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육학의 현실, 세 번째 이야기 : 맹목적 보수성
| 이 글은 한국 교육학의 현실에 관한 세 번째 이야기로 교육학의 맹목적 보수성을 논의한다. 이 글의 순서는 아래와 같다.
1. 교육은 본래 보수적일까? |
1. 교육은 본래 보수적일까?
교육은 본래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만일 변한다고 해도 다른 모든 게 달라지고 나서 마지막으로 변해야 하는 것이 교육이라고 말한다. 교육의 본분은 과거 유산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수하여 유지하는 데 있다는 말이다.
오래전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교육은 이 사회의 정체성과 안정을 이어가는 최후의 보루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렸었다. 그러나 교육학을 조금 공부하고 나서는 갸우뚱해졌다. 교육은 한편으로 과거의 문화유산을 후세대에 전달하는 기능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지식이나 가치를 발견하고 확산하여 기존 사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기능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후 사회운동과 교육운동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고부터는 어떻게 하면 교육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가에 온통 관심을 쏟았다. 그즈음에 이르러서는 교육이 본래 보수적이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보다는 반감이 컸다.
교육이 보수적이라고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교육의 의미를 ‘전수’, 즉 과거의 지식이나 가치 혹은 문화를 성인 세대가 새로운 세대에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홍우 교수가 『교육의 개념』(1991)이라는 책에서 교육의 대표적인 개념으로 제시한 ‘성년식 개념’이나 ‘사회화 개념’이 그 전형이다. 지식이나 문화는 어느 특정인이나 특정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오랜 인류의 진화와 역사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형성되어 전해 내려온 유산이다. 이것을 후세대에 잘 전수하는 것은 인류의 생존을 이어가기 위한 필수 과업이며, 따라서 성인 세대의 중요한 임무이다.
이런 관점에서 교육은 곧 ‘가르침’과 동의어가 된다. 흔히 교육의 의미를 교사의 가르침과 학생의 배움을 연결하여 설명하기도 하지만, ‘敎育’(가르치고 기름)이라는 글자의 뜻풀이나 앞에서 말한 교육의 개념, 그리고 실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 방식 등을 통틀어 학생의 ‘배움’이 오롯이 들어설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거기서 억지로나마 학생의 배움을 찾는다면 단지 무조건적인 ‘받아들임’일 뿐이다.
이런 관점은 학생이 아직 어리다는 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점을 분명하게 표현한 사람은 영국의 교육철학자 R. S. 피터즈이다. 그는 민주사회에서 누구든 자유를 누려야 하지만 아동의 자유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이훙우 역, 1980:202-204). 만일 스스로 통제할 줄 모르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능력도 없는 아동들에게 아무런 구속과 제재가 없다면 교육이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가 제시한 교육의 성년식 개념과 이어진다.
물론 이러한 관점이 교육을 보는 유일한 견해는 아니다. 근대 학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인 16세기 초에 이미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아동이 자유로운 존재이며 따라서 그러한 특성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우메네사토루, 김정환·심성보 옮김, 1990:185). 그러한 생각은 18세기 루소의 등장으로 비로소 세인의 조명을 받게 되었고, 20세기 진보주의 교육에 이르러 이론적 기반과 함께 대중화되었다. 아동중심 교육에서 출발한 이 대안적 관점은 점차 가르침보다 배움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발전하였고, 최근에는 21세기 역량 교육과 결합하여 ‘더 나은 세상 만들기’ 교육을 구체적으로 모색(마크 프렌스키, 허성심 옮김, 2019)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교육 현실은 이러한 대안적 흐름과는 아직 거리가 먼 것 같다. 교육이 새로운 세계를 향하기보다 학생들을 과거 세계에 머물도록 하는 압력이 여전히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압력의 형태는 주로 입시나 생존경쟁과 같은 현실적 요소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변화보다는 현실 고정을 지지함으로써 그러한 현실적 요소들을 응원하고 감싸주는 이론적 배경도 무시하기 어렵다. 여기서 나는 그것을 교육학의 ‘맹목적 보수성’이라고 부르고, 이하에서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2. ‘제도의 아름다움’에 나타난 보수의 논리 구조
‘제도의 아름다움’(이하 ‘아름다움’)은 이홍우 교수의 『교육의 목적과 난점』에 실린 11번째 글이다1. 내가 파악한 이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즉, 일부 낭만주의적 교육자들이 기존의 교육을 비판하면서 바꾸려고 하지만, 변화는 그렇게 일어나는 게 아니다. 현재의 교육제도는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형성된 하나의 완전체이며, 따라서 거기에 순응하는 게 최선이다. 단, 여기서 말하는 제도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제도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이하에서는 ‘아름다움’의 논리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이홍우 교수의 극단적 보수성이 어디에서 비롯되고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 가늠해 보고자 한다.
