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톺아보기④ – 사교육이란 ‘그림자’가 학교 교육의 본체를 삼키다
| 사교육 이야기 넷째 토막이다. 이제까지 해 온 세 이야기를 간추리면서, 정부의 과외(사교육) 대책이 문제 해결은커녕 사교육의 학교 교육 찬탈을 초래했다고 이야기한다. 2000년대 후반을 넘어서면서 사교육 대책은 학교 교육의 의미(가치)를 바꾸어버렸다. 흔히 사교육을 ‘그림자 교육’이라 일컫는다. 학교 교육을 따라가며 비어져 나오는 현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교육은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다. 학교 교육이란 본체를 삼켰다. 이 찬탈을 이야기했다. 이 현실을 성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
사교육이 학교 문턱을 넘다
지난번 글(‘사교육비 경감대책, 학교를 시장에 내놓았다’)을 맺으며 “지금 우리는 과거와 다른 뜻으로 학교 교육을 하고 있다.”고 적었다. 무슨 말인가? 이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앞서 세 토막의 이야기를 했다. 내용을 간추려보면 이렇다. 교육 정책의 맥락에서, ‘사교육’ 문제는 과외에서 시작됐다. 과외를 나쁘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교육상 바람직하지도 않고 학생들에게도 해롭다고 했다.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정부는 과외하는 학교와 교사는 물론 부모들까지 벌하면서 막았다. 과외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급기야 고질적인 ‘망국병’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교육 기회가 늘면서 과외라는 고질병은 더 번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와 대학 교육의 팽창은 진학 경쟁을 보편적인 의례로 만들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과외가 세대마다 모두에게 필수가 되어갔다. 과외 부담은 모든 학생과 학부모에게 지워져 ‘범국민적인’ 것이 되었다. 교육 민원(民怨)은 점차 과외 ‘부담’ 쪽으로 도드라졌다. 이 무렵(1990년대 초) 두 줄기 이야기가 얽혔다. 나라의 교육 예산이 부족하다며 이전부터 ‘지나친 사교육비 의존’을 문제 삼았었는데, 이 비판의 흐름과 과외비 부담 이슈가 얽혔다. ‘사교육비’와 과외비 문제를 혼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초 사교육비 문제는 과외비에 관한 것이기보다는 의무교육(또는 무상교육)이 미흡한 현실에 관한 것이었다. 등록금이나 교과서 대금과 같이, ‘공교육비’에 속하여야 할 비용들이 사적으로(‘사+교육비’로) 부담되고 있어서 제기되는 문제였다. 그런데 과외비 부담의 이슈가 부상하면서 기존 사교육비 논란은 과외비 이야기인 것처럼 와전되기 시작했다. ‘사+교육비’ 문제와 ‘사교육+비’ 문제가 뒤섞이기 시작했다. 이 혼동 과정에서 과외 문제는 이중적으로 꼬인다. 문제의 초점이 비용으로 옮아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표상의 용어도 ‘과외’에서 ‘사교육’으로 바뀌게 되었다.
용어의 대체는 단순한 말 바꿈이 아니었다. ‘사교육’이란 용어가 ‘사교육비(과외비)’ 문제를 전제로 끌어내지면서, 사교육 이야기 자체가 ‘비용’ 이야기로 귀결되어 갔다. 이전에 ‘과외’를 이야기할 때는 그것의 성질(입시/지식/암기 위주, 국영수 중심 등)을 주로 문제 삼았지만, ‘사교육’이라는 용어를 쓰면서는 으레 비용을 문제 삼게 되었다. 사교육비가 가계에 크게 부담된다는 사실이 ‘사교육 문제’(이야기)의 핵심이 되었다.
