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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입시교육의 유구한 역사: 경쟁교육의 뿌리는 깊고 넓다 (Revised)

#1427 현병호, 교육매체 계간《민들레》발행인 2025.12.17
우리 사회의 경쟁 문화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며 그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넓습니다. 벼농사 체제, 신분제도, 과거제 등 경쟁교육의 역사적 배경을 더듬어보며, 올바른 방향으로의 변화를 소망합니다.                               

 

 

경쟁교육, 심성 탓일까

 

경쟁교육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독문학자 김누리 교수는 독일에 견주어 한국의 교육을 비판하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경쟁 지향적인 심성 탓으로 돌린다. 잘못된 경쟁교육으로 한국인들은 환자가 되다시피 하여 하루하루 지옥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12년 동안 경쟁교육을 받은 결과 심성이 잔혹해져 <오징어게임> 같은 잔혹한 영화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한다. “세계에서 가장 잔혹하고 불행한 한국인”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그 틀로 한국 사회를 재단하는 그는 한국인들의 ‘품성’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보는 셈이다. 주체사상이 품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또 하나의 품성론이다.

 

독일 의사들은 의대생 증원을 다들 환영했는데 반해 한국 의사들이 반대하는 것은 시민성이 뒤떨어져서 그런 거라고 말하지만, 진실은 독일의 경우 공공의료에 기반하고 있어 의사 수가 늘어나면 일을 덜 수 있으니 찬성하는 것이지 그들의 품성이 좋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마음만 고쳐 먹으면 경쟁을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회참여형 작가 귄터 그라스를 전공하고 독일 사회를 잘 아는 김누리 교수가 이런 사회구조의 차이, 문화적 배경의 차이를 모르지 않을 텐데 품성론을 펼치는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사회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도덕 문제로 치환하게 되면 문제 해결은 요원해진다. 사회심리학자 로랑 베그는 『도덕적인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에서 개인의 선의나 도덕성만으로는 정의로운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으며, 진정한 윤리는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통찰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말한다. 인의예지를 중시한 조선의 사대부들이 노비를 수백 명씩 거느리면서 숨막히는 신분사회를 수백 년간 고수했던 이율배반성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우리 사회의 경쟁 문화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며 그 뿌리는 생각보다 깊고 넓다. 적어도 한반도에서 3천 년 넘게 지속된 벼농사 체제와 신분제도가 경쟁 문화의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경쟁교육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기 힘든 이유다. 농경사회에서 벗어난 지 불과 반 세기다. 천 년을 이어져온 과거제에 이어 그에 버금가는 입시와 고시 제도가 자리 잡았다. 신분제는 사라졌지만 계층화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괄시받지 않으려는 심리는 신분제 사회보다 더 강렬하게 교육열을 자극한다. 경쟁교육의 역사적 배경을 더듬어보자.

 

 

신분제 사회와 경쟁 문화

 

조선의 공식적인 신분제도는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이라는 양천제를 기반으로 했다.1 사농공상(士農工商)은 신분이 아닌 직역이었다. 노비는 과거 응시 자격이 없었을 뿐 사농공상 어떤 직역이든 맡을 수 있었다. 양인에 속하는 상민의 법적 신분은 양반과 다를 바 없어 과거에 응시해서 급제하면 양반(문반 또는 무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글을 익힐 여유가 있는 이들은 양반과 중인 계급 정도였고, 상민들은 생업에 치어 과거 공부할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다. 양반들은 서얼과 중인, 향리 출신이 진사과를 볼 수 있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양반 사회의 진입 장벽을 높였다.

 

양반은 전체 인구의 5~10% 남짓이었지만 양반 사회 내부의 경쟁은 치열했다. 3년마다 치러진 과거시험의 급제자는 소수였으며 벼슬자리는 더욱 적어 말단 관리인 참봉이라도 되면 다행이었다. 과거에 급제해도 대개는 생원 또는 진사로 불리며 재야에서 일생을 보냈으니 달리 생업이 없는 양반들의 처지는 상민보다 낫지 않았다. 조선 후기에는 상업이 발달했지만 양반이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는 없다 보니 상민보다 곤궁한 양반들이 대거 생겨났다.

