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돌아보는 평가의 이모저모
| “아이의 변화 정도를 평가하는 것은 아이의 현재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평가의 대상은 아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본문 중에서] |
평가의 시즌에
“선생님, 어찌까. 수해력 검사1 통과 못 할 것 같은디.”
작년 11월 말의 일이다. 한 학교의 2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났는데, 선생님이 날 보더니 한숨을 포옥 쉬며 말했다. 선생님 반엔 여덟 명의 아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중 네 아이에게 어려움이 있단다. 이전 담임 선생님은 1학년 말 검사에서 반 아이들이 모두 성취기준에 도달했다고 했지만…….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도 이 아이들은 1학년 문제에서조차 틀린 답을 하기 일쑤다.
선생님이 꺼내 보여준 네 명의 검사지 오답은 이러한 것들이었다. ‘삼십칠’을 ‘317’로 쓴 경우, 간단한 규칙을 파악하여 동그라미를 세 개만 쳐야 하는 자리에 O표를 10개 가까이 그린 경우, 동그라미 17개를 보고 ‘16’ 또는 ‘12’라고 쓴 경우 등등. 선생님은 “내가 1년 동안 잘못 가르친 걸까?”라며 고민을 쉽사리 내려놓지 못했다.
연말, 평가의 시즌이 되면, 전남 지역 학교들에서는 ‘기초학력’을 진단하는 목적으로 여러 가지 검사2를 실시하게 되어 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2017년)보다 관련 검사들이 늘어났다. 느린 학습자에 대한 조기 지원이 강조되면서, 1학년 때부터 한글 해독 능력과 기초 수학 능력을 파악하는 검사3도 생겼다. 아이가 그해에 갖추어야 한다고 여겨지는 최소한의 학력 수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교사들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평가에서 선생님들이 애쓴 만큼 아이의 변화가 크게 나타났다면 선생님의 보람 역시 크겠지만, 아이들이 나타내는 결과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또 다른 2학년 선생님은 이런 문자를 보내오셨다.
“마침 결과 보고를 해야 할 상황이어서 검사를 했는데 […중략…] 많은 진전이 없어서요. 속상합니다.”
작년 4월, 선생님께 들은 아이의 사정은 이러했다. 아이는 부모님의 이혼 후 어머니와 함께 지내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외부로 일하러 다니셔서 주로 조부모님의 돌봄 가운데 생활하고 있다. 아이의 어머니는 베트남 분이셨는데, 한국어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여 아이는 발음이 또렷하지 않다. 이런 배경 탓인지 자존감이 낮고 표현을 잘하지 못한다. 1학년 때 한글 교육을 시작했지만 발음이 부정확하여 글자를 깨치기가 쉽지 않았다. 쓰기와 연필 잡기가 잘 되지 않고, 수학 영역의 이해도도 느리다. 지능 검사 결과 아이의 인지 능력은 경계선의 범위에 속하였다.
선생님은 1년 동안 아이와 만나는 시간을 따로 내어 일대일로 읽기와 수학을 지도했다. 내가 속한 학습종합클리닉센터도 연계하여 강사 선생님께 주 2차시 지원을 받도록 했다. 아이는 다문화 가정 지원 사업의 선생님과도 연결됐다. 이렇게 많은 노력과 자원을 투입한 후의 결과가 선명했다면 선생님의 기분이 좋았으련만……. 아이는 연말에 시행한 검사 두 가지 모두에서 기준 점수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평가하며, 평가받는 나(교사)
아이의 변화 정도를 평가하는 것은 아이의 현재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분명히 필요한 일이다. 이때 우리는 모든 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일반적인 검사를 실시할 수도 있고, 아이의 내적 성장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 개인적인 목표를 준거로 진단해 볼 수도 있다. 두 가지 검사는 모두 필요하고 각각 장단점을 내포한다. 담임교사가 다수의 학생들과 함께 실시하는 검사는 주로 전자에 해당한다. 국가가 정한 것이든 교사가 자율적으로 시행한 것이든, 아이들에게 어떤 잣대를 놓고 그를 달성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 평가의 대상은 아이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한 교사 역시 자신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교사라는 존재의 필요성, 교사의 성과라는 것이 어떤 업무에 의한 것보다는 아이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교육 정책 기조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기초학력 관련 정책이 우세한 전남 지역의 교사들은 기초학력 검사 결과에 모종의 압박감을 느끼기도 한다.
