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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현대사회 속의 영유아교육, 그 본질을 향한 성찰

#1231 이연선, 부산대학교 교수 2025.03.12
유아교육 이론과 실제가 더욱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다양한 관점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칼럼 집필을 마무리하며, 독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근대 사회 속 유아교육 읽기

 

그간 칼럼을 쓰며 ‘읽기’의 중요성을 꾸준히 강조해왔다.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단순히 사상이 제안하는 이론과 개념을 정확히 이해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함이 아니다. 읽기는 근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부모, 교사, 아이들로 하여금 유아교육의 문제를 통찰케 하고, 나와 주변을 변화시키는 상상을 서서히 내 몸에 침투시키는 자극제가 되기 때문이다. 근대적 사고를 벗어나는 움직임에 조응하지 않으면 유아교육의 본질적인 문제에 다가가지 못한 채, 겉보기에는 변화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기존의 틀을 반복하는데 그칠 수 있다. 창조란 단지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는 과정이며, 이는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이 시간은 시작과 끝이 명확한 분절적 시간이 아니라, 지속으로서의 시간으로, 현재와 이어지는 과거의 연장으로 존재한다. 요약하자면, ‘근대적 사고를 벗어나 유아교육을 새롭게 성찰하는 과정’으로 읽기를 제안한다. 지난번 ‘팀 잉골드의 어린이 세계와 고유의 탐험 감각’에 이어, 이번 칼럼에서도 인류학자 팀 잉골드의 이론과 지속의 시간 속에서 공명하며 글을 쓴다.

 

영유아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교육에 대해 알아가고 논할 때, 우리는 종종 교육학 이론이나 특정 개념을 익히는 데 집중하거나, 그것을 실제 경험 속에서 검토하거나 성찰 없이 당연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축적된 이론적 지식과 관념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 관념과 지식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돌아봐야 한다. 우리가 가까이 하고 있는 이론과 개념들은 유아교육의 본질적 질문을 깊이 성찰하도록 돕고 있는가, 아니면 기존의 틀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고 있는가?

 

오늘날 지식기반 경제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상품성 높은 지식을 더 쉽게, 더 빠르게 습득하고 소비하고 활용하려는 마인드를 온몸에 장착하고 있다. 정보는 빠르게 유통되며, 당장 쓸모 있는 지식과 그렇지 않은 느린 지식이 구분되고, 교육 또한 이러한 흐름 속에서 기능적으로 변모해 왔다. 그러나 이렇게 습득된 지식은 빨리 소비되어 버리거나 실제 삶에서 분리될 때 공허함을 남긴다. 유아교육에서 이러한 지식의 소비 방식이 더욱 두드러지며, 어린이와 그들의 삶에 대한 인식론적 틀을 더욱 공고히 한다. 예컨대, 영유아기 아이들을 신체, 인지, 정서, 사회성 등으로 나누어 발달을 수치화하고 평가하고 구분하는 시스템은 날로 정교해지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어린이는 스스로 배우는 존재이기 전에 ‘측정되고 분류되는’ 존재로 사회 속에 자리 잡게 된다. 부모는 내 아이가 분류체계에서 더 높은 곳에 위치할 수 있도록 더욱 효율적인 방법을 찾으며 바쁘게 움직인다. 영유아 교사 역시 동시대의 사회적 패러다임이 부여하는 과업에서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며, 내가 만나는 어린이들에 주의를 기울일 여유 없이 하루를 분주하게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어린이는 잘 보이지 않게 되고, 빨리 기록되고 쉽게 해석된다. 그러나 어린이를 성급하게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놀이 속 배움에 당장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하려는 것은 단지 서두름에 불과하다. 발달 이론에 근거한 해석이든, 교육과정에 근거한 해석이든, 그 속에서 의미를 고정시켜 기록하고 평가하려는 시도를 넘어서, 어린이가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정성과 그 시간이 더 중요하다.