 

조선 후기에 화폐제도가 도입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늘어난 경제력은 신분 세탁을 용이하게 했다. 돈 있는 상민과 외거노비들은 오늘날 하급 직업군인에 해당하는 군역의 말단 직역을 산 다음 점점 높은 직급으로 갈아탔다. 노비의 경우 양반 계급으로 진입하는 데 상민보다 한 단계가 더 있어 더 오랜 기간이 걸리긴 했지만 많은 노비들이 신분 상승에 성공했다. 몰락한 양반 중에 신분 낮은 집안과 혼약을 맺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신분질서가 빠르게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많은 하층민들이 돈을 주고 벼슬자리를 샀지만 실제로 관료가 될 수는 없었다. 사실상 문서상의 양반에 그친 셈이다. 구한말 근대 학교에 대한 폭발적 관심은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신분 상승에 대한 강력한 욕구가 그 밑바탕에 있었을 것이다. 신분을 살 수는 있었지만 교육 기회를 누리지 못한 신진 양반들에게 근대 학교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은 것이었다.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사라지자 평민과 노비들 중에 재력 있는 이들이 앞다퉈 학교를 설립했다. 교육을 받고 학문을 닦음으로써 ‘진정한 양반’이 되기 위해서였다.

 

조선시대 한양의 반촌(명륜동)에 살았던 성균관 노비들에게는 문묘 제향과 유생들의 밥상에 올릴 소고기를 장만하기 위해 소를 도살하고 쇠고기를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백정의 멍에를 지고 살던 이들은 신분제가 폐지된 후 자식들을 위해 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1910년 지금의 혜화동에 세운 학교가 숭정학교(현 혜화초등학교)다. 이 학교는 경기중학교 진학률이 전국에서 5위 안에 들 정도였다고 한다. 양반 자제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던 노비들이 자기 자식들만큼은 공부를 해서 사람대접받으며 살기를 바란 것이다.

 

천민 신분에서 막 벗어난 이들에게는 조선시대보다 일제강점기가 더 살아볼 만한 세상이었을 것이다. 조선 왕조에 대한 미련이 없었던 그들은 외세에 의해 시작된 근대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다. 성균관 노비 출신 부모들이 자녀들을 교육시켜 (조선시대 성균관에 해당하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시켰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권 회복의 열망보다 신분 상승의 현실적인 욕망이 더 컸을 것이다.

 

조선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1908년 경성 시내에만 백여 개의 사립학교가 있었으며, 전국적으로는 5천여 개, 20만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있었다. 서당의 수도 만(萬)을 헤아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을 병합한 일본제국은 사학이 번성하게 놔두지 않았다. 들불처럼 번졌던 근대학교는 조선총독부의 「사립학교령」 반포 이후 1910년 5월 1,973개로, 1915년 5월에는 1,154개교로 급속히 줄어든다. 국권을 잃으면서 교육의 기회마저 잃게 된 것이다.2

 

해방 이후 국권을 회복한 뒤 이 땅에 휘몰아친 근대화 바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학력과 학벌을 취득할 기회를 부여했고, 고시 제도는 실제로 관료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명실상부한 양반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누구나 시험을 거쳐 고위 관료가 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경쟁이 치열해지는 것은 당연했다. 입시와 고시는 신분 상승의 확실한 통로였다. 그리하여 억눌렸던 교육열이 분출하면서 새로운 신분 상승의 릴레이 경주가 벌어지게 되었다.

 

 

입시 중심 교육의 유구한 역사

 

과거제는 고려 광종 9년(958년)에 처음 시행된 이래 천 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왕은 과거를 통해 선발된 관리를 파견하여 지방호족의 힘을 견제하고, 양반계급 안에서도 서로 경쟁하게 만듦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귀족이나 양반이라 할지라도 후손들이 꾸준히 과거에 급제하여 새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지 못하면 가문의 쇠락을 피할 수 없었다. 때문에 한정된 벼슬 자리를 놓고 양반계급 안에서도 경쟁이 치열했을뿐더러 신분 상승을 꾀하는 평민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에 양반이라 해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입시 중심 교육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조선시대 공립학교였던 향교와 성균관이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곳이 되어버린 데 문제의식을 가진 유학자들이 도학을 교육하는 곳으로 서원을 열었다. 말하자면 입시교육 아닌 인간교육을 하는 배움터를 새롭게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안학교였던 셈이다. 향교와 마찬가지로 선현을 배향해 문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교육하는 곳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배향하는 인물이 그 지역의 도학자였다는 점, 그리고 스스로를 닦는 위기지학 교육에 치중했다는 점에서 달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원 또한 과거를 준비하는 곳으로 변해갔다.

