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톺아보기⑩ – ‘사교육 정책’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 사교육 이야기 연재를 매듭지으며 사교육 정책이 가야 할 길을 짚는다. 사교육 정책이 결국 학교에 사교육을 욱여넣는 데까지 이른 점을 비판하며, 학교에 사교육 책임을 전가할 엄두도 내지 말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교육 정책이 일탈해 온 전철은 곧이곧대로 거슬러 지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
교육열은 학교를 망구기 마련일까?
2009년 11월 23일, 미국 백악관에서는 ‘혁신을 위한 교육’(Educate to Innovate) 캠페인을 시작하는 포럼이 열렸다. 이 자리 연설에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Obama는 한국 교육을 선망했다. 미국 교육이 한국을 닮아가길 희망했다.
당시로써 얼마 전(11월 18~19일)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명박 대통령과 점심 먹으며 나눈 얘기를 소개했는데, 교육정책에서 어려운 문제가 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학부모들의 요구가 너무 지나쳐서 어렵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도 자식들만은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조른다. 학부모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아우성쳐서 하는 수없이 수천 명의 외국인 교사를 들여와야 하기도 했다.” 한국 대통령의 이런 대답을 오바마 대통령은 배부른 투정으로 여겼던 듯하다. 그는 미국 부모들도 한국 부모들처럼 교육에 열성이길 바랐다.
한국인이라면 Obama 대통령이 순진했다고 여길 것이다. 한국 교육 현실의 내막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대통령이 한국 교육을 부러워했다는 보도가 있고 한 달여 뒤, 한 영자신문에 Obama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이 실렸다. 전라남도의 한 중학교 영어 교사가 쓴 것으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이 시작했다.
Obama 대통령님, 대통령님께서는 종종 한국 교육을 칭송해 주십니다.
만약 미국 어린이들이 사교육 지옥에 떨어지게 된대도 그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학교 파한 뒤에 피아노, 태권도, 영어, 수학, 논술 학원 등 너덧 개 학원에 다니며 시간 곡예를 해야 한대도 말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스페인어 단어나 문장의 문법 구조를 달달 외도록 강요당할 뿐 아니라, 그 언어로 실지로 말하는 법은 익히지 못하면서, 오직 점수를 얻기 위해 정답 고르는 훈련만 받게 된대도 그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고등학생들이 높은 점수를 얻고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거의 매일 아침 7시부터 한밤중까지 학교에 있어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초중등 학교에 스포츠나 창의 활동을 위한 시간이 전혀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주지하다시피 편지는 우리 학교 교육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전혀 과장이 아니다. 미국 교육이 한국 교육처럼 된대도 그런 공언을 하겠냐고 Obama 대통령에게 묻고 있다. 편지를 쓴 선생님의 충정을 우리는 이해하고도 남는다. 우리의 교육 문제에 대한 지적도 거듭 아프게 새겨야 할 점이다.
한편, 위 편지의 이면에 있는, 우리가 무심코 받아들이는 생각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터이다. ‘교육열이 높으면 탈’이라는 우리의 통념 말이다. 편지가 묘사하듯 교육이 무너진 것은 과연 교육열 탓인가?
문제는 교육열이 아니라 사교육 정책
부모들의 교육열이 높다고 해서 교육이 으레 그렇게 돌아가란 법은 없다. 말하자면, ‘교육열 → 과도한 사교육과 점수만 노리는 교육’이라는 인과관계가 절대적일 리 없다. 우리 교육이 그렇게 흐르는 데는 필경 어떤 인위적(정책적) 조치가(또는 그런 것이 없었던 게) 작용했을 것이다.
Obama 대통령이 방한하기 약 6개월 전, 당시 우리 정부(교육과학기술부)는 ‘사교육 없는 학교’라는 이름의 사교육 정책을 발진시켰다. “사교육 수요 대부분을 학교 교육으로 충족시켜 주는 학교”를 지정해서 지원하겠다는 정책이었다. 말하자면, 학교가 학원이 되도록 정부가 예산을 동원하여 지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위 편지에 적힌 이야기, “거의 매일 아침 7시부터 한밤중까지 학교에 있어야” 하는 일은 정부가 바라는 정책 결과였다.