사교육 이야기가 그 교육적 속성을 탓하지 않고 비용 부담을 불평하는 쪽으로 기울면서, 사교육 행위는 교육의 ‘악’(惡)이란 손가락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사교육은 학생들이 떳떳하게 표출할 수 있는 수요(需要)의 대상이 되었다. 정책상으로는, 하지 말도록 설득하고 막아야 할 행태가 아니라, 적극 충족시켜 주어야 할 ‘교육적 필요’가 되었다. 말하자면, 오르는 물가를 잡기 위해 정부가 비축분을 방출하듯, 싼값의 사교육 상품을 만들어 풀려는 정책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이런 정책에 학교가 동원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닌 게 아니라,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질 높은’ 사교육 서비스를 ‘값싸게’ 제공하는(“사교육 반값”을 이루는) 과업이 학교의 공적 사명이 된다. 이 과업에는 EBS도 곧 징발된다.
과외 금지가 위헌이라 판결되고
학교를 사교육 서비스에 동원하게 되는 데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작용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헌법재판소는 과외를 악으로 규정하고 금지를 명하던 정부 시책이 “부모의 자녀에 대한 교육권”을 침범했기에 위헌이라 판결했다. ‘과외를 허하라’라고 명했다. 언론은 과외의 봇물이 터졌다고 대서특필했다. ‘사적인 교육권’을 행사하게 된 국민이 ‘사적인 부담’에 대해 어마어마한 원성을 쏟아낼 것이라 난리 피웠다. 툭하면 휘두를 수 있었던 과외 금지의 철퇴를 빼앗긴 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2000년의 일이다. 이후 정부는 야금야금 학교를 징발했다. 학교에 ‘부담 없는’ 사교육을 요구했다. 정책을 돌려세운 것은,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수긍하여, 헌법의 정신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돌변은 헌법의 또 다른 조항에 어긋날지 모른다. 이 점은 충분히 검토되지 않았다.
사교육 수요 충족을 위해 학교를 동원하는 조치는, 적어도 법리상, 학교의 정의(定義)를 바꾸고 나서 가능한 일이다. 근대국가의 맥락에서 학교 교육은 일차적으로 국민의 의무이다. 헌법에서도 그렇게 규정한다. 학교 교육의 이유는 기본적으로 공적(公的)이다. 개인적인 필요에 따라 받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공교육’ 기관으로서 학교는 사적인 수요를 충족시켜야 할 사명을 띠지 않는다. 이 법리를 받아들인다면, 사교육 수요를 만족시키는 데 학교를 동원하는 정책은 적어도 두 조건 가운데 하나는 성립해야 정당화될 수 있다. 즉, 사교육 수요가 공적인 교육 이유에 맞닿는 것이어야 하거나, 학교가 사적인 ‘교육’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기관으로 법제상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학교에 사교육 서비스의 책임을 지우는 것은 매우 심각한 결정이다. 그렇지만 신중한 논의나 큰 소란도 없이 이루어졌다. 정부가 헌법을 의식하며 그 사안을 검토한 적도 없고, 학계나 교육계에서도 각별한 경계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부 교직 단체가 학교의 본분을 망각하는 처사라 비판하기는 했지만, 기득권을 지키려는 저항이려니 정도로 가볍게 취급되었다. 그렇다고 정부가 정책을 뒤집기 위한 정당화를 생략할 수는 없었다. 학교가 마땅히 배척해야 한다고 이야기해 왔던 사교육을 학교에 들여놓으려면, 최소한 문서상의 이유라도 만들어야 했다.
사교육 대책은 학교 ‘내실화’를 거쳐 ‘정상화’로
정부는 일차적으로 학교에 책임을 묻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2000년의 헌법재판소 판결은 당시 교육부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판결에 당혹했던 교육부는 부랴부랴 ‘과외교습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빗장 풀린’ 과외를 막는 게 다급했다. 대책이 나오는 데는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 정책 문서는 “과열 과외 예방 및 공교육 내실화 방안”이란 제목을 달고 나왔다. 학교 교육을 ‘내실화’하여 과외를 제어하겠다는 발상이었다. 과외가 생겨나는 원인이 학교에 있다는 전제를 담았다. 과외가 학교 탓이니 책임도 지라고 이야기한 셈이다.
