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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교육개혁, 누가 할 것인가? – 교육계는 현실을 직시하는가? 개혁할 동력을 만들고 있는가?

#1329 홍섭근,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 연구위원 2025.07.16
교육개혁은 과연 누가 해야 할까요? 이 글은 이는 결국 외부자가 아닌 교육자의 몫이며, 이를 위해 우리 안에서 실천할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들어가며

 

교육개혁에 대한 이야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어느 정권이든 초기에는 어김없이 교육개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다양한 주제들이 제시되며, 모두가 지금이 ‘교육개혁의 골든타임’이라고 입을 모은다. 예를 들어, 입시제도 개편, 대학 서열화 완화, 고등교육 개혁(‘서울대 10개 만들기’ 등), 평생·직업교육 강화, 특목고·자사고 문제 등이 꾸준히 논의된다. 학생 수는 급격히 줄고 있지만, ‘학급당 학생 수 20명 제한’을 핵심 의제로 삼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진영이나 지역마다 시각이 달라 합의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로 진보 진영에서는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보수 진영에서는 ‘수월성 교육’ 차원에서 현행 선별 방식을 유지·강화하자는 입장을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보수 정부에서는 교육개혁에 대한 적극적인 주장이 드물고, 현상 유지에 급급한 경우가 많다. 반면, 진보 정부에서는 개혁 논의가 활발하지만, 공론화나 사회적 합의로 이어지지 못하고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말은 많지만, 어느 정권에서도 교육개혁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진 적은 드물다.

 

결국 논의는 다시 입시, 특히 정시 확대 등으로 귀결되고, 수도권이든 지방이든 SKY나 의대 진학에 관심이 집중된다. 지방이 소멸하든 말든, 많은 이들이 내 아이에게 유리한 입시 방식만을 지향한다. 하지만 알려져 있듯, 의대 진학은 상위 0.1~0.2%의 극소수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학생들은 교육적 명분 속에서 들러리로 전락할 뿐이다. 교육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자녀를 의대나 SKY, 자사고·특목고에 보내려 한다. 그 자녀들이 정말 특별해서일까? 아니면, 교육개혁이라는 말이 그저 구호나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정권이 교체된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교육부 장관은 지명되었고, 차관은 대선 후 40일 만인 7월 13일에야 지명되었다. 지명된 장관에 대해 여러 말들이 오가는 상황에서, 청문회를 통과해 국민 눈높이에 부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만약 낙마하게 된다면 장관 인선은 한두 달 더 늦어질 것이고, 그 사이 교육에 대한 정권 차원의 관심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사법개혁이나 경제 문제에 밀려 후순위로 전락하고, 문재인 정부 때처럼 리스크 관리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다. 그 사이 수많은 학생들은 입시 스트레스로 고통받고, 사교육비는 더욱 증가할 것이다.

 

필자는 그간 여러 연구와 실천을 통해,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에 이르게 되었다.

 

“교육개혁은 과연 누가 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혁을 실현할 동력은 과연 존재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교육개혁을 교사들, 교원단체, 교육청이나 교육부, 혹은 장관이나 대통령, 나아가 국회(정치권)가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개혁을 이룰 이는 누구인가

 

