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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한국 교육학을 향한 고언(苦言)과 진언(進言) – 서장

#962 이종태, 건신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2023.09.20
“새로운 논점을 제기함으로써 기존의 한국 교육학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고, 공동의 노력으로 그것을 극복해나감으로써 교육학의 현실 적합성을 높여나가기를 바란다. 이 글이 그러한 대장정을 위한 작은 출발이기를 기대한다.” (본문 발췌)

 

 

1. 시작하며

 

우리의 교육 현실이 언제 만족스러운 때가 있었나 싶기는 하지만, 지난 세기말 이후 특히 최근에 이르러 거대한 학교 체제가 폐섬유화증 환자처럼 활력을 잃어가는 양상이다. 기우라면 좋겠지만, 이러다가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아예 호흡이 멈추지나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이러한 국면에서 교육학의 목소리가 커질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왜 교육 난세에서는 춘추전국시대의 백가쟁명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국내 교육학자들만 해도 수천 명이고, 그들이 속한 수십 개의 학회들이 매년 엄청난 양의 논문을 쏟아내고는 있다. 하지만 이들이 교육 현장이나 사회의 이목을 끌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육학자들이 무능하거나 게으른 탓일까 아니면 교육학이란 본래 현실에 무관심한 학문인 것일까? 도대체 교육학이란 어떤 학문이며 왜 존재하는 것일까?

 

이 글은 이런 의문들에서 출발한다. 물론 사람마다 학문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서 내놓는 답도 제각각일 것이다. 그런데 학문을 보는 시각이 어떠하든지 간에, 사람들이 힘겨워하는 핵심 문제들을 제쳐 놓고 자기 입맛에 맞는 주제만 다루거나 공허한 담론에 몰두하는 학문이라면 사회적으로 환영받기 어려울 것이다. 대개 학자들의 학문 활동이나 생존은 국민 세금으로 영위하기 때문에 그런 태도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무책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 교육학이 이런 형국에 놓인 게 아닌가 싶어 교육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불편하다.

 

아마도 한두 편의 글로써 속 시원한 답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몇 권의 책에 담을 만큼 긴 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으로서는 어떤 결말에 이르게 될지도 모르지만, 일단 한국 교육학에 돌을 던진다는 심정으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아마도 적지 않은 분들이 불편해할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이 글은 오랜 시간 교육과 씨름해 온 나 자신을 향한 성찰과 비판의 독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는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가지 주제에 관해 일련의 글을 쓰려고 한다. 오늘 이야기는 그러한 논의를 시작하는 서장이자 일종의 밑그림이다.

 

첫째 주제는 ‘한국 교육학의 현실’이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육학은 대학들의 생존을 위한 취업률 경쟁에 밀려 소수 대학을 제외하고는 교직학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교직과목이 실제로 그 이름처럼 교사 양성과정에서 유의미한 역할을 한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교육학이 이름에 걸맞게 주목할 만한 교육 이론을 내놓거나 혼란스러운 교육 현실에 도움이 될 만한 진단과 처방을 제시하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한국 교육학이 하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지금 어떤 양상으로 존재하며, 어떤 문제를 안고 있을까? 이와 관련하여 장상호 원로 교수가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제기한 통렬한 비판은 귀 기울일 만하다. 그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만, 앞으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그의 주장을 소개하고 나름의 비판적 의견을 덧붙일 예정이다. 아울러 한국 교육학의 전개 과정에서 뚜렷한 목소리를 냈던 원로 학자들 몇 분의 주장도 비판적으로 훑어볼 것이다. 전체적으로 논리정연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주제의 논의를 통해 한국 교육학의 난맥상과 정체성 혼란의 일부나마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주제는 ‘한국 교육학의 형성 과정’이다. 여기서는 한국 교육학이 어떤 배경에서 무슨 연유로 지금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 살필 것이다. 장상호 교수는 현존하는 한국 교육학은 교육학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교육학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모든 논의와 저술을 한국 교육학의 내용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제1부에서 드러낸 한국 교육학의 현 실태가 어떤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를 주마간산 격으로나마 짚어볼 것이다. 이 주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학사적(學史的) 접근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시간과 지면의 제약, 그리고 더 크게는 필자의 무능 탓으로 일면적인 고찰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셋째 주제는 ‘교육학의 학문적 성격’이다. 여기서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일반적인 학문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교육과 교육학에 대한 기존의 통념적 시각을 깨고 아주 낯선 이야기를 시도해 보려고 한다. 제2부가 현재의 한국 교육학을 배태한 직접적 원인(原因)을 살피기 위한 것이라면, 이 부분은 한국 교육학의 기본적인 특성을 규정하는 원인(遠因)을 따지는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교육과 교육학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하는 작업이기도 한데, 기존의 관점과 정면으로 충돌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이 현존하는 교육학을 새롭게 해석하고 성찰하기 위한 의미 있는 자극제일 수 있기를 바란다.

