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권 침해가 아니라 교육 와해이다
| 선생님이 목숨으로 고발해야 비로소 우리는 학교 문제를 논란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논란은 선생님의 희생에 값할 만하지 못하다. 이대로 가면 갈등을 둘러싼 당사자들에게 법조문의 무기를 고루 나눠주는 정도로 논란을 봉합할 모양새이다. 이 글은 우리가 암암리에 구성해 온 교육과 학교 그리고 교사의 정의(定義)를 성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수요자 중심’의 정의로는 교육의 본연을 지탱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교육은 공동선의 모판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우리는 왜 목숨으로 얘기해야 겨우 귀를 기울일까? 생계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고, 재해 문제에 대해서도 그러하며,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다. 안타깝고 죄스럽다. 그런데 귀를 연들 무슨 소용인가? 생명으로 적은 경고에 쓰나미 같은 반응이 일지만 곧 썰물처럼 잦아들 테고, 목숨을 앗아갔던 문제들은 여전하게 남을 것이다. 지난 몇 년만 되돌아보아도 짐작하고 남을 일이다. 답답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세상을 조금 더 살만하게 만드는 데 얼마나 많은 목숨이 희생되어야 하는가?
법대로 가면 된다?
선생님이 학교에서 목숨을 끊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 없다. 대통령이 나서고 장관이 나서서 ‘사건 규명’을 다그친다고 진실이 온전히 드러날 리 없다. 정부나 학교 그리고 관련된 많은 사람도 필경 이야기를 가려서 하리라. 나온 물증이나 진술이 전부를 이야기해 줄 수 없다.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사건 규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건’을 어떤 뜻으로 받아들이고 품는가에 있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역사의 지점에 던져진 과제는 다른 것 없다. 우리가 교사(그리고 교육)를 어떤 자리로 몰아넣어 왔는지 되돌아보고, 앞날을 위해서라도 성찰하는 과업이 전부일 터이다.
주변에 어떤 이야기가 돌아가고 있는지 보자. ‘사건’은 ‘교권 침해’라고 규정되고 있으며, ‘법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게 대세 공론이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심지어 교육자들까지도 그런 쪽으로만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동학대방지법’이 문제라느니, ‘학생인권조례’가 문제라느니 하는 얘기들이 그렇다. ‘법대로 가는’ 것이 바른 해결책이라고 모두 믿는 듯하다. 교권을 둘러싼 싸움은 계속되든 말든, 법대로 싸우는 데 수단의 평형만 맞춰주면 된다는 식이다. 교사와 학생이 부딪치든 학부모가 부딪치든, 싸우는 당사자들이 각자 기댈 수 있는 법조문만 대등하게 마련해 주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사회의 갈등을 모두 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이미 유토피아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이 그러하듯, 교육에서도 근본이고 더 중요한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바람직한 교육이 성문율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교육 현실은 불문율이 지배하며, 법제가 아닌 문화가 교육의 실상을 결정한다. 말 그대로,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마을(사회) 전체가 음으로 양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학교와 교육을 어떻게 생각하고 교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교육의 진상(眞相)이 달려 있다.
학교와 교사를 패대기쳐 온 교육정책
어떤 일이 있었기에, 우리의 문화가 어떻게 뒤집혔기에, 선생님이 학생과 학부모의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는 절규가 나오게 됐고, 성직이라 불렸던 교직은 기피 ‘직업’이 되었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매우 신중하고 철저하게 풀어가야 할 것이다. 교육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바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의 교육 역사를 30년 정도만 되돌아 성찰해 보자. 1990년대를 지나며 교육정책은 급격한 ‘턴’을 했다. 그 방향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였다. 정황은 충분히 이해는 되는 전환이었다. 당시 우리 사회에 민주화의 기대는 한껏 부풀어 있었고, 군부 정부의 전제적 ‘교육’ 횡포에 넌더리가 난 즈음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교육도 국민의 뜻을 따르도록 하겠다고 공약한 데 사회적 공감은 넘쳤다. 국민의 뜻이 민주적으로 국가 정책에 반영되리라는 데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정책에서 학교와 시장(市場)을 구분하지 않은 데서 덧나기 시작했다. 교육 이야기에 시장의 언어를 정부가 태연하게 집어넣으면서 교육 공동체에 균열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수요자 중심’ 개혁에서 교육은 시장에 내놓는 서비스 상품으로 정의됐으며, 학부모(학생)는 필요에 따라 상품을 골라 사들일 수요자가 되었다. ‘선택권 확대’로 포장된 정책은 ‘교육 서비스 시장’을 더욱 활기 띠게 할 참이었다. 이 맥락에서 학교와 교사는 더 이상 교육 공동체의 중심이거나 스승일 수 없다. 학교는 상품을 만드는 공장이자 시장이 되고, 교사는 공원(工員)이자 판매원이 되어야 한다. 이런 비유가 생경하게 들린다면, 요즘 흔히 듣게 되는 정부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라. 학교(교사)가 학원이 제공하는 수준의 상품(서비스)을 내놓지 못한다는 비난이 가득하고, 정부의 개혁안은 그런 상품을 만들 수 있게 학교를 바꾸겠다는 호언으로 가득 차 있다. 학교(교사)와 학원(강사)이 말 그대로 ‘시장경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교사에만 눈을 돌려보면, 그들은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니다. 가정마다의 ‘내 아이’에게 맞춤인 서비스를 하도록 고용된 ‘공복’(公僕)일 뿐이다. 국가에 고용됐으니 안정된 직장인이기는 하겠지만, 주인인 국민(학부모)의 ‘노비’이기도 하다. 교사는 더 이상 학부모(가정)와 협력하고 또 지원도 받으면서 교육을 ‘이끌어 갈’ 주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공원으로서 주문대로 상품을 만들어야 하고,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회초리’도 감수해야 한다.
