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상의 종식을 넘어서 대전환의 시대를 열기 위한 가냘픈 상상력
| “(비상계엄 사태는) 피로 세운 우리 민주주의가 뿌리 깊고 든든함을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거대한 혼란의 한가운데 있다. 이 혼란 수습의 첫걸음은 이 시대착오적 자해극의 책임을 준엄하게 묻는 일이 될 것이다.” [본문 중에서] |
윤석열의 비상계엄 담화를 들었을 때 순간 딥페이크(deepfake)라고 의심했다. 너무나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2024년의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 선포는 비현실을 넘어서 가상과 초현실의 소환(召喚)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상과 초현실은 윤석열의 통치행위를 해석할 때 흔히 소환되는 미신과 주술과 묘하게 맞닿아있다. 다만 전자가 창의적인 힘으로 현실을 구원하고자 한다면, 후자는 비이성적 힘을 빌려 현실을 파괴하고자 한다. 비상계엄 선포는 지난 2년 반 동안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불가능했던, 그래서 주술이라는 풍문을 동원해야 겨우 납득이 되던 윤석열의 현실파괴적 통치행위와 정신세계의 밑바탕을 백일하에 폭로해 주었다.
다행히도 한국 민주주의를 한순간에 50년 전 과거로 회귀시킬 뻔한 윤석열의 오판은 한순간의 촌극(寸劇)으로 끝났다. 자기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국회 앞으로 모여든 용기 있는 시민들은 이번에도 민주주의의 위기를 구해낸 주역들이다.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비상계엄을 무효화시킨 국회의원들도 오랜만에 제 몫을 해냈다. 무엇보다 다행스러운 것은 대통령의 계엄선포에도 상식의 선을 크게 넘어서지 않은 군대와 경찰의 행동이다. 비상계엄을 통치의 수단으로 꿈꾸고 동원하려는 세력이 겨우 한 줌에 불과함을 이번 사태는 잘 보여주었다. 잠시 흔들릴 수는 있으나 피로 세운 우리 민주주의가 뿌리 깊고 든든함을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거대한 혼란의 한가운데 있다. 물론, 이 혼란 수습의 첫걸음은 이 시대착오적 자해극의 책임을 준엄하게 묻는 일이 될 것이다. 탄핵이든 하야든 구속이든 임기단축이든 방법은 다양할 것이다. 행동마다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 윤석열에게 한 시라도 더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은 국가 전체의 비극이다. 그리고 비상계엄 선포를 막지 못한 허수아비 내각은 총사퇴하고, 사랑하는 우리 아들들을 동원하여 선량한 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도록 만든 군부의 모든 책임자는 구속 수사하는 것이 마땅하다.
불행하게도 현재의 정치 지형을 볼 때 이 최소한의 조치조차 시일이 걸릴 듯하다. 중요한 분수령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 표결이다. 국민의 힘이 당론으로 탄핵 반대를 결정했다. 탄핵에서 200표를 넘어설 수 있을지 온 국민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아야 하는 답답한 상황이다. 만약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하면 정국은 한동안 혼미하고 국정은 표류할 것이다. 그 경우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처럼 엄동설한에 수많은 시민이 생업을 뒤로 하고 거리로 나서는 일이 장기간 이어질 것이다. 이 모든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그렇지만 조바심을 내려놓고 좀 더 긴 호흡으로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이 혼란은 수습될 것이다. 윤석열은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고 단죄를 받을 것이다.
일찍이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의 정치를 소용돌이(Vortex) 현상이라는 키워드로 해석했다. 이 한바탕의 소용돌이가 끝나고 다시 돌아오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어야 할까? 일상의 회복을 넘어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누군가는 비상시국에 이 질문이 한가하고 사치스럽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8년 전 탄핵이 인용되고 정권이 교체되었을 때 8년 만에 우리가 다시 거리에 나설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8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우리 사회는 이 거대한 퇴행을 목도하고 있는 것일까?
역설적으로 우리 시대의 퇴행을 극복하는 해답의 일부는 윤석열의 정신세계를 잘 드러낸 담화문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겠다고 했다. 여기에는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종북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는 무서운 이분법과 분열주의가 들어있다. 윤석열만의 사고일까? 윤석열에게서 극단적 형태로 나타나기는 하였으나, 적어도 지난 8년가량을 지배해 온 우리 사회의 집단적 파토스(Pathos)라고 나는 믿는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적대시하는 망국적 문화 말이다.