 

 

어린이로부터 배우기

 

잉골드는 지식이 삶의 과정 속으로 다시 스며들 때 비로소 ‘앎’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성인과 달리 이 과정을 자연스럽게 실천하고 있다. 어린이는 단순히 듣거나 읽거나 경험하며 배우게 된 지식을 그저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생성의 존재로, 대화 속에서, 사물과 자연 및 이야기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열고 다가가며 세계에 주의를 기울인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과 삶을 대하는 살아있는 감각과 태도를 어린이로부터 배워야 한다.

 

<에피소드>

 

오전에 내리던 비가 그치자 4세반 아이들과 숲 산책을 나갔다. 아이들은 민달팽이를 발견하고 소리를 지르며 반응했다. 한참을 앉아서 민달팽이가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아이들, 만져보고 점액질에 놀라 옷에 닦는 아이들, 여러 마리를 발견한 기쁨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표현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엿보았다.

 

“달팽이인데 집이 없어.”
“비가 그쳐서 나왔을까?”
“집을 놔두고 나왔나 봐.”

 

아이들은 민달팽이를 보며 분석하거나 외부 지식으로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민달팽이의 움직임에 몰입하고, 그 순간을 온전히 경험한다. 선생님이 장소 이동을 권유하기 전까지 아이들은 꼼짝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무르며 장소의 일부가 된다. 이 시간은 단순히 민달팽이를 관찰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와 연결되어 일부로서 그 세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 순간이었으리라. 아이들은 불러도 들리지 않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민달팽이에 관한(about) 과학 지식을 읊고 관찰로부터 이끌어내려는 교사(나)와 달리, 아이들은 민달팽이를 ‘데이터’로 취급하지 않았으며, 분석하거나 과학적 지식으로만 파편화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민달팽이를 그려보았다. 반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서 별이 지각과 상상에 의해 밤하늘에 움직이는 듯 보이는 것처럼, 아이들의 그림 속 민달팽이는 경험한 그대로의 생동감을 담고 있었다. 민달팽이가 움직이는 모습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그림으로 표현했으며, 아이들은 그 경험을 하나의 순간으로 포착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은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그림 속에서 민달팽이들은 단순히 묘사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경험한 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민달팽이들이 꿈틀거리고 있지 않는가?

 

들뢰즈는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정보 입력이나 기술 습득이 아니라 ‘무언가에 영향을 받으며 변화하는 차이 생성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 또한 ‘세계-내-존재’(being-in-the-world)라는 개념을 통해, 존재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다. 팀 잉골드는 이러한 사유를 이어받아 지식을 ‘하기’보다 더 깊은 차원의 ‘겪기’로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지식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응답하고 겪으며 배운다고 말한다. 이는 유아의 배움에서도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위의 에피소드에서 읽을 수 있듯이, 아이들은 상상과 지각을 넘나들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그곳에 있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상상과 지각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두 세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경험한다. 아이들의 그림 작품 하나하나가 그들이 경험한 시간성과 감각을 반영하며, 지각과 상상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어린이는 단순한 정보의 수용자가 아니다. 아이들의 경험은 그 자체로 하나의 깊은 학습의 과정이다. 사물, 자연, 이야기 등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를 열고 다가가며,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고 기다리는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명과 삶을 대하는 태도를 어린이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들의 세계에서 ‘배운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세계와 함께 응답하며 함께 살아가는 과정임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근대 사회의 고정된 경로와 아이들의 삶

 

• 목표 중심 교육과 정태적 존재관

 

한국 사회에서 많은 부모들은 특정 대학과 학과, 특정 직업과 같이 고정된 목표를 설정하고 그 길로 아이들을 밀어 넣는다. 이는 인간의 삶을 고정된 실체로 바라보는 정태적 존재관(static being)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팀 잉골드는 근대 사회가 지닌 ‘고정된 경로(fixed path)’의 문제를 지적하며, 삶을 정해진 목표로 향하는 직선적 경로로 보는 대신, 끊임없이 생성하고 흐르는 유기적 과정으로 바라본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선행학습’과 ‘목표 지향적 교육’은 아이를 살아있는 흐름으로 보지 않고, 완성된 형태에 도달하게끔 강제하는 ‘선형적 사고’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아이들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가능성을 차단하고, 자기 존재를 미완의 상태로 간주하게 하며 특정한 완성형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준다.