 

넷째 주제는 ‘한국 교육학을 위한 진언(進言)’이다. 과대망상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이 부분은 앞의 세 주제를 관통하는 기존 교육학의 근원적인 한계를 총정리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시하려는 내용은, 대안교육을 ‘오래된 미래’로 부르듯이, 아주 새로운 게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교육 사상과 실천의 한 흐름을 새롭게 드러내어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흔히 루소의 교육 사상을 교육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들 하지만, 여태껏 주류 교육에서 그의 생각이 실현된 적은 없다. 실제의 전환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제는 그 전환의 기미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내가 오늘날 한국 교육이 당면한 위기의 본질이 ‘가르침’을 기본으로 하는 기존의 교육 패러다임에 기인하며, 위기 탈출을 위해서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수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사실 공교육 체제에서 그것의 본질은 국가의 의도이자 요구이고, 교사는 그것을 실행하는 매개자일 뿐이다. 학습자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한 체제는 일종의 폭력으로 작용해 왔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최근 인공지능을 필두로 한 다양한 미래의 도전 앞에서 기존 체제의 한계는 더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오래된 미래’로의 회귀를 통해 한국 교육의 희망을 새롭게 찾을 수 있으며, 한국 교육학이 이를 준비해야 한다고 믿는다.

 

 

2. 교육학과의 만남

 

본래 나는 자연과학(미생물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 게 아니어서 그런지 3년의 전공 과정 내내 별 흥미를 못 느꼈고, 대학 후반에는 주로 사회과학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당시 나는 정치적으로 순진한 기독교 신자였으면서도 유신 체제라는 폭압적 정치 현실을 바꾸는 게 우리나라의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의 자연과학도들이 대개 정치 현실에 무관심한 현실을 보고 자연과학에서 멀어지게 된 게 아닌가 싶다. 나는 대학 4학년 2학기 중 어느 날 피 말리는 여러 날의 고민 끝에 진로 변경을 결심했고, 결국 대학원을 교육학과로 진학했다.

 

대학원생이었지만 나의 주된 관심사는 학문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바꾸는 데 있었다. 진학을 결심할 무렵 가졌던 유일한 관심이 파울로 프레이리의 의식화 교육론이었으나, 대학원에서 접한 교육학은 사회변혁은커녕 교육 현실 자체와도 동떨어져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학위를 받고 뒤늦게나마 강의와 연구 업무에 종사하게 되면서부터는, 내 의식 한구석에 아직 교육을 통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미련으로 남아 있기는 했지만, 당면한 교육 문제들의 기능적 해법을 찾는 일에 전념했다.

 

