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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교육은 무엇인가?’라고 새삼 물어야 할 이유

#1233 강태중,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25.03.13
교육이 무엇인지 몰랐었던 듯이 새롭게 묻고 답을 천착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교육 이야기가 의미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학교 제도에 연루된 현상으로만 교육을 이야기해 온 관성으로는 교육을 바로 볼 수 없으리라는 뜻이다. ‘교육학’ 밖에서 축적한 연구 결과들을 참조하는 일은 당연히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에 대해 새롭게 이야기할 게 남아 있을까? 

 

교육은 무엇인가? 이런 물음은 보통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대답을 스스로 마련해 놓은 사람들이 내놓는다.1 그렇지 않고, 순진하고도 진정하게 모른다는 뜻에서 묻는다면, 듣는 사람 대부분은 의아해할 것이다. 교육이 무엇인지 우리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물며, 한국 사람은 모두 교육에 대해서는 박사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일상이 이러한데 굳이 교육은 무엇인가 묻는 경우라면, 필경 거기에는 교육이란 말이 어떤 뜻으로 쓰이느냐고 단순히 묻는 이상의 뜻이 들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그런 교육’이 아닌 다른 어떤 교육을 이야기해야 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을 법하다.

 

교육이 무엇이냐고 왜 새삼 묻는가? 교육에 대하여 지금 돌아가고 있는 이야기나, 그런 이야기에 뿌리를 둔 여러(가정이나 학원과 학교 그리고 국가의 정책 결정에서까지 나타나는) ‘교육’ 행태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서이기 십상이다. 교육이 지금 세상에서 돌아가듯 한 그런 게 아니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려는 게 아닐까. 교육에 대하여 우리는 개념에서부터(원천적으로) 잘못 짚고 있다고 이해시키려 꺼내는 질문일 것이다.

 

교육에 대하여 아직도 새롭게 이야기할 게 남아 있는가? 지금 돌아가고 있는 교육 사태가 마땅치 않아 나름의 대안을 내놓으려 한다면, 그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이제까지 것 이상이 될 만한가? 교육이 무엇인지 탁월하게 가르쳐 온 이홍우 선생께서, 30여 년 전에, 「교육의 개념」이라는 저서로 교육의 의미를 정리해 놓았다.2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표적인” 답들을 골라 세밀히 고찰했다. 선생의 작업은, 물론, 교육을 제대로 한다는 게 어떤 뜻이어야 하는지 일러주려는 취지를 담고 있었다. 이제 다시 ‘교육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이홍우 선생께서 정리한 내용을 넘어설 다른 답이 있겠는가?

 

이야기를 풀어놓고 보면 이미 정리된 개념들의 ‘손바닥’ 안에 들어 있었다고 확인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일반적인 수준에서 결국 그렇게 읽히더라도, 세부 내용에서는 사뭇 다르고, 그래서 그것이 교육 실제를 이해하는 데 주는 시사도 크게 다를 수 있을,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은 없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교육이 ‘문화 전승’과 관련된다는 개념적 외양은 교육을 새롭게 살피려는 시각이나 접근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일관되게 재확인될 것이다. 그러나 전승되는 문화가 어떤 것이며 전승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화 전승의 행동이(말하자면, 교육이) 왜 유독 인간에게 일어나게 됐는지 등등을 밝히는 수준으로 진입하면, 이야기들의 표면적 동질성은 바로 사라질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렇게 깊고 세밀한 수준에서의 천착은, 교육은 무엇인가 묻는 시도가 ‘강령적인(programmatic) 정의’만을 모색하는 작업이 아니라는3, 그 질문은 교육 현상 자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다시 물어야 할 것이라는 점도 확인하게 될지 모른다.

 

 

교육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야기해 낼 수 없었던 교육학

 

교육이 무엇인지에 답하는 이야기를 모두 섭렵해 확인한 바는 아니지만, 이제까지 교육 이야기들은 모종의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그것들은 대체로 규범적이었다. 주로 ‘교육학’이란 학문적 분업 경계 안에서 이루어져 왔으며, 주로 교육 현실에 대한 비판을 밑에 깔고 있었다는 점에서, 교육이 발전적으로 마땅히 갖추어야 할 요건들을 제시하는 데 치중할 마련이었다. 이런 맥락은 이야기 자체에 모종의 특징과 한계를 가져왔을 것이다.

