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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딜레마가 살아 숨 쉬는 그곳, 학교

#1395 전종옥, 양서중학교 교장 2025.11.05
학교가 학생들이 배움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곳이 되려면 학교에 존재하는 다양한 ‘딜레마 상황’을 직시하고, 배움의 현장으로 적극 끌어들여야 합니다. 학교 공동체의 성장을 이끌어 줄 학교의 딜레마 상황을 살펴봅니다.

 

 

학교에도 딜레마가 싹틀 수 있을까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존재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1

 

햄릿 왕자의 이 독백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디며 살기’와 ‘죽음을 통해 그것을 끝내기’ 사이에서 그 어느 것도 선뜻 고르고 싶지 않지만, 결국은 고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절망적 고백이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딜레마(dilemma)’에 빠졌다고 한다. ‘딜레마’는 대체로 양극단이 맞서 있다. 그 어느 선택도 흔쾌하지 않으니 헷갈리고 혼란스럽다. 빠져든 이는 둘 사이에서 흔들림을 거듭하다가 회피하기 일쑤다.

 

학교도 딜레마에 빠질까. 당연히 그렇다. 학교에서 접하는 현실은 딜레마투성이인데, 학교는 이를 다루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피하는 법을 열심히 찾고 가르친다.

 

배움이란, 흔히 우리가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것, 서툴던 것을 능숙하게 하는 것을 배운다고 말한다. 그래서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하나라도 더 알려 주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런데, 학생들이 무엇을 더 알고, 더 능숙하게 할 수 있어야 하는 걸까?

 

학교는 대체로 ‘지식 습득’에 중점을 두고, 교과교육과정에 맞추어 만들어진 교과서 위주로 ‘진도’를 나가는 교육활동을 운영한다. 이러한 현상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교사가 이런 태도를 취하면 학생들도 거기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 묻거나 따질 겨를도 없이, 듣고 필기하고, 과제물 제출하고 지필평가에 참여하는 데 몰두한다.

 

그렇게 받은 12년 남짓의 공교육. 그런 까닭에 수능이 끝나면 학교나 학원가에서는 재활용 수거함에 문제집, 교과서를 버리는 일이 벌어진다. 왜, 더 이상 쓸모없는 물건이니까. 지금까지의 배움이 다음 배움의 디딤돌, 징검다리가 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교육이론, 2015, 2022개정 교육과정이 나오고, OECD 학습 나침반 2030이 나와도 소용이 없다. 스스로 느끼거나 생각할 기회나 필요가 없는 교육, 학생 개개인의 개성을 살리고 흥미와 호기심을 북돋지 못하는 주입식, 정답 찾기 교육의 성채는 아직도 흔들림이 없다. 여전히 우리 교육에서는 맞고 틀림이 분명한 것만 잔뜩 채워가면 된다. 확신의 함정에 빠지기 딱 좋다. 우리는 그렇게 아이들을 키워왔다. 간혹,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보려고 하는 아이에겐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면박을 주거나, ‘그런 건 시험에 안 나온다’는 응답이 돌아온다. 문제 상황이나 딜레마는 아예 싹을 잘라 버린다.

 

AI가 전면화하면서 정답 찾기 교육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학교가 학생들이 배움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는 곳이 되려면, 더 넓고 깊은 배움으로 나아갈 수 있으려면, 학교에 존재하는 다양한 ‘딜레마 상황’을 직시하고, 배움의 현장으로 적극 끌어들여야 한다. 학교 공동체의 성장을 이끌어 줄 학교의 딜레마 상황 몇 개를 꺼내본다.

 

 

딜레마 하나 : 전학생을 통해 무엇을 배울 것인가?

 

어쩔 수 없이 학교를 옮기는 아이에겐 정말 미안한 얘기지만, 전학생을 반기는 학교는 없다. 안 해도 될 일을 학기 중에 해야 하는 까닭이다.

 

미인정 결석이 수십 일에 달하는 아이가 전학을 왔다. 한눈에 공부는커녕 생활지도도 만만치가 않아 보인다. 전입 서류, 학생의 옷차림, 표정 어디에서도 이 학교를 제대로 잘 다닐 것 같지가 않다.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할 건 아니지만, 선생님들 안색이 좋을 리가 없다. 학급 배정을 해야 하는데, 이런 학생을 맡겠다고 선뜻 나서기는 쉽지 않다. 이미 전학을 간 아이가 있어서 학급 인원수가 적은 반이나 학년초에 정해둔 차례로 전입생을 배정할 뿐이다.