그런데 그 경험이 어느 정도 쌓여 비로소 우리 교육 현실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나는 절망하고 후회했다. 그 무렵 나는 당면한 교육 현안에 대한 해법을 찾아 이리저리 고민하다 보면 10분도 채 되기 전에 심한 두통을 느끼곤 했다. 교육 문제라는 게 모두 거대한 이념적 정치적 족쇄와 복잡한 이해관계, 그리고 공고한 기득권 구조를 배경으로 하여 심하게 꼬인 실타래 같은 것들이며, 따라서 어떤 변화의 실마리조차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아! 내가 교육학을 잘못 선택했구나!’ 하는 장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교육학자로 산다는 것은 마치 시지프스처럼 절망을 안고 사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이미 ‘배운 도둑질’이 된 교육학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이후 기존 교육학을 좀 더 비판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차츰 기존 교육학은 교육의 본질을 잘못 보고 있으며, 결국 그 주된 역할은 국가와 지배 계급의 교육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 교육학은 정상적인 학문이라기보다 일종의 관학(官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교육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오래전부터 대안교육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이런 생각들은 자연스럽게 기존의 교육 개념과 교육학 체계를 뒤집는 대안적 교육학이 필요하다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이런 생각 또는 그 연장선에 있는 내용들을 담게 될 것이다. 물론 그중에는 아주 설익은 생각들도 적잖이 포함될 것이다. 기존 교육학자들에게 상당히 낯설고 이단적일 수 있는 설익은 생각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일 자체가 무례이기에 선배나 동료 교육학자들에게 송구스럽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한국 교육 현실과 교육학 상황이 돌들이라도 소리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의 절박한 위기라고 생각한다. 감히 이런 충정에 기대어 이 글의 무모함과 무례함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3. 존재감 없는 교육학

 

앞에서 나는 교육학이 교육 난세의 국면에서도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정체성과 존재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런데 이 말은 현실 문제의 해결에 무기력한 교육학을 힐난하자는 게 아니다. 현실의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하는 학문은 어디에도 없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예컨대 사회문제와 사회학, 경제문제와 경제학의 관계가 다 그러하다. 현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 복합적인 인과관계의 산물이어서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학문적 지식이 필요하고, 해결을 위해서는 복잡한 이해관계 조정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교육학이 ‘현실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서두에서 꺼낸 이야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지난 세기말 이후 우리 교육은 그 유례를 찾기 힘든 큼직한 사건들을 연이어 경험하고 있다. 교육 대학살이라고 할 만한 전교조 조합원의 대량 해임·파면 사태가 있었고, 단군 이래의 최대 변화라고 할 만한 5·31 교육개혁도 단행되었다. 사교육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교육 원칙을 거스르는 정책들(예컨대 EBS 교재와 연계한 수능 출제)이 국가 이름으로 시행되고, 극심한 사회적 논쟁을 겨쳐 대입 전형 방법을 결정하기도 했다. 고교 학생들의 전국적인 집단행동이 지방자치단체의 학생인권 조례 제정을 촉진했고, 그 반작용으로 교권 보호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그것은 다시 일부 학부모의 과잉보호 반응을 자극했다. 이 과정에서 누적된 교사들의 피로와 스트레스는 최근 교사의 연이은 비극적 선택으로 표출되었고, 문제의 근원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교사들의 분노가 전국에 들불처럼 번지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보면, 거의 예외 없이 교사나 학생 집단이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가 정책 방안을 만들어 마무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주역은 교사(학생)와 정부로 보인다. 하지만, 교사나 학생 집단은 직접적 이해 당사자이면서도 실제로 문제 해결 과정에서는 객체로 밀려나고 정부의 역할이 압도적이다. 정부가 실질적인 주체인 셈이다. 그런데 정부 뒤에는 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획자가 있다. 바로 권력을 장악한 정파(정당)이다. 이들은 정부(부처)를 움직여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책을 만들어간다.

 

이들이 추진하는 문제 해결 과정의 핵심은 이해집단 간의 의견 조정이다. 물론 이것은, 일방적인 명령과 지시가 통했던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과 달리, 어느 정도 형식적인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나타난 근래의 현상이다.1 이것은 교육 문제의 해결이 정치적 타협과 절충, 즉 정치적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사회의 굵직한 교육 쟁점들은 더 이상 교육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정치문제로 접근해야 비로소 해결 가능성이 열린다는 뜻에서다.

