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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영유아교육, 낮은 시선과 닫힌 태도를 넘어 성찰의 길로

#1367 김병만, 경남대학교 교수 2025.09.16
영유아교육이 교육계 안팎에서 여전히 낮은 시선에 머물러 있음을 비판하며, 그 시선을 바꾸는 출발점으로 우리 안의 편견을 직시하고 겸손 속에서 각자가 성찰할 것을 강조합니다.                                                                                 

 

 

영유아교육에 드리운 낮은 시선

 

“영유아교육에도 박사가 있어? 어차피 아이들이랑 노는 거잖아!”

 

낯설지 않은 말이다. 교육 현장 안팎에서조차 영유아교육을 가볍게 치부하는 시선은 여전히 반복된다. 영유아교육은 쉬운 교육, 특별한 전문성이 필요 없는 영역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다. 그러나 아이들과 하루를 온전히 보내본 사람이라면 안다. 놀이라는 언어로 세계를 탐색하고, 작은 몸짓 속에서 삶의 태도를 배워가는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 않음을. 오히려 그 속에는 세심한 전문성과 깊은 이해가 필요함을.

 

대한민국 교육계에서는 영유아교육을 여전히 ‘준비교육’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강하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글자와 숫자를 조금 익히는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유아기는 ‘아직 준비 중인 시기’가 아니라, 이미 ‘삶이 시작된 시기’다. 아이들은 그 나이답게 세상을 배우고, 관계를 맺으며, 저마다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 그 배움은 단순히 초등교육을 위한 예비 단계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초를 다지는 과정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낮은 시선이 교육계 내부에서도 반복된다는 점이다. 대학이나 연구 현장에서는 지금도 “영유아교육은 학문성이 부족하다”, “영유아교육은 실천만 강조한다”는 말이 들려온다. 이는 유아교육을 주변적인 학문 영역으로 규정하는 시선이며, 결국 교사와 연구자의 자존감을 흔들기도 한다. 하지만 영유아교육이 다루는 것은 인간 삶의 가장 복잡하고 섬세한 시기의 그것이며, 그만큼 높은 수준의 전문성과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흥미로운 점은, 영유아교육을 가볍게 보는 사람일수록 아이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한 경험이 적다는 사실이다.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하면 교사의 언어 하나, 손길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절실히 깨닫게 된다. 영유아교육은 단순히 지식을 주입하는 일이 아니라, 아이의 삶 전체를 돌보고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다. ‘쉽다’는 말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높은’ 수준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교육이다.

 

이제 우리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왜 영유아교육은 교육계 안팎에서 여전히 낮은 시선에 머물러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 시선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필자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영유아교육의 위상을 제대로 세우는 일은 단순히 교사와 연구자들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가장 어린 시민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우리 안의 익숙한 편견을 직시하는 데 있다.

 

 

‘준비교육’이라는 오해

 

영유아교육을 바라보는 흔한 시선 중 하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준비 단계’라는 인식이다. 글자를 익히고, 숫자를 세어 보고, 또래와 어울리는 연습을 하는 정도로만 이해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 속에서 영유아교육은 그저 초등학교라는 본격적인 교육의 문턱을 넘기 위한 사전 훈련으로 축소된다. 그래서 영유아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아직 ‘제대로 배우지 않은 아이들’, 영유아 교사는 ‘초등 교사만큼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들’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유아기는 결코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기’가 아니다. 아이들은 이미 지금-여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놀잇감 하나에도 자기만의 세계를 담고, 친구와의 갈등 속에서 사회적 규칙을 배우며, 일상의 대화 속에서 언어와 사고를 확장한다. 이 모든 것은 ‘앞으로’를 위한 예행연습이 아니라, 그 자체로 온전한 배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전히 영유아교육을 ‘본격적인 교육 이전의 준비과정’으로만 규정하며, 아이들의 현재 삶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이런 오해는 단순한 인식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실제 정책과 제도에도 스며들어 있다. 여타의 교육 학제에 비해 영유아교육은 늘 뒷순위로 밀리고, 예산과 지원도 상대적으로 적게 배분되는 현실이 그 증거다. 마치 ‘아직 진짜 교육이 시작되지 않았으니, 그만큼만 해주면 된다’는 식의 태도다. 그러나 영유아교육을 준비 단계로만 한정한다면, 가장 어린 시민들이 누려야 할 현재적 권리와 배움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오해는 영유아교육의 사회적 정체성을 왜곡한다. 영유아교육이 초등교육의 그림자처럼 존재한다면, 결국 영유아 교사들은 늘 ‘미완의 교육자’로, 아이들은 ‘아직 온전히 인정받지 못한 배움의 주체’로 머물게 된다. 이는 단순한 차별이 아니라 제도적 배제이자 권리 침해다. 영유아교육을 준비교육으로 치부하는 사회는 가장 어린 세대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이며, 교육의 출발선을 의도적으로 늦추는 사회다. 우리는 이 왜곡된 구조를 더 이상 용인하지 말아야 한다. 영유아교육은 초등교육의 하위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본질적인 교육 영역이며,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기초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이처럼 영유아교육을 ‘준비교육’으로 축소하는 사회적 시선은 외부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시선은 학문 내부에서도 다른 모습으로 반복된다. 사회가 영유아교육의 가치를 낮추듯, 학계 안에서도 특정 연구 방법이나 분야를 주류로 세우고 다른 접근을 주변부로 밀어내는 태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결국 외부에서는 제도와 정책을 통해, 내부에서는 학문적 위계와 배제를 통해 영유아교육의 풍부한 가능성이 충분히 드러나지 못하게 된다. 두 문제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지만, 공통적으로 영유아교육을 다각적으로 이해하는 데 한계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맞닿아 있다.