 

이 아이를 어찌할 것인가? 실거주가 아닌, 위장 전입이라면 안 받고 되돌려 보내면 되겠는데, 가정 방문을 해 보니, 진짜로 이사를 한 것처럼 보인다. 불시 가택 방문으로 실거주 여부를 확인하자는 말도 있지만, 무슨 범죄자 압수수색도 아니고 가능하지가 않다.

 

우리 학교에 와서 잘 적응해 주면 좋겠지만,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경우는 학교 하나 옮긴다고 문제가 풀릴 리 없다. 오자마자 교사 지시 불이행, 무단결과 등 여러 교칙 위반 사항이 벌어져 생활교육위원회를 열어야 한다. 그의 언행으로 보면 일주일에 한 번씩 열어도 모자랄 판이다. 간혹, 가벼운 것은 눈감아 주려고 해도, 다른 아이들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다. 왜 그 아이만 특별대우를 해 주느냐는 볼멘소리도 들려온다. 보호자도 알 바 아니라는 이 아이가 과연 여기서 졸업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학교가 이 아이를 무한정 끌어안을 수도 없고, 교칙대로 깔끔하게(?) 처리를 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도 할 만큼 했다고 위안을 삼는다.

 

다른 접근법은 없을까? 그런 아이는 대개 우리 학교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펼쳐 놓은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휩쓸려 왔을 뿐이다. 내가 만일 그 학생의 처지였다면, 난 얼마나 잘 해내고 있을까? 또, 학교 부적응 상황에 놓인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는 어떤 기회를 주었던가? 적당히 눈감고, 지원하고, 얼러가며 최대한 데리고 있어 보는 것이다. 사사건건 학교 규정을 적용하면 그 아이는 설 곳이 아무 데도 없다. 분명 잘못이 있긴 하지만, 쫓겨온 아이를 쫓아낼 수는 없잖은가. 하지만, 잘 될까?

 

환경의 변화를 준다(전학을 흔히 이렇게 말한다.)고 새로운 학교에 잘 적응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단순히 학교라는 환경 변수 때문에 학교 다니기 힘들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담임 교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공을 들여도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마는 경우가 제법 있다. 힘이 빠진다.

 

결국, 검정고시를 보든, 학업을 중단하든 본인의 삶이겠는데. 보호자 쪽에서 조금이라도 더 마음을 기울였다면 조금은 달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은 이렇게 잠시 멈추지만, 그 아이가 살아가면서 자신의 인생에 관심을 기울였던 가족 아닌 어른이 있었음을 한 번이라도 기억할 수 있다면 ○○중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허튼 세월은 아니었으리라 믿을 뿐이다.

 

학교가 아이의 삶에 얼마나 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지 판단하기는 늘 어렵다. 규정대로 안 하면 안 되고, 규정대로만 해서도 안 되는 곳이 학교다. 다만, 그때그때 우리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우리의 고민]

• 학교 규정에 따라 학생을 징계하는 것이 선도, 교정의 효과가 있는가? 그냥 통과 의례에 그칠 뿐인가?

• 학생의 부적응은 주로 개인 때문인가, 아니면 해당 학교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것인가?

• 지금의 학교가 청소년에게 가장 안전하고 의미 있는 배움터인가? 그게 아니라면, 학생들이 다니든 그만두든 무슨 문제가 있을까?

 

 

딜레마 둘 : 학생과 교사의 이해가 충돌할 때는 어찌할 것인가?

 

노동자요, 공무원인 교사도 인간다운 삶, 행복한 삶을 위해 근무하는 틈틈이 휴가를 사용한다. 공무원 휴가 제도2는 국가공무원 복무규정 제14조~제20조에서 연가(年暇), 병가(病暇), 공가(公暇) 및 특별휴가로 구분하여 운영하도록 제시하고 있다.

 

그중, 연가는 규정 제16조3에 “행정기관의 장은 소속 공무원이 자유롭게 연가를 사용하여 심신을 새롭게 하고 공·사 생활의 만족도를 높여 직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하라고 되어 있다. 이에 따라, 교육 공무원은 다음 9가지 경우에 연가를 사용할 수 있다.

