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열망’, 깊숙하고 심각한 문제
| 의대 열망은 대입 경쟁의 부작용이 아니다. ‘7세 고시’라는 기형적 행태에서 그 극단성을 읽어야 할 것이며, 저출산 문제로 일반화된 조짐까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태를 보면, ‘교육’은 인류를 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절멸의 길로 이끌고 있는지 모른다. |
수능 만점자가 공대 진학했다는 ‘놀라운’ 뉴스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이 의대가 아닌 공대에 진학했단다. 2025학년도 대학 입시가 마무리되면서 많은 언론이 비중 있게 보도한 이야기이다. ‘점수만 되면’ 의대로 진학하는 게 당연한 우리 사회에서, 수능 만점자가 공대로 진학한 것은 과연 예외적인 사건이다. 언론이 달려들어 보도할 법하다.
보도를 접하며 거부감을 느꼈던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수능 만점자 공대행이 뉴스가 되는 비정상”을 탄식하는 신문 사설도 눈에 띈다. ‘사회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만점자들이 “소신을 지켜” 공대에 진학했다고 추어올리는 기사도 있다. 휩쓸리지 말라고 계도하는 말맛이 느껴진다. ‘식자’들은 의대 열망의 풍조를 개탄한다.
개탄에는 으레 ‘나라 걱정’이 따른다.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의 지위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이공계 인재 확보전’에서부터 이겨야 하는데, ‘의대 쏠림’이 이 전쟁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식이다. 늘 그랬듯이, ‘과감한 정책과 인센티브’를 정부에 주문한다. 이공계 분야 예산을 늘림은 물론 연구 환경도 획기적으로 바꾸어 주어야 한다는 등, 역시 많이 듣던 대안들을 나열한다. 최근엔 ‘미래의 먹거리 AI’를 거론하는 게 유행이다. 이 부문 지원이 특히 시급하다 열 올린다.
과감한 인센티브로 이공계 인재 확보해야?
압도적인 인센티브가 해결책일 수 있을까? 어림없는 일이다. 그런 접근은 이전에도 실패했지만, 의대 쏠림의 경우에도 먹힐 리 없다. 인센티브로 꾀어내려는 술수는 ‘경제학적 합리성’에 기댄다는 점에서 이미 글렀다.
제도(대책) 이야기는 논리 정연해 보인다. 우선, 의대 열망이 이성적인 계산에서 비롯됐다고 전제하는 것은 ‘사람’에 대해 합당해 보일 것이다. 의대와 공대를 저울질해 보면 의대로의 진학에서 훨씬 더 큰 ‘이익’이 기대되므로, 의대 선택은 합리적으로 따라 나온다고 볼 법하다. 그런 결정을 이공계 쪽으로 돌리려면, 인센티브가 ‘합리적으로’ 막강해야 하리라. 그러나 의대 열망은 이성적인 타산의 산물이 아니다. 그 열망이 최근 ‘7세 고시’라는 신풍속을 낳고 있다는데, 이런 사회적 증후가 합리적이라 여겨지는가?
합리적일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더 많고 정확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의대 쪽이든 공대 쪽이든, 특정한 진학 진로에 어떤 경험과 보상들이 이어질지, 사전에 제대로 알아볼 도리는 사실상 없다. 부모가 의사(엔지니어, 연구자)라면 정보를 충분히 얻을 수 있지 않겠냐고 짐작할지 모르지만, 그런 직접적인 정보도 결국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부모의 경험을 자녀에게까지 일반화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다른 진로와 면밀하게 견주어 저울질 될 수도 없다.
‘미래’라는 것이 가보아야 아는 것인 만큼, 본질적으로 모호한 것이고, 의대인가 공대인가라는 요인만으로 핑크 또는 회색으로 ‘색깔’이 달라질 만큼 간단한 소출도 아니다. 게다가, 사실을 두고 보면, 인간 자체가 합리적 계산을 위해 필요한 정보를 샅샅이 찾아보지도 않는다. 개인 따라 물론 차이가 있겠지만, 우리는 대체로 남 따라가는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성향은 다분히 본능적이다.
