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톺아보기⑤ – 사교육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잃은 것
| 우리나라에서 사교육이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라 학교 교육 본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이어간다. 우리 사교육은 국제적으로 ‘극단 사례’라 알려져 있다. 우리 사교육이 유난히 극성스러운 점을 이르는 것이겠지만, 실은 그 이상이다. 결국 공교육을 몰아냈다. 사교육과 공교육의 경계가 뭉개진 사태에서 학교 모습이 어떤지 새삼 떠올려 보고, 잃어버린 학교 교육을 찾을 이야기를 위한 실마리도 놓아둔다. |
영어권에서 흔히 이름하듯, 사교육은 정의상 ‘그림자(shadow education)’이다. 학교 교육의 그늘이다. 학교 교육을 좇아서 생겨난다. 학교 교육과정과 수업의 양식을 좇으며, 학교 교육의 성취 기준을 좇는다. 그러나 학교 교육의 본성을 온전히 투영하지는 않는다. ‘그늘’이란 말에 실린 느낌대로, 그 실제는 종종 삿되다. 학교 교육이 공적인(교육적인) 정도(正道)에 대체로 고지식하게 매달린다면, 사교육에서는 사적인 이익을 좇아 ‘지름길’을 찾는 데 서슴없다.
위 문단은 다분히 형식적인(개념적인) 서술이다. 이제는 세계 현상이 된 사교육을 일반화하여 이야기할 때나 쓸법한 말들이다. 이런 ‘평균’의 말로는 우리 교육 현실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다. 우리나라 사교육은 ‘지구적으로’ 볼 때 ‘극단적으로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국제적으로 사교육 현상을 다루는 논문들이 한국을 사례로 택할 때 종종 이런 극단성을 선택 이유로 든다.1
한국 사교육, ‘극단적인 사례(the extreme case)’
우리나라 사교육 사태를 극단적이라 보게 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세 가지 현상을 지적할 만하다. 차차 드러나겠지만, 이 세 현상은 사실 서로 얽혀있다.
흔히 이야기되는 대로, 먼저, 우리나라에서는 사교육이 만연하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사교육 참여율’이 놀랍게 높다. 국제 통계에서 우리나라 참여율이 늘 ‘세계 최고’로 나타나지는 않지만(최고나 최고 근처에 있다), 그런 비교가 엄밀하지는 못하다. 나라마다 사교육 통계가 들쭉날쭉하고, PISA 등에서의 조사도 느슨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참여의 강도나 범위 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 특정 과목에 국한된 조사이거나, 참여 시간 분류 없이 ‘참여/비참여’로 이분된 조사일 때가 많다. 조사가 엄밀해질수록 우리나라 참여율의 압도적 양상은 확연해질 것이다. 2009년의 PISA 보고에서 보면, 수학의 경우 4시간 미만 참여 비율에서는 일본, 러시아, 그리스 등 여러 나라에 비해 낮지만, 4시간 이상 참여를 포함하게 되면 비교 대상 국가 가운데 최고에 등극한다.
한국 사교육의 극단성을 볼 수 있는 둘째 현상은 사교육의 동기가 보충(supplement)이 아니라 앞섬(advancement)에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유럽이나 OECD 회원국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분석에서는 성적 낮은 학생들이 사교육을 더 받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학교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는 학생이 사교육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경향이 뒤엎여 있다. 성적이 높을수록 사교육을 더 받는다. 교육과정의 충실한 이수보다 성적에서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동기가 우세하다는 뜻이 된다. 한국은 이런 경향을 보이는 나라로 거의 유일할 뿐만 아니라 그 정도도 독보적이다. 이런 극단성은 학원가에 ‘선행’이 당연해지는 추세에서도 쉬이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에서 사교육은 ‘예외가 아니라 규범’이라는 사실로 그 극단성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이제는 학교 수업에서 으레 학생들이 학원에 다닐 것이라 전제한다고 듣는다. 학생이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교사가 학부모에게 학원에 등록시키도록 조언하는 것도 ‘교육적인’ 선의라고 한다. 이런 사태가 실지로 얼마나 번져 있는지 모르지만, 확인해 볼 필요까진 없을 터이다. 정부 정책이 이미 사교육을 규범적 기반으로 삼고 있다. 정부가 나서서 사교육의 ‘정신’(‘소비자는 왕’)과 ‘수완’(手腕)(‘고득점 전략’)을 학교에 요구하고 있다. ‘학원’에 뒤지지 않는 것이 ‘공교육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길이고, ‘학교 교육 정상화’의 길이라 거듭 천명해 오고 있다.