 

안동에 도산서원을 세운 퇴계 이황은 오늘날로 치면 명문 사립학교 이사장인 셈이다. 풍기군수 시절 겸직 금지를 어기고 소수서원에 출강도 했으니 조선의 일타강사이기도 했다. 그는 노비를 300명 이상 거느린 대표적인 토호로서 안동 지역에서 사실상 부족장 노릇을 했다. 이기일원론을 주장한 율곡이 중앙집권을 옹호한 반면 이기이원론을 주장한 퇴계가 지방분권을 옹호했던 것도 그의 삶의 양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지만 유학자가 제사장 역할을 하는 유교 국가로서 씨족 또는 부족 사회의 요소 또한 강하게 남아 있었다. 양천제라는 신분 질서 아래 서원은 부족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서원 중심의 교육체제는 중앙 정계의 붕당정치와 맞물려 있었다. 훈구파의 몰락 이후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는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점차 파벌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서원은 이들 세력의 근거지로 성격이 변하게 된다. 사림파의 정계 진출이 활발해지자 세력 확장과 과시를 위해 서원이 난립하면서 조선 후기에 이르면 그 수가 900여 개에 이르렀다. 서원들은 오늘날의 입시학원처럼 과거 잘 보는 요령을 가르쳤다. 과거시험장에서는 서원 출신끼리 자리다툼을 벌이고 부정행위도 공공연히 행해졌다.

 

서원은 오늘날로 치면 기숙형 사립학교이자 대학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서원에 등록하면 군역이 면제되었으므로 그 이유로 서원에 적을 두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사학비리와 병역비리가 얽혀 있었던 셈이다. 서원의 폐단을 둘러싼 논란은 인조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다 영조 14년(1738년) 대대적인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 서원을 철폐했다. 그래도 700개 가까이가 남아 백 년이 넘도록 비리의 온상이 되었다. 고종 1년(1864년) 대원군이 서원의 특권을 폐지하고 47개 서원만 남기고 모두 없애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지만 이미 나라는 기울어진 뒤였다.

 

우리 사회의 입시 중심 교육은 천 년 가까이 되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근대화가 시작된 이후 법률상의 신분제가 사라지고 교육을 통한 신분 상승의 길이 모든 사람들에게 열리면서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가 일단락된 20세기 후반, 양반이 되고 싶어 몸부림쳤던 이들의 욕구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21세기 들어 학력 인플레는 가속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계층 사다리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고위 공무원, 의사나 변호사 등의 전문직, 대기업 정규직 등 상위 10% 자리를 선점한 이들은 자신의 자녀가 사다리 상층부에 쉽게 이를 수 있게 가용 자원을 쏟아부으며 입시교육에 올인한다.

 

하지만 입시교육이 문제의 뿌리는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입시 중심의 경쟁교육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는 기준은 단지 시험을 통과했느냐 아니냐이다. “원샷 소사이어티(One Shot Society)”. 2011년 <이코노미스트>가 한국 교육 특집에서 쓴 이 표현은 출신 대학과 시험 합격 여부가 평생을 좌우하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인생은 한방’이라는 것을 체감하는 이들이 시험에 매달리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는 일이다.