학부모가 주문(선택)하게 되는 상품은 어떤 것인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수요자가 바랄 상품은 지극히 사적인 이익을 안겨 줄 서비스이다. 내 아이의 점수를 높일 서비스이다. 결국 소비자 중심 교육의 과제는 ‘계층 이동 사다리 복원’으로 수렴된다. 학교는 각자도생의 사회에서 공인된 유일한 출세 사다리이다. 그 사다리를 오르는 데 요구되는 결정적인 수단이 바로 수요자가 바라는 상품일 것은 뻔하다. 그런 상품을 만들어 제공하겠다는 공약이 교육정책의 일관된 흐름이 되었다. 정부가 바뀌고 정책도 바뀌어 왔지만, 지난 30년 교육개혁의 공약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런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일 수밖에 없다. 수요자마다 바라는(그리고 그 바람은 서로 갈등하는) ‘결정적인 수단’은 학교에서 만들어질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학교는 특정 수요자만을 위해 서비스하게 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학교는 ‘공유지’(公有地, commons)이다. 그것은 사회 구성원이 모두 함께 가꾸어야 하고, 그 과실(果實)도 함께 나누어야 마땅하다. 그런 학교에서 ‘나’만의 이익에 충실한 서비스를 기대하는 행태는 학교의 존재 이유에 대해 모순적이다. 정부의 교육정책은 그 모순의 행태를 인정하고 부추긴 셈이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공공의 이익을 추구한다는(개혁의) 명분으로 자행되어 왔다. 그 와중에서 교사의 공적 자리는 실종되었다.
문제 사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적 모순인 교육개혁이 결국 실패하는데, 그 책임은 학교와 교사에게 전가된다. 냉소적인 언사가 적절할 듯하다. 이제까지 소위 교육개혁이 한결같이 해낸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약속을 지킨 것이 아니라 다음 개혁의 명분을 거듭 제공한 것이다. 그런 ‘성공’은 학교와 교사를 비난하고 그 권위를 깎아내림으로써 가능했다. 학교와 교사를 늘 ‘개혁 대상’으로 지목하면 되었고, 개혁에 동참하지 않는 ‘공공의 적’이라 손가락질하면 됐다.
교육정책 결정자들은 한결같이 주장했다. 자신들이 마련한 개혁방안은 완전하다고 장담했다. 장밋빛 미래를 가져올 게 틀림없는 방안을 구안하고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개혁은 늘 실패해 왔다. 이 거듭되는 실패가 결국 다음 개혁의 명분이 된다. 학교와 교사가 여전히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새로운 ‘채찍’의 개혁안을 내놓으면 된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개혁은 그렇게 계속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혁 실패의 책임을 학교와 교사에 떠넘기면, 또 다른 개혁의 명분이 살아났다.
개혁의 명분을 살리는 과정에서 학교와 교사는 거듭거듭 성토됐다. 개혁 주체들은 교사들을 사명감도 없고 능력도 없다고 비난했다. 개혁안마다 포함됐던 교원평가나 ‘무능 교사’ 퇴출의 대안에서 그 비난 궤적을 확인할 수 있다. 교사는 ‘철밥통’ 지키기에만 매달리는 ‘무능한’ 공무원이라 낙인찍혔다. 낙인은 우리 문화의 뇌리에 완강하게 박히고도 남을 만큼 반복됐다.
학교 교육에는 존중되어야 할 문법이 있다
교사가 교육개혁을 막아선 점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기관이든 개인이든, 관성과 기득권을 내려놓기는 쉽지 않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여도 그것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은 만큼은 학교와 교사가 비난받아 마땅할 터이다. 그러나 교육개혁은 종종 그 자체로 실제적이지 못하고 길을 잘못 들곤 한다. 개혁을 평가할 때는 이 사실도 함께 감안해야 한다. 개혁은 으레 ‘한 방의 혁명적 쇄신’을 장담하지만, 학교는 완만하고 점진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개혁안은 자체의 시나리오에 학교와 교사를 모두 혼연일체로 끌어들이는 변화를 꿈꾼다. 밖에서 투입하는 기술이나 명령이 학교를 단박에 바꿀 수 있으리라 가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학교 교육은 그것의 문법(grammar of schooling)에 조화되는 ‘외압’에 한해서 반응하기 마련이다.
