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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미래 교육’에는 미래가 없다.

#918 강태중,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23.06.15
미래에 대비한다며 교육부는 ‘맞춤’이라는 말을 골라 정책을 구성하고 정당화하고 있다. 이 글은 그런 정책과 정당화 논리로는 교육을 발전시킬 수 없다고 경고한다. 미래론자(futurist)들의 부박한 예상을 곧이 받아들이는 정부나 정책 담론의 어설픔을 지적하고, 꿰어 맞춰 내놓은 맞춤의 슬로건은 교육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라 비판한다. ‘미래 교육’의 주장이나 정책이 기본적으로 반교육적이라고 비판한다. 진정 교육의 바른 미래를 도모한다면, 미래를 외치기보다 전통을 되짚어야 하리라고 고언(苦言) 한다.

 

 

교육은 미래를 대비하는 사업이라는데

 

교육개혁의 이유가 모두 ‘미래’로 몰리고 있다. 특히 ‘제4차 산업혁명’이란 근거 박약한 용어가 유독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면서, 교육부나 교육청이 개혁 얘기에서 미래라는 말을 뺀 적이 있는가 싶다. 미래 또는 미래 교육이라는 말은, 엄밀히는 무엇을 뜻하는지 모호한데도 불구하고, 이제 교육정책 문서에서 빠져선 안 되는 ‘클리셰’가 된 듯하다.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간다는 통념에 비추어보면, 교육은 자연스럽게 미래에 엮여서야 의미를 지니는 일로 보인다. 교육은 개인을 키우고, 키워진 개인은 미래를 살아갈 터이기에, 교육은 으레 미래에 관련되어 가치를 지니리라고 여기게 된다. 또한, 미래 사회는 교육으로 키워진 개인들이 그 구성원으로 살아갈 터이기에, 사회적으로도 교육은 미래에 대해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여겨진다. 요컨대 현재의 교육은 미래를 위한 활동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더 돌아볼 필요 없이 뻔해 보이는 이 통념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정책에서 ‘미래’를 향해 투영하는 소망이나 상상이 매우 잡다해서 ‘미래를 위한 교육’ 또는 ‘미래 교육’이란 말에 어떤 뜻이 담기는지 단출하게 정리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 통념이 그런 버릇의 핵심에 들어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하나는 ‘현재’ 교육이 ‘미래’에 대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의 양식(樣式)에서도 미래의 기술(‘에듀테크’)을 담지해 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미래 인재 양성’과 같은 정책 표방이 전자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그린 스마트 스쿨’이나 ‘디지털 교육혁신’과 같은 것은 후자의 생각을 반영한다. 교육정책은 이런 슬로건이나 통념에 재고 여지가 있을 리 없다는 듯이 강구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상식은 교육에 해롭다. 여기에서는 우선 전자의 통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1

 

 

인류와 로봇이 일자리를 두고 싸울 미래?

 

개인 수준에서나 사회 수준에서나 모두, 교육이 미래에 대비하는 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특히 최근에 특별해졌다. ‘제4차 산업혁명’이란 조어에 실려, 미래가 매우 불확실하며 느닷없이(abruptly) 닥친다는 경고가 대중적인 호응을 얻으면서, 우리나라 교육정책은 매우 다급한 듯이 미래 걱정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그 걱정은 특히 기계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게 미래 세대를 키워야 한다는 얘기로 모아졌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유행시킨 Schwab이 팸플릿 같은 저서에서도 덩달아 얘기했고,2 그 이전에(2013년)3 영국의 두 연구자(Frey and Osborne)가 허구적인 계산4을 통해 마치 실증하는 듯 발표했는데, 현재 있는 직업 대부분은 미래에 ‘컴퓨터화’ 될 것이라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트렌드’ 또는 ‘미래’를 파는 사람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미래에는 많은 인간이 ‘로봇’에게 일을 빼앗겨 실업자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그 얘기에 대한 맹신은 유난했다. 그래서 교육정책 담론에서는 ‘미래 교육’이 학생들을 ‘기계가 할 수 없는 것’(곧,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게 키우는 사업이어야 한다고 일반화하기에 이르렀다.

 

인간이 미래에 일자리를 로봇에게 빼앗길 것이라는 주장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섣부르다. 우선, 기술 개발이 곧 사회 변화를 가져오리라는 가정에 문제가 있고, 아울러, 기술(로봇) 때문에 사람 일자리가 사라지리라고 단정하는 데도 문제가 있다.