 

 

벼농사, 경쟁과 협력의 이중주

 

유럽에서는 노예제가 일찍 사라지고 농노제가 발달한 반면 한반도에서 노비제가 오랫동안 유지된 배경에는 밀농사와 벼농사라는 농업 구조의 차이가 존재한다. 밀농사는 개인이나 가족 단위로 가능한 반면 벼농사는 집단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노비제를 고집한 것은 무엇보다 대지주로서 논농사를 짓기 위한 것이었다. 면화 플랜테이션 농업이 흑인 노예를 필요로 한 것과 유사하다. 노예 인구가 30% 이상인 사회를 노예제 사회로 규정할 때 조선은 노예제 사회였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3

 

한반도는 화강암이 풍화된 토양으로 지구상에서도 토질이 나쁜 편에 속한다.4 큰 강 하류 지역을 제외하면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이 별로 없음에도 꽤 많은 인구가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었던 것은 여름철의 고온다습한 기후가 벼농사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벼농사는 흙보다 물이 중요하다. 저수지와 수로를 통한 치수 기술과 이앙법, 똥오줌을 활용한 퇴비 만들기 같은 농사 기술이 발달하면서 척박한 토양의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3천 년에 걸쳐 한반도의 기후와 토양에 최적화된 벼농사는 사회구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치수를 위해서는 마을 단위의 공동작업이 필수다. 둑을 쌓아 저수지를 만들고 논에 물을 골고루 댈 수 있게 수로를 관리하는 일은 자치 능력과 협동심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밭에 종자를 직파하는 밀농사와 달리 모내기를 하는 벼농사의 특수성 또한 마을 단위의 집단노동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두레 같은 협동조직이 발달하게 된다. 개별 농가 단위로 생산이 가능한 밀농사가 개인주의 문화를 낳았다면 집단생산 방식의 벼농사가 공동체 문화를 낳는 것은 자연스럽다.

 

벼농사가 협력 문화만 발달시킨 것은 아니다. 그 못지않게 비교와 경쟁, 질시의 문화도 낳았다. 생산은 서로의 노동을 공유하는 공동 생산 방식이지만 수확은 개별 농가에 귀속되는 구조에서 수확량을 두고 서로 비교하고 질시하는 문화가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모내기와 김매기를 함께 하며 이웃 논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고 서로의 숟가락 숫자까지 꿰고 있는 사이에 수확량의 차이는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게 되는 것이다.

 

아낙네들의 길쌈 조직 또한 경쟁과 질시의 문화에 적지 않게 기여했다. 농사일 틈틈이 베를 짜는 일은 여성들의 주요 일과였다. 베는 쌀 만큼이나 화폐처럼 쓰여 군역을 군포로 대신하기도 했으니 베 짜기도 벼농사 못지않게 기술의 표준화가 중요했다. 공동 노동 조직인 두레는 농사와 길쌈 기술의 표준화와 평준화를 위한 기술교육과 검증 기능을 했다. “논바닥과 툇마루에서 만들어진 농군들과 아낙들의 협력과 경쟁 그리고 기술 튜닝을 핵심으로 하는” 벼농사 체제는 현대의 기업 문화와 사회 전반에 고스란히 이식되었다.5 산업사회로 넘어온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수천 년을 이어온 농경 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벼농사 체제의 유산인 연공제는 우리 사회 임금 불평등의 주요 원인이다. 신입사원 임금을 100으로 잡았을 때 30년 근속자의 임금이 서구의 경우 170, 일본이 240 정도인데 비해 한국은 330~350에 이른다. 베이비부머 세대가 50대에 접어든 2010년대 들어 임금 부담이 두 배 가까이 늘면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이 확대되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 세대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저출산이 심화되는 배경에는 연공제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된 결과 아파트라는 비교하기 좋은 주거 형태가 경쟁 심리를 더욱 자극한다. 과시성 SNS 문화가 거기에 기름을 끼얹는다. 한때 유행했던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은 우리 사회에 팽배한 경쟁과 질시의 문화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하기보다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자 너도나도 기를 쓰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 뒤에는 공허함이 숨어 있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도 결코 행복하지 않다. 모두가 지는 이 게임을 우리는 과연 그만둘 수 있을까.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교육 문제의 뿌리는 사회구조에 닿아 있다. 벼농사는 마을 단위의 협력 문화와 함께 경쟁과 질시의 문화를 낳았고, 해마다 반복되는 장마철에 큰 강의 치수를 위해서는 중앙집권화된 권력이 필요해 과거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한반도의 지리적 조건에서 사람들이 먹고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구조인 셈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연공제(호봉제)가 자연스럽게 정착할 수 있었던 데는 연장자의 경험을 높이 사는 벼농사 체제의 영향이 적지 않았겠지만, 제조업에서도 경험의 가치가 유효했기에 큰 저항 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정보화사회로 넘어오면서 기술과 정보가 경험을 대체하기 시작했음에도 연공제는 공고하게 유지되면서 청년 실업과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취업 경쟁과 세대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