탄핵을 반대하고 대통령을 옹호하고 나서는 국민의 힘은 이런 정신에 포획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내란죄에 준(準)하는 위헌·위법한 비상계엄을 획책한 개인을 처벌하고 이 땅의 국법 질서를 회복하는 것보다 다른 편을 제압하고 권력을 지탱하는 것이 더 상위의 목표이다. 국익보다 당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그들은 ‘탄핵의 트라우마’를 언급할 자격조차 없다. 그렇다면 탄핵 절차를 추진하면서 현재는 정의의 편에 선 민주당은 이런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행여라도 민주당이 이 기회를 정권 교체의 호기로 생각하는 당파적 이익을 더 우선하는 유혹에 빠진다면 이 또한 집단적 파토스의 다른 한 축과 다름없다. 나아가서 초거대 정당으로서 민주당은 촛불로 이루어낸 민주주의의 성취를 8년 만에 이렇게 퇴행시킨 책임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가? 나아가서 끊임없이 분열하고 대립하는 시민사회와 우리 생활세계는 정치권만 탓하는 것으로 스스로 면책받을 수 있을까?
비상계엄으로 인한 혼란에 대해서 많은 언론이 대한민국 국격이 손상되었다고 말한다. 후진국에서나 일어날 뻔한 일이 시도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이번 사태를 보면서 불과 4년 전에 있었던 미국의 의사당 난입 사건이 떠올랐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경계가 따로 있는가? 200년 넘는 미국 민주주의의 역사조차 의사당 난입이라는 촌극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4년 만에 트럼프가 현실 정치의 왕좌로 재등극하여 적대자에게 군대를 동원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뿐 아니다. 극단적으로 정치·사회·경제가 양극화되고 타자를 적대시하는 사회라면 퇴행은 어느 사회에서나 독버섯처럼 매번 고개를 들 것이다.
‘탄핵의 트라우마’는 국민의 힘이 입에 올릴 말이 아니다. 8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거리에서 다시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이 땅의 민중들이 물어야 할 말이다. 그래서 탄핵 이후 전망이 절실하다. 대전환의 시대를 여는 것이 절실하다. 다행히 집회의 현장에서 대전환이란 말이 자주 들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조차 자기의 관성을 쫓아서 해석한다. 정치학자들은 87 체제를 넘어서는 정치개혁을 말한다. 검찰 개혁이 제 일 순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말한다. 농민단체는 양곡법 개정 등 농민 생존권을 말한다. 페미니즘 단체들은 여성이 존중받고 안전하게 살아갈 세상을 말한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명료한 정책적 언어로 절절한 심정을 갈무리해 내지 못하는 많은 힘없는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체념으로 때로 기도하는 심정으로 탄핵 넘어 세상에 대한 여린 희망을 꿈꿀 뿐이다.
아마도 대전환이란 침묵 속 열망까지 담아내는 고차원 방정식일 것이다. 나는 감히 그 지름길을 알지 못한다. 현재 나의 문제의식과 유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는 사람 중에는 정치학자 박명림이 있다. 박명림은 우리 사회를 진영 국가·진영 공화국이라 진단한다. 그리고 승자독식의 정치 체제를 개혁하는 여러 방안을 제안한다. 또한 민주정치의 복원을 위해 대화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진영 간의 대화 단절뿐만 아니라 진영 내부 대화 부족도 심각하다는 그의 통찰에 나는 동의한다.
그런데 나는 교육학자로서 우리 사회의 다양한 전환에 대한 논의를 교육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그것을 우리 사회 구성원의 집단적 파토스를 다시 정의하는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혐오와 대립의 종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파토스 말이다. 그것을 내 부족한 언어로 ‘모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존중’이라고 다시 말하고 싶다. 너무나 뻔하지만 너무나 무시되는 것, 어릴 때부터 줄곧 배웠던 민주주의의 근본 토대 말이다. 그것은 대화주의를 뛰어넘는 차원이다. 자기의 안녕과 평화를 대화의 언어로 갈무리해 낼 수조차 없는 수많은 약한 타자의 목소리까지 듣고자 하는 공감과 연대의 정신, 그런 정신이 살아있는 감수성 높은 사회는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 이를 위해 우리 교육은, 우리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대전환의 지난(至難)한 목표를 향해 우리는 또다시 멀고 긴 항해 길을 나서야 할 때이다. 그 밑바탕에 모든 약자의 가냘픈 희망의 언어까지 힘들여 경청하고자 하는 새로운 정념(情念)이 항해의 동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2024. 12. 05)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에서 수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의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10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97년부터 청주교육대학교에서 예비 교사들을 양성하고 있다. 수업 연구가 필생의 연구 주제이며 학교 혁신과 더불어 미래 사회를 위한 교육에 관심이 많다. 수업 연구의 새로운 방법으로 수업 비평이라는 연구 장르를 동료 연구자들과 함께 개척하였으며 다양한 연수와 강연을 통해서 전국의 선생님들을 만나고 있다. <교과교육현상의 질적 연구>, <수업, 비평의 눈으로 읽다>, <수업,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 <한국의 교육생태계> 등을 집필하였으며 수업과 학교 혁신을 위한 새로운 책을 준비 중이다. 모든 학생이 소외되지 않고 온전히 성장할 수 있는 교육생태계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것이 앞으로의 소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