교원단체는 태생적 한계로 인해 교원들의 복지나 처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며, 궁극적인 교육개혁을 추진하거나 이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각 단체마다 성향은 다소 다르지만, 최근 주장하는 내용들을 종합하면 교권 강화, 교원 행정업무 경감, 교사 정치기본권 확보, 승진제도 개혁(진보단체), 교원 수당 및 급여 인상, 학급당 학생 수 조정, 입시제도 개혁(진보단체) 등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 주제들은 수십 년 간 반복되어 왔고, 실질적으로 심화되거나 실현된 사례는 드물다. 일부 주장들은 학부모의 요구와 충돌하거나 국민 정서와 괴리를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교사 집단의 이기주의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모든 노조나 단체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제도화나 법제화로 이어진 경우는 많지 않다. 그 배경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겠지만, 오랜 기간 실현되지 못한 점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같은 양상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교육청과 교육부 역시 구조적으로 유사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들은 교육 관료 중심의 공무원 조직으로, 주체적으로 개혁을 이끌기보다는 지시와 명령에 따라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실질적인 개선보다는 형식적인 문서와 계획에 몰두하며, 그에 따라 예산과 인력을 확보하는 데 집중한다. 승진이나 보직과 같은 인센티브가 주요 동기이다 보니, 조직은 점점 비대해지고 내부 논리에 갇히기 쉽다. 이렇게 팽창된 조직은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 기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교육부는 공무원 수 기준으로도 손꼽히는 대형 조직이며, 검찰이나 기획재정부처럼 막강한 내부 권한을 지닌 관료 조직으로 기능하고 있다. 교육청 또한 이러한 교육부의 모습을 점차 닮아가고 있다.

 

그 결과, 교육부 장관이나 교육감은 개혁을 주장하며 임명되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수사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초선 교육감은 비교적 개혁적인 자세를 보이기도 하나, 재선 이상이 되면 관료의 논리에 포섭되어 현실에 안주하는 행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오랜 기간 같은 자리에 머무르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과연 현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든 것이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지만, 그 역할과 위상은 여전히 모호하다. 오히려 교육부보다 더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교육개혁의 동력을 마련하기보다는 조직 간 책임 전가와 무기력한 운영으로 실망을 주고 있다. 국교위의 실질적 기능 개선을 말하는 정부의 주장도 아직까지는 구체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는 자칭 교육전문가가 넘쳐나는 듯 보이지만, 정작 교육개혁을 실제로 이끌고 실현할 수 있는 동력은 극히 부족하다. 누구나 교육을 말하지만, 실제 현장과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실질적 접근과 실행은 거의 없다. 이로 인해 교육개혁은 이상과 구호로만 남고 있으며, 현실에서는 점점 더 불가능에 가까운 과제로 여겨지고 있다.

 

대통령이나 장관은 교육개혁을 주도하기보다는 정치적 상징에 불과하다. 김영삼 대통령의 5.31 교육개혁 이후, 대통령이 직접 교육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사례는 거의 없다. 최근에는 교육이 대선 TV 토론 의제에서도 아예 배제될 정도로 정치적으로 외면당하고 있다. 장관은 대통령의 의중을 대변할 뿐, 독립적인 개혁 주체가 아니다. 여론에 따라 쉽게 교체되며, 개혁적인 정책조차 꺼내기 어려운 환경이다.

 

정치권에서 장관직은 ‘파리 목숨’이라 불릴 정도로 불안정하며, 리스크 관리가 주요 임무가 되어버렸다. 진보 진영에서도 실질적으로 개혁을 실현한 장관이나 실장을 찾기 어렵고, 교원단체 출신 고위직들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개혁을 하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만 많을 뿐, 실질적인 변화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장관이 바뀐다고 교육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는 환상에 가깝다. 개혁은 외부에서 대신해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교사 출신이 교육부 장관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이들도 적지 않다. 그 취지와 의미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지만, 교육이 초·중등교육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필요충분조건이라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장관의 자격으로 교사 경력이나 학문적 이력이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국방부 장관도 이제는 군인이 아닌 민간인이 맡는 시대다. 일각에서는 교사 출신이 장관이 될 경우 오히려 전문성과 시야가 제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존재한다. 그동안 교원 집단이 과연 교육 개혁과 정책에 있어 얼마나 주도적 역할을 해왔는지를 돌아볼 시점이기도 하다. 다만, 장관에게 반드시 요구되어야 할 자질이 있다면, 그것은 실무 경험보다도 교육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정책에 대한 통찰일 것이다.