의대 열망은 생존 본능에서 나와
사람을 포함하여 모든 생물은 안정된 터전(‘niche’)을 마련해야 도태를 면할 수 있다. 터전을 마련했는지 못했는지, 멸종으로 갈지 계속 생존할지, 판정하는 냉혹한 과정을 가리켜 진화론은 ‘자연선택’이라 한다. 오래전 한때 위기를 겪었던 인류는 결국 그런 터전을 확보했고, 이제 지구의 지배종이 되기에 이르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그야말로 단순하게 정리하면, 인류는 서로 모방하고 동조하며 사회를 이뤄 사는 길을 터득했고, 문화를 전승하는 사회적 기제도 구축해 냈기 때문이다. 한 세대 속에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상생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캐낸 생존의 지혜를 다음 세대로 넘겨주며 진보의 길을 대대로 열어 냈다.
그렇게 살아남고 번성하는(진화) 과정에서 인류는 수많은 ‘무의식적’ 행위 양식을 장착하게 되었다. 태어나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구를 따라 하고 누구 편에 서야 할지 깨닫고, 세계 어디에서 탄생했건 그곳 말을 ‘자연스럽게’ 익혀 간다. 이와 같이 암묵적으로 발현되는 삶의 부속(gadget)들은 인류를 지탱시키는 데 결정적이었지만, 인류가 ‘합리적인 이성’으로 창안해 냈던 것들이 아니다. ‘의식적으로 계산할 필요 없이’ 가동된다는 점에서 알아챌 수 있는 것처럼,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비합리적이다. ‘파충류의 뇌’가 현대인의 행위를 좌우한다는 유행어는 다분히 사실이고, 바로 이 점을 일러준다.
의대 열망은 인류가 살아 낼 터전을 일구던 ‘본능’에서 온다. 우리 사회에서 의대는, 말하자면, 도태를 면하게 해 줄 거의 유일해 보이는 ‘틈새’이다. 불확실한 미래에(살아남느냐 낙오하느냐) 불안을 느낀다면 누구나 열망하지 않을 수 없는 ‘약속의 땅’이다. 그 불안은 원초적이며 강고하기 마련이다. 특히 의대 열망은 생존의 불안이 우리 사회에서 ‘상층’에까지 파급됐다는 징후이다. 생존 경쟁에 필요한 준비나 자원에 어느 정도 자신할 수 있었던 상층에서는, 이전에는 비교적 느긋했다. 그러나 이제 사태는 달라졌다고 감지하기 시작한 듯하다. 불안은 우리 사회에 보편적으로 번졌고, ‘정책적인’ 인센티브 정도로 무감하게 만들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면, 의대에 진학하지 못하더라도, 누구나 미래 불안을 느끼지 않을 사회를 이루어야 할 테다. 경제 대국이니 이공계 인센티브니 하는 타령 정도로 그런 해결책에 이르길 기대한다면 가증스럽도록 안이하다.
‘이공계 인센티브’나 ‘대학 평준화’나, 대책으론 모두 낙제
기저귀도 떼지 못한 단계에서부터 의대 진학을 준비시키는 세태를 개탄하면서는 흔히 ‘인재 분배의 왜곡’을 우려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의대를 향한 열망과 ‘인재’의 의대 쏠림은 잠재적인 이공계 인재들이 거기에 빨려 들어가서 문제이고, 그 문제는 의대 진학에 필적할 미끼를 던져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인식이 실지로도 우리 교육 정책에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킬 것이다.
‘인재론자’들은 사람을 ‘재료’로 취급한다. 재료는 경제적 가치로 다뤄지기 마련이다. ‘인재’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정책 골자는, 사람의 값어치를 따져 ‘전략적인’ 부문(‘이공계’)으로 유인하거나, 아니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부문으로 흘리거나 하자는 것이다. 그런 정책(인간관)이 장악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생존 불안을 덜 수 있으리라고 기대나 할 수 있겠는가? 비인간적인, 무서운 사회이다. 그런 사회는 불안을 바탕에 깔아 놓음으로써 비로소 작동된다. 경쟁을 부추겨 각자에게 ‘인재’임을 입증하도록 요구한다. 경쟁을 뚫고 솟아오른다면, ‘경제 발전’의 재료가 되므로, 상응하는 값을 쳐주겠다 흥정 거는 셈이다. 이런 사회(정책 상황)에서는 의대(피난 틈새)에 대한 열망이 식을 리 만무하다. 더욱 타오를 수밖에 없다.