 

교육에 대하여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은 적어도 두 측면에서 비친다. 우선, 이제까지 이야기들이 이른바 교육학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져 왔다면, 그 ‘교육학’이라는 바탕 또는 맥락이 견고하지 못할 때 이야기들 또한 함께 흔들릴 터이다. 그런데 교육학의 입지가 허약하다는 점은 장상호 선생께서 이미 마땅하게 지적했다.4 학교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현상들(‘학교태’)과 ‘교육’을 구분하지 못하고, 이제까지 교육학은 학문으로서 기본적인 체계도 세우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선생의 이런 지적과 그것에 이은 새로운(‘제2기’) 교육학의 제안에 대해서는 물론 더 검토해 보아야 하겠지만, 기존 교육학이 토대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만은 수긍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한국에서 운위되는 교육학을 두고 말하면, 그것은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의 탓으로 생겨난 것이다.5 이 때문에 교육학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학교(대학) 제도를 염두에 두기 마련이었고, 이 ‘근대 제도’를 넘어서는, 심대한 인문 사회 현상의 하나로 교육을 다루지 못했다. 역사를 두고 볼 때, 근대 학교 제도가 생겨난 지 200여 년에 불과하다면, 교육학에서 교육 이야기들도 불과 200여 년이란 시간 테두리에 갇힌다.

 

제도의 역사에 갇힌 이야기만으로는 결코 소화될 수 없을 만큼, 교육은 연원이 훨씬 더 깊고 복합적인 인간사(人間事)의 한 측면을 이룬다. 교육학에서 흔히 이루어져 온 이야기들은 이 점을 담지 못했다.6 차차 이야기해 가겠지만(직관적으로도 이해되리라 믿건대),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는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진화 경로를 걷게 되는 연유와 밀접히 관련된다. 이제까지 교육학은 이런 이야기의 여지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렇게 간과되었던 ‘여지’는, 다른 학문 분야의 진전을 따라서, 비교적 최근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교육은 무엇인가?’ 새롭게 물을 만하다. 새로운 시도에서는, 이제까지처럼 교육을 규범적으로만 이야기하지 않고, 인류 역사의 사실로 이야기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사실적인 이야기가 규범적인 처방으로 이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교육학 밖에서 진척된 새로운 이야기

 

교육학 밖에서는, 특히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학자들이 교육에 관련된 새로운 문제와 명제들을 일궈 왔다. 그들이 교육(education)이란 용어를 표면에서 좀체 사용하지 않았지만7, 그들이 탐구해 온 건 분명하게 교육 현상이었다.

 

오랫동안 ‘학습’(learning)과 ‘발달’(development)의 문제를 건드려 온 심리학에서는 사람이 어떤 과정으로 사람다워 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은 다른 동물과 얼마나 다른지 논구해 왔으며, 생물학(동물학)이나 신경과학 등의 분야에서도 배우고 가르치는 행동이 진화상 어떻게 발원하는지 찾는 데서부터 그런 행동의 양상을 뇌에서 촬영해 내기까지, 큰 진전을 보여 왔다. 전통 깊은 인류학이나 고고학 분야에서도 배우고 가르치는 현상에 대해 새롭게 관심을 키워왔다. 참여관찰 기록이나 유물들을 새롭게 뒤지고 살피며, 언제부터 어떤 문화(사회) 조건에서 배우거나 가르치는 일들이 일어났을지 추론해 왔다. 종교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정치학 등도 믿음이나 이념 그리고 사회적 위계(규범)와 질서 등에 대해 더 깊이 파헤치면서, 교육을 더욱 깊고 다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시각들을 지원해 왔다. 심지어 최근 주목받는 인공지능 기술도, 교수 학습에 대한 기존 연구의 토대 위에서 발전해 왔으면서, 이제는 역으로 사람이 배우고 가르치는 행동을 추론하는 데 이용되기에 이르고 있다.