 

새로운 기술이 얻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사회에 곧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초음속 여객기(Concorde)를 만들 기술이 있다고 해서, 또는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게 된다고 해서 그런 기술들이 상품이나 서비스로 바로 사회에 통용되지 않는다. 윤리나 편익 등 다양한 측면에서 기술들은 ‘사회적으로’ 심사되기 마련이다. 기술이 곧 미래를 결정하리라고 여긴다면 섣부른 일이다.

 

과학과 기술의 진보가 사회 현실에 융화되는 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누구도 사전에 예상할 수 없는, 오묘하고도 진화적인(emergent) 점검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점검은 인류가 스스로 생존을 추구하는 과정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그 과정은 쉽사리 ‘인류의 위기’로 치닫지만은 않을 것이다. 특정 기술의 상용이 인류에게 자해적일 수 있을 때, 생존을 위한 점검 또는 경계가 ‘진화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한편, ‘로봇’이라는 기술은 이미 쓰이고 있고, 근로자들을 벌써 일자리에서 밀어내고 있지 않냐고 말할지 모른다. 이 점에 대해서도 아직 확증된 바는 없다. 연구 결과들은 갈리고 있다. 일자리가 사라지는 모습이 일상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데 반해서, 일자리들이 변형되고 또 새롭게 생겨나는 모습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그래서 ‘일자리 침식’의 주장이 대중적으로 수긍되는 경향이 있지만, 사라지는 일자리들에 못지않게, 기술이 바뀌면서 새로운 일자리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분석들도 견고하다.

 

더 나아가, 기술의 발달로 사람의 일자리가 설령 줄어든다고 하더라도, 그런 변화가 곧 인간이 해고되는 미래로 귀결되지만도 않을 것이다. 일을 위한 도구(기술)가 바뀌게 되면, ‘일자리’의 의미가 바뀔 수도 있다. 로봇과 같은 도구 덕분에 상품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인력이 줄어든다면, 근로자의 수를 줄일 수도 있지만 근로자의 노동 시간을 줄일 수도 있다. 일자리를 으레 ‘8시간 노동’으로 전제한다면, 로봇의 도입과 더불어 인간 근로자들은 쫓겨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류 사회가 일자리의 의미를 예컨대 ‘4시간 노동’으로 변화시킨다면, 미래 이야기는 달라져야 할 것이다.

 

현재를 기준으로 기계와 사람의 일자리 비중을 예측하며 견주기 전에,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로 할 수 있게 되면 곧 사람이 쫓겨나게 된다고 상정하는 ‘미래 이야기’ 자체가 중대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이야기는 미래를 보고 있지 않고, 현재를 미래에 그대로 투영하고 있을 뿐이다. 흔히 들리는 미래 이야기에서는 현재의 노동(‘일자리’) 조건을 고정해 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계를 소유한 사람이 기계가 가져오는(즉, ‘사람에게 일자리를 주지 않는’ 생산방식으로 얻게 되는) 모든 이익을 독차지하게 된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런 전제가 지금으로서는 당연해 보일 테지만, 엄밀히 따져보면 결코 지당한 것만은 아니다.

 

사람의 일을 대신할 미래의 기계에 대한 재산권이 현재 자본가들이 땅이나 공장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명하리라고 볼 수 없다.5 ‘인공지능’을 생각해 보자. 이것이야말로 요즘 ‘게임체인저’라고 너나없이 법석대고 있는데, 그것은 과연 개발한 사람의 소유이어야만 할까? 이미 중요한 이슈로 부상하고 있듯이, 특정한 인공지능의 소유권이나 그것이 일궈내는 이익에 대한 권리가 누구에게 주어져야 하는지는 그렇게 확연하지 않다. 이를테면 그것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 데이터는 어디서 오는가? 수많은 개인의 활동과 업적으로 축적되는 것이고, 수많은 플랫폼에 모아져 있다. 빅데이터의 소유권 또는 이권은 정보를 내준 개인들에게 있는가, 아니면 플랫폼 운영자에게 있는가? 또 아니면, 모든 데이터의 네트워크인 사회가 공유해야 하는가? 이런 혼선의 와중에서, 빅데이터가 키워준 인공지능에 대한 권리는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가? 아직 단언할 수 있는 규칙이나 답이 없다.

