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의 언어, 실종된 교육
| 교육부가 발표한 2025년 업무 계획을 들여다본다. 문서에 쓰인 단어와 조어들에 주목하여, 교육부가 무심결에 드러내는 관념과 습성을 읽는다. 교육을 ‘사다리 오르기’ 경쟁으로 보는 인식이 완강하며, 구체적인 업무들은 경쟁을 관리하는 데 몰려 있다고 비판한다. |
교육부가 발표한 2025년 업무 계획을 들여다본다. 문서에 쓰인 단어와 조어들에 주목하여, 교육부가 무심결에 드러내는 관념과 습성을 읽는다. 교육을 ‘사다리 오르기’ 경쟁으로 보는 인식이 완강하며, 구체적인 업무들은 경쟁을 관리하는 데 몰려 있다고 비판한다.
언어는 마음을 드러낸다. 언어에 비추어 우리는 발화 주체의 철학과 품격을 엿볼 수 있다. 때로는 마음을 숨기려는 언어를 구사하기도 하지만, 예민하다면 상대방은 그런 의도마저 읽어낼 수 있다.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이나 기관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교육부가 ‘2025년 주요업무 추진계획’을 내놓았다. 신중하게 작성했을 문서인 만큼, 용어나 표현을 나름 적확하게 구사하려 했을 것이다. 그 언어에는 스스로 엄격히 검증해서 내보이는 교육부의 관념이 배어 있을 것이다. 계획 문서는 교육부가 ‘집합적으로’ 교육을 어떻게 여기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교육부 생각은 문면에 드러나 있기도 할 테고 이면에 숨어 있기도 할 테다.
새해 교육부 업무 계획의 구도
새해 계획 문서의 요체가 되는 언어들은 업무 ‘추진 방향’에서 볼 수 있다. 교육부는 이 부분을 ‘비전-목표-정책 방향’의 위계로 정리하고 있다. 보도자료에서는 그 구도를 아래와 같은 표로 요약하고 있다.
<2025년 교육부 주요 업무 추진 방향>
| 비전 | 기회의 사다리가 되는 공정한 교육 실현 | ||||
| 목표 | 모두를 위한 맞춤교육으로 교육격차 해소 | ||||
| 3대 분야 | 국가책임 교육‧돌봄 | 교육 현장의 담대한 변화 | 지방과 국가의 동반 도약 | ||
| 정책 방향 | 출발선
평등 |
사교육‧입시
부담 완화 |
맞춤형
지원 강화 |
지역 격차
해소 |
청년 성장
지원 |
교육을 사다리 오르기 게임으로 규정한 ‘비전’
교육에 대한 교육부의 생각을 읽어보자. 먼저, ‘비전’은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기회의 사다리가 되는 공정한 교육 실현”. 여기에 어떤 뜻이 함축되어 있는가? 시각이나 관심 등에 따라 해석은 물론 다를 것이다. 그러나 교육부가 두 개의 관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문면 자체에서 명백히 확인된다. ‘교육은 기회의 사다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이와 관련해서 ‘교육은 공정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교육부가 보기에 교육은 사다리를 올라가는 게임이다. 사다리를 올라가면 가닿게 되는 곳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사회적 지위’일 터이다. 사다리 오르기 경쟁은 마땅히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공정 교육 실현”은 교육부가 그런 점도 놓치지 않고 있다는 표시이다. 말하자면, 교육부는 2025년 새해를 맞으며 이렇게 다짐하고 있다. 교육이 지위 사다리를 오르는 경쟁이란 점을 새삼 마음에 새기면서, 그 경쟁을 공정하게 운영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목표’에서는 자가당착적인 배려 몸짓만
비전에 따라오는 ‘목표’에서는 어떤 인식을 드러내는가? “모두를 위한 맞춤교육으로 교육격차 해소”라고 진술하고 있다. 말 그대로 보면 ‘평등’을 추구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격차를 없애겠다는 말에는 경쟁의 결과가 불평등하도록 두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때 격차는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인가? 이 점에 대해서 문서는 모호하지만, 학업 성취도를 염두에 둔 용어라고 짐작해서 무리 없을 듯하다. 문서 여기저기에서 ‘소득 수준’이나 ‘지역’ 사이의 격차를 이야기하고 ‘기초학력 부진’을 운위하며, ‘지방 소도시’에는 ‘EBS와 협업하여’ 학생들의 학습을 지원할 센터도 만들겠다는 등의 구상을 내놓은 것으로 보아서 그렇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교육부가 격차를 명료하게 정리하지 않은 것은, 그렇게 정리하지 않더라도 격차 이야기는 ‘누구나 다 아는’ 그런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교육격차라면 으레 성적 차이를 뜻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아니라 ‘지구적으로’도 이제 상식이다.