 

또한 정치권, 특히 국회에서 교육개혁을 입법으로 이끌어낼 것이라 기대하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시도가 있었고, 일정 부분 성과도 있었지만, 입법만으로 교육개혁을 주도하기란 매우 어렵다. 국회는 실행 기능이 없고, 입법 과정은 결국 여야 합의와 국민 여론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교원 사회의 요구만으로는 국회가 움직이지 않으며, 아무리 교육적으로 필요성이 높다 하더라도 정치적 합의 없이는 법안 통과는 요원하다. 발의는 빈번하지만 실질적인 통과는 드물고, 설령 통과되더라도 조율 과정에서 내용이 희석되어 본래의 취지를 잃는 경우도 많다. 예컨대, AI 교과서 도입은 국회에서 여러 차례 제동이 걸렸지만, 결국은 학교 현장에서 추진되고 있으며, 교원 사회가 강력히 요구해 온 아동학대 관련 ‘정서적 학대’ 조항은 여전히 법제화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교육개혁은 입법만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다.

 

초·중등 교육계에서 그나마 남아 있는 개혁 동력은 시·도교육청 중심의 교육자치 정도다. 그러나 2010년 교육자치가 본격화된 이후, 실질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만한 사례는 거의 없다. 형식적인 사업 추진이 반복되고 있으며, 인력은 50% 이상 증가하고 예산도 꾸준히 늘어났지만, 정작 현장은 혼란과 불만이 커지고 있다. 일반행정직은 교육적 비전보다 조직 논리에 따라 움직이고, 교육전문직 역시 교육 철학보다는 승진과 자리보전에 치중하는 구조다. 장학사나 장학관 선발 기준 또한 학교 현장에서 어떤 실천을 해 왔는지보다는, 교육청의 사업을 얼마나 충실히 이행했는지, 매뉴얼을 얼마나 잘 숙지했는지가 주요 기준이 되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개혁적인 인물이 교육전문직으로 진입하거나, 진입 후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기란 쉽지 않다.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변화를 이끈 교육전문직은 손에 꼽을 정도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이는 교육전문직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기형적인 구조로 굳어진 교육청 조직 자체의 한계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학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교육청이나 학교 모두 개혁을 시스템으로 뒷받침하기보다는, 개인의 역량과 의지에 기대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그리고 그런 개인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든 책임은 교육부보다는 오히려 교육청의 안일함과 자기 기만에 더 있다.

 

 

결국 개혁은 제도나 법률, 외부자가 아닌 교육자의 몫

 

결국 교육개혁은 법률이나 제도, 외부 전문가가 아니라 교육자 자신이 해내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 교육청이나 학교가 교육자를 길러내는 데 실패해 왔다는 점은 명백하다. 교감이나 교장이 된다고 해서 인성과 역량이 뛰어나다는 보장은 없으며, 대부분은 단지 승진 규정에 필요한 점수를 갖추었다는 이유만으로 자리에 오른 경우가 많다. 장학사 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1급 정교사 자격증은 형식에 불과하고, 의무적으로 이수해야 하는 각종 연수나 클릭만 하며 넘기는 연수도 현장 교사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현 제도 아래에서 양성된 교장, 교감, 장학사, 교사들이 모두 훌륭하다고 믿는 이는 많지 않다.

 

