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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대선 시즌에 다시 돌아온 ‘교육개혁’ 외침들

#1266 강태중,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25.04.16
뜻밖에 닥친 대선 시즌이 교육개혁 논의의 봇물을 다시 텄습니다. 쏟아져 나오는 ‘큰 목소리’들이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합니다. 교육의 이상 또는 본연에 대해 사색합니다.                                                                                            

 

 

여전한 ‘좌우’ 진자 운동

 

교육계 여러 이해당사자나 단체/조직들이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선 시즌이 열리고 교육정책을 바꿀 계기가 생겼다고 활기차다. “교육 개악 철폐”을 외치기도 하고 “교육위기 극복”을 호소하기도 하며, “희망의 교육 복원”을 내걸기도 한다. 내용이나 색조는 다르지만, 모두 ‘바람직한’ 교육을 역설하고 ‘미래를 위한’ 교육을 표방하고 있다.

 

봇물 터진 듯 쏟아져 나오는 개혁 주장들은 과연 ‘바람직하며 미래를 위한 교육’을 확약할 수 있을까? 아니, 어느 정도 지속될 만한 정책이라도 낳을 수 있을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러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결국 그것들은 곧 스러질 정부의 정책 노선을 버리자는 한 목소리이다. 여러 색깔로 뿜어지고 있을 뿐이다. 자기들 주장에 붙박인 부조리를 헤아리지는 못하고 있다.

 

개혁 외침은 정책의 추(錘)를 ‘좌우로’ 오가게만 할, 여전한 갈등의 틀에 갇혀 있다. 외침대로 ‘개혁’이 시도된다 해도 결과가 ‘지속 가능한’ 것이 될 수는 없겠다. 정권의 색깔이 바뀔 때마다 기존 정책을 뒤집거나 지워 왔듯이, ‘개혁’의 번복이나 폐기를 거듭하는 양상은 그치지 않을 듯하다. 교육 논의가 정당들의 정권 다툼과 진배없다.

 

 

‘백년대계’라면 어떤가?

 

교육은 낫게 만듦 없이 정책의 좌우 흔들림만 낳는 ‘개혁’을 문제 삼으며, ‘전문가’들은 으레 ‘장기적인 로드맵’(‘백년대계’)을 거론한다. 오락가락 말고 멀리 보아야 한다는 조언은 언뜻 일리 있어 보이지만, 그 뜻은 모호하다. 말 그대로 100년 동안 착착 진행될 계획이란 뜻인가? 아니면, 먼 미래를 정확히 예견해서 그 종착의 때까지 밟아갈 도정(道程)의 그림인가?

 

어떻게 해석하건 상투적이다. 100년을(10년으로 줄이더라도) 유지할 계획을 촘촘히 세우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며, 그에 앞서, 미래를 정확히 예견하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람이 제어할 수 없는 역사의 변수들이 ‘구체적인’ 계획을 허락하지 않으며, 미래는 또 그런 역사의 소산이기에, ‘미래 예견’이란 발상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백년대계’는 교육을 진정한 이상(理想)을 늘 염두에 두고 수행해야 할 과업이라 환기하는 경구로 받아들여야 한다. 교육의 가치를 오롯이 세우고, 그 구현에 흔들림 없이 힘쓰라는 뜻으로 말이다. 당연히 사회적인 숙의와 합의를 전제할 터이다. 명석한 집단지성으로 승화하는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교육의 ‘뜻’을 정하고 관철하는 데 끊임없어야 한다는 충고이다.

 

‘현실’이니 ‘실용’이니 하며 ‘합리적 실리’를 내세우는 사람들은 비아냥거릴 것이다. 어느 세월에 숙의하고 합의하느냐, 가망 없는 공론(空論)에 어리석게 매달리지 말라 웃을 터이다. 그렇다, 쉬이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그 길이 순탄하고 경로도 확연하겠기에 가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길이 곧 교육이 발전하는 과정일 것이기에 가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의 뜻을 세우기 위해 토론하며, 사회는 교육을 보는 집단지성을 계발할 것이다. 뜻을 세웠다고 그것을 구현할 방도가 저절로 도출되는 것도 아니다. 교육 실천의 바른길은 미래로 가면서 만나는 온갖 변수를 다스려 가며 열어야 한다. 그것은 확정된 ‘미래상’을 향해 달리는 길이 아니다. 교육의 이상을 품고 꾸준히 깨어 있으면서 늘 새롭게 터 가야 하는 길이다.

 

 

교육은 ‘성공’에 엮여야 하는가?