○ 낭만주의 교육에 대한 비판
‘아름다움’의 본론2은 섬머힐 학교를 세운 A. S. 니일과 탈학교론으로 유명한 I. 일리치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한다. 이홍우 교수는 그들의 주장을 ‘유치한 낭만주의의 수사학’으로 규정하고 그 말에 혹하는 사람들을 ‘가냘픈 젊은이’나 ‘강인한 논리에 시달려 본 일이 없는 유치한 어른’으로 묘사한다. 그러면서 니일의 논리적 취약성을 다음과 같이 논박한다.
니일은 ‘나는 섬머힐 학교 아이들이 장차 신경질적인 대학교수보다 행복한 청소부가 되는 것이 더 소원이다’라고 말하고 있고… (중략) (이 말은) 부모 또는 선생에게서 공부를 강요당한 결과로 대학교수가 되면 그 사람은 신경질적일 수밖에 없고, 그런 압력을 받지 않아서 매일 빈둥거리다가 청소부가 되면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연상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중략) 대학교수라 하여 누구나 신경질적인 것도 아니요, 청소부라고 하여 누구나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211).
이홍우 교수는 여기서 ‘강인한 논리’로 니일을 때려눕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위의 반박은 니일의 진정한 의도를 겨냥하기보다 지엽적인 표현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논리적 반박이라기보다 낭만주의적 사고에 대한 감정적 거부라고 보는 게 온당할 것이다.
다음의 비판은 좀 더 신랄하다. 개인이 제도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도덕적으로도 틀렸고, 나아가 위험하기까지 하다고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낭만주의적 사고는 교육 자체의 포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개인에 의한 제도 변화가) 낭만주의적 사고방식에 기초를 둔 것일 때, 그것은 그야말로 지적으로 그릇되고 도덕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 낭만주의는 모든 ‘인간다운 점’을 제도의 영향 밖에서 구하려고 하는 사고방식입니다. (…) 철두철미 제도의 바깥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준’이 없이 살아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기준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요, 결과적으로 기준이 없이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223).
그러나 이 비판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 우선, 낭만주의를 ‘철두철미 제도의 바깥에서 살 수 있다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지만, 니일이나 일리치가 그런 종류의 낭만주의자인지는 더욱 의문스럽다. 이홍우 교수의 지레짐작과 달리 실제로 섬머힐의 상황을 보면 아이들이 나름의 확실한 ‘기준’을 배우고 또 그 기준에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리치가 제시한 대안적 교육체제에 대한 비판은 학습자의 자발성이나 대중문화에 대한 이홍우 교수의 편향된 시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의 교육이 마치 ‘강요’에 의해 성과를 거두는 것처럼 말하는 대목이다. 바람직한 결과를 위해서 강요 체제가 불가피하다는 말은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그런 방안으로 교육을 하더라도 그중에는 미분방정식을 배우려고 동료를 규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낮이나 밤이나’보다는 차이콥스키 음반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처럼 생각될지 모르지만, 한 세대, 두 세대가 지나고 차차 ‘강요’의 영향이 사라져가면, 사람들이 배우고 싶어 할 것이라고는 당장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기술이 아니면 유치한 감각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들에 철저하게 국한되고 말 것입니다(229).