실제로 교육개혁을 직접 경험하고 성공시킨 이들이 현장에 얼마나 존재하는지도 의문이다. 고등교육계는 각자의 전공을 유지하고 살리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 왔지만, 지금은 학생 수 감소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다. 대학은 폐지되거나 통폐합되는 수순을 밟고 있으며, 이는 머지않아 유아·초등·중등 교육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한때 호황을 누리던 사립 어린이집은 이미 붕괴 단계에 접어들었다. 이처럼 교육계 전반이 위기를 맞고 있지만, 개혁의 동력은 제도도 예산도 아닌 결국 ‘사람’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초·중등 교육계 역시 학령인구 감소라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진지하게 논의하는 이들은 드물다. 대부분은 여전히 기득권 유지에 몰두하고 있으며, 시·도교육청 또한 교육자치라는 이름 아래 교육부와 다를 바 없는 조직 확장과 고위직 확보에 집중하고 있다. 의미 있는 개혁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필자 역시 과거 일부 개혁 시도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일정한 성과도 있었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과도한 업무와 심리적 압박 속에서 건강을 잃었고, 가족들까지 부당한 비방과 압력에 노출되었다. 어떤 보상을 기대한 것도 아니고, 위로나 격려를 바란 적도 없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왜곡된 비난과 공격은 멈추지 않고 있다. 한 지인은 필자의 이 같은 경험이 교육청 내부에서 개혁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개혁의 대가는 이런 것’이라는 인식이 내부에 깊게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누가 이런 역할을 자처하려 하겠는가. 적어도 지금의 방식이라면, 누구에게도 그 부담을 쉽게 권할 수는 없다.

 

오늘날 개혁의 열매를 누리면서도, 그에 따르는 책임은 외면한 채 권리만을 주장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누군가의 희생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이기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피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개혁 자체가 좌초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다. 교육부나 정치권도 아닌, 교육자치를 표방한 교육청조차 이러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면, 교육자치를 왜 보장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교육감과 그 측근들이 깊이 반성하고 곱씹어야 할 문제다. 현실은 역량보다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이들이 중심에 서 있으며, 장학관 이상의 고위직 중 실제로 개혁적 성과를 낸 인물이 몇이나 되는지 의문이다. 그럴듯한 말로 상급자를 설득하고, 자리를 얻는 기술만 정교해지고 있으며, 이런 잘못된 문화가 조직 전반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교원단체, 교육청 모두 탓만 할 때는 아니다

 

서이초 사건 이후 교원단체는 명확한 한계에 부딪혔다. 회원 수는 급증했지만, 그 수에 상응하는 조직력이나 대응력은 부족해 보인다. 만 5세 초등 입학 정책 철회 당시, 박순애 장관이 물러나자 교원단체들은 모든 걸 해낸 듯 도취되었지만, 이후 등장한 이주호 장관 체제에서는 그 영향력이 사실상 사라졌다. 이후 교원단체의 요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고, 이들이 겪은 무력감은 교육계 전체의 현실을 보여준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사 정치기본권의 필요성이 절실히 드러난다. 박순애 장관의 경질은 무리한 정책 추진과 공론화 부족, 그리고 교육계와 학부모, 국민 전체의 반발이 결합된 결과였다. 이를 특정 단체의 승리로 포장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며, 자의적 해석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일부는 이를 이미지 메이킹과 홍보 전략에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다. 정책은 특정 인물이나 단체가 쉽게 바꾸거나 바꿔서는 안 되는 것이며, 교육개혁이 그렇게 쉬웠다면 애초에 교원단체가 필요할 이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말 잘 듣는 교사’를 장학사로 만든다고 해서 교육개혁이 이루어지진 않는다. 개혁은 교사 시절부터 문제의식을 갖고, 제도 변화와 실천을 경험해 본 이들이 모여야 비로소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교육전문직’이라는 명칭조차 학교 현장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교장이나 교육장이라는 껍데기 명칭에만 집착하면서, 실질적 변화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지금의 교육전문직이 하는 역할이라면, 차라리 일반행정직에게 맡기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들이 더 유능할 수 있다. 이쯤 되면 교육전문직의 존재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교육개혁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 경험을 자부심 있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개혁은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다.

