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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사법고시, 로스쿨, 정의(正義) 그리고 교육

#1330 강태중,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25.07.17
사법고시를 부활해야 한다는 주장이 떠오르고 있다. ‘로스쿨’이 ‘금수저’에게만 열린 기회라는 비판에 여론이(대통령도) 수긍하는 데서 비롯되는 듯하다. 대입제도 개편 맥락에서 일었던 ‘수시 대 정시’ 논란과 닮은 양상이다. 이 점을 지적하면서, ‘유불리 균형’(특히, 계층 사이의 균형)만 따져 시험 제도를 손보는 정책으로는 정의(正義)를 기대할 수 없다고 짚는다. 정의로운 제도는 사회적인 선(善)을 얻어내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대통령도 사법고시 부활 주장에 공감한다는데

 

“사법고시 부활?” 전형적인 ‘출세’ 통로의 쟁점이어선지, 논란이 봇물 터진 모양새다. 사법고시를 부활해달라는 한 시민의 건의에 대통령이 “공감한다”고 대답하면서 얘기는 번졌다. 대통령은 참모진에게 사안을 살펴보자고 지시도 건넸단다. 이해관계자들은 벌써 싸울 기미도 보인다. 대한법학교수회1가 “로스쿨 폐지”까지 거론하며 고시 부활을 촉구한다고 성명서를 낸 데 반해, 대한변호사협회는 재론할 필요 없는 “해묵은 논쟁”이라고 퇴박했다.

 

사법고시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공정하지 못하다며 자신들의 외침을 정당화한다. 로스쿨이 가난한 청년들에게는 접근할 수 없는 기회이며, 이제 ‘개천의 용’이 날 수 없게 된 만큼, 실력에 따른 등용의 정의(正義)에 어긋난다고 힘준다. 대통령과 참모들도 “로스쿨이 과거제가 아니라 음서제가 되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했었다고 한다. 어떤 신문은 “돈 잡아먹는 로스쿨 ‘수천 쓰고 졸업해도 학원’”이라는 기사도 냈다.

 

로스쿨 제도 비판에는 과장이 섞인 듯하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실제 통계를 보면 로스쿨 제도 도입 이후 “사회적 약자의 법조계 진출은 크게 확대됐다”고 밝혔다. “가난하면 로스쿨에서 공부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진실과 다른 의혹을 확대 재생산하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문제는 로스쿨 제도에 있지 않고 그 운영에 있다고 반박하며, 일부 로스쿨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어서, 이 점을 개선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사법고시 대 로스쿨’은 ‘과거제 대 음서제’?

 

‘로스쿨 대 사법고시’의 논란에서는 변호사시험 합격자의 ‘계층’ 구성이 문제라고 전제한다. ‘과거제 대 음서제’의 비유가 그래서 나온다. 사법고시 부활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현행 제도가 시험 응시를 위해 로스쿨 석사 학위를 요구하고 있어서, 비용이 많이 드는 그 과정을 밟을 수 없는 ‘어려운’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로스쿨을 두둔하는 쪽에서는 배제가 사실이 아니며 로스쿨은 법조인 양성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옹호한다.

 

논란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사법고시를 부활해달라는 건의를 받은 자리에서, 대통령은 이렇게 언급했다고 한다. “실력이 되면 로스쿨을 안 나와도 변호사 자격을 검증해서 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법조인 양성 루트가 좀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음서제가 되는 것 아니냐, 과거제 아니고. 그런 걱정을 잠깐 했다.” 로스쿨 도입 이전 사법고시에서 응시 자격 제한을 두지 않았던 점에 수긍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논란이 이렇게 수렴하는 모습은 대입 제도에서와 질이 같다. 2018년 대입제도 개편 때 쟁점은 ‘수시 대 정시의 비중’으로 쏠렸다. 당시 여론은 수시가 ‘금수저 전형’이며 ‘특권 대물림’의 수단이라는 쪽으로 기울었으며, ‘흙수저’에게 기회를 허용하는 ‘수능 위주’의 정시 전형을 늘려야 한다고 들끓었다. 로스쿨 제도를 ‘음서제’에 그리고 사법고시를 ‘과거제’에 비유하는 상식이 당시에도 그대로 반영됐었다. 당시 정부는 그런 이슈를 ‘공론화 숙의’ 의제로 채택했다.

