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읽기 – ⑤ 지킬 가치가 있는가?
| 정부가 곧 보완책이란 걸 내놓고 고교학점제를 밀고 가겠지만, 그렇게 해서 교육에 나아지는 건 없으리라 비관한다. 실제에 문제가 생긴다 해도 고교학점제에는 좋은 ‘철학’이 있다는 옹호론도 비판한다. 고교학점제 논란 자체가 어두운 ‘안’에서 잃어버린 것을(교육을) 밝다고 ‘밖’에서(사적 이해<利害>가 논리의 전부인 논란 와중 속에서) 찾고 있는 꼴이라고 꼬집는다. |
고교학점제의 ‘철학’은 좋다지만
고교학점제는 옹호할 만한가? 고교학점제를 어떻게든 끌고 가야 하는 정부가 ‘여론전’에 힘을 기울여서인지, 최근에 고교학점제를 옹호하는 의견이나 글들이 부쩍 눈에 띈다. 시행 초기라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긴 하지만 알고 보면 좋은 제도라고들 얘기한다.
교사들이 고교학점제에 대해선 가장 격하게 반발했지만, 요즘엔 그런 반발에 이견을 보이는 교사들의 목소리도 들린다. 반발하는 논리가 ‘괴담’ 수준이라며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고교학점제를 감싼다. 문제 해결을 논의하고 있는 국가교육위원회에서도 ‘철학이나 가치’는 좋은 제도라는 변호가 나온다. 교육부 장관도 “고교학점제가 고등학교 교육이 올바른 방향으로 재편되는 데 필수적”이라고 역설했다.
고교학점제가 좋은 제도이고 꾸준히 유지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는 맥락마다 각양(各樣)하지만, 핵심은 두 가지 점에 있는 듯하다. 고교학점제가 학생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점과 ‘국가 책임교육’을 지지한다는 점이다. 학생의 선택대로 교육과정을 편성해 주고, 학생이 낙제하는 일 없도록 국가가 책임진다는 제도이니, 계속 유지할 만하지 않으냐는 주장이다. 위에 인용한 교육부 장관의 말은, 이제까지 선택 허용도 책임교육도 고등학교에 사실상 없었으니, 고교학점제로 재편해 바로잡아 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교학점제 옹호론에 일리가 없지는 않다.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데 학생의 요구가 반영되면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경우보다 나을 것이다. 교육의 과정에서 학생으로부터의 되먹임을 허용하지 않으면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울 테다. 더욱이,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못해 탈락하는 학생이 없도록 국가가 책임지는 일은 벌써 이루어졌어야 하는 과업이다. 고교학점제가 이런 측면에서 교육 결함을 메운다면, 과연 환영할 만하다.
좋다는 철학은 껍데기
문제는 요즘 듣게 되는 변호론의 전망이나 약속은 모두 ‘말뿐’이기 십상이고 또 그나마 그 ‘말’이 의존하는 교육관은 피상적이고 얄팍하다.
무엇보다도, ‘맞춤형 선택’이 가능해진다는 말부터 과장이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선택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지 못한다. 여건이 안 되면(선택하는 학생이 적다거나 가르칠 교사가 없다거나 하는 여러 이유로) 과목을 개설해 줄 수 없다. 엄밀히 말하면, 여건이 완전할 수 있는 학교는 세상에 없다. 학생이 원하는 대로 교과과정을 맞춰주는 것은 국가 교육체제로는 불가능하다. 고교학점제를 밀고 나가면 언젠가 학생마다 원하는 대로 교육을 받게 되리라는 생각은 그냥 환상이다. 그리고 설사 그 환상이 구현된다 해도 바람직할지는 따져 보아야 한다.
책임교육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국가가 교육을 실속 있게 책임지겠다고 얘기할 양이었으면, 초등학교 아니 유치원 또는 유아 교육의 제도부터 손보고 지원했어야 마땅하다. 고교학점제에 ‘최소 성취 수준 보장’의 구호를 내건 자체가 말뿐일 ‘제스처’였다. 그 보장을 위한 준비가 형식적이었다는 사실은 제도가 시행되자마자 드러났다. 이제 와서 ‘책임교육’을 다시 들먹이며, 제도를 끌고 가다 보면 된다는 식으로 합리화하는 건 염치없다.