앞선 연재 글들에서 이야기했듯, 정부는 틈만 나면 학교 교육이 ‘수요자 중심’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수요자’가 원하는 것이 ‘공교육’이기보다는 ‘사교육’일 게 자명한 마당에, 결국 정부는 학교에서 사교육을 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른다. 1990년대 ‘5.31 교육개혁’에서 정부는 ‘수요자 중심’을 외쳤고, 2000년 ‘과외 금지 위헌’ 판결에 따라, 더 이상 ‘금지’로 제한할 수 없게 된 과외 ‘수요’를 학교가 책임지도록 떠넘기기 시작했다. 2009년 ‘사교육 없는 학교’ 사업에서는 학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서비스를 학교에서 제공하도록 요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런 과정에서 공영 방송인 EBS에도 사교육 프로그램을 장착시켰고, 2010년대 들어서는 급기야 그 사교육 방송의 내용을 수능에도 ‘연계’하는 ‘사교육비 경감 대책’으로까지 몰아갔다. 대학입시마저도 사교육 기반에서 출제하도록 엮었다.
이런 수요자 중심의 규범은 지금도 교육 정책의 철칙이다. 교육부는 작년 ‘사교육 경감 대책’에서도 “사교육 수요 원인별 맞춤 정책으로 사교육 수요를 공교육 내 흡수”하겠다고 버젓이 공언했다. 정부의 위호(衛護) 속에서 사교육에 함축된 욕망과 그 실현의 수완이 학교 교육을 장악하고 있다. 지구에서 이런 나라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이 그래서 ‘극단적인 예외’ 사례이다.
공교육과 사교육의 혼돈
사교육 문제를 영어로 논의할 때 일반적으로 그것을 ‘private supplementary tutoring’이라고 이름한다. 그것은 공적이거나 본령인 것도 아니고, 교육이라기보다는 ‘교습’ 정도로 격을 낮추어 이야기해야 적절하다는 생각이 담긴 조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그것은 당당히 ‘교육’이다. 사적인 울타리를 넘어 공적인 행태가 되었으며, 더 이상 보조라는 ‘그늘’에 있지 않고 본체 안에 들어앉았다. 더 이상 교육이 아닌 교습이라고 격하하여 구분할 이유가 사라졌다.
엄밀하게 확인해 보지는 못한 이야기지만, 학생과 교사에게 두루 듣기로, 대체로 사실인 듯하다. 적어도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수업은 EBS 수능 교재를 따라 이루어지는 게 다반사라 한다. 교재가 집약 정리한 대로(교과서 ‘진도’대로) 빠르게 ‘개념’ 정리를 하고는 계속 ‘문제를 푼다’는 것이다. 물론 학교마다 다를 것이다. 이런 행태가 극심한 학교도 있을 테고, 전혀 그렇지 않거나 못하는 학교도 있을 테다. 그렇더라도 이렇게는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고3 교실의 수업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을 우리 사회에서는 전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말이다. 고3의 학교 수업은 당연한 것처럼 학원 수업을 모범으로 삼고 있다. 학교에서의 이런 행태는 사실 정부가 권장하는 것이어서 ‘이상한 것’이면 안 되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했던 정부의 공언대로, 학교는 “사교육 수요 원인별 맞춤”으로 “사교육 수요를… 흡수”해야 한다.
겨우 고등학교의 마지막 한 학기 수업을 ‘증거’로 너무 거창하게 일반화하고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중차대한 대입 시험을 앞둔 ‘예외적인’ 학기에 잠깐 일어나는, 차라리 눈감아 주어야 할 수업의 양상을 근거로 ‘사교육이 학교 교육을 삼켰다!’ 외치는 것은 무리라 여길지 모르겠다. 그렇게 여긴다면,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이전의 학교 수업이나 개인적인 학습(사교육)이 어디를 향하고 있고, 어떤 성질로 이루어지는지 짚어보자. 학생과 가정마다 사정이 다르고, 교육의 길을 밟아가는 계획이나 경로도 실제에서 다르기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길의 끝에서 소망하는 바는 서로 그다지 다르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대체로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좋은 성적을 확보하고 ‘하늘’ 같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기를 희망하지 않을까. 고등학교 3학년 2학기의 학교 수업은 이런 ‘집합적인’ 속내를 마침내 확연히 보여주는 현상일 뿐이다.