 

1. 본인 및 배우자 직계존속의 생일
2. 배우자, 본인 및 배우자 직계존속의 기일
3. 배우자, 본인 및 배우자 직계존비속 또는 형제·자매의 질병, 부상 등으로 일시적인 간호 또는 위로가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4. 병가를 모두 사용한 후에도 직무를 수행할 수 없거나 계속 요양을 할 필요가 있는 경우
5.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석 수업 및 일반대학원 시험에 참석하는 경우
6. 본인 및 배우자 부모의 형제·자매 장례식
7. 본인 및 배우자 형제·자매의 배우자 장례식
8. 본인 자녀의 입영일
9. 기타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소속 학교의 장이 인정하는 경우

 

그런데, 연가의 ‘자유로운’ 사용과 관련하여 학교에선 약간의 문제가 있다. 연가를 쓰는 당일엔 수업을 못하게 되는데, 그 수업을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이다. 대개는 날짜 변경을 요청해 할 수 있는 한 수업을 해 왔고, 그게 어려울 때는 보강을 넣는 방식으로 운영을 했다.

 

물론, 연가를 쓰기 위해 수업 날짜를 옮기는 것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수업을 옮겨서 하게 되면, 해당 학급만이 아니라 연쇄적으로 바뀌게 되어 다른 학급 및 다른 교사에게도 어려움이 생긴다. 게다가 연가 교사가 자신의 수업 날짜를 바꾸면, 그로 인해 수업이 많아지는 날이 생기고 그런 부담을 생각하면 연가 쓰는 걸 주저하게 될 수도 있다. 즉, ‘자유로운’ 사용에 방해가 된다. 일리가 있다.

 

교사가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중요한 직무는 단연 ‘수업’이다. 그런데, 가끔 교사가 수업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한다. 갑작스런 개인 사정으로 당일 또는 하루 전에 출근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대개 교내 교사가 대신 들어가 보강을 한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결근이 예정된 경우라면 조금 다르다. 질병 치료를 위한 병가와 본인 결혼이나 그밖의 경조사로 인한 특별휴가는 본인이 수업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보고 거의 모든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나 대체 강사를 채용하여 수업을 운영한다. 다만, 대개 하루 정도 결근인 연가의 경우에는 강사를 채용하지 않고, 사전에 수업의 날짜 변경을 요청하여 가능한 한 본인이 해당 수업을 하는 쪽으로 운영해 왔다. 물론, 일부 학교에서는 강사 채용을 하기도 한다.

 

교육공무원인 교사는 그 업무가 학생과의 수업 위주로 구체화되어 있어, 업무 일반화가 쉬운 다른 공무원에 비해 대체가 어렵다. 본인 수업이 어려울 땐 대체 강사를 위한 수업 계획서와 수업 자료를 미리 준비해 놓긴 하지만, 아는 아이 한 명도 없는 교실에 불쑥 들어간 교사가 하는 수업이 학기 내내 담당했던 교사의 수업에 견줄 수는 없다. 수업이란 교사 중심 수업이든 학습자 주도적인 수업이든 모두 양자의 상호작용에 의한 생생하고 구체적인 행위의 공동 결과물이다. 그 어떤 교실의 어떤 수업도 절대로 똑같은 결과물이 나올 수 없는, 각각이 고유한 창조물이다. 제조업에서 대량 생산을 하듯 수업 계획서와 수업 자료에 따라 학습 결과물이 나오는 그런 단순하고 단조로운 작업이 전혀 아니다. 그러하기에 배움을 돕거나 이끄는 이와 참여하는 이의 개개인 특성이 고스란히 뒤섞여 배움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시나브로 쌓이며 교사와 학생 모두가 성장한다. 수업에 담당 교사가 아닌 대체 교사를 투입하는 일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교사의 권익 보장과 학생의 수업권이 충돌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풀 것인가. 연가를 사용하면 일상과 공직의 만족도 및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니, 당연히 연가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본인이 아닌 대체 강사가 수업을 하면 아무리 준비를 잘 해 놓는다 하더라도 수업의 연속성이 무너지고 밀도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또, 대체 강사를 부르는 게 1순위가 된다면, 수시로 수업 교사가 바뀌고, 대체 강사를 채용하기 위한 학교의 행정 부담도 만만치가 않다.

 

이러한 두 가지 방식이 공존하는 가운데, 학교는 교사의 의견 수렴을 통해 학교마다 연가로 인한 결강에 대비해 왔다. 어느 것 하나가 절대 선(善)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니, 현재까지는 이 둘이 상황, 조건에 따라 선택적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단순히, 무엇을 하는 학교가 더 많은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학교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대개 단순, 명쾌하지 않으니 복잡다단한 상황을 고려하며 운영하는 것이다.