 

• 고정된 길이 아닌, 흐름 속에서 존재해 가는 중

 

인간을 ‘존재(being)’가 아니라 ‘존재해 가는 중(becoming)’이라고 보는 것이 왜 중요한가? 아이들은 단순히 어떤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경험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과정(becoming)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러나 부모가 미리 설정한 목표, 선행학습과 강제된 학습량, 경쟁적 교육환경 속에서의 목표 지향적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자기 생성을 충분히 겪어보지 못한 채 길들여진다. 이 길들임은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감각을 서서히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으며, 유아기와 학령기 전체를 이러한 환경에 조급하게 밀어넣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이러한 교육 방식은 부모 자신의 불안과 통제 욕구가 투영된 결과일 수 있다. 부모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성공’이라는 고정된 틀을 내면화하고, 이를 자녀에게 강요한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업과 같은 정해진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단 하나의 길만을 선택하며, 아이들의 삶을 계획하고 조정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 정작 부모와 아이가 함께 경험하고 만들어가는 관계적 삶의 시간은 사라질 위험에 처한다. 요즘은 초등학생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바쁘다는 말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부모는 정작 중요한 아이와의 경험을 놓친 채, 내일의 일정과 학습 계획을 점검하는 것으로 불안을 해소하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일부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다양한 놀이 활동을 제공하며 체험학습을 생활 속 경험으로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조차도 때로는 그 경험을 미래경쟁력이라는 결과로 환원하는 경우가 많다. 잉골드가 지적한 바와 같이, 거대 사회망이 통제하고 있는 경쟁과 효율성 기반의 패러다임이 우리 삶 전반에서 강력한 헤게모니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에 내포된 겪기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사회생활 속에서 이러한 패러다임을 끊임없이 경험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패러다임 속에서는 경험이 그 자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아이의 창의력 향상이나 특기 개발 등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결국, 이는 근대적 사고의 틀에 갇히는 것이며, 경험이 서서히 도구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은 목표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여야 한다.

 

아이들의 배움과 삶을 선형적인 목표로 보지 않고, 흐름과 생성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유아 교육의 역할은 충분하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이것이 가장 어려운 과업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아이들의 삶을 정해진 틀 안에 가두기보다는, 그들이 경험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제공하고, 그 경험 속에서 함께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으로 역할을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 함께 겪어가는 동반자로서의 교사와 부모

 

어린이뿐 아니라, 부모와 교사, 우리는 모두 미리 정해진 목표를 향해 가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가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영유아 교육에서 부모와 교사의 역할은 아이들을 목표에 맞춰 길들이고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의 시선에서 함께 세계를 탐구하며 생성의 흐름에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는 놀이와 시간을 효율적으로 설계하고 관리하며, 놀이를 학습과 연결하는 ‘효율적인 교사나 부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관찰하고, 잊고 있던 감각을 회복하며, 아이들의 생기 있는 모습을 귀하게 여기는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잉골드는 인간의 삶을 ‘하기(doing)’와 ‘겪기(undergoing)’로 구분한다. ‘하기’란 문자 그대로 행함으로 개체의 아이디어에서 구상되어 만들어진 완성된 결과물과 창조물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반면, ‘겪기’는 목표가 미리 설정되지 않은 채 세계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흐르는 과정이다. 이는 단순히 수동적인 경험이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능동적으로 응답하고 참여하는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 모든 ‘하기’는 ‘겪기’ 속에서 이루어지며, 단절된 활동이나 순간이 아니라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 이어진다. 따라서 영유아 교육은 단지 ‘하기(doing)’의 과정이 아니라, 아이들이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겪기(undergoing)’의 흐름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유아교육, 경계를 넘어 사유하다

 