적어도 정부는 교육 정책으로, 짧게 보면 지난 4반세기에 걸쳐, 국민 개개인의 사적인 ‘수요’를 만족시키려고 골몰해 왔다. 학교라는 ‘계층 이동 사다리’를 거쳐 만족스러운 ‘사회적 지위’에 이르려는 꿈을 누구나 갖고 있다고 전제했고, 그런 꿈의 바탕에서 일고 있는 ‘사교육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공교육’의 사명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학교를 동원하고 공영 방송을 동원했다. 이제는 전국 다양한 수준의 지방자치단체들까지 모두 나서서 사교육을 지원하고 진학 전략을 돕는다. 서울시의 공식 블로그에서는 “혼공으로 서울대 가기, 이게 가능한 이유?”라며 자체의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이용하도록 광고한다. 이런 범정부적이며 범사회적인 인식과 노력은 이제 우리 사회에 ‘그냥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과 제도를 구성하고 있다. 그것을 사교육 조장이라거나 그래서 그 속성을 따져 보아야 한다는 식의 딴지를 걸 계제는 더 이상 없다.
공/사교육의 ‘선’이 뭉개졌다는 것은
‘극단적인 사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사교육 현상이 우리나라에서 유독 두드러지다 하는 데는 ‘사사로운 것’이라는 그 개념적 ‘선’(singularity)이 우리 사회에서 뭉개졌다는 데 있다. 두 가지 일화에서 그 무너진 모습을 볼 수 있다.
2000년 헌법재판소가 과외 금지 정책이 위헌이라 판결했을 때, 당시 교육부 장관이 어려운 형편에 있는 학생들이 과외 교습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가 엄청난 비난의 세례를 맞았다. ‘사교육 행위’를 어떻게 공적으로 지원할 엄두를 교육부 장관이 내느냐는 비난이었다.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의 통념에선 ‘공’과 ‘사’를 구분하던 그 선이 지워졌다. 세금으로 사교육 기회를 만들어 주는 정책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다른 하나, 국제적으로 되돌아보면, ‘코로나 사태’에 대응하여 많은 나라에서 사교육 지원책을 채택했다. 학교에 가지 못해 학업이 처지는 학생들이 ‘과외’로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했다. 이런 정책은 이른바 계층 간 성취 격차를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어느 정도 붙잡았다고 평가됐다. 코로나 사태가 지나갔지만, 나라에 따라서는 ‘사교육 지원’의 정책 관성을 놓아둘 기미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미에 대해 예민한 지적이 없지 않다. ‘공교육’ 정책의 본지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영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그러다 한국 꼴 난다’는 경계의 이야기도 나왔다.2 ‘한국 꼴’은 어떤 것인가? 사교육을 공인하고 좇는 것이 ‘공교육 정상화’라 여기는 꼴이고, 진정한 공교육 정상화의 길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꼴이다.
한국의 꼴이 그렇대서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 교육은 여전히 ‘경쟁력’을 갖고 있지 않은가? 공교육과 사교육을 가리지 않고 지원해 왔다고 자부하는 정부라면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그런 정책 결정을 돕고 지지해 온 학자들이나 교육자들도 정부의 그런 태세를 지지할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총체적으로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키워왔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 교육에는 여전히 ‘큰 탈 없지 않은가?’라며 안주하고 있다고 얘기해야 맞을지 모른다.
역사를 돌아보건대, 공교육과 사교육의 경계를 허무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 허묾이 무엇을 뜻하며 어떤 파장을 낳을지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다. 앞서 연재한 글들에서 어느 정도 드러냈듯이, 그 정책 과정은 다분히 직관과 즉흥으로 점철되어 있다. 급격한 정치 변동이나 급속한 학교 교육 팽창과 같은 변수들이 차분하고 점진적인 정책 행위를 어렵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만 보이는 현상은 아니지만, ‘교육 문제는 내가 겪어보아서 안다’는 일상적 착각과 그것을 파고드는 대중영합적 정치 행태도 한몫했을 것이다. 사익이 집합적으로 표상되기 마련인 여론 지형에서 ‘수요자 중심’이니 ‘반값 사교육비’니 하는 구호들은 정치용으로 딱 알맞았다. 그래서 내걸린 선거용 기치들은 종종 ‘국정과제’로 둔갑한 후 교육 정책을 규정했다. 결국 사교육을 학교(‘공교육’ 기관)에 뒤집어씌우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잃은 것은?