 

이와 같은 변화들에 대하여 그동안 교육학은 대체로 문 닫아 왔다. 교육학이 제도적 역사적인 원인으로 비틀거려 온 탓인지, 아니면 교육 자체가 교육학이라는 하나의 분과 학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현상인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어떤 원인이 있는지 지금 단언하기는 어렵다. 하나 분명해 보이는 것은,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새롭게 제기할 이유가 있으리라는 점이다. 그렇게 묻고, 다양한 분야에서 축적해 온 연구 결과들을 모아 새로운 대답을 시도할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런 시도에서는 그동안 스스로 옭아 묶는 교육학의 습성을 깨게 되면서, 이제까지의 개념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바탕으로 교육이란 현상의 영역에 대해 점차 온전한 지도를 그려갈 수 있을지 모른다.

 

 

교육은 어마어마한 인간사일 것

 

가르치고 배우는 행동은 인류를 독보적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지구의 땅을 지배하는 정도에서 본다면 그렇다. 인류의 지배력은 문화 축적의 바탕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바탕은 곧 가르치고 배운 소산이다. 사람의 아기들은 순전히 혼자 힘으로 커가지 않는다. 태어나면서 그들은 유구한 문화 전통의 ‘어깨’ 위에 올라타게 된다.8 다른 동물이라면 유전자 프로그램대로 홀로 헤쳐 나가야 하는 일생을 살아가야 하지만, 사람의 자손은 절묘한 규범과 제도 그리고 지식과 기술 등이 받쳐주는(물론, 개인의 창의도 허용하는)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 엄청난 자원들은 개체로서 한 세대에 창안해 갖추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들이다.

 

유전자만 보면 침팬지는 우리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런 침팬지의 아기와 사람의 아기를 오늘의 상황에서 그려보자. 침팬지라면 수백만 년 전 선조들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아가게 될 터이다. 오늘날 휴대전화를 가지고 노는 사람 아기들을 대조시켜 보자. 엄마들은 그렇게 노는 아기들을 보며 감탄한다.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나보다도 더 잘 알아, 천재인가 봐!” 사실 사람의 아기는 문화라는 ‘천재(天財)’를 물려받고, 그걸 더 불려 후대에 넘겨주게 된다. 교육은 이런 인간사와 관련된다. 이것은 침팬지와 구분되는, 2% 미만의 유전자 차이가 결정해 놓은 사람의 조건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과정에 일어나게 되는, ‘사람이 되어 가는’ 현상이다.

 

교육의 이야기는, 제대로 한다면, 이 어마어마한 사실의 이야기여야 할 것이다. 글 쓰는 이의 작업이 어마어마하리라는 뜻은 물론 아니다. 교육이란 현상이 어마어마하리라는 뜻이며, 많은 사람과 학문의 분야가 달려들어 궁구해야 하리라는 뜻이다.

 

결국, 교육은 문화를 전승하는 과업이라는, 늘 해 오던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 눈부신 인류 문명이 구축되는 데 교육이라는 인간 활동 또는 체제가 큰 몫을 했으며, 이 점을 새삼 힘주어 말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 숭고한 신화를 새롭다고 떠벌릴 사람은 없다. 새롭게 보게 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교육 → 문화 전승 → 고도의 문명’이라는 굵은 신화적 얼개가 아니라, 그런 얼개 이면에 숨은 원인과 과정(dynamics)의 ‘디테일’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행동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왜 사람에게 그것이 나타나는가? 그런 행동은, 또한, 처음부터 문화 체계나 전승의 도구를(언어 등을) 겸비하지도 않았다. 문화는 어떻게 생겨나 체계화되고 축적되며, 또 어떻게 후대로 전수되기까지 하는가? 생존하기에 급급했던 ‘원시’ 상황에서 한가하게 남을 가르칠 ‘본능적인’ 이유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근대로 오면서 교육은 또 왜 치열한 지위 경쟁과 얽히는가? 교육은 어느덧 인간 행동이 아니라 인간이 적응해야 할 ‘환경’으로 둔갑하기에 이르렀고, 인간이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만들기까지에 이르렀다. 무슨 까닭인가?