 

 

시험의 정의(正義)는 개인의 유불리가 아니라 공동선에서 찾아야

 

사법고시건 대입이건, 그 제도 발전은 ‘정의(正義)’를 향해야 한다고들 입을 모은다. 이때 정의란 경쟁이 ‘공정’해야 한다는 뜻이라 여긴다. 구체적으로는 합격자 비율이 상층 계층으로 치우치는 점을 문제 삼는다. 사회 정의를 위해 계층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야 하리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특히 선발 제도에서는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의 구현의 요체는 아니다. 교육의 측면에서 정의 구현에는 더 근원적인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법조인 양성이나 변호사시험 제도를 ‘개천’ 출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게 곧 발전이고 정의로운 변화일 수는 없다. 고시 부활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그런 뜻으로만 주장하지는 않을 테다. 법조인 자격을 부여하는 절차와 방법은, 그것이 누구에게 유리하고 불리한지 따져보기에 앞서, 훌륭한 법조인을 양성하고 등용하는 데 이바지할 제도인지 따져 결정해야 한다. 즉, 법조인 양성과 선발 제도가 정의로운지는 공동선의 잣대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법학전문대학원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은 ‘교육이념’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제2조). “국민의 다양한 기대와 요청에 부응하는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풍부한 교양, 인간 및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유·평등·정의를 지향하는 가치관을 바탕으로 건전한 직업 윤리관과 복잡다기한 법적 분쟁을 전문적ㆍ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지식 및 능력을 갖춘 법조인의 양성에 있다.”

 

교육이념 조항에는 법조인의 요건이 담겨 있다. 법률을 한 사회가 숙의해 낸 공동선의 규범으로 인정한다면, 변호사시험 제도는 그 요건에 비추어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어떤 응시자들에게 유리하고 불리한지 타산하며 제도 개선을 논란할 일이 아니다. 법조인에겐 ‘정의 수호’의 사명이 주어져 있다. 제도의 발전을 모색한다면, 그런 사명에 걸맞은 법조인을 우리 사회가 더 얻게 될지 우선 따져야 한다. 제도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사회적 선(善)을 얻는 데 있다.

 

 

‘공정한’ 시험이 곧 정의롭지는 않아

 

‘시험 개편’을 논란할 때 ‘유불리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은 우리 문화에 만연하고 또 고질적이다. 그러나 시험의 중핵 요건은 유불리 균형에 있지 않고 타당성에 있다. ‘시험점수’가 드러낼 것을 드러내는지가 관건이다. 좋은 시험은 교육을 제대로 받았는지 정확하게 가늠하는 것이어야 한다. 유불리가 치우치지 않도록 만들어진 시험은 물론 그렇지 못한 시험에 비해 좋다고 인정될 수 있지만, 그런 조건을 충족하는 것만으로 좋은 시험이 되지는 못한다.

 