 

 

차이를 넘어, 함께 만드는 영유아교육

 

영유아교육 연구는 본래 다양한 방법과 주제가 공존하며 서로를 보완하는 다층적 영역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특정 연구를 더 중심에 두거나, 다른 접근을 상대적으로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가 여전히 존재한다. 필자가 보기에 과거에는 양적 연구가 과학성과 객관성의 이름으로 상대적 우위를 점하며 질적 연구를 주변화하는 경향이 있었고, 최근에는 반대로 질적 연구가 절대적으로 강조되면서 양적 연구가 소홀히 다루어지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연구자들 사이에 불필요한 경계를 만들고, 학문적 다양성을 충분히 살려내는 데 어려움을 줄 수 있다.

 

사실 모든 연구는 저마다의 학문적 가치와 필요성을 지니고 있다. 양적 연구는 대규모 자료를 통해 일반화 가능한 경향과 구조를 드러내고, 질적 연구는 개별적 맥락과 삶의 구체성을 탐색하는 데 강점을 지닌다. 정책 연구는 제도의 변화를 촉진하며, 철학적 탐구는 교육의 근본적 방향을 성찰하게 한다. 어느 하나만으로는 영유아교육의 복잡한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다양한 접근이 서로 보완될 때 학문적 이해는 더욱 깊고 풍부해진다.

 

그럼에도 최근 학계에서는 “내가 선택한 방법이 가장 타당하다”는 식의 확신이 드러나기도 한다. 더 나아가 “내가 아는 영역, 내가 선호하는 연구만이 진정한 학문”이라는 편견이 암묵적으로 작동하면서, 다른 연구를 가볍게 여기거나 주변부로 밀어내는 태도가 은연중에 나타나고 있다. 이는 연구자들 사이의 건설적 협력보다는 불필요한 경쟁을 낳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연구의 중심을 ‘아이들의 삶’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위험을 안고 있다. 연구 방법이나 성과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 몰두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질문인 “이 연구가 아이들의 삶과 권리를 더 깊이 이해하고 보장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이 뒷전으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비단 학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현장의 교사들 사이에서도 “내가 하는 놀이 지도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다”, “내가 선호하는 활동만이 옳다”는 확신이 비슷하게 드러나곤 한다. 그러나 아이들의 삶은 단일한 접근으로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 다양한 놀이와 활동이 서로 보완될 때 아이들은 더 넓은 경험과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며, 교사 또한 성찰과 성장을 이어갈 수 있다.

 

결국 영유아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는 어느 한 방법이나 접근의 우위를 주장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연구와 실천 모두에서 서로 다른 관점과 방식을 존중하며,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아이들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를 모색하는 일이다. 연구자와 교사가 열린 마음으로 서로 배우고 협력할 때, 영유아교육은 단일한 시각의 한계를 넘어 더 넓고 깊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가장 어린 시민의 삶’을 지키고 이해하려는 우리의 공동된 책무가 놓여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겸손 속에서 함께하는 배움

 

영유아교육이 낮은 시선에 갇히는 이유는 단지 사회적 편견 때문만이 아니다. 영유아교육이 초등교육을 위한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오해가 여전히 존재하고, 학문 내부에서는 특정 연구를 우월시하며 다른 접근을 배제하는 태도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는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축소하고, 내부에서는 스스로의 다양성을 제한하는 이중의 문제가 겹쳐 있는 셈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유아교육은 그 독립성과 전문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채, 제도적으로도 주변부에 머무를 위험에 놓여 있다.

 

필자가 보기에, 이 문제를 풀어가는 핵심은 바로 ‘겸손(謙遜)’1이다. 겸손은 사회를 향해 영유아교육의 위상을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내부적으로는 특정 연구 방식이나 분야에 우월성을 부여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힘이 된다. ‘준비교육’이라는 오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영유아교육이 그 자체로 삶의 중요한 시기임을 분명히 해야 하고, 학문 내부의 위계를 넘어설 때 비로소 이러한 메시지는 설득력을 얻게 된다.