‘사교육 없는 학교’ 정책을 발표하기 전, 정부는 바람잡는 홍보를 시작했다. 대통령이 ‘모범적인’ 학교를 방문하여 격려하는 행사가 있었다. 모범 사례로 보도되었던, 대통령의 방문을 받았던, 서울의 한 학교 교장은 “사교육 없는 학교로 만들 테니 아이가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특화반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맡겨 달라”고 학부모들을 설득했다고 한다. 학부모 동의 아래, 학생들은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교사들로부터 사교육 서비스를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교사들도 교장의 생각에 공감해서 사교육 시장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서비스들을 학생에게 제공하려고 밤늦게까지 애썼다고 했다. 그 덕에 재학생들이 학원에 다니지 않게 되었으니 ‘사교육 없는 학교’라는 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다른 학교들도 그런 학교를 닮아가야 한다고 방문 자리에서 주문했다. 정부도 그렇고 언론에서도, 그런 학교가 ‘공교육 정상화’의 사례라고 추켜세웠다. 기이한 것은, ‘사교육 없는 학교’이자 공교육을 정상화하는 데 모범이 된다는 그 학교가 사교육 서비스로 채워진 학교라는 점이다.
‘사교육’ 정책이 ‘교육’ 정책인 우리나라
이제까지 ‘사교육 이야기’ 연재에서 짚어 왔듯이, 우리나라 사교육 정책은 ‘사교육 없는 학교’와 같은 대책을 꾸준히 변주해 왔고, 이런 기조가 변할 기미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다. 학교가(EBS 같은 공공기관의 지원을 받아 가면서) 사교육 수요를 감당해 낼 수 있게 만들기 위한 정책은 이제 사교육 정책이 아닌 ‘교육’ 정책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 사교육 정책은 더 이상 ‘사교육’ 정책이 아니다. ‘교육’ 정책 그 자체이다.
적어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라면 사교육과 교육(공교육)은 달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 구분은 사라졌다. 특이한 일이다. 사교육이란 용어도 그대로 있고, 교육이란 용어도 그대로 있다. 그러나 그런 용어로 가리켜지는 행위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대체로 얘기해서 그것은 ‘시험 점수를 높이 얻도록 학생들을 돕는 행위’이다. 다만, 그것이 학교에서 이루어지면 ‘교육’이고 학원이나 집에서 이루어지면 ‘사교육’이다.
우리 교육정책은 말하자면 사교육이 학원이나 집이 아닌 학교에서 일어나도록 바꾸는 데 온갖 자원과 노력을 쏟아붓고 있다. Obama 대통령에게 푸념했던 대로, 부모들의 ‘지나친 요구’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고 여겼기에 그렇게 애썼고, 그 이후로도, 대통령이나 정책 결정자들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사교육 없는 학교 정책은 ‘사교육 반값’ 대선 캠페인 구호 아래 나온 것이었다. 그런 캠페인은 ‘교육 수요자’의 요구에 충실하게 응답하려는 발상이었고, 꾸준히 계승되고 있다. 결국 정책들은 학교를 학관으로 뒤집는 데 크게 성공했다. 이제 학교에서의 수업과 그 외 많은 ‘교육 활동’ 그리고 학생 지원 서비스는 사교육 시장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사교육에 밀려난 교육은 어디에?
학교에 있어야 할 마련인, 사교육에 밀려난, ‘교육’은 어디로 갔는가? 사라진 교육을 찾아보려면 우선, 사교육과 다른 교육이란 게 어떤 것인지부터 그려보아야 할 것이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한 줌의 이야기로 답할 수 있는 질문도 아니고, 길게 답하도록 허락받는대도 만족스럽게 답할 자신도 없다. 제도상의 면모를 가지고 가능한 한 그 차이를 드러내 보자.
제도를 가지고 이야기하더라도 학교 교육(공교육)과 사교육의 차이는 여러 측면에서 정리할 수 있을 테다. 교육의 핵심 요건이라 볼 수 있을 두 가지에 대해서만 짚어 보기로 한다. 교육자(교사)와 교육 내용(교육과정)에 대해서이다. 부족한 대로, 이 글의 뜻은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먼저, 교육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자. 학교 교육은 교사가 이끈다. 교사는 학생의 사적인 필요(want)에 부응하기 위해 고용된 ‘기술자’가 아니다. 교사는 교육과정이 함축한 가치와 지식을 충실하게 전수하는 사명을 으뜸으로 지닌다. 이 사명은 철저하게 공적이다. 학생에게 제대로 전수하기 위해 학생의 요건(need)을 고려해야 하지만, 학생이나 학부모가 요구하는 대로 서비스하지는 않는다. 교사는, ‘교원 양성 과정’과 ‘임용 과정’을 거치면서, 그런 사명 의식을 견지하도록 요청받았고 또 그런 사명을 이행할 수 있도록 훈련과 검증도 받았다.