 

이러한 시각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대개의 교육 관련 사태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국가 재정력이나 행정력의 동원 또는 국회 입법 절차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 과정을 주도하는 주체는 정부 권력을 장악한 정치집단이며, 그들은 다음 선거의 지지층 확대를 위해 현안으로 떠오른 사안들을 최대한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하려고 한다. 특히 그것이 선거의 승패를 좌우할 정도의 사안일 경우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교육의 관점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교육 관련 사건이나 쟁점들이 단지 정치적인 방식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다면, 그러한 사건이나 쟁점에 내재한 본래의 교육적 가치나 목표는 포기해도 좋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교육부와 교육정책은 왜 있으며, 교육이라는 영역은 왜 별도로 존재하는가? 교육학과 교육학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러한 일련의 의문들은 교육 관련 쟁점들을 정치 문제로 바꿀 수 없다는, 일종의 교육학적인 반발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해결을 위해 정치적 과정을 거쳐야 할지언정, 해결 방향이나 그 내용 요소들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교육적 가치나 원칙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요구인 셈이다. 이는 또 정치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해서 교육적으로는 해결된 것도 아니며, 동시에 그것은 또 다른 정치적 문제를 낳을 뿐이라는 판단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난 세기말 이후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숱한 교육 관련 현안과 쟁점에 관한 논란에서는 이런 교육학적인 반발의 목소리가 없거나 있다고 해도 아주 작았다. 여기서 말하는 반발의 목소리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적어도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킬 만한 학회나 교육학자 집단의 목소리를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행위로 보일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교육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교육학적 반발인 동시에 준엄한 학문적 행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교육 난세임에도 불구하고 교육학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지적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다양한 사건들과 쟁점들에 관하여 정치적 과정에만 맡기지 말고 교육학적 해석과 진단 또는 교육학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하는 처방이나 대안을 제시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최근 나는 우리 사회에서 교육학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음을 상징하는 한 현상을 확인하였다. 예전에는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가면 교육학 서적들이 넓은 서가를 여러 칸 차지하고 있었는데, 근래에 가보니 단 한 칸의 서가로 좁혀져 있었다. 교육학 서적 수요가 그만큼 줄었다는 방증이다. 다른 이유에서지만, 장상호 교수도 최근 저서에서 교육학이 대학에서 통째로 사라질 수도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장상호, 2020).

 

누군가는 유식한 말로 ‘올빼미는 황혼이 되어서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라고 핑계를 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올빼미가 죽은 다음에야 황혼이 오는 건 아닐까?

 

 

4. 교육학의 존재 이유

 

학문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여기서 이 질문을 꺼내는 이유는 본격적인 학문론을 논하자는 데 있지 않고 학문 분야의 하나로 존재하는 교육학의 성격과 그것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 보자는 데 있다.

 

일단 선배 학자의 학문론에 기대어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일찍이 국문학자 조동일 교수는 『우리 학문의 길』(1993)이라는 책을 통하여 한국 사회 토양에 적합한 학문 탐구의 필요성을 역설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그것은 80년대 사회운동에서 시작된 민족 자주 의식의 학문적 반영으로서 모든 학문 분야에서 일어났던 식민성 극복 및 토착화 관련 논의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서문에서 ‘왜 우리 학문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이제는 우리 학문이 ‘의존에서 자립으로, 수입에서 생산으로’ 방향을 바꿔야 할 때가 되었음을 천명하였다.

 