시험의 타당성을 문제 삼지 않을 때 교육은 시험 위주로 변질된다. 유불리만 따지며 시험의 성질을 논란하는 사태에서는 점수가 무엇을 드러내는지 살펴야 할 과제는 내팽개쳐진다. 점수는 으레 교육받은 결과(‘실력’)의 지표로 묵인되고, 교육 과정(過程)은 고득점만 노리는 전략에 장악된다. 법조인이나 ‘명문대’ 학생이 되는 데 시험점수가 결정적인 상황에서 그런 변질은 극에 달하기 마련이다. ‘합격’에 따르는 ‘배당금’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교육은 개인 수준에서 자기 정체(正體)를 구축해 가는 과업이며, 사회 수준에서 공동선에 참여할 구성원을 키워내려는 과업이다. 사법시험이 부활한다면 과연 이런 교육을 떠받쳐줄까? 현행 변호사시험이나 다른 여러 자격시험 그리고 수능 등은 응시자들이 제대로 교육받았는지 드러내 주는가? 이와 같이 묻고 토론하는 것이 시험(전형) 제도 개편 작업에 핵심이 되어야 할 터에, 우리 사회의 논란은 시험을 부와 지위 그리고 권력 배분의 ‘공정’ 게임으로만 여긴다.

 

늘 보아 온 시험관(試驗觀)과 개편 논의 양식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교육과 사회의 정의를 도모할 수 없다. 시험 제도의 정의는, 다른 어떤 조건보다도 우선해서, 그것이 교육을 정상화하는지에 달려 있다. 이 근본 요건을 도외시하고(또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공정한 시험’을 외치며 유불리 조정에만 몰두하는 정책 행태로는, 교육을 늘 불의한 상태로 방치하게 될 것이다. 교육이 예비 법조인을 위한 것이건 예비 대학생을 위한 것이건, 예외 없이 그러할 터이다.

 

 

법조인이 아닌 ‘용(龍)’을 내기 위한 제도에는 정의(正義)의 여지 없어

 

글이 오해되지 않길 바란다. 사법고시 부활을 이야기하지 말자는 주장도 아니고, 로스쿨 제도가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아니다. 여기에 쓴 것은, 법조인의 자격을 어떤 양식으로 부여할 것인지 논의할 때,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유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불리한지에만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이다. 제도를 시행하면 우리 사회가 어떤 법조인들을 더 얻게 될지 따져보는 일이 ‘등용 제도’의 정의를 추구하는 핵심 과제라고 말하려고 했다.

 

만약 법조인에게 부와 명예와 권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한 시민이 사법고시 부활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지도 않았을 듯하고, 건의했더라도, 언론사마다 일제히 기사로 받아 내지도 않았을 듯하다. 또, 논란하더라도 유불리 문제에만 집착하지도 않았을 테다. 지금 보이는 일련의 논란은 ‘한국적’이다. 법조인을(의사 경우도) 그 사회적 책임(분업)에 비추어 이야기하기보다 그 직(職)에 부수할 사적(私的) 이익에 비추어서 이야기하는 모습이 ‘우리의 것’답다.

 

교육은 우리 문화 안에서 궁핍해져 왔다. 사회의 온갖 분업의 자리에는 그곳에 적합하도록 교육받은 사람이 요구된다. 적재적소(適材適所)의 배치가 이루어진다면 사회는 평안할 것이다. 그러나 분업은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좋은 자리를 향한 경쟁이 빚어진다. 교육은 그 경쟁으로 비틀린다. 교육은 본디 분업과 조화의 이상을 지향해 설계됐을 테지만, 그 본연은 자리다툼(경쟁)으로 뭉개진다. 오직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한다.

 

지금 법조인 교육은, 일반 학교와 대학에서의 교육도 마찬가지로, 아마도 심각하게 변질된 상태일 것이다.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획책에 온통 휘말려 있을 것이다. 이 ‘자명한’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변호사시험이든 사법고시이든 개선하겠다고 설왕설래하는 건 사실 무의미하다. 개인의 욕구를 우선시하는 정책 아첨에 앞서 사회의 안녕을 위한 교육을 우선 도모하지 않는다면, 시험 제도의 정의는 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는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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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이 없는 대학교의 “일반 법과대학과 법학과 및 기타 학과의 법학 교수로 구성”된 단체이다. 창립 취지문에서 “로스쿨 교수들과는 법학 교육의 발전 방향을 근본적으로 달리”하는 교수들이 모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강태중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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