(1).
  33. ‘인문계’ 고등학교는 대학 진학을 위한 준비교육기관에 대해 1950년대 이후 1984년까지 사용한 명칭이고 이후는 ‘일반계’ 고등학교로 명칭이 변화되었다.
  34. 「實業高校 學生不足」 『東亞日報』 1959.5.21.석간.(3).
  35. 이상의 수치들은 모두 문교부 (1959), 앞의 책에 의함.
  36. 이들 1953년과 1961년 비교 수치는 內務部統計局 (1953), 『第二回 大韓民國統計年鑑 檀紀4286年』, 內務部統計局. 및 經濟企劃院 (1962), 『第九回 韓國統計年鑑』, 經濟企劃院.에 의거한다. 다만, 『한국통계연감』 1962년판에는 고등교육기관 중 사립대학의 학생 수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 제시한 것은 1963년의 수치로서 그 출처는 文敎部 (1963), 『全國高等敎育機關一覽 1963.4.1 現在』, 등사판자료, 7쪽에 의거한다.
  37. 김일환 (2022), 「한국 사립대학체제의 형성과 재단법인의 정치」,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학박사학위논문, 165-166쪽.
  38. 花井信 (2013), 「日本義務敎育制度成立史論」, 米田俊彦(編), 『論集 現代日本の敎育史 1 敎育改革』, 東京: 日本圖書センター, p.125.
  39. 예컨대 거리의 신문팔이나 구두닦이 소년들의 문제를 다루는 기사들이 간헐적으로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劉漢徹 「時感 바람속의 어린이들」 『京鄕新聞』 1949.1.13.(3).
  40. 김기석 (1989), 「유상중등교육의 팽창」, 김신일 외, 『한국교육의 현단계』, 교육과학사, 126-154쪽.
  41. 國會事務處, 『國會速記錄』, 제1회 제18호, 1948년 6월 26일(토), 17쪽.
  42. 「社說 師親會費를 合理化하라」 『京鄕新聞』 1957.6.8.(1).
  43. 문교부 (1959), 앞의 책.
  44. 예컨대 1956년에 국민학교의 경우 인천시는 1인당 500환, 수원시는 450환, 경기도 내 읍면지역은 380환의 사친회비를 납부해야만 했는데(경기도 (1956), 앞의 글), 같은 해에 문교부는 명년도부터 중학교의 수업료를 월 6,000환(사립은 9,600환), 고등학교는 월 7,200환(사립은 10,800환)으로 인상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授業料入學金 倍額引上으로」 『東亞日報』 1956.12.5.(3).). 중학교의 수업료가 국민학교 사친회비의 거의 10배를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여기에 입학금, 학도호국단비, 사친회비 등이 부가되어 그 차이는 더욱 커진다.
  45. 朱耀燮 (1931), 『朝鮮敎育의 缺陷』, 世界書院, 34-35쪽.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 오성철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전글 변화의 바람을 즐기는 교사 다음글 학습부진과 격차 완화, 해외 사례에서 배운다(1) – “미국 RTI 모델”
칼럼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