 

교사들 또한 개인적인 이해득실이나 눈앞의 상황에만 머무르지 않기를 바란다. 인간이기에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이지만, 모두가 같은 계산만 한다면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개혁을 말하고 추진해야 한다. 교육계는 초·중등 교사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데이터가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 교육계 논의의 상당수는 ‘다수결’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집단적 폭력에 가깝다. 교사만이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없으며,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면 제도화나 법제화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젊은 교사들이 교육정책과 교육법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길 바란다. 그리고 단순한 이론에 머물지 말고, 실천과 연구, 실패와 좌절을 반복적으로 경험했으면 한다. 그래야만 절박함 속에서 진정한 개혁의 필요성과 교육의 본질적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국민과 학부모의 시선에 맞는 정책을 개발하고, 함께 소통하며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정책만이 실현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모든 책임을 교육부 탓으로 돌릴 일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가 어느 수준에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직시하는 일이 먼저다.

 

안타깝게도, 현재 교육청과 교원단체, 그리고 최상위 구조인 교육부는 더 이상 절박하지 않다. 변화시킬 의지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오직 조직의 확장과 개인의 입지 강화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좀 더 냉정하게 보자면, 교육부나 교육청, 관리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료 교사 중에도 변화에 저항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개혁은 어렵다.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주장만 반복하는 개인이나 단체의 말은 국민도, 정치권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결국 지금의 교원단체나 교육청이 교육개혁을 주도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에 가깝다. ‘교사 개인이 무슨 힘으로 교육개혁을 하느냐’는 반문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되묻고 싶다. 그렇다면 누가 교육개혁을 이끌고, 상상하며, 실현할 것인가? 학부모인가, 정치권인가, 대통령이나 장관인가? 누구도 대신하지 않는다. 교사들조차 이제는 퇴보하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며, 실제로 교육계는 점차 후퇴하고 있다. 변화하지 못하면 결국 퇴보하는 것이다. 학생 수는 줄어들고, 예산은 삭감되고, 교육부는 사회부총리 역할에서 물러날 예정이다. 이는 결국 말만 앞세우고 실질적 합의나 협의는 외면한 채, 기득권만을 지키려 했던 우리 교육계 전체의 자화상이다.

 

교사 개인이 독자적으로 교육개혁을 이끌 수는 없지만, 다양한 사람들과 단체가 연대하고 합의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단, 그 연대는 균형 감각과 국민 눈높이를 전제로 해야 하며, 지속적인 훈련과 자기 성찰이 함께 뒤따라야 한다. 교육은 고립된 실험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함께 만들어가야 할 긴 여정이다.

 

 

나가며

 

기회는 누군가가 마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치열하게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양보와 희생 없이 이루어지는 개혁은 없다. 교육개혁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가 나서 주기만을 기다리고, 특정 인물이나 단체에 기대려는 환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이제는 사람을 키우고,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히 성찰해야 할 때다. 단기적 욕망보다는 긴 호흡으로 국가의 미래와 학생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시선이 필요하다. 학령인구가 급감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과연 앞으로의 교육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절박함의 우선순위가 실종된 채 ‘요구’만 남아 있다면, 이를 지지할 국민은 과연 얼마나 될까. 권리는 반드시 의무와 함께 따라온다. 교육계라 해서 예외일 수 없다.

 

교육개혁은 한순간에, 누군가에게 의존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장관이나 대통령이 바뀐다고 교육이 달라졌다면, 우리는 벌써 수십 번 개혁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수없이 반복된 구호에도 불구하고 교육개혁이 실현된 적은 거의 없다. 진정한 개혁은 낭만이 아니라 절박함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철학과 신념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시작된다.

 

이제 말뿐인 개혁 담론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학부모들이 왜 공교육에 분노하는지, 왜 외면하는지를 먼저 분석해야 한다. 가능성 있는 젊은 교사들, 의식 있는 동료들과 함께 고민하고 전략을 세워야 할 때다. 그리고 함께 연대하여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개혁을 하나씩 실현해 나가야 한다. 교육개혁은 단순 수사(레토릭)로 그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실천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사람을 지금부터, 바로 우리 안에서 키워야 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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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 연구위원 홍섭근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 연구위원이며, 교육정책 관련 다수의 저서 및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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