고교학점제 두둔은 교육에 해독일 것
고교학점제는 반드시 추진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강변하는 게 ‘말뿐’이라서만 문제라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선택권 확대(맞춤형 교육)이니 책임교육이니 하며 고교학점제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학교 교육에 얼마나 해로운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의식하고 있다면 주장 자체가 악의적이다. 요컨대 그들의 주장은 학교 교육에 근원적인 해독(害毒)이 된다.
선택이니 책임이니 하는 말은, 일상에서 듣다시피, 표피적으로 매력적이다. 교육을 그런 말로 꾸미면 직관적으로 ‘어필’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유행하게 되는 관념은 사실 교육을 심각하게 왜곡하며 망가트려 왔다. 그런 것이 번지면 번질수록 그만큼 학교 교육은 무너져 갈 것이다. 요즘 느끼게 되듯이, 그런 인식에 사로잡힌(또는 그런 ‘레토릭’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주로 정책결정자나 관변 인사란 점에서 사태는 더욱 심각하다.
선택권 확대는 그 자체로 교육에 좋을지
선택권을 가능한 한 넓혀 교육을 학생에게 맞춰주면 좋은 일 아니냐는 주장이 무리한 점은 한둘이 아니다. 그 주장의 실체적인 뜻이 무엇인지 조금 파보기만 해도 그것의 궁색함을 확인할 수 있다. 과연 그 주장은 무엇을 뜻하는가? 학생의 선택을 받아들여 주는 제도는 ‘어디에’ 좋은가? 학생의 요구는 그저 들어주면 들어줄수록 좋은 것인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게 된 학생이 만족할 터이므로 좋은가? 교육은 학생의 모든 선택에 대한 응석받이이어야 하는가? 결국 학생의 바람에(적성에, 계획에, 전략에) 맞는다면 좋은 교육인가?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하여 제도화되어 온 교육은 어째서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구속받는다고 느낄 만큼 표준적(국가주의적)인 양식으로 ‘근대화’되었을까? 만인만색(萬人萬色)의 교육을 제도로 소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현실적인 제약으로 ‘공장 모형’의 학교 교육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인류사적인(인류 진화상의) 다른(‘자연선택’과 같은) ‘이유’가 있었을까? 교육이 생성 진화해 온 경위에는 개인의 ‘이익’(동기, 흥미, 적성)에 앞서 사회적인 ‘이유’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과연 학생의 선택을 받아주는 것이 교육에서 능사이고 본연일까?
이상과 같이 끊이지 않는 질문의 여지를 추궁해 보면, 학생의 선택권을 넓힌다는 정책이라면 곧 좋은 교육을 추구하는 일이라 믿기는 어려워진다. 아울러, ‘학생의 선택권을 확대해 주는 한(맞춤형 교육을 약속하는 한) 고교학점제는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위와 같은 일련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기본적인 검토를 거쳐 자신의 주장에 이르렀다고 여겨지지도 않는다. 그 질문들을 해소하지 않고 나온 주장이라면, 결국 거기에는 교육이 무엇인지 성찰한 심지(心志)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어떤 교육을 옹호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선택권을 부여받는 학생 쪽을 염두에 두고도 질문은 병행해서 한없이 제기될 수 있다. 학생은 어떤 생각(계획, 계산, 인생관)으로 과목을 선택하게 될까? 점수 높게 받기 쉬울 듯해서? ‘컨설턴트’가 대학 진학에 유리하다고 해서? 친구가 수업 같이 듣자고 해서? 진학하려는 대학이 이수를 권장해서? ‘적성과 흥미’에 맞는 듯해서?(이때 적성과 흥미는 어떤 것이며, 과연 학생은 그것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1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인지하는(심리검사로 파악한) 적성과 흥미는 과연 언제까지의 유효기간을 가지고 있을까?) 이런 여러 갈래에서 어떤 경위로 선택하든, 학생에게 선택권만 준다면 좋은 교육은 절로 오는가?