 

새로운 전기(轉機)라며 여러 곳에서 여러 대안을 내놓고 있지만, 그것들은 교육을 ‘성공’에 엮는다는 점에서 한통속이다. 들어보건대, 취약 계층의 고질적 실패를 성공으로 만회해 줄 교육, 투명한 경쟁으로 공정하게 성공(기회)을 배분하는 교육 등, 서로 대립하듯 외치고 있다. 하지만 교육을 보는 데서 다르지 않다. 교육이 생존 게임이라는 데 모두 암암리에 합의하고 있다.

 

국민의 교육 고통(사교육 부담)을 덜어야 한다거나, 미래 역량을 함양해 나라의 국제경쟁력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들도 마찬가지이다. 성공(경쟁력)을 추구하는 게임으로서의 교육을 당연시한다. 그런 교육 게임에 따라오는 고통 그리고 그런 게임이 ‘글로벌’ 수준으로 확장되는 사태의 위기 등이 문제일 뿐이라고, 개혁의 이름으로 떠들고 있다.

 

원초를 되돌아보면, 인류에게 교육 행동은 생물로서의 생존을 돕도록 생겨났다. 오늘날 인류는 지구의 지배종으로 ‘성공’했다. 성공의 바탕에는 교육으로 이루어낸 문화 전승이 있다. 문화 상속을 토대로 인류는 대대로 더욱 지혜로워졌고, 거듭 큰 집단으로 결집(협력)해 왔다. 개체로는 허약하지만, 이제 ‘문명’을 뒤에 업고 호가호위하는 인류에게 포식자(경쟁자)는 없다.

 

사람에게 자연은 더 이상 생존의 난관이 아니다. 대처해야 할 위협이 아니라, 필요나 취향대로 부릴 ‘재료’에 불과하다. 현재 인간의 진화(생존)는 자연 선택보다 문화적(사회적) 선택이 좌우한다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포식자나 추위를 피해야 하는 생존 문제는 사라졌고, 말하자면, 교육과 같은 사회제도에서의 적응(성공) 여부가 생존의 관건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의 진화적 성공은, 자연 세계에서 포식자를 없앤 대신, 서로에게 포식자가 되는 ‘사회 사태’를 초래했다. 생물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서로 직접 해치는 일이 드물기는 하지만, 사람은 필요하면 ‘사실상’ 서로 죽인다. ‘얼굴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들거나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행태가 그런 것이고, ‘은둔형 외톨이’ 같은 현상은 그 단면의 그림이다.

 

성공에 엮인 교육은 결국 제로섬 게임이며, 서로에게 포식자인 게임이다. 교육을 이렇게 상정하는 한, ‘교육’의 개혁 기세를 아무리 강도 높게 그리고 장기적으로 유지하더라도 백년대계의 요건을 갖출 수 없다. 아무리 먼 미래를 향한 로드맵을 그리고 따라간다 해도 ‘미래를 위한 교육’이 되지 못한다. 교육을 위해서는, ‘성공’에 교육을 거는 교육론의 관성을 깨야 한다.

 

 

진정한 교육개혁을 추구한다면

 

교육의 이상은 인류가 다시 자연 선택의 순리에 복종하도록 이끄는 데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지구 생태계의 지속 가능성을 품은 ‘문명의 삶’을 살도록 후대를 키우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란 만용과 지구 착취의 문화에서 벗어나 만물과 공생하도록, 지배종이란 성공에 도취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멸하는 기이한 멸종에 이르지 않을 길을 가도록 향도하는 것이다.

 

교육 행동은 호모사피엔스로의 진화 압력을 받으며 뻗쳐 나왔다. 위압적인 포식자에 대처하고 험악한 환경에 적응하도록 마련된 틈새(niche)의 진화물이다. 본디 미물이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문화를 대대로 축적할 수 있게 길을 열었고, 그렇게 집적된 지혜는 결국 지구 정복에까지 성공하도록 이끌었다. 이제 그것은 지구 만물을 유린하는 장비로 둔갑했다.

 

교육을 성공의 열쇠로 보는 타성은 원초적인 진화 과정에서 배어 나와 오늘날 제도에도 인으로 박인 된 듯하다. 교육은 사람을 키우고 있기도 하지만 사람을 ‘잡아먹고’ 있기도 하다. 교육개혁을 꿈꾼다면, 교육이 포식(捕食)의 도구가 된 현실을 극복하는 데서 그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진정한 개혁이라면 교육에 밴 정복의(성공을 향한) 공격성을 퇴색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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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강태중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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