사교육의 강사에게는 교사에게 전제되는 사명이나 역량이 필수 요건이 아니다. 사교육 시장의 강사는 철저하게 소비자(‘교육 수요자’)의 필요에 종속한다. 그들의 기대(이익)를 채워줄 수 있으면 강사의 일은 ‘성공’이다. 그는 오직 수요자가 원하는 서비스를 판다.1
교육 내용은 어떤가. 얼핏 보면, 그것은 학교 교육과 사교육에서 서로 다르지 않다. 사교육을 ‘그림자 교육’이라 일컫는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학교 교육에서 다루는 내용(교육과정)을 학관에서도 ‘그림자’처럼 따른다. 그러나 이때의 동질성은 과정(課程)의 이름(교과)과 문면상의 내용에 국한되는 것이다. 수업의 과정에서 구현되어야 할, 교과에 담긴 ‘정신’은 판이하다. 학교 교육에서 그 정신은 수업과 활동의 내부를 흘러야 하지만, 사교육에서는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도덕(윤리)과 교육과정을 예로 삼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보자. 도덕 교과가 학교 교육과정에 들어있는 것은, 이를테면, 학생들(사회 구성원) 모두 삶의 의미와 사회 규범을 사색하고 성찰하며 올바른 삶을 추구할 수 있게 이끌기 위해서일 터이다. 학교 교육에서는 이런 취지를 살리려고 애써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교육에서는 그런 취지를 안중에 둘 이유도 없고 두지도 않는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교육에서 교과 내용은 오직 시험의 소재가 되는 한에서 다뤄지게 된다. 학교 교육에서는 모든 교과의 비중들을 중시하며 총체적으로 ‘전인적인’ 교육 성취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할 마련이지만, 사교육에서는 이를테면 시험 범위와 출제될 확률을 계산에 넣어 전략적으로 짜깁기하며 오직 고득점 성취를 노리게 된다.2
사교육 정책이 학교에 사교육을 욱여넣는 동안 우리가 잃은 교육은, 말하자면, 위에서 교사와 교육과정에 대해 생각해 본 바와 같은 ‘본연’의 것들이다. “교육과정이 함축한 가치와 지식을 충실하게 전수”하려고 애쓰는, “학생들 모두 삶의 의미와 사회 규범을 사색하고 성찰하며 올바른 삶을 추구할 수 있게 이끌기 위해” 애쓰는, “모든 교과의 비중들을 중시하며 총체적으로 ‘전인적인’ 교육 성취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과업이다. 이것은 학교에서 이제 자리를 잃었다.
학교 교육의 본디 과업은 ‘교육 소비자’(국민)가 아무리 억척스럽게 요구하더라도 양보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를 지탱하기 위한 최소한(공동선)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학교 교육은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출세를 보장하거나 지원하기 위한 사업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 각자는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또 이기적이어도 무방하다. 그러나 사회(국가, 지구촌)는, 그렇게 다양하고 이해충돌하는 구성원들을 품고도, 구성원 모두 함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버틸 수 있어야 한다. 교육은 사회가 그런 공동체로 버티기 위해(진화하면서) 구축해 낸 제도일 것이다. 한국 정부는 그런 제도를 어이없게도 무심하게 걷어찼다.
‘부담 경감’에 모든 걸 걸어 온 사교육 정책, 공동선 망각
Obama 대통령이 우리나라 중학교 선생님의 공개서한을 읽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위에서 인용했던 편지 머리 부분을 읽으며, 혹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부모의 교육 열의를 키우는 것이 ‘어린이들이 사교육 지옥에 떨어지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라고 말이다. 우리에겐 이 ‘인과관계’가 자명해 보일지 모르지만, 논리적으로나 실증적으로나, 그 관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모의 교육열은 ‘지옥’을 만들 수도 있고 ‘천국’을 만들 수도 있을 터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맥락에서는 우리와 같은(우리가 Obama 대통령을 순진하다고 여길 때와 같은) 생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Obama 대통령이(또는 미국이) 우리보다 더 나은 교육적 상상력을 가졌을 것이란 뜻이 아니다. 교육열이란 에너지를 어떤 쪽으로 분출시킬 것인지, 생각과 정책은 다양할 수 있으리란 뜻이다. 우리처럼 온통 점수 얻는 전략을 찾는 데로 분출되도록 하고, 그래서 그 열기를 식히는 데 학교까지 동원하게 이르는 정책이 불가피하지 않다는 뜻이다.
우리의 사교육 정책은(또는, 교육열을 다루기 위한 정책은) 길을 잘못 든 것이다. 거두절미하듯 축약해 이야기한다면, 사교육 정책에서 ‘문제는 곧 돈’이라 늘 전제했다. 사교육비 지출이 지나친 것이 문제이고, 그 지출을 줄이는 데 정책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여겼다. 지금도 여전하다. 그렇기에 학교에도 사교육을 하도록 종용할 수 있었다. 공동선을 의식한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정책이었다.