‘책임교육’이 책임지는 교육은 어떤 것인지도 모호
책임교육이란 구호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고교학점제의 ‘책임교육’은 어째서 좋은가? 국가가 교육과정 이수(고등학교 졸업)를 보장해 주기만 하면 교육상 더 바랄 나위 없다는 뜻인가? 그 보장이란 게 어떤 것인가? 현재 국가교육위원회에서는 ‘개선안’이라고 검토하면서 출석만 하면 이수를 보장해 줄까, 아니면 성적도 ‘40점’ 이상 되도록 보장해 줄까, 그것도 아니면(40점이란 기준이 너무 높다면) 20점 정도로 낮춰 적당히 보장해 줄까 하며 논의한다고 한다. 어떤 기준을 고르든 학생의 이수를 국가가 보장하기만 하면 교육은 좋아지는가? 아니면,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최소 성취 기준을 두고 그 이수를 보장한다는 규정을 유지만 하다 보면 언젠가 제대로 보장해 줄 수 있게 되고, 교육은 드디어 좋아지는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지만, 국가교육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고교학점제를 유지해 가다 보면 미래 어느 시점에 가서, 고교학점제가 처음에 표명했던 대로 40% 이상의 성취를 국가가 실지로 보장해 줄 수 있게 된다고 치자. 그러면 책임교육은 이행된 것인가? 이때 ‘40% 이상’이란 분수령은 무엇을 뜻하는가? 39% 성취보다 더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는 표지인가? 이때 퍼센트 계산은 어떻게 나오는가? 필경 시험 친 결과를 근거로 계산할 텐데, 시험 점수가 교육 성과의 전부인가? 아니면 달리 ‘진정한 성과’를 계산할 어떤 방도가 있는가?
정부야 고교학점제를 끌고 가겠지만
11월 3일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이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를 가졌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지금 국가교육위원들 인선도 이루어지지 못한 상태인데, 12월까지 고교학점제 개선안 나올 수 있겠느냐는 말이 나왔던 모양이다. 위원장은 “내달 중 고교학점제 개편안 발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답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은 고교학점제를 유지해 가는 데 별다른 장애도 문제도 없을 것이라 믿고 있다.
교사들이 제도 폐기를 요구할 정도로 강도 높은 문제 지적이 일었지만, 국가교육위원회나 교육부는 고교학점제를 멈춰 세울 정도로 결정적인 불량이나 어려움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국가교육위원회가 개선안을 내놓을 텐데, 그것이 앞에서 제기했던 질문들의 여지를 싹 없애주리라 기대하는 건 만부당하다. 교육부가 넘긴 ‘검토안’(학점 이수 기준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 결정하는 안)을 토의하여 어느 하나를 선택하고는 다른 주변적인 권고를 하는 수준에서 그칠 게 뻔하다. 그렇게 정부는 고교학점제를 연명시키도록 절차를 밟을 것이다.
그러면 고교학점제 사태는 매듭되는 것인가? 고교학점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의 뜻대로, 고교학점제가 ‘가치 있는’ 제도인 만큼 궁극적으로 그 가치가 실현될 때까지 꾸준히 보전해야 하는가?
안 될 일이다. 앞에서 여러 질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듯이, 고교학점제가 암암리에 가져올 교육이 어떤 것인지 사실 알 수 없다. 그 제도는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없이 만들어졌다. ‘학생 맞춤형’ 교육을 위해 수강 과목 ‘선택’의 여지를 넓히고, ‘최소 수준 성취’를 ‘국가 책임’으로 보장한다는 제도적 장치(규정)들을 갖추었다지만, 정부나 옹호자들의 ‘레토릭’ 또는 환상일 뿐이다. 그리고 설사 그렇게 장착했다고 해서 바람직한 ‘교육’ 제도라 인정할 수도 없다. ‘맞춤이 되고 성취가 보장되는 교육’이 정작 어디로 가는 것인지 모르거니와, 필경 그것은 교육의 ‘사회적인 이유’를 거스를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정책의 맥락에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듯, 고교학점제도 교육을 생각하지 않고 만들었다. 왜 그런 제도를(교육을) 시행해야 하는지 엄밀히 따져 보지 않았다. 그저 국민에게 선택권을 주고 국가가 성적(진급, 졸업)까지 보장해 주면 좋은 정책이 아니겠느냐 정도의 심산(心算)만 있었을 뿐이다(선거에서 유리해지지 않겠느냐는 계산만 있었다고 해야 정직한 말일지 모르겠다). 놀랍게도, 교육을 왜 하는지(또는, 인류에게 교육은 왜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은 셈이다.