지난 5년 동안,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에서 유아교육 관련 칼럼을 쓰며 철학, 인류학, 사회학 등 다양한 학문을 기웃거렸다. 실증주의적 패러다임이 지배적인 교육학의 한계를 고민하면서, 보다 넓은 학문적 토대 위에서 유아교육을 새롭게 조망하며 현대 학문의 개념들을 유아교육 현장에 연결시키고자 했다. 유아교육은 단순한 실천의 영역이 아니라, 철학적 성찰과 학제 간 대화를 통해 확장될 수 있는 살아 있는 학문이다. 나는 유아교육 이론과 실제가 더욱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로 다양한 관점과 관계 맺기를 시도해야 한다고 믿는다. 특정 이론이 절대적인 진리로 기능하며 어린이의 세계를 하나의 방식으로만 이해하도록 강요할 때, 우리는 어린이의 삶과 배움을 축소시키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어린이에 대한 이해는 오랫동안 심리학, 특히 발달심리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어린이의 존재를 단순히 성장과 발달의 과정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그들의 세계를 충분히 존중하는 방식이 아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인류학, 철학, 사회학의 관점에서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칼럼을 통해 어린이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고, 성인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기 위한 다양한 이론적 도구를 탐색해 왔다. 예를 들어, 팀 잉골드는 어린이의 탐험 감각과 세계와의 관계 맺음을 강조하며,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어린이의 세계를 사유하도록 한다. 또한, 카린 뮤리스는 어린이와 지식의 관계를 재고하며, 어린이를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세계와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는 존재로 본다. 나는 이러한 이론들이 한국 유아교육에 중요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교사의 역할 역시 단순한 지식 전달자가 아니라 사유하고 실천하는 존재로 다시 정의될 필요가 있다. 나는 교사가 철학을 ‘다르게 알고 다르게 하기’를 통해 배움의 주체로 자리 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는 단순히 요약된 지식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탐구하는 과정이다. 빠르게 효율성을 추구하는 교육 풍토임에도 불구하고, 교사의 배움은 서두르지 않고 깊이 사유하며, 주변의 세계와 조응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바라드의 ‘내부-작용(intra-action)’ 개념을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 교사가 그 개념을 통해 자신의 교육적 실천을 실제로 재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아교육, 살아있는 사유의 장

 

유아교육은 단순한 기술이나 방법론이 아니라, 어린이와 배움에 대해 깊이 사유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살아있는 학문이다. 나는 교육이 실증주의적 지식 소비의 틀을 넘어, 교사가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인식하고 탐구하는 과정이 될 때, 철학적 사유가 필수적이라고 믿는다. 유아교육이 현대철학, 인문학, 사회과학과 연결될 때, 더욱 깊이 있고 풍부한 논의의 장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칼럼을 통해 나는 유아교육을 철학적 시선에서 성찰하고 독자와 함께 탐구하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여정이 가능했던 것은, 교육을 단순히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현 정책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고 실천하는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이라는 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장에서 유아교육의 실제 지형을 확장하고 대화가 계속 이어지도록 끊임없이 움직이며 노력하는 선생님들에게도 깊은 경의를 표한다.

 

이제 칼럼의 집필을 마무리하며, 앞으로 유아교육이 다양한 학문적 연대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교사와 어린이가 함께 사유하며 성장할 수 있는 교육으로 확장되기를 희망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교육을 바꾸어 가는 사람들과 함께, 느리지만 깊고 단단한 변화의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며,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 글을 함께 읽고 사유해 준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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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교수 이연선

컬럼비아 대학에서 국제교육을 전공했으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에서 연구원으로도 근무했다. 현재는 부산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이름과 뜻을 같이하며 교육을 바꾸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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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1. 김지영 수정 삭제

    그 동안 교수님의 칼럼을 읽으며 유아교육에 대해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영유아를 바라보는 관점과 교사로써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들도 칼럼들을 읽으며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하고 깊이있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지막 칼럼이신 것 같아 너무나 아쉽지만 교수님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부족하지만 천천히 탐구하고 능동적인 영유아 교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2. juing 수정 삭제

    오랜만에 제 의식과 사고의 살아있음을 겪기위해 교바사에 들어왔는데, 마지막 칼럼인 듯하여 저도 너무 아쉽습니다.!!
    여기 남겨주신 글들과 만났던 순간들이 살아있는 만큼 또 어디선가 만날 수 있길 바래요!!
    감사합니다 교수님.

  3. 김영연 수정 삭제

    이교수의 글 감사하게도 그동안 잘 보고 있었어요. 고맙고 반갑고 조만간 만나기를 청합니다.
    김영연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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