학교는 오랜 기간 그 구조나 규율 그리고 수업의 양식 등에서 큰 변화 없이 기본 틀을 유지해 왔다. 이를테면, 학년을 나이별로 나누고 교과를 지식의 범주에 맞춰 나누는 것 그리고 교실은 한 사람의 교사를 중심으로 독립적으로 돌아가게 두는 것 등에서 그 ‘전통’을 볼 수 있다. 이런 전통적인 규칙성이 유지되는 데는 모종의 학교 교육 문법이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특정한 시기에 교사들만의 의도와 식견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긴 역사를 통하여 인류는 학교가 무엇이고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지 암암리에 규정해 왔다.
그런 문화나 규범은 교사들의 인식으로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학생과 학부모에게도 있고, 다른 많은 사회적 규범과 제도 또는 기관의 작동 안에도 스며있다. 그것은 마치 한 사회를 엮고 지탱하는 수많은 행동과 사고 규범의 그물과 같은 것이다. 그것의 구조나 정체를 확연히 밝혀낼 길은 없지만, 그것이 ‘강한 한 방’(개혁)으로 바뀌거나 풀어헤쳐지지 않을 거라고는 장담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교육개혁의 실패 책임은 종종 학교와 교사의 저항과 무능 탓으로 전가된다. 부당한 일이고, 교육 발전에도 도움 되지 않는 일이다.
우리는 교육개혁의 역사를 통해 공유지로서의 학교를 지속 가능하도록 가꾸며 보호하지 못했다. 늘 개선과 개혁을 외쳐왔지만, 그 탓에 오히려 학교는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리고 있다. 사회는 각자도생의 규범이 지배하게 되었고, 학교는 그 규범에 포박된 채 ‘성공’의 사다리 기능에 잡혀 있다. 그 기능을 이행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제 교사는 그 사다리 오르기 경쟁의 심판이자 관리자이다. 학생 개개인의 미래를 좌우할 막강한 권력의 자리인 듯하지만, 그 자리를 지지해줄 윤리나 법제는 없다. 사다리에서 일어나는 사생결단의 경쟁은 이기적이고도 부패한 요구를 쏟아낸다. 학부모를 탓할 수도 없다. 그것은 교육개혁이 공인해준 ‘교육 수요자’의 권리 행사이다. 그러나 정작 그 요구는 관철될 수 없다. 그것은 학교 교육의 문법과 조화되지 못하는 것이고, 교사의 윤리에도 부딪치는 것이다.
교육, 출세 사다리가 아닌 공동선의 모판
수요자의 기대나 바람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도 교사는 끊임없이 수요자의 ‘맞춤 주문’을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주문이 충족되지 않아 결국 그것이 집요하고도 표독스러운 ‘교권 침해’로 바뀌어도, 교사는 수세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정부는 공식적인 정책으로 이런 사태를 초래했으며, 학부모는 그 과정에서 얻게 된 권리를 행사하고 있을 뿐이다. 학교와 교사는 ‘수요자 중심’으로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다. 전자의 길로 가면 비난은 좀 덜 받겠지만 학교와 교사로서의 본분을 버리는 꼴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길로 가면 정부와 정책이 위법이고 반동이라고 처벌하려 든다.
지금 우리가 ‘교권 침해’라 부르는 사태는 바로 이런 진퇴양난의 궁지이다. 그것은 한 교사의 생명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운명이 걸린 문제이다. 학교 교육의 총체적 붕괴 문제이다. 법조문 몇 개를 손보고, 책임질 몇 사람을 골라내 인사 처리하면 될 문제로 여긴다면, 그것 자체로 암울하고 슬픈 웃음거리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학교와 교사에게 주문하고 있는 ‘교육’이 무엇인지 되짚어보는 것이다. 그 교육의 의미가 어디에서 왔으며, 그 의미는 또 교사에게 어떤 역할과 권위를 부여하는지 되돌아보는 것이다. 교육은 사회의 일이다. 교육은 사회가 그 의미를 정의하고 실천으로 번안하는 대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그런 교육대로 사회는 뭉치거나 부서지고, 나아가거나 비틀거리며 퇴행할 터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은 교육과 사회가 부서지고 퇴행하는 징후이다. 단순한 교권 침해 사건이 아니다. 견실한 교육을 바탕으로 공동체적 연대(連帶)를 새롭게 구축하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말(개혁)로는 전진을 외치면서 퇴행의 내리막길을 계속 가게 될 것이다. 미래를 위한 이른바 대전환을 노린다면, 새롭게 추구할 교육의 의미를 찾는 일이 우선 필요하다. 파편화된 ‘수요자’들의 주문을 중심에 두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선을 바탕에 두는 의미 구성이 필요하다. 교육은 출세를 위한 사다리가 아니라 공동선의 모판이어야 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