이런 짐작의 연장에서 ‘맞춤교육’이란 조어도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곧 학생 개개인의 학업(점수) 수준에 맞추는 교육을 가리키는 것이겠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교육부의 ‘목표’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맞춤교육으로는 교육격차를 해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를 위한 맞춤교육”이라면, 모두가(‘상위권’이건 ‘하위권’이건) 그 혜택을 입을 터라, 그런 교육 결과로 위아래 성적 차이가 줄게 된다고 보장할 수 없다. 성적 낮은 집단이 점수를 높이게 된다 해도, 그렇게 쫓아 올라간 이상으로, 성적 높은 집단은 더 높게 달아나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교 교육 현실에서 보면, 하나의 교육 지원 프로그램에서 이익을 더 뽑아내는 학생들은 하층보다는 으레 상층에 있기 마련이다. 결국 교육부 목표는 자가당착이거나 자기기만인 것이 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목표를 모르고 내걸었거나, 아니면 알면서도 발림으로 내세웠다.
목표 자체가 말이 안 되지만, 그것에 담긴 교육 관념은 비전에 담긴 것과 일관한다. 교육은 경쟁 게임이며, 그 요체는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느냐(‘격차’)에 있다는 통념을 거듭해서 박아 놓고 있다. ‘격차’라는 상대적인 측면을 보지 말고, 절대적인 측면에 주목해서 목표를 설정할 수도 있었을 마련이지만, 굳이(어쩌면 자연스럽게) ‘교육격차 해소’라고 내걸었다. 교육은 경쟁이라 여기는 만큼, 격차는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암암리에 받아들이고 있을지 모른다. 교육부가 채택한 목표는 어쩌면 그 ‘피할 수 없는 결과’를 가능한 한 견딜 만하게 관리하겠다는, 말하자면 ‘국민’에게 양해를 구하는 몸짓일지 모른다.
‘경쟁’과 ‘격차 해소’가 현실에서 모순이란 점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육부가 자기모순의 목표를 설정했을 수도 있다. ‘비전’으로 사다리 오르기 게임을 공정하게 관리하겠다고 내세운 마당에, ‘목표’에서는, 살벌할 수밖에 없을 그 경쟁을 방관하지는 않겠다고 무마할 필요를 느꼈을지 모른다. 경쟁의 낙오자도 배려하겠다는 언사로 ‘비전’(‘공정한 교육’)을 보완한 것이다. 어쨌거나 교육부의 업무 추진 목표는, 모두가 점수를 올릴 수 있도록 ‘맞춤’으로 교육하겠다면서 동시에 격차는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배반(背反)의 논리를 천연덕스럽게 담고 있다. 교육이 사다리 오르기 경쟁이란 관념은 ‘목표’에서도 흔들림 없이 다져지고 있다.
교육은 경쟁이지만 모두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는 ‘정책 방향’
계획하고 있는 업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3대 분야’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국가책임 교육•돌봄’, ‘교육 현장의 담대한 변화’, ‘지방과 국가의 동반 도약’이 각 분야에 내건 표어이다. 분야를 구분하는 논리가 확연히 보이지는 않는다. 업무들이 기본 청사진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조직된 것들이기보다는 이런저런 이유로 저마다 다르게 생겨난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엮어 그럴듯하게 제시하는 작업은 요령부득하게 될 수밖에 없었을 듯하다. 짐작건대, 사람의 발달 단계를 감안하면서 업무들이 제도나 기관에서 어디에 자리하는지 대충 따져 분류한 듯하다. 이를테면, 학령 전, 학령(학교), 고등교육/지역사회/청년 등의 개략적인 테두리를 두르고 적당히 업무들을 분류해 넣고는, 각각에 대해 수사적인 간판을 단 모양새다.