 

수천 년 가까이 이어져온 경쟁과 협력의 문화 위에 지난 반세기 동안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가 함께 만들어낸 불평등한 사회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민주화 세대가 기득권층이 되면서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자. 우선 연공제를 직무제 또는 연봉제로 바꾸고 임금피크제를 도입해 청년 일자리를 늘여야 한다. 대기업이 연공제를 유지하기 위해 하청기업을 쥐어짜는 악순환을 막고, 비정규직을 늘이는 것도 막을 수 있는 길이다. 그러자면 사회적 대타협이 요구된다. 사회구성원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정치력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대기업이 하청기업에게, 정규직이 비정규직에게 ‘삥 뜯는’ 사회구조를 계속 방치한다면 우리 사회는 격차사회로 치달아 서서히 와해될 것이다. 정부는 기업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주문하기 전에 공무원 사회에서 먼저 모범을 보여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음 세대를 위해 기득권을 조금만 내려놓자고 설득해야 한다. 공무원 중 교직 공무원들, 그중 연차가 높은 교사와 교수들이 먼저 솔선수범할 수는 없을까. 지금처럼 젊은 기간제 교사들, 시간강사들을 착취하는 교육 현장을 묵인하면서 다음 세대가 건강하게 성장하기를 바란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철승 교수의 말처럼 “민주화 세대의 두 번째 희생”6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세대 갈등의 바탕에는 기성세대가 경제성장의 과실을 독식하고 있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연공제에 더해 부동산 폭등으로 세대 간 자산 격차가 벌어지고, 자산 증식에 성공한 기성세대가 자식들에게 자산을 물려주면서 젊은 세대 안에서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기성세대의 자산 증식과 증여 및 상속에서 발생하는 세금(양도세, 증여세, 상속세 등)을 청년 세대의 주거권 보장에 쓰는 것도 한 방법이다. 이미 보금자리 주택, 임대주택 입주 우선권 같은 제도가 시행되고 있지만 세대 간, 세대 내 격차를 줄이는 다양한 정책을 고강도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청년 취업과 주거 문제가 개선되면 소모적인 입시 경쟁이 완화되고 청년들이 자포자기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출산율도 따라서 높아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1차산업을 업그레이드하는 정책도 서둘러야 한다. 북유럽처럼 1차산업이 발달하면 굳이 대학에 가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길이 넓어진다. 북유럽 국가에 가서 정작 눈여겨 봐야 할 것은 교육이 아니라 수산업 같은 1차산업이다. 스스로 ‘세계 제일의 조선 강국’이라 자랑하지만 노르웨이의 고등어잡이 어선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어선 실태를 방치하면서 청년 일자리를 논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현재 수산자원공단에서 시행하고 있는 어선청년임대사업은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과연 공단의 50대 정규직은 자신의 아들더러 낡은 통통배에 목숨을 걸고 고기잡이에 나서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

 

우리 사회의 경쟁 문화는 공생의 이념으로 극복할 수 있을 만치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서울대 10개 만들기’ 같은 교육개혁이 이루어진다 해도 입시교육과 취업 경쟁은 여전할 것이다. 벼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자연 환경이 ‘어쩔 수 없는’ 것이듯이, 오늘날 5천만 인구가 먹고살기 위해 세계를 경쟁 상대로 수출 중심의 경제를 꾸릴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어쩔 수가 없다”며 체념하고 자기정당화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시도하는 존재이다. 사회는 다름아닌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므로. 첫단추는 기득권을 가진 이들이 다음 세대를 위해 기득권의 일부를 내려놓는 것이다.