‘교육 생각’ 없이 만들어진 고교학점제, 그 논란엔 ‘교육 걱정’ 없어
우리는 교육을 잃어버렸다. 고교학점제만의 탓이란 말이 아니다. 이미 잃은 지 오래고, 고교학점제 혼란에서도 그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이런 뜻이다. 교육은 ‘심성 함양’의 과업이라고 이야기하거나, 교육은 ‘전인교육’이어야 한다고도 이야기한다. ‘난 사람, 든 사람, 된 사람’을 열거하면서 교육의 초점은 ‘된 사람’에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전통적인’ 이야기가 오늘날 교육정책 논의에서 얼마나 힘을 발휘할까? 적어도 고교학점제만 보면 그 힘은 미미하다. 그렇게 힘이 잦아든 만큼 우리는 교육을 잃었으리라는 뜻이다.
고교학점제의 문제는 그것이 초래한 말썽들이 전부가 아니다. 고교학점제로 인해 대입에 혼선이 일고 자퇴하는 학생이 늘며, 교사의 업무가 과중해졌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으레 열거되는 문제들, 이를테면 대입제도와의 연계, 내신 평가 방식, 선택 가능성에서의 지역 격차, 교사의 업무 과중 등이 해결되면(해결되지도 못하겠지만) 그만인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런 문제들을 지목하며 고교학점제를 지지하건 반대하건, 그런 교육 걱정으로는 우리 교육이 나아질 수 없다.
고교학점제는 우리가 교육을 잃어버렸단 사실을 다시 일러준다. 그 제도를 버리자고 하건 밀고 가자고 하건, 그런 주장의 바탕에 ‘심성’, ‘전인’, ‘된 사람’ 등에 대한 일말의 미련도 볼 수 없다. 고교학점제를 두고 이루어지는 논란이 보여주는 이런 형국은 바로 어두운 데서 잃어버린 물건을 밝다고 해서 가로등이 있는 곳에 옮겨와 찾는 꼴이나 마찬가지다.
고교학점제는 지금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안이다. 그것의 구석구석은 환하게 드러나고 있다. 미세한 티끌이나 차이에도 부릅뜬 눈들이 ‘각광(脚光)을 쏘고 있다. 그곳에서 ‘문제’를 찾는 데는 특별한 안목이 필요 없다. 문제가 있다면 누구나 볼 수 있게 훤히 드러날 터이다. 문제 사태의 인과(因果) 구도도 벌어지고 있는 이해 다툼의 얼개에서 바로 읽을 수 있을 듯하고, 그래서 대책도 명쾌하게 결론 낼 수 있을 듯 보인다. 확신에 찬 지적과 훈수가 난무한다. 그러나 지금 난무는 의미 없다. 그 ‘밝은 곳’에는 ‘교육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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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그래서…필자가 생각하는 고교교육의 방향은 무엇인가요? 1. 외고, 자사고는 그대로 두는 게 좋은지, 아닌지? 2. 학교 내신의 바닥을 깔아주기 위해 고통스럽게 과목을 이수해야 하는(특히, 고 2~3 수학) 학생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 3. 언제까지 상대평가를 유지할 것인지….등등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말해 주세요.
죄송하지만 두 번째 댓글로 달아두신 내용은 오해가 있으신 데다가, 정치적 편향을 드러내는 질문이기에 부득이 삭제를 합니다. 다만, 지운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필자에게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교학점제 존치여부에 대한 글에 뜬금 고교교육전체에 대한 의견을 묻는 이유는? 내신을 깔아주는 고통스러운 학생? 경쟁교육에 대한 반감은 이해하나 그렇다고 무슨 교육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인가….
대한민국은 교육을 잃어버렸다는 말씀에 고개를 100번 끄덕입니다. 형식적인 구색 갖추기에 지나지 않는 허울뿐인 고교학점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