 

‘교육은 무엇인가?’라고 새삼스레 묻고 답을 찾아가는 길은, 이와 같이 열거하려면 한이 없는 의문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길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짓게 되는 새로운 이야기들은, 근대 제도만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오늘날의 담론과 극적으로 다르게, 비로소 교육 본연의 길로 안내해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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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교육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되는 경우는 물론 다양할 것이다. 이를테면, 국어사전을 편찬하면서 그 뜻을 새롭게 정의하려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학문(과학)의 맥락에서 명료한 논의를 위해 전제할 의미를 서로 약속해 두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런 특정한 맥락이 아닌 일반적인 교육 논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있으며, 이 경우라 하더라도, 이 모두(冒頭)의 진술은 검증 가능한 것인 양 내놓고 있지 않다. 이홍우 선생이 추론했듯이(주2 참조), 교육의 개념을 다루는 논의가 이제까지 대체로 그런 경향을 띠어왔다고 이르는 것일 뿐이다.
  2. 이홍우(1991), 교육의 개념. 서울: 문음사. 이 책은 ‘교육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결국 ‘강령적(programmatic) 정의’를 요청하는(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묻는) 것이라 추론하며, 정범모, R.S. Peters, E. Durkheim 등 세 학자의 이론을 주석하고 있다. J. Dewey의 주장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지만, 그의 개념은, 앞의 세 학자 경우와 달리, 교육이 무엇인지에 대답하는 독립적인 반열에 들지 못한다고 평론한다.
  3. 앞의 두 개의 주 참조.
  4. 장상호 선생의, ‘학문과 교육’이라는 제목을 가진, 일련의 5권 저서(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가 기존 교육학의 정체를 문제 삼으며 새로운 교육학을 제안하고 있다. 교육학의 한계를 지적하는 데 집중한 저서는 ‘중-①’의 순번인 것으로, ‘교육이란 무엇인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5. 짐작할 수 있듯이, 학문은 ‘연구 문제’에서 발단한다. 교원 양성 제도에 연루된 ‘교육학’은 그렇게 생겨나지 않았다. 학교 교육이 팽창하고 다수의 교원을 훈련하여 배출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서, 그 훈련(양성) 과정에서 사용할 이론과 기술의 패키지를 꾸려야 했기에, 실용적인(제도적인) 이유로 생겨났다. 한국의 경우, 식민지기 경성제국대학에서부터 교육학은 학부 과정의 독립 전공으로 설치되었으며, 그 독립적 지위는 지금까지도 대학들에서 유지되고 있다. 많은 나라(대학)에서 ‘교육학’은 독립된 학문 분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양한 시각(분야)에서 연구할 만한 현상(주제) 정도로 취급된다. 대학의 학부 과정에 교육학과를 두지 않거나, ‘교육철학’이니 ‘교육심리학’이니 하는 이름보다는 ‘교육에 대한 철학적 또는 심리학적 연구’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데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적어도 제도와 관습에서, 교육학을 독립 학문 분야로 취급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최근 부상한 하위 분야(예컨대, ‘교육공학’이나 ‘평생교육학’)까지도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취급한다.
  6. 근대 이전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교육사 이야기는 많고 흔히 장구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대체로 오늘날의 학교 교육과 관련해서 의미를 지니도록 이루어진다. 여전히 근대 학교 제도의 맥락 안에 갇혀 있다.
  7. 영어의 ‘educate’라는 단어만 두고 보면, 교육이라는 말은 유럽 중세에 비로소 생겨났다. 학교 교육과 관련된 ‘class’나 ‘curriculum’이라는 용어들도 마찬가지이다(Hamilton, D. 1989. Towards a Theory of Schooling. Routledge. 참조). 근대 학교 제도의 아이디어가 다분히 유럽 중세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교육 이야기가 제한될 수밖에 없는 점은 역사적 귀결일지 모른다.
  8. ‘거인의 어깨’가 아니다. 좁게는 생활 공동체의 어깨이거나 넓게는 인류 공동체의 어깨이다.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강태중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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