 

 

* 이 글 마지막 단원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는 재발송 시점에 업데이트되었음을 밝힙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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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조선은 법적으로 양천제였지만 실제로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4계급으로 나뉘었다.
  2.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원 등 민족정신을 교육하는 학교들이 폐교되고 숭정학교 등 일반 사립학교는 유지되었다.
  3. 한국사 연구자 제임스 팔레는 「한국적 특수성을 찾아서 A Search for Korean Uniqueness」(1995) 논문에서 조선은 그리스 로마, 18~19세기 미국과 마찬가지로 노예제 사회였다고 주장한다.
  4. 미국 농림부가 실시한 세계 토양 비옥도 조사에 따르면 전체 9등급 중 한반도 산간 지역은 거의가 7등급이며 호남평야도 4~5등급 수준이다.
  5. 이철승, 『쌀, 재난, 국가』, 문학과지성사, 2021, 140~162쪽.
  6. 이철승, 『불평등의 세대』, 문학과지성사, 2019, 329~338쪽.
교육매체 계간《민들레》발행인 현병호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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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1. 지나는 사람 수정 삭제

    그래서 “함께 즐기는 게임”을 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맨날 이런 추상적 이야기만 반복하는 당신들의 무능력이 오늘날 위기와 모순의 밑거름이란 걸 모르시나??

    1. 현병호 수정 삭제

      답답한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건강한 토론을 위해서는 표현을 좀 다르게 하시면 좋을 듯하네요. 글 속에 해법이 드러나 있는데 간과하신 것 같습니다. 우선 연공제를 직무제나 연봉제로 바꿔 세대 간의 임금 격차와 청년실업을 줄이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도 줄여야겠지요. 대기업이 하청기업 삥 뜯는 구조, 정규직이 비정규직 삥 뜯는 구조를 용인하는 제도부터 바꾸자는 거지요. 사실상 지금 교육 현장도 정규직 교사들이 기간제 교사들을, 정규직 교수들은 시간강사들을 삥 뜯는 구조죠. 민주화세대가 기득권층이 되면서 불평등을 고착화시키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당신들의 무능력’이라고 욕을 한다면 그 점에서는 민주화세대가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겠지요. (좀더 진전된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다음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교육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착각’ https://www.mindle.org/column/?bmode=view&idx=167965527&back_url=&t=board&page=2 )

    2. 교사 수정 삭제

      지나가던 사람이면 그냥 지나가세요. 이게 저질스런 악담에 불과하지 무슨 의견입니까. 싸지르고 다시 찾아볼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나 교육관련일하는 사람일까 걱정되네요

    3. 교육을바꾸는사람들 수정 삭제

      안녕하세요. “지나는 사람”님.
      저널 편집실에서 살펴볼 때, 달아주신 댓글의 내용 중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무례한 부분을 삭제합니다.
      본인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런 형태의 댓글은 자제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 궁금이 수정 삭제

    인간이 더불어 사는 한 경쟁은 피할수 없을 것 같아요.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타인과의 경쟁하다가 어느 순간 나 자신과 피터지는 전쟁을 치루게 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승리는 또 나에게 인정 받고 수고했다는 말로는 만족하지 않고 타인과 비교를 하여 결과를 평가합니다. 결국 자책도 스트레스도 비교에서 오는건데 이 나이가 되니 그걸 지혜롭게 줄이는 방법을 이것저것 생각해 봅니다.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지혜롭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요. 말씀하신것처럼 경쟁을 피할수 없는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있지만, 우리가 행복하다, 잘한다는 것을 수치화 시키기 힘든 영역의 것으로 확장시키는 사회적 인식이 있다면 좀 더 많은 사람이 울타리 안에서 더불어 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뜬금없이 생각이 나는데, 시험에서 몇개틀렸어. 이번에는 다 맞은 애가 두명이나 있는데. 라고 징징거리는 아이에게 네가 잘하려고 노력했으면 된거야. 오늘 몇개 틀리고 맞고는 괜찮아 다음에 이렇게 저렇게 애써보면 되지. 합니다. 잘하려고 하는 마음을..공부든 혹은 그게 아니더라고 자기 인생에서 정성을 다해 하고 싶은 열정의 대상을 찾는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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