 

겸손 속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와 실천은 차이를 배제하지 않고 ‘공존(共存)’2을 지향한다. 양적 연구와 질적 연구, 발달 연구와 놀이 연구, 정책 분석과 철학적 성찰은 대립적인 선택지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자원이다. 다양한 접근이 함께 어우러질 때 우리는 아이들의 놀이, 발달, 권리, 관계, 제도적 환경을 더 풍부하고 면밀하게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한 가지 관점만을 고집한다면, 아이들의 삶은 단편적으로 해석되고 일부 목소리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

 

결국 영유아교육이 회복해야 할 학문적 자세는 ‘내 연구가 최고’라는 닫힌 확신이 아니라, ‘당신의 연구도 필요하다’는 인정이다. 이는 곧 사회를 향해서도 같은 메시지로 이어진다. 영유아교육은 초등 이전의 준비가 아니라 현재적 삶이며, 다양한 연구와 실천이 서로를 존중할 때 그 삶은 더 온전히 드러난다. 더 나아가 이러한 태도는 연구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교사 역시 자신이 선호하는 놀이나 활동 방식만을 고집하기보다, 다양한 접근이 지닌 가치를 인정하고 배워 나갈 때 아이들의 경험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교사는 단순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존재를 넘어, 끊임없이 성찰하며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가 된다.

 

겸손 속에서 함께하는 학문과 실천만이 영유아교육을 학문적 위계나 사회적 저평가의 틀을 넘어, 아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교육으로 자리매김하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연구와 실천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우리는 여전히 방법의 우월성과 성과의 크기를 따지며 스스로의 울타리를 높이고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아이들의 현재적 삶을 중심에 두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함께 길을 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이, 곧 영유아교육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그 미래는 학문적 성취나 제도의 변화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과 교사, 그리고 연구자가 함께 만들어 가는 살아 있는 배움의 과정 속에서 비로소 싹트고 자라날 것이다.

 

 

위상을 높이는 길, 성찰에서 시작하다

 

영유아교육의 위상을 높이는 일은 단지 외부의 편견을 바로잡는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아이를 어떤 존재로 대하는가에 관한 문제이며, 동시에 학문과 현장이 스스로를 어떻게 성찰하느냐에 달린 과제다. 일방적 확신이나 폐쇄적 관행을 그대로 둔 채 위상을 논한다면, 그 말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사회를 향해 “영유아교육은 결코 낮은 교육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려면, 내부적으로도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는 열린 자세를 지녀야 한다. 외부의 인식을 바꾸는 노력과 내부의 성찰이 함께 맞물릴 때, 영유아교육은 비로소 독립적이고 존엄한 교육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다.

 

영유아교육의 가치는 결코 ‘준비’라는 이름으로 축소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시작된 삶이며,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의 권리이자 경험이다. 또한 그 가치는 어느 한 연구 방법이나 단일한 분야의 성과로 환원될 수도 없다. 다양한 연구와 실천이 서로 보완하고 협력할 때, 우리는 아이들의 삶을 더 깊고 다층적이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영유아교육의 품격은 목소리의 크기나 학문적 권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겸손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아이들의 삶을 중심에 두는 태도에서 빛을 발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의 성찰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연구하고, 무엇을 위해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는가? 우리의 연구와 실천은 정말로 아이들의 삶을 더 잘 이해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키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에 솔직히 답하는 과정이 곧 영유아교육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다. 위상은 외부가 부여하는 지위가 아니라, 우리가 쌓아 올린 신뢰와 성찰에서 비롯된다.

 

영유아교육의 미래는 성찰에서 시작된다.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며, 아이들의 현재적 삶을 중심에 두는 태도야말로 가장 단단한 기반이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영유아교육은 더 이상 주변부가 아니라,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먼 미래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작은 성찰과 실천 속에서 이미 자라나고 있다. 아이들의 눈빛과 웃음 속에서 우리는 그 가능성을 마주하며, 영유아교육이 지닌 참된 위상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함께 지켜내야 할 미래의 약속이기도 하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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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겸(謙)’은 스스로를 낮추어 타인을 존중한다는 뜻이며, ‘손(遜)’은 한 발 물러서며 양보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겸손은 단순한 자기 비하가 아니라, 타인의 가치를 인정하고 관계 속에서 조화를 이루려는 능동적 태도를 가리킨다.
  2. ‘공(共)’은 함께, 더불어의 의미를, ‘존(存)’은 존재함을 뜻한다. 공존은 단순히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적극적 관계를 의미한다.
경남대학교 교수 김병만

아동학과 유아교육학을 전공한 후 현재는 경남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영유아 교육정책을 주로 연구하며 관심분야를 확장하고 있다. 구성원의 참여와 상생을 추구하는 공동선의 가치가 영유아 교육정책에 반영되기를 희망하고 있으며, 상향식 영유아 교육정책 수립 및 평가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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