사교육의 규범이 학교를 장악하도록 만듦으로써 우리 사회는 무엇을 잃었는가? 교육은 기본적으로 마음에 작용하는 것으로, 대체로 가시적이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 육안으로(데이터로) 확인하기는 어렵다. 개념적이며 윤리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그만큼 일상에서 쉬이 수긍될 수 있게 잃은 것을 적시하기는 난망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짚어보지 않았던 정책의 ‘이면’을 함께 논의함으로써 필경 잃었을 것들에 대해 감지해 갈 수 있을 것이다.
정책에는 정부가 ‘생각 없이’ 받아들인 ‘전제’들이 있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정부는 넘어갔지만 의심했어야 마땅한 전제들이다. 우리가 잃은 것들을 건지려면 톺아야 할 부분이다. 그 부분을 들춤으로써 무엇을 잃었는지 헤아려 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수요자 중심’이란 개혁의 기치를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기치 아래에서 정부는 공교육과 사교육의 경계를 허물기 시작했다.
과연 교육은 수요자 중심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철저하게 검토되지 않았다. 당시(1990년대 중후반) 사회 정치적 환경은 이 질문이 충실히 검토되지 않았어도 될 만한 여론 지형을 만들어 주었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물결’이 이미 미국과 영국 등으로부터 흘러넘쳐 오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문민정부’의 출현으로 ‘민주화’의 기대가 충만해 있었다. 국가가 개입하기보다 ‘시장’을 열어 시민 개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허용하는 정책이 대세가 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그런 추세를 민주화로 채색하여 이해하기도 했다. 군부와 관료적 전체주의의 폐습을 떨쳐내기 위한 민주화 정책이나 개인에게 자유를 준다는(‘수요자 중심’의) 시장주의적 정책이 엄밀히 구분되지 못했다. 그래서 당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요자 중심의 기치가 교육개혁에서 매우 경솔하게 내걸렸다는 지적을 피할 수는 없을 터이다.
교육은 본질적으로 개인에 대한 사회적인 개입이다. 개인이 욕망하고 선택하는 대로 무엇인가를 건네주는 행위가 아니다. 특히, 학교라는 기관을 전제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학교는 태생적으로 사회적이다. 학교 교육에서 학생 개인은 당연히 사회의 버금이다. 개인을 전적으로 사회에 종속시킨다는 뜻이 아니다. 사회를 염두에 두고 개인의 필요(needs)나 성숙을 정의하게 된다는 뜻이다. 단순히 사회화시킨다는 뜻도 아니다. 개인에게 사회적 순응을 주입하거나 강요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함께 삶)에 대한 실존적 예민함이 개인의 인격에 함축되도록 함양해 간다는 것이다.
사교육과 공교육이 뒤엎어진 사태에서, 오늘날 우리는 학교를 계층 이동 사다리라고 부른다. 학교 교육은 그 사다리를 오르도록 개개인의 전략에 맞춰 지원하는 일이 되었다. 교사는 더 이상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학생 옆에서 돕고 응원하는 사람(facilitator)일 뿐이다. 학교는 학생들이 ‘세상’에 나아가기 전에 실수하며 세상을 터득하는 ‘모색과 가능성의 공간’이 아니라, 성적과 스펙을 갖춰 미래를 확보해야 하는 ‘경쟁과 사정(査定)의 공간’이다. 정부의 바람대로라면, 그런 학교의 사다리를 오른 학생들은 국가 경쟁력의 근간인 ‘미래형 인재’가 될 것이다.
정부가 기약하는 인재는 필경 얻지 못할 것이다. 공교육과 사교육을 뒤섞은 정책으로 어떤 정합한 결실을 낼 수 없다. ‘미래형 인재’라는 조어 자체가 그 혼돈의 징후이다.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정책은 늘 겉돌 것이고, 정부는 나름의 제스처로 정책의 이곳저곳을 단속하고 조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책이나 그 부품들에 있지 않다. 정책 이전의 발상 즉, 패러다임에 있다. 거기엔 교육에 대한 인식이 없다. 사교육과 씨름하느라 교육 자체를 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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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