이상에서 보듯이, 이홍우 교수의 낭만주의 교육 비판은 논리적이기보다 다분히 감정적이고 독단적이며, 교육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니일이나 일리치는 일종의 논리적 소모품이라 할 만하다.
○ 의도적 베일로 가린 제도의 변화
‘아름다움’에서 이홍우 교수가 말하는 ‘제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법이나 행정 제도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는 이 점을 ‘가족제도’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제도’란 ‘집단생활 속에 붙박혀 있는 논리적 가정’이다. 이것은 다음의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첫째, ‘제도’는 개인에 비하여 ‘논리적’으로 앞선다.
둘째, ‘제도’는 집단활동 방식의 논리적 분석에서 나오는, 그 활동의 ‘의미’이다.
셋째, 제도는, 그 안의 요소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연관된, 하나의 ‘총체’이다.
그렇다면 ‘제도’는 영원한가? 그렇지 않다. 변화는 필연적이다. 그렇다면 변화는 왜, 어떻게 일어나는가? 이에 대해 이홍우 교수는 자신이 잘 모를뿐더러 관심사도 아니라고 하면서 대신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개인이 ‘제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태도를 가지도록 개인을 교육해야(원문 강조) 하는가?”3
이 질문에 이어지는 긴 논의는 변화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우회적 설명으로 볼 수 있다. 이홍우 교수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인간의 활동에는 그 의미가 논리적 가정으로 들어 있다―제도의 발전은 현재의 활동이 그 의미를 더 완전하게 구현하는 방향으로 바뀔 때 이루어진다―제도의 변화를 판단하는 기준은 하나의 활동이 그 의미를 더 완전하게 구현하게 되었는가 아닌가에 있다. (…) 이렇게 볼 때 제도의 발전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과거’에 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현재의 활동이 그 의미를 더 완전하게 구현하는 방향으로 바뀔 때’는 언제이고 그 이유나 동인은 무엇인가? 이홍우 교수는 제도 변화를 위한 개인의 노력을 극구 부정하면서도 기존 제도의 불완전함이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는 동인이 무엇인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침묵은 현실 제도에 불만을 품은 무수한 개인들의 노력과 희생에 대한 의도적 무시로 보인다.
또 다른 의문은, 제도 발전 여부를 누가 어떻게 판단하는가이다. 판단 기준이 ‘과거’에 있다는 말은, 제도가 처음 형성될 당시에 이미 활동의 완전한 의미(=기준)가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야만 불완전하게 구현된 제도가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변화될 때 그것이 더 완전한 방향으로 진전되었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된다. 처음 제도가 형성될 무렵에 완전한 의미가 마련되어 있었을 리도 없고(물론 그는 논리적으로 그렇다고 할 것이다), 또 후세에 그것을 충족하기 위해 제도가 스스로 변화한다는 말도 수긍하기 어렵다. 여기서도 이홍우 교수는 제도를 바꾸기 위한 개인들의 투쟁과 시행착오, 그리고 그 결과 등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일부러 외면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반복되는 이러한 의도적 무시는 결국 기존 제도를 따라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적 편법이라고 생각된다.
○ 이홍우 교수의 맹목적 보수성
앞서 말한 이홍우 교수의 ‘의도적 무시’는 급진적 비판에 대한 강한 반감의 발로이다. 그는 비판적 주장들을 정확하게 요약한 후 ‘솔직히 그들의 역사를 보는 눈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구했을 때 과연 세상의 모습이 어떠하겠는가를 저는 전율 없이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라고 못 박는다. 아마도 그에게는 급진적 비판론자들이 마치 탈레반과 같은 파괴적 존재로 생각되는 것 같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현재의 교육제도를 옹호한다.