그는 ‘학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으로 다음의 네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학문은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이다. 학문은 논리로 이루어진다. 학문은 실천의 지침인 이론을 마련한다. 학문은 독백이 아니고 대화이다.’ 이 명제들은 학문의 의미와 성격에 대한 답인 동시에 그의 입장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오는 것은 ‘진실’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흔히 객관적 사실을 가리킨다고 하지만, 자연 현상을 다루는 자연과학에서조차 객관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토마스 쿤(1962, 김명자·홍성욱 옮김, 1999)의 통찰을 고려하면 그마저도 머뭇거려진다. 더구나 실증주의 논쟁에서 핵심 쟁점이었던 가치 중립성 문제에 이르면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객관적 사실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러한 문제들을 논할 여유는 없으므로 일단 덮어두고 교육학의 문제로 관심을 돌려보자. 어떻게 평가하든 간에, 현실적으로 교육학은 하나의 학문 분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교육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앞의 첫 번째 명제에 대입하면, 교육학이란 교육에 관한 진실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그리고, 뒤의 명제에 따라 그것은 논리로 이루어지며 교육 실천의 지침이 되는 이론을 마련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점은 ‘교육 실천의 지침이 되는 이론’이라는 명제이다. 이 명제는 학문의 존재 이유를 명시한다. 학문이 진실(리)을 탐구하고 논리로 구성된다고는 하지만 그 궁극적인 존재 이유가 실천의 지침이 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육학 역시 교육 실천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고 실시간으로 교육 실천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실천과 무관한데도 실천의 지침이 될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육학이 교육에 관한 진실(객관적 사실)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말과도 통한다. 교육에 관한 진실(객관적 사실) 역시 교육 실천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존하는 한국 교육학은 교육 실천과 유리되어 있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그러한 평의 원천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생적인 학문이 아니라 외국에서 수입된 학문이라는 점이다. 교육학의 주요 개념이나 이론의 출처가 외국의 교육 실천이다 보니 설사 잘 정비된 교육 이론이라 하더라도 우리 현실과 맞지 않아 그 지침이 되기 어렵다. 교육학자들의 먼 산 바라기 태도는 이러한 상황을 더 악화시킨다. 비록 수입 학문이라 하더라도 현장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그 실천적 적합성을 키울 수 있을 테지만, 교육학자들이 교육 현장을 찾아 호흡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2

 

교육 이론과 실천이 따로 존재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일부 교육학자들이 학문 연구란 본래 실천과 직접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구체적인 교육 실제에 관해서는 처음부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고도의 추상적인 논리나 개념 세계에 머물면서 교육의 의미와 목적, 가치 등을 논한다. 혹 이런 이야기들이 어떤 예비교사들에게는 장차 교직 생활의 의미를 찾는 데 도움을 줄지도 모르지만, 수강자의 대부분은 자기가 무슨 강의를 들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한 채 교직 현장으로 갈 것이다.

 

 

5. 새로운 한국 교육학을 향하여

 

변죽만 건드린 셈이지만, 나는 지금까지 말한 이유 등을 근거로 제법 오래전부터 한국 교육학을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한국의 교육 실천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며, 한국 교육이 안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들과 실시간으로 씨름할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 교육학에서 당연시 해온 교육의 개념이나 관행, 교육학 체계 등을 전면적으로 재검토하고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대안의 원천은 이미 국내에서 30년 이상 역사를 가진 대안교육 운동의 다양한 경험과 실천 사례들, 그리고 세계 역사에서 이미 존재했던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사례들이다.

 

물론 교육학을 다시 쓴다는 말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앞에서 인용했듯이, 학문이란 독백이 아니라 대화이기에 어떤 학문의 개념과 체계를 한두 사람이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다시 쓴다는 말의 실질적인 의미는 새로운 논점을 제기함으로써 기존의 한국 교육학이 가진 한계를 드러내고, 공동의 노력으로 그것을 극복해나감으로써 교육학의 현실 적합성을 높여나가자는 것이다. 나는 이 글이 그러한 대장정을 위한 작은 출발이기를 기대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참고문헌

 

• 장상호(2020). 『교육학의 재건』. 서울:교육과학사
• 조동일(1993). 『우리 학문의 길』. 서울:지식산업사
• 토마스 쿤(1962, 김명자·홍성욱 옮김, 1999). 『과학혁명의 구조』. 서울:까치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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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조정이라고는 하지만 공정한 타협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의 불완전한 민주화를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정부를 장악한 권력 집단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귀결된다.
  2. 교사 양성기관의 교수 중 초중등 학교 교직 경험을 가진 교수가 극소수라는 점도 문제이다. 교육 현장의 구조나 생리도 잘 알지 못하는 교수들이 장차 예비교사들이 교직에 잘 적응하도록 지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건신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이종태

현재 건신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이후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원장, 한울고등학교 교장, 이우학교 초대 이사장, 참여정부 교육혁신위원회 상임위원, 교육을바꾸는사람들 21세기연구소장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 외에 '사회정책 제3의 길(2008), 대안교육 이해하기(2007), 현대사회와 교육의 이해(2004), 고등학교 교육학(2002)' 등 다수의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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