아이가 객관적인 검사의 최소 성취기준에 미치지 못했을 때 아이와 함께 한 선생님의 마음속에도 다양한 감정들이 찾아든다. 더디게 배워가는 아이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겠지만 감정의 초점이 교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일 때도 많다. 아이에게 열정을 다한 선생님일수록 결과에 대한 감정의 폭이 더 클 수 있다.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하며 시간을 쪼개어 아이를 붙들고 씨름했는데, 나타난 아이의 결과가 기대와 거리가 멀다면 낙심하고 좌절감이 따를 수 있다. 가르치는 역할에 대한 자긍심과 효능감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내 노력이 보상받지 못했다 느끼고 허무할 수도 있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하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탓하게도 된다. 방과 후에도 빼곡히 찬 아이의 일정, 작은 학교일수록 더 크게 부여되는 과중한 업무들.
그런데 그런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소요를 일으키면 아이를 객관적으로 세세히 살피는 것이 쉽지 않다. 또 평가의 본래 목적을 놓치고 엉뚱한 곳에 초점을 맞추게도 된다. 평가를 해서 아이를 아는 것보다 평가 자체가 중요해져서 이런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검사를 통과할 때까지 검사를 반복적으로 실시해서 올려보내는 게 좋을까, 지금 상태 그대로 검사 결과를 보고하는 게 좋을까.’
검사의 결과를 해석하는 과정, 아이와 만나는 내가 이를 수용하고 담담히 받아들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선생님은 아이에게만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여유를 줄 필요가 있다. 평가의 결과로 떠오르는 감정을 바라보고, 당연한 것으로서 받아주고 안아주고, 나를 도닥이자. 교사로 살아가는 중이라면, 어떤 아이들은 눈 밖에 내놓고 무시한 채 살아가려는 교사가 아니라면, 그런 감정들이 어느 때곤 나를 찾아오리란 것을 알고 인정하자. 찾아오면 인사하고 맞이하고 충분히 함께 하자.
감정의 찌꺼기를 떠나보내고 찬찬히 살피면 아이의 오류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좀 더 잘 보인다. 검사 중 문제 푸는 과정을 직접 보았거나 아이에게 풀이 과정을 설명하게 한다면 더 명확히 알 수 있지만, 그러기 여의찮을 때도 결과지만 보고 아이의 머릿속 움직임을 알 수 있을 때가 있다. 다음처럼.
“(선생님) 81+4=125, 이걸 이렇게 써놨어요. 어떻게 이렇게 푼 건지…….”
“(나) 8+4 해서 12를 쓰고 1+4해서 5를 쓴 거 같은데요?”
“(선생님) 맞네, 맞아.”
아이가 나타낸 결과는 고정되고 불변인 것이 아니라 과정의 한 지점이다. 이를 견지하면, 점수가 아니라 내용이 보인다. 검사를 성공과 실패를 가리는 도구가 아니라 점검과 확인의 절차로 쓸 수 있다. 검사라는 건 아이의 미래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영역에 대한 현재의 아이를 반영할 따름이라며, 조금은 관조할 수 있게 된다. 아이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검사는 없고 우리가 마주하는 건 불완전한 것임을 인식하고 수긍하게 된다.
발밤발밤
나는 아이들과 강사 선생님들을 일대일로 연결하는 일도 한다. 선생님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아이를 만나 관계를 맺고 담임교사와 의논하여 기초적인 학습 영역을 지원한다. 이 선생님들과는 두 달에 한 번꼴로 만나 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어떻게 시간을 운영했는지, 아이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아이와 만나는 자기 자신은 또한 어떠했는지를.

12월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을 모두 마무리하고, 2024년 마지막 협의회를 열었다. 지난 1년을 평가하는 자리였다. 선생님들은 각자 평가서를 써오셨는데, 작성해오신 내용을 공유하기 전에 아이에 대해서, 또 아이와 만나왔던 나 자신에 대하여 짧게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아이의 성장과 변화, 앞으로의 지원 방향’은 날씨의 변화에 빗대어 그림으로, ‘학습코칭단으로서의 나의 경험과 의미’는 의성어나 의태어나 사자성어로 표현해 보기로 했다.