개인의 자유라든가 정체성, 합리성 등등, 개인의 모든 ‘인간다운 점’들은 제도에 의하여 부여되고 제도 속에서 의미를 가지며, 현재의 제도는 비록 불완전하기는 하나 우리가 그런 인간다운 점들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라고 보는 방식이 있는 것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교육제도가 나타내고 있는 ‘강요의 체제’는 바로 개인이 그 인간다운 점들을 체득하고 구현하는 데에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됩니다. 그것은, (…) 교육이라는 활동 내부에 들어 있는 의미를 점점 더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도록 발전되어 온 것입니다(227).
이런 시각에서는 기존 교육제도의 문제로 지적되어 온 시험이나 경쟁, 획일적인 교육, 잘게 쪼개진 교과 체제 등등이 하등 문제 될 게 없고 오히려 ‘필요한 제도적 장치’가 된다. 따라서 그는, 비록 개인들이 보기에 그것들이 아무리 불합리해 보여도, 그대로 수용하면서 “제도에 들어 있는 생각을 분석해 낼 때, 우리는 제도를 이해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게” 된다고 역설한다(227). 현재의 교육에 대한 어떤 비판도, 어떤 이견도 용납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입장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특성은 맹목적 보수성 이외의 다른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3. 보수성의 연원
이런 보수성의 연원으로는 세 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그의 연역적 사고방식이다. 이홍우 교수의 교육에 관한 논의는 기본적으로 이론과 실제, 논리와 사실의 이분법 위에서 전개된다. 『교육의 개념』에서도 그는 ‘보는 지식’과 ‘하는 지식’, ‘이론적 지식’과 실제적 지식‘을 대비시킨다(67). 전자는 논리의 세계이고, 후자는 사실의 세계이다. 그가 지향하는 교육은 전자이다. 후자는 굳이 교육이 아니라도 일상이나 산업 현장에서 얼마든지 접하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이홍우 교수의 사고 체계에서는 이론·논리의 세계가 실제·사실의 세계와 절연되어 있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에서는 관찰을 통해 발견된 어떤 사실이 일반화될 때 비로소 이론이 되지만, 그의 사고 속에서는, 앞의 낭만주의 교육 비판에서 알 수 있듯이, 사실이 아무리 쌓여도 이론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예를 들어 현재 교육제도의 과오가 아무리 커도 그 이유로 제도를 비난하거나 바꿀 수 없다고 본다. 이것은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무오성(無誤性)’과 다름이 없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는 모든 판단이나 행동이 연역적으로 처방된다. 즉, 어떤 명제가 전제되면 나머지는 모두 거기에서 논리적으로 연역된다. 그의 맹목적 보수성은 여기서 비롯된다. ‘아름다움’에서도 그는 플라톤의 「향연」과 그 내용의 일부인 ‘제도의 아름다움’을 소개한 뒤, 일관되게 현재 제도의 이론적 정당성을 옹호한다. 이 양자가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것인지조차 근본적인 의문이지만, 그가 애용하는 사실과 논리의 이분법에 비추어 ‘논리’(그가 말하는 ‘제도’의 의미)에서 사실(현재 제도의 정당성)을 연역하는 그의 논리 전개가 타당한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둘째, 교육에 대한 그의 극단적 보수성은 현실과 괴리된 사고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섬머힐 아이들은 이홍우 교수가 염려하듯 아무런 ‘기준’ 없이 난장판으로 살지도 않고, 오히려 사회에서 제 역할을 할 정도로 ‘기준’을 체득하고 졸업한다. 그렇다고 니일이 자신의 원칙을 위배하여 적절하게 통제한 결과도 아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 교육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말하자면, 현실에서는 기존 제도와 다른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바람직한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전제한 원리나 개념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것이 무엇이든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학문적 엄밀성이 아니라 독단이다. 그분의 학문적 성실성에 대해서는 나를 포함해 누구나 다 존경해 마지않지만, 그 결과가 독단의 폐해로 나타난다면 충분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게 후학들의 온당한 길이라 믿는다.