 

[우리의 고민]

• 노동자인 교사의 휴식권과 건강은 어떻게 보장되는 것이 바람직한가?

• 하루 연가 사용으로 인한 날짜(요일) 변경 수업이 교사의 ‘자유로운’ 연가 사용에 방해가 될 정도인가?

• 본인의 수업을 본인이 할 것인지, 강사에게 맡길 것인지는 연가 교사의 선택에 놓인 문제인가?

• 연가를 사용하는 문제와 수업을 하지 않는 문제는 하나의 문제인가, 별개의 문제인가?

• 개인 용무인 연가는 수업을 안 해도 되지만, 공적 업무인 출장(또는 연수)은 수업을 해야 하는가?

• 교사의 연가 사용에 지장이 없으면서도 학생의 학습권을 보장하려면 학교엔 어떤 준비가 필요할까?

 

 

딜레마 셋 : 학교에서 휴대전화 사용,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8월 27일, 수업 중 학생들의 스마트폰 사용을 제한하는 규정이 담긴 초·중등교육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내년 1학기부터 원칙적으로 학생들이 수업 중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휴대전화 소지 허용 여부는 모든 학생이 관련된 가장 뜨거운 감자이며, 학생의 자기 결정권 한계를 다투는 핵심적인 주제이다. 학생 학습권과 교원의 교육 활동을 보호한다는 이 결정을 두고 학생들의 자기 결정권을 지나치게 제한한 것이며 학생 인권이 오히려 퇴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제기되는 등 반대 목소리도 높다.

 

개정안의 해당 조문은 아래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제20조의5(교내 스마트기기의 사용 제한 등)
① 학생은 수업 중에 휴대전화 등 스마트기기(이하 “스마트기기”라 한다)를 사용하여서는 아니 된다. 다만,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로서 학교의 장과 교원이 허용하는 경우에는 수업 중에 스마트기기를 사용할 수 있다.

1. 장애가 있거나 특수교육이 필요한 학생 등이 보조기기로 사용하는 경우
2. 교육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
3. 긴급한 상황 대응 등을 위하여 사용하는 경우

② 학교의 장과 교원은 학생의 학습권 보호와 교원의 교육 활동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교내 스마트기기의 사용·소지를 제한할 수 있다.
③ 제2항에 따라 교내 스마트기기의 사용·소지를 제한하는 경우 제한 기준·방법, 스마트기기의 유형 등 필요한 사항은 학칙으로 정할 수 있다.4

 

교내 스마트폰 사용에 교육부가 법적 규제까지 도입한 것은 스마트폰 사용 문제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심각한 사회적 문제임을 보여준다.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만이라도 학업과 공동체 활동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물리적으로 만들어주자는 사회적 합의가 반영된 결과다.

 

사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자유롭게 폰을 사용하게 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 대개 개정안의 ➀항에 맞추어 운영하고, 학생들도 대체로 수긍하는 편이다. 문제는 제➁항과 ➂항에 있을 텐데, 수업 중이 아니라도 ‘학교의 장과 교원’의 결정으로 사용·소지를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은 이런 때 쓰라고 만들어진 말일 거다.

 

학교에서 스마트폰 소지를 허용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수업 활동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학생만 집중을 못하는 것이 아니고 주변 학생들까지 피해를 볼 수 있다. 또, 언제든 녹음이나 촬영이 가능하기에 개인정보보호, 사생활 침해 관련 문제가 벌어질 수도 있다. 수업 도중이 아니라도, 일과 중에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면 게임이나 채팅 같은 사이버 공간에 대한 의존성이 커져 원만한 교우관계 형성이나 다양한 교육 활동 운영에 어려움이 생기기도 한다. 아마도 개정안의 ➁항과 ➂항은 그에 관한 우려를 반영한 조항인 듯하다.

 

이 정도라면, 휴대전화는 학생들이 접근하지 말아야 할 사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학교에도 가져오지 못하게 하는 게 더 타당하지 않을까? 가져와도 되는데, 사용하지는 못하게 하는 것이 적절한가? 좋다, 학교에서는 최대한 사용하지 않는다고 치자. 족쇄가 풀리면 금단현상처럼 다른 시·공간에서 더 과몰입하는 일은 우려하지 않아도 될까?