선생님들이 표현한 단어들은 여러 가지였다. ‘시나브로’, ‘자강불식(自強不息: 스스로 힘써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 아니하다)’,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침과 배움은 서로 성장시킨다)’, ‘절차탁마(切磋琢磨: 옥이나 돌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내듯, 부지런히 학문과 덕행을 닦다)’,……. 이 활동을 하면서 선생님들은 자기 자신 또한 성장했음을 고백했다.
선생님들의 말씀과 사례 각각이 의미 있고 감동적이었는데, 그중에 처음 듣는 의태어가 하나 있었다. ‘발밤발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걷는 모양을 뜻하는 어휘다. 협의회를 마치고서도 이 낱말이 한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새롭게 알게 된 단어여서이기도 하지만 그 선생님이 이번 학기에 겪은 일의 속사정을 알고 있어서 더 그런 듯하다.
선생님은 10월 중순께 한 아이와의 만남을 예기치 않게 종결하게 되었다. 그동안 아이는 여느 4학년 남자아이들과 달리 성실하게 수업에 참여했고, 짜증 내거나 투덜거린 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복도를 지나가는 아이들이나 선생님 소리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자기를 숨기려 하는 아이의 태도를 주의 깊게 봐온 터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의 아버지가 학교 담임 선생님께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전해오셨다. 선생님은 당시 이 일로 한동안 감정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아이에게 좀 더 세심하게 접근해야 했을까, 아이가 지나치게 압박감을 느꼈을까.’ 자꾸 곱씹게 되고 후회도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들을 겪어내면서 또 배우는 것이 있었고 변화되는 것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도 자신의 길을 발밤발밤 걸어 나간다.
아이와 함께 1년을 마치며
학기를 마칠 무렵에는 아이들과 아래와 같은 활동지를 작성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한 해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 아이들은 주어진 항목에 자기 생각을 나름대로 표기하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설명한다.

“공부 때문에 힘들어서 2점은 뺐어요. 그리고 모르는 것을 알게 돼서 3점, 건축(공부)할 때 ‘공간을 이렇게 활용하다니 대단하다’ 해서 2점, 처음엔 떨렸는데 이제 선생님하고 친해진 것 같아서 1점.”
“내가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상상력.”
“읽는 거 더 잘하게 됐어요. 단어도 더 많이 알게 됐고요.”
“게임도 하고 그래서 재밌었어요.”
깊이 있는 성찰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학습 과정을 돌아보고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중요하다. 이는 학습력과 관계가 크다고 일컬어지는 메타인지 능력을 촉진시키는 데에도 영향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아이가 하는 말은 나에게도 큰 울림을 주곤 한다. 6학년 한 친구와의 시간, 아이와 안데르센의 유년기 시절 이야기를 다룬 글을 읽게 되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안데르센이 열한 살 때 처음 제대로 된 글을 완성했다. 그는 기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기가 쓴 글을 보여주었지만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웃 아주머니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실망한 안데르센은 작문 공책을 들고 서서 울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본 어머니가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화단으로 데려가 봉오리도 채 맺지 못한 꽃 잎사귀를 가리켰다. 어머니는 이 잎사귀가 자라서 아주 예쁜 꽃을 피우게 될 것처럼, 너 또한 언젠가는 훌륭하게 피어나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 수 있을 거라며 위로하고 응원했다.
글을 읽는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내 가슴이 순간 뭉클해졌다. 이 아이와는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왔었다. 하지만 이제 중학교에 가면 아이를 이렇게 정기적으로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내가 말했다.
“OO아, 너도 […중략…] 훌륭한 어른이 될 거야.”
라고. 그랬는데 아이가 바로 답했다.
“선생님도 훌륭한 늙은 할머니가 되세요.”
“훌륭한 늙은 할머니.”
따라 읊조렸다.
웃었다.
그러마 했다.
고마웠다.
멋진 꿈이다. 그러하길 무척이나 소망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현재 전라남도 장흥교육지원청 학습종합클리닉센터에서 학습심리상담사로 또래보다 천천히 학습 과정을 밟아가는 친구들을 만나는 일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