‘공교육 내실화’ 논리가 사리에 닿지 않는다는 점은 과외 사태를 조금만 들여다보아도 감지할 수 있다. 이유야 물론 다양하지만, 주로 성적을 높이기 위해 과외를 한다고 보면, 학교는 부차적인 원인이다. ‘내실 학교’와 ‘부실 학교’를 가상해 보자. 과외는 필경 전자의 재학생들 사이에서 더 활발할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에서 과외는 우수한 학생 쪽에서 더 일어난다. 흔히 그렇듯, 내실 있다고 알려진 학교일수록 진학 경쟁이 세다면, 그런 학교의 ‘우수’ 학생들이 과외는 더 심하게 받을 것이다. 내실 있는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주는 대책이 과외 수요를 낮추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더 근본적으로는, 과외를 받으려는 학생이 기대하는 ‘서비스’가 학교 교육의 내실화를 통해 이루려는 성공적인 ‘공교육’과 일치하지 않는다. 오랫동안 그래 왔고 또 여전히 그렇다고 인정해야 할 마련으로, 과외에서는 ‘입시 위주 교육’을 원한다. 하지만 그것이 ‘공교육 내실화’의 목적일 수는 없다. 입시 위주 교육에서 탈피하는 ‘공교육 내실’을 갖추어야 한다고 교육부는 늘 역설해 왔다. 이 방침을 버리기로 작정하지 않는다면, ‘공교육 내실화’와 ‘과외 예방’을 정책적(인과적)으로 엮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논리가 이치에 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학교(공교육) 내실화를 내세우는 사교육 대책에 꿋꿋이 매달렸다. 그 바탕 논리는 꾸준히 완고해졌고, 급기야 공교육과 사교육의 위상 자체를 전도(顚倒)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말하자면, ‘내실화’ 이야기에서 ‘정상화’ 이야기로 건너간 것이다. 암암리에 공교육과 사교육의 위상을 역전시킨 것이다.
내실화 이야기에서는 그나마 공교육이 주인 위치에 있었다. 공교육이 추구해 오던 방향에서 내실화를 도모할 때 사교육의 경감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는 논리였다. 공교육의 줏대가 남아 있다. 그러나 정상화 이야기로 넘어가면 공교육을 지탱해 온 줏대가 사라진다. 공교육의 ‘정상성’은 사교육을 해소하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 된다. 공교육이 정상적이면 사교육은 경감되어야 마땅하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교육 문제 해결은 공교육이(‘정상’이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 전부가 된다.
사교육, ‘그림자 교육’에서 학교 교육 본체로
지난 20여 년의 사교육 대책은 사교육이 공교육의 지위를 찬탈하도록 꾸민 역사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공교육의 지위를 규정하는 조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테다. 전통을 따라 이를테면 ‘전인교육’이나 ‘지덕체 함양’과 같은 지향을 그 조건으로 받아들여 보자. 공교육이 ‘정상’(正常)이라면 그런 지향을 품어야 한다고 전제해 보자. 어떤가. 사교육 대책의 역사를 따라오면서 그런 공교육의 자리는 사라지지 않았는가?
오늘날 ‘정상화된’ 공교육은 사교육의 수요를 ‘흡수’하거나 아예 사교육을 대체하는 ‘교육’을 가리킨다. 이렇게 뒤집어져 온 역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정부가 내놓았던 사교육 대책의 표제들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2000년 정부는 과외 금지책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자 다급하게 “과열 과외 예방 및 공교육 내실화 방안”을 내놓았다. 2004년에는 “공교육 정상화를 통한 사교육비 경감 대책”을 내놓았다. 4년 정도 지나 정책 표방이 ‘내실화’에서 ‘정상화’로 바뀌었다. ‘공교육의 정상화’가 어떤 ‘교육’ 효과를 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언표가 분명해졌다. 그것은 사교육비를 줄이는 것이다. 이런 논리(표방)는 이후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10년 정도 지난 2014년 대책의 표제는 “사교육 경감 및 공교육 정상화 대책”이었다. ‘정상화’ 내러티브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사소해 보이지만 간과해선 안 될 변화가 있다. 이전까지 흔히 쓰이던 ‘사교육비 경감’이란 구절이 여기에서 ‘사교육 경감’으로 바뀌었다. ‘비’ 자가 떨어져 나갔다. 사소한 변화가 아닐 수 있다.