다른 한 편에서는, 의대 쏠림 현상을 ‘대입제도’ 문제라 여기고, 대입 경쟁을 완화하면 어느 정도 풀릴 문제라는 주장들도 흔히 만난다. 이를테면 ‘야만적인 경쟁’을 제어하기 위해 ‘대학 평준화’ 쪽으로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주지하듯이, 경쟁은 그것을 판가름하는 제도(이를테면, 대입 제도)에 붙어 있지 않다. 거듭 되뇌거니와, 그것은 생존의 틈새를 찾아야 하는 모든 생물의 본질에 들어 있다. 입시제도의 경쟁 강도나 대학의 위계를 완만히 누그린다고 해소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는 교육의 이름으로 절멸(絶滅)로 가고 있어
동물은 ‘자연’의 선택을 받아야 하기에 본디 경쟁에 사로잡혀 있게 되지만, 인류는 그 굴레를 벗어났다. 포식자에게 먹히지 않고 오래 살아 내면서 후손을 번성시켜야 하는 생물의 굴레에서, 인류는 스스로 해방했다. 인류에게는 이제 포식자가 없다. 인류는 거듭 영악해졌고 문명은 이제 자연을 지배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더 이상 진화의 선택압(selection pressure)이 되지 못한다. 자연은 인류 사회와 문화에 밀려났다. 인류에게는 자연이 더 이상 적응 과제가 아니다. 스스로 쌓아 올린 문명으로(지구촌 사회, 과학기술, 규범과 관습, 제도 등으로) 파멸하지 말아야 하는 게 과제이다. 이제 인류의 적은 인류이다.
일곱째 문단에 적어넣었던 것 일부를, 조금 고쳐 아래 옮겨 왔다. 생각을 가다듬어 보자.
사람은 서로 모방하고 동조하며 사회를 이뤄 사는 길을 터득했고, 문화를 전승하는 사회적 기제도 구축해 냈다. 한 세대 속에서 서로 가르치고 배우며 상생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캐낸 생존의 지혜를 다음 세대로 넘겨주며 대대로 진보의 길도 열어 왔다.
위에 옮긴 부분은, 눈치챘겠지만, ‘교육’이 인류 진화 과정에서 보편 ‘레짐’(regime)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렇게 해서, 인류는 자연이란 적을(적응 대상을) 물리칠 수 있었고, 이제 적이 남아 있다면 스스로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교육은 인류가 포식자(불안) 없는 삶의 무대를 갖출 수 있게 뒷받침했지만, 자칫 서로에게(同種의) 포식자가 되는 삶의 조건으로 몰릴 사태도 빚어냈다.
의대 열망은 인류가 서로에게 포식자인 사태의 전조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에서 ‘교육’은, 부모에게도 자녀에게도, 피하고 싶은 싸움이고 불안의 원천이다. 싸움과 불안의 삶이 일상이 되고 피할 수 없는 조건이라 체념하게 되면서, 필경 ‘저출산’이란 현상도 초래되었을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후손을 죽이며 절멸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이 끔찍한 추론이 터무니없지 않다면, 우리 사회를 총체적으로 성찰해야 한다. 반복하건대, 의대 열망의 문제를 진정 해결하려면, “의대에 진학하지 못하더라도 생존(미래) 불안을 느끼지 않게 되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교육의 이름으로, 미래가 불확실하다 거듭 외치고, 그러니 ‘미래 역량’을 갖춰 치열한 싸움에서(인공지능과의 경쟁에서도) 살아남으라 독려한다. 생존 자체의 불안을 거듭 각인시키고 있다. 교육의 이름으로 절멸의 길로 채찍질하고 있는 꼴이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