분야의 구분과 분야별로 내건 구호에서도 교육부의 ‘집단 지성’은 궁색한 허세로 드러난다. 세 분야의 구획은 적어도 서로 중첩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는 있겠다. 그러나 교육부의 한 해 업무가 총체적으로 어떤 지향을 지녀야 마땅하다면, 세 분야는 서로 구분되면서도 연대 또한 이루어야 할 것이다. 유기적으로 엮여 ‘한국 교육’의 정체와 지향을 내비쳐야 할 것이다. 그런 기조는 보이지 않는다. 문서의 논리 위계로 보면, 그것은 비전으로 제시된 ‘공정한 교육’일 텐데, 결국 경쟁 관리가 한 나라 교육의 요체란 뜻이 된다. ‘책임’, ‘담대’, ‘도약’ 등과 같은 공허한 수사로 각 분야를 색칠하고 있을 뿐, 거기에 담긴 업무들이 궁극적으로 한국인과 한국 사회를 어떤 문명의 품위로 올려놓을지 고심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정책 방향’에서도 결국 확인하게 되는 것은 경쟁, 경쟁, 경쟁이다. 먼저, ‘국가책임 교육•돌봄’이란 분야에서 방향은 “출발선 평등”으로 잡고 있다. 학령 전 단계에 초점을 둔 업무들이기에, 곧 학교 교육을 시작하게 된다는 점에서 ‘출발’을 염두에 둘 만하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왜 굳이 ‘출발선 평등’인가? ‘출발선’이란 단어에는 모두 한곳을 향해 달리는 단선적인 경주라는 전제가 들어 있고, ‘평등’이라는 첨언에는 그런 경주에서 누군가 앞서 출발하는 불공평을 막겠다는 소박한 ‘정의론’이 담겨 있다. 이런 언사는 사실 습관적인데, 교육부의 이런 버릇에는 개개인이 고유하게 품기 마련인 교육적 잠재력에 대한 사려가 한 톨도 없다. 말하자면, 요즘 대입 이야기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학교 교육을 모든 학생이 의대 진학을 향해 달리는 경주와 다름없게 보고 있다.
‘교육 현장의 담대한 변화’라고 거창하게 표방한 분야, 즉, 학교 교육 자체에 신경 쓰는 정책 방향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두 갈래 길을 잡고 있는데, “사교육•입시 부담 완화”와 “맞춤형 지원 강화”가 그것이다. 요컨대 입시 경쟁에 따르는 부담을 줄이는 데 주력하겠다는 뜻이고, 경쟁에 가담하는 ‘수요자’들의 다양한 여건에 맞춤으로 지원하겠다는 뜻이다. 경쟁은 으레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다만 그 경쟁이 학생이나 가정에 버텨낼 만한 것이 되도록 애쓰겠다는 선의 정도를 내비치고 있다. ‘담대한’ 변화를 추구한다지만 구체적인 업무에서 담대함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한 해의 계획 속에서, 학교 교육은 입시 경쟁에 불과하도록 옹색하게 쪼그라들어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교육부가 ‘지방과 국가의 동반 도약’이라 외치는 분야에는 중등 교육을 넘어서는 단계와 학교와 대학의 경계 밖 지역사회까지 포괄하는 업무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부분 정책 방향은 “지역 격차 해소”와 “청년 성장 지원”이다. ‘격차’와 ‘성장’이라는 낱말이 풍겨주고 있듯이, 여기에서도 교육의 기본 속성은 경쟁으로 상정되어 있다. ‘지역 격차’는 다분히 ‘교육 경쟁력’에서 빚어진다고 믿으며, 이때 차이가 벌어지는 것은 사다리 오르기 게임인 교육을 위해 지역마다 어떤 수단을(학교, 사교육 서비스 등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달린 것이다. 청년들의 ‘성장’ 역시 경쟁의 과정과 결과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어떤 경로로 어디에 취업할 수 있게 되느냐에 관한 문제로 규정하고 있으며, 그런 ‘문제’(성장)에 대해 지원한다는 말은 취업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도록 뒷받침하겠다는 뜻이다.