 

학교 공동체는 이 문제를 풀 준비, 능력이 없는 집단 사회이기에 학교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일일이 정해 주겠다는 것인가? 그러면 학생들은 무얼 배울 것인가? 또 다시 기성세대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하나하나 정해주고, 학생들은 그걸 잘 따라 하는 사람으로 키우겠다는 심산인가? 좀 서툴더라도 스스로 좌충우돌, 비틀거리며 이런 길, 저런 길을 걸으며 다양한 관점, 접근법을 배우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스마트폰의 포로가 되지 않고, 자신이 삶의 주인공이 되는 길이 아닐까?

 

사용 여부를 학생들의 논의에 맡기는 학교도 있었다. 제천간디학교에서는 교내 스마트폰 과잉 사용 문제가 불거졌을 때, 아이들 스스로 숱한 논의를 거쳐 아이들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일과 시간 중 스마트폰은 ‘지붕이 있는 곳 아래’에서 사용 불가능. 욕구를 충족하려면 당사자는 건물 밖으로 나가는 수고를 감내하라는 것이다.5 이 또한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겠지만, 미래 세대, 미래 역량을 입으로만 떠들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닌 문제 해결 역량을 믿어 줄 수는 없는 걸까?

 

[우리의 고민]

• 자율적으로 잘 사용하는 학생도 적지 않은데, 일률적으로 사용을 제한 또는 금지하는 것은 과잉금지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가? (영화관이나 비행기 등에서 무음이나 비행기 모드를 허용하여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사용법을 스스로 익히게 하는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 공직선거법(제15조)은 선거권, 정당법(제22조)은 정당 가입이 만 18세(고3)에 가능한데, 휴대전화 사용조차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선거권과 정당 가입을 허용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는 처사인가?

• 자기 결정권은 연습, 훈련을 통해 키울 수 있는 것인데, 그걸 가르쳐 주어야 할 학교에서 오히려 차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이가 차면 저절로 생기는 것인가?

• 휴대전화 과몰입이 학생(청소년)들에게만 나쁜 것인가? 특정 연령이나 집단에서 과몰입이 일어난다면 그들에게도 사용을 제한할 것인가?

• 초연결시대, AI와 함께 사는 시대에 실질적인 차단·금지가 가능한가? 교육 활동에 적극 활용하자는 주장이 봇물을 이루는데, 디지털 기기 사용을 제한하는 정책 방향이 바람직한가?

 

 

혼자 빨리 vs 여럿이 천천히

 

세 가지 상황을 통해 학교의 단면을 살펴보았다. 대체로, 어느 한쪽으로 몰아가는 것보다는 양자 사이의 무수한 여백에서 더 좋은 배움과 성찰을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 말고도 학교에는 교과수업을 포함한 모든 교육 활동 현장이 딜레마의 요소를 갖추고 있고, 또 그러한 접근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안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문제는 양극단이 아니라, 그 안에 다양한 옳고 그름, 좋고 싫음, 즐겁고 괴로움 등의 층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교육 활동 곳곳에서 느끼고 생각하며, 그 정도가 어느 누구도 같지 않고 모두 다를 수 있음을 배우는 것이 핵심이 되어야 한다.

 

현재,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이슈에 관해 학생들이 접하는 통로는 소셜 미디어나 또래 친구가 대부분이다. 알고리즘이나 단편적 사실에 노출되어 극단적 사고를 키우거나 혼란을 겪기 딱 좋은 환경이다. 학교가 배움의 지평을 적극적으로 넓혀 학생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학습자 주도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끌어 줄 필요가 있다. 학생들은 다양한 딜레마 상황이나 논쟁적 주제에 접근함으로써, 다양한 학습 역량(지식정보처리, 창의적 사고, 협력적 의사소통, 공동체)이나 성숙한 시민 태도 및 행동을 스스로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6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의 학교는 학생들이 교사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공개적으로 딜레마 상황을 다루고, 논쟁적 주제를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라 보기엔 미흡하다. 학교가 딜레마가 살아 숨 쉬는 논쟁적인 공간이 되려면, 먼저 학교 관리자가 교사의 논쟁 수업을 지원하겠다는 의지 태도가 중요하다. 또, 교실에서는 물론 복도, 운동장, 기타 공간에서도 논쟁적 토론이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학교의 민주주의 문화를 발달시키고 학부모를 비롯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협조와 동참을 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딜레마 상황은 일정 기간 육체적, 정서적 피로도를 높이는 일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이들도 많다. 그럼에도 그걸 해야 할까? 처음엔 품이 더 들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하지만, 훈련을 통해 익숙해지면 문제를 더 깊이 파헤쳐 더 좋은 해결책을 찾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그래서, “빨리 가고 싶다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나 혼자 옳다고 독주할 것인지, 여럿이 함께 갈 것인지는 딜레마를 대하는 태도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알려 준 정답과 스스로 고른 오답 사이7