이제까지 사교육 정책은 학교 교육의 본연을 꾸준히 뭉개어 왔다. 교사의 사명이나 권위 그리고 교육과정(敎育課程)의 가치 등이 특별할 게 없다고 여기며 정책을 펴 왔다. 학교 교육에 전제된 고전적이며 전통적인 요건들을 학생들의 시험 점수를 높이기 위한 전략적인(사교육적인) 기획에 종속시키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점수 높이는 일이 학부모들의 요구인 만큼, 그것에 부응하는 정책은 교육적 당위였던 셈이다.
학교가 사교육을 해선 안 되는가? 이런 질문이 버젓이 제기될 수 있을 만큼, 그동안 사교육 정책은 학교와 학관(學館)의 차이를 지웠다. 그러나 ‘사교육’이라는 용어 자체가 ‘공교육’(즉, 학교 교육)과 구분되도록 생겨난 것이다.3 두 범주의 혼동은 적어도 공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사교육 정책은 학교에서 사교육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견제하려는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제까지 오던 길을 정확하게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러면 그 막대한 사교육비 부담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 반문할 터이다. 그 치열하고 거친 교육 경쟁을 정부가 나 몰라라 해도 되는 것이냐 반문할 터이다.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 ‘야만적인’ 교육 경쟁, 물론 정책으로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이다. 그것의 심각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학교를 동원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 들지 말라는 뜻이다. 학교에는 엄연한 공적 소명이 있고, 그 소명을 이행하는 데 전념해야 한다.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학교의 본래 소명에 비하면 소소하다. 학교를 교육 경쟁이나 사교육 부담 해결에 동원해도 안 되지만, 한 걸음 물러서 동원을 묵인한다 해도, 학교가 그런 문제 해결에 수단(도움)이 될 수도 없다. 교육은 그런 데서 효험을 찾아야 할 과업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그렇다면 사교육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내놓으라고 재차 주문할지 모르겠다. 이렇게 반문해 둘 수밖에 없겠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사교육비’가 아니라 사교육의 ‘성질’이며 사교육 정책의 과오라는 점은 받아들인 것인가? 그리고, 그 대안 찾기 전에 잃어버린 교육부터 찾자고 호소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 모색 과정에서 제대로 된 사교육 정책을 부수적으로 찾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각주
- 학교 교사나 학원 강사 모두, 여기에서 서술하는 대로 살고 있는 사람이 현실에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여기에서의 뜻은 범주를 분명히 확인하는 데 있다. 실지로 교사나 강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살펴보려는 것이 아니다. 원칙 또는 당위를 가르는 범주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다. 현실에는 교사보다 더 교사다운 강사가 있을 것이며, 강사보다 더 강사 같은 교사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개개인 삶의 행태에서 학교 교사/사교육 강사 범주가 흐려진다고 해서 그 범주 자체나 그 범주에 함축된 가치가 부정되지 않는다.
- 여기에서도, 현실을 들어, 학교 수업에서도 교육과정의 정신이 증발하기는 마찬가지 아니냐고 반문할 듯하다. 어쩌면, 학원에서 오히려 그 정신이 더 살아난다고까지 반문할지도 모른다. 거듭 이야기하건대, 여기 이야기는, 오늘날 학교 교육이 사교육과 진배없게 되었을망정, 그렇게 되지 않았어야 할 이유가 본연적으로 있다고 밝혀두려는 것이다.
- 우리가 흔히 쓰는 ‘사교육’(private supplementary tutoring, shadow education)이란 용어는 기형적이다. 그 단어는 사립학교에서의 교육(private education, private schooling)을 가리키는(번역하는) 용어로 쓰였을 법한데, 이런 용법은 우리나라에 없다. 우리나라에서 ‘사교육’은, 공립 사립을 막론하고, 학교 교육에 맞서는 뜻으로 쓰인다. 공립학교와 사립학교를 구분할 이유가 크게 없는 반면, ‘과외’를 중요한 문제로 다뤄야 했던 우리나라 맥락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 용어인 듯하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강태중 교수님, 방학 중 학교에 와서 컴을 켜고 처음 한 일이 교바사-교수님 칼럼을 정독한 것입니다.
오늘 하루 가장 후련한 시간일 것 같습니다. 교수님 의견에 폭풍 공감하면서 제가 앞으로 무엇에 더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할 지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인상적인 문구: 한 줌의 이야기, 공동선 망각, 공적소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