교육부는 교육의 제자리부터 찾아야
교육기본법 제2조는 우리나라의 ‘교육이념’을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정부 수립 후 첫 교육법의 제1조에서 천명했던 이념이며, ‘신(新)한국 건설’이란 표방 아래 이루어진 교육개혁을 따라 2007년 법을 개정하면서도 그 뜻을 유지한 조항이다.
새해를 맞으며, 교육을 제대로 해내겠다고 우리 사회가 마음을 모아 숙의를 시작한다고 상상해 보자. 정부가 흔히 해 온 형식적인 숙의 말고, 진정한 숙의를 한다고 가정해 보자. ‘어떤 교육을 추구할 것인가?’ 묻고 시한 없이 치열하게 논의했다고 하자. 어떤 이념을 채택하게 될까? 그것이 교육기본법 제2조의 내용과 크게 다를까? 아닐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다른 ‘선진국’들에서도, 엄숙하고 진지하게 교육의 지향을 논할 때면, 우리와 다름없게 언명한다. 역사적으로도 교육적 이상은 당대의 ‘훌륭한 사람’의 상이었다. 최근으로 올수록 교육이 인지적 성취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여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치우침에 대한 경계 또한 늘 병행해 왔다.
근대 국가의 제도에서 교육의 ‘면허’ 기능은 꾸준히 커지고 강해져 왔다. 사회적 분업은 불평등과 공정의 시비를 낳게 마련이며, 그 시시비비를 가라앉힐 규칙은 자유민주 사회(특히, 자본주의사회)에 불가결하다. 교육제도는 그 규칙의 근간이다. 사회에서 선망되는 자리나 이익은 그것에 대한 자격을 분명히 그어서 배분해야 할 터, 교육은 그 정당화의 핵심 기제로 기능해 왔다. 교육은 이른바 ‘능력주의’의 요체이다. ‘사’자 돌림 직업에서 볼 수 있듯,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몰리는 지위에는 교육을 거쳐야 하는 면허가 으레 요구된다. 교육은 생존경쟁 소용돌이의 핵이어야 했다.
어느 부문에서건 경쟁이 치열해지면, 지금 우리가 교육에서 보고 있듯이, ‘공정한’ 경쟁을 외치는 원성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이때 공정성을 위해선 ‘객관적인’ 가늠자가 절대 필요하다. 경쟁의 판가름은 이를테면 숫자 또는 점수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이 결국 점수로 귀결하게 되는 이유이다. 숫자로 잡히지 않는 교육적 성취는 더 이상 ‘교육적’일 수 없게 된다. ‘인격’이니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이니 하는 덕목이 우리 교육 언어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교육계에서마저 그렇다. 개인의 ‘선택’과 그 ‘수요’ 충족이 초점인 ‘교육 시장’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 없다. 교육부는 새해 업무에서도 그런 ‘비즈니스’에 몰두할 참이다.
교육은 개인 수준에서 사람 됨에 관한 것이며 사회 수준에서 공생에 관한 것이다. 두 차원의 가치는 개인의 고유함과 그것이 모인 사회적 다양성을 살리는 교육으로 구현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 더 나아가서 지구촌의 존속과 번영은 다양한 개성의 유기적 연대 위에서 비로소 기약할 수 있다. 교육기본법의 교육이념 조항은 바로 이 점을 적고 있다. 그냥 구색 갖추는 법일 뿐이라며 무시할 조항이 아니다. 교육부는 본연의 일에서 크게 일탈해 있다. 이제부터라도 교육의 제자리를 찾아야 할 터이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주르륵 눈물이 흐릅니다.
읽는 내내 분통함과 원통함에 마음이 뜨거워지고 무거워집니다.
우리가 빼앗기고 있는 것
그 자들이 팔아먹고 있는 것
그것으로 상처받고
죽음을 선택한 아이들을 떠올립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