 

자신만의 확신에 찬 사람이 날로 늘어간다. 극단에 설수록 남의 눈에 잘 띄니, 편견과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이 세력을 넓히는 걸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학교 공동체마저 학생은 정답 찾기에 최적화되고, 우리 아이는 절대 그럴 아이가 아니라는 확신에 찬 학부모가 늘면서, 교사의 입지가 좁아지는 현실은 안타깝다. 뉴턴의 제3법칙은 작용 반작용의 법칙이다. 어느 한쪽이 억지를 부리고 확신에 가득 차 있으면, 다른 한쪽에도 밀리지 않고 맞서려는 힘이 생길 수밖에 없다. 벼랑 끝에 선 이러한 충돌은 문제 상황을 가속화할 뿐,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옳은 것은 하나라는 관점과 태도에 변화가 절실하다.

 

학교의 중심에 딜레마를 놓는 것은 양자택일(兩者擇一)을 잘 하자는 게 아니다. 어디에 더 무게를 두고 숙고와 숙의를 해야 하는 문제이다. 정답이 있는 배움, 태도에 대한 추구는 결국 독선으로 흐를 가능성이 그만큼 높다. 사이다 발언은 당장은 달콤하지만, 오래도록 깊은 맛을 남기기 어렵다. 말과 행동에 조심스런, 심지어 자신감이 부족해 보일 수도 있는 태도가 더 많이 필요하고 존중을 받아야 한다.

 

스스로 예봉(銳鋒)을 꺾자. ‘정답(正答)’을 좇는 문화와 풍토에 대한 성찰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맞닥뜨리며 배우는 대부분은 단지 지금까지의 옳음에 불과한, 즉 잠정적 결론 아니던가.

 

GPT가 무엇이든 척척 ‘transform’을 해내는 시대이다. 지식의 양과 속도 경쟁으로는 그와 함께 살 수 없다. 인간이 진짜 잘하는 생성(트랜스폼)은 창의성의 영역일 것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붙지도 떨어지지도 않으므로 그 짬에 잘 처할 수 있다.’는 그 ‘짬’이지. 바로 도를 아는 자라야 짬에 처할 수 있다네.”라고 했다. 양극단이 아니라, 여백과 틈새, 짬에 처하는 태도가 피어나야 한다. 거기에서 질문하는 힘, 탐험력이 나오고, 또 그래야 정해진 경로를 벗어날 수 있다. 정답으로 쌓아 올린 학교 시스템은 적응성, 창의성을 떨어뜨리는 임계점에 도달해 있다. 중심이 아니라 딜레마가 무궁무진하게 널려있는 경계를 향해야 한다.

 

드라마 「햄릿」의 딜레마는 주동인물 햄릿과 반동인물 클로디어스, 햄릿의 연인 오필리어와 그녀의 아버지 폴로니어스,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 등 주요인물 대부분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비극을 극대화하려는 극적 장치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극단적 선택지 둘만을 놓고 하나를 고르는 방식이 낳은 피할 수 없는 결말이다. 햄릿에게는 다른 선택은 전혀 불가능했을까. 그랬으면 인물들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극단주의가 힘을 얻는 정치·사회 문제도 자세히 뜯어보면, 100과 0의 두 주장, 해결책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생각과 해법이 존재하고, 그 하나하나가 각각 고유한 의미, 가치가 있다. 그걸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곳,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난 아직 학교 만한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난 오늘도 학교 공동체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말한다.

 

“명확한 것을 원하는 당신에게는 미안하지만, 산다는 건 모호함을 견디는 일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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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햄릿], W. 셰익스피어. 이 독백은 한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해석하기도 했다.
  2. https://www.mpm.go.kr/mpm/info/infoService/BizService01/ (인사혁신처 누리집)
  3. https://www.law.go.kr/ (국가법령정보센터)
  4. https://www.law.go.kr/
  5.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216848.html (한겨레신문 2025.09.04.)
  6. 「논쟁문제 가르치기」 12~14쪽. (서울시교육청, 2020)
  7.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85쪽. (장강명)
양서중학교 교장 전종옥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35년 동안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쳤다. 『선생님과 함께 가는 고전 소설 여행』(공저), 『선생님과 함께 가는 현대 소설 여행』(공저) 등의 책을 썼으며,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세계문학) 서평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양서중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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