‘사교육비 경감’에는 교육의 속성을 건드리는 뉘앙스가 없다. ‘사교육 경감’에서는 다르게 느껴진다. 전자 어구에서는 공교육 ‘전통’을 거스른다고까지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어져 온 전통을 문제 삼음 없이, 다만 공교육의 결과가 사교육 비용을 줄여주는 방향으로 ‘정상화’되어야 한다는 기대를 담은 듯하다. 공/사교육의 내적 통섭(通涉)까지는 계산하지 않은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후자 어구에서는 공교육과 사교육의 교접이 불가능하거나 금기일 이유가 없다는 관념이 내비친다. 만약 공교육에 있을 수 없는 일종의 내성(耐性)이 사교육에 있다면, 공교육이 이제는 그런 성질을 이식해 품으면서라도 사교육 경감(즉, 정상화)을 도모해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말하자면, 학교 교육의 ‘그림자’로 규정되어 오던 사교육(shadow education)에서, 그 그림자의 성질을 벗겨버려도 그만이라 말하는 듯하다. 이 경우 사교육은 학교 교육을 따라 일어나는 ‘그림자 교육’이 더 이상 아니다. 학교 교육과 대등하고, 심지어 학교 교육을 이끌어도 무방한 공공연한 ‘교육’이 된다.
교육부가 가장 최근에(2023년 6월 26일) 내놓은 ‘사교육 경감 대책’에서는 공교육과 사교육의 경계가 무너진 모습을 볼 수 있다. 교육부는 “근본적으로 정규 교실 수업을 혁신하는 ‘공교육 경쟁력 제고 방안’과 연계하여 중‧고등학교의 교과 사교육을 경감한다”고 표방하고 있다. 공교육의 ‘경쟁력’과 사교육 경감이 같은 지표로 가늠될 수 있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교육부는 “유·초·중·고[에서] 사교육 수요 원인별 맞춤 정책으로 사교육 수요를 공교육 내 흡수”하는 대안들을 내놓았다. 학교 교육을 사교육의 수요에 맞춰 재구축한다면서 일말의 저어함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 교육은 어디로?
‘사교육(과외)’을 비교육적으로 규정하고 ‘공교육’의 장에서 그 뿌리를 뽑으려고 애썼던 시대에서 참 멀리 왔다. 멀리 온 것이 아니라, 거슬러 갔다고 이야기해야 맞겠다. 시간으로는 멀리 왔고 이상(理想)으로는 거슬렀다. 학교 교육에서 우리는 과거와 다른 이상을 추구하고 있다. 과거에는 ‘과외’ 교육을 지양했다. 이제는 사교육을 지향한다.
이런 일변(一變)이 잘 된 것인지 못 된 것인지 단언하기는 어렵다. 적지 않은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여길 듯하다. 그렇지만 모른다.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이 방향의 변화를 지지했을 터이다. 적어도 정부는(대통령이나 국회의원과 같은 정치인들도) 그렇게 여겼다. 변화는 획기적이었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깊이 성찰한 결과는 아니었다. 발표가 잦았던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책들을 저질러 온 결과이다.
이제까지 걸어 온 대로 갈 때 사교육 대책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그보다 먼저, 사교육 대책이 겨냥해 온 ‘성과’는 도대체 무엇인가? 국민이 입시 경쟁에 돈을 덜 들이게만 되면 공교육은 정상화되는 것인가? 학교는 국민 사이의 지위 경쟁을 돕기(?) 위해 있는가? 학교가 도울 수 있기는 한가? 이런 질문과 이어질 토론은 이제부터라도 필요하다. 뒤늦었지만 거를 수는 없는 일이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