셋째, 그의 보수성은 그가 애용하는 논리 구조 자체에 이미 붙박혀 있다. 앞서 인용했듯이, 그는 ‘제도’의 의미를 ‘집단생활 속에 붙박혀 있는 논리적 가정’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 말의 의미를 실제에 비추어 해석하면, ‘현 제도의 이상적인 형태’ 또는 ‘현 제도가 목적하는 최선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이론이 현실과 만났을 때 초래할 수도 있는 부작용이나 시행착오를 배제한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이홍우 교수는 이 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야말로 위험천만한 독단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자칫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일제 강점기의 교육도 ‘선’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들도 비록 불완전하나마 ‘세계 평화’나 ‘동양 평화’라는 ‘완전한 의미’(혹은 ‘기준’)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4. 결론에 대신하여
사람마다 ‘한국 교육학이 보수적이다’라는 말에 대한 느낌은 다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처음부터 그렇게 단정한 이 글에 대해 반감을 갖는 분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또 ‘보수적’이라는 말의 의미도 서로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보수적’이라는 말을 다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우선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기존의 교육제도와 방식을 고수하려는 경향으로 생각했다. 교육학자들은 한편으로 기존 제도의 문제들을 즐겨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지만, 따지고 보면 아랫돌 빼서 윗돌 메우기식의, 기존 패러다임을 답습하는 태도를 견지해 왔다.
다음으로, 앞의 태도와 연결되어 기존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개선안이나 실천에 대해서 동조하지 않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그 현실적인 이유의 하나는 자기들의 학문적 지위나 이해관계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겠지만, 이론적으로는 교육에 대한 새로운 제안이나 접근을 이단시하는 사고방식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러한 사고방식이나 태도의 정점에 이홍우 교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무례함을 무릅쓰고 이 글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지막으로, 학문적 논의에서 적절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한국 교육학자들의 절대다수가 정치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보여왔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정치적 보수집단은 과거의 양반 계층과 일제 강점기 지주나 친일 협력자를 배경으로 하고, 해방 후 군사 독재 정권과 재벌 및 그들의 후예와 동조자로 요약할 수 있다. 국가의 장래나 새로운 세대의 앞날을 생각할 때, 나는 교육학자들이 그처럼 편향된 정치 성향을 보인다는 사실이 온당한 것인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수없이 자문하곤 했다.
생각을 달리하면, 교육은 보수적이 아니라 진취적인 인간 활동이다. 그것은 과거 회귀나 현실 안주보다는 미래의 새로운 세계를 지향한다. 인공 지능을 비롯한 수많은 도전이 밀려오는 오늘날에는 이것이 더욱 절실하다. 그러기에 기성세대는 새로운 세대에게 더 많은 도전의 기회를 마련해 줘야 한다. 공자님 말씀도 소크라테스의 지혜도 소중하지만, 그것들은 새로운 시대 상황에 맞게 재해석될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교육학과 교육학자들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답해야 할 책무가 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참고문헌
• 마크 프렌스키(허성심 옮김, 2019). 미래의 교육을 설계한다. 한문화
• 우메네사토루(김정환·심성보 옮김, 1990). 세계교육사. 풀빛
• 이홍우(2019). 교육의 목적과 난점(제7판). 교육과학사
• 이홍우(1991). 교육의 개념. 문음사
• 피터즈, R. S.(이홍우 역, 1980). 倫理學과 敎育. 교육과학사
각주
현재 건신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이후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원장, 한울고등학교 교장, 이우학교 초대 이사장, 참여정부 교육혁신위원회 상임위원, 교육을바꾸는사람들 21세기연구소장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 외에 '사회정책 제3의 길(2008), 대안교육 이해하기(2007), 현대사회와 교육의 이해(2004), 고등학교 교육학(2002)' 등 다수의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