 

더 근본적으로, 설사 재산권 이야기가 현재의 연장선에서(최종적으로 만든 사람에게 돌아가도록) 매듭된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기계가 낳을 ‘황금알’의 이익이 모두 소유주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결론짓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흔히 미래론자(futurist)들이 그렇게 되리라 상정하는 것은 현재의 생산과 사회관계 체제가 미래에도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금 그러니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고, 현재의 상식을 연장해서 미래를 그리고 있다. 과거에도 미래를(유토피아든 디스토피아든) 그리는 사람들이 으레 그런 오류를 범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지금의 체제가 변함없으리라고 암암리에 가정하며 미래를 얘기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인류 사회는 꾸준히 새롭게 거듭난다(emerge). 미래론자들은 말하자면 ‘지금 이대로 간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미래를 얘기하고 있는 셈인데, 그런 논리는 그들의 예언 안에서도 자가당착이다. 다른 많은 부문이 어마어마하게 바뀌리라 예언하면서, 왜 경제 분배 양식만은 변하지 않으리라 예상하는가? 미래로 가면서 과학 기술이 바뀌고 생산될 상품과 서비스들이 바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런 변화에서 파생되는 이익(풍요)을 나누는 방식도 아울러 바뀔 수 있지 않겠는가.

 

인류가 오직 종말을 향해 걸어가게만 되어 있는 게 아니라면, 오늘날 ‘위기’라고 야단법석하는 그런 ‘미래’로만 가지는 않을 것이다. 기계가 가져오는 풍요를 좀 더 평등하게 나누며 더 많은 사람이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문화를 인류가 구축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이상하게도 교육 당국이나 정책 결정자들은 자신들의 방안이 가져올 효과에 대해서는 터무니없이 낙관하면서 인류 사회의 앞날에 대해서만은 비관하는데, 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역량 ‘맞춤교육’으로 미래 대비?

 

미래 교육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미래를 일방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하나 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교육 자체에 대해서도 편견 또는 관견(管見)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이 ‘미래 인재’를 키워내는 일이라는 생각이나 주장은 순진한 선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고, 도덕적으로나 실용적으로도 잘못된 점이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일반화하고 정책으로까지 굳혀가는 행위는 교육에 매우 심각한 폐해를 가져올 수 있다. 악의가 없었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폐해가 아니다. 과거 정부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 정부도 여전히 그런 행위를 천연덕스럽게 자행하고 있다.

 

이를테면 교육부는 올해 업무의 핵심을 ‘맞춤의 교육개혁’에 두었다. 교육이 ‘맞춤교육’이어야 한다면서, ‘학생맞춤’, ‘가정맞춤’, ‘지역맞춤’, ‘산업·사회맞춤’ 등으로 정책을 구성했다.6 네 수준에서의 맞춤을 겨냥해 교육이 개혁되도록 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교육개혁’이 현재 교육이 미흡하거나 바르지 못한 점을 보완하고 고치는 일이라면, 교육부가 하는 이야기는, ‘맞춤’을 통해 교육이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런 암묵적인 생각의 바닥에는 교육을 오직 수단으로 여기는 오래된 통념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교육부의 정책 논리에서는,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지만, 교육에 그 자체로 고유한(intrinsic) 가치가 있으리란 염을 찾아볼 수 없다. ‘맞춤교육’의 구도에서 교육은 오직 ‘밖’에 있는 것들에 맞춰질 때만 가치를 지니도록 자리잡혀져 있다. 교육이 잘 되고 못 되고를 가름할 표준은 교육 안에 있지 않다. 교육은 ‘교육 밖’에 있는 잣대로 성패가 결정되도록 애당초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도덕규범이나 예술 작품이 다른 세계(정치, 경제 등)의 표준에 따라 가치가 매겨질 수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교육도 다른 생활세계의 기준으로 그 가치가 가늠되어선 안 된다. 예술의 세계가 아름다움이라는 본연의 가치 준거를 지니고 있다면, 교육의 세계도 ‘사람됨’이라는 준거를 지니고 있다. 교육이 개인이나 가정 또는 사회의 다른 부문의 필요에 맞춰져서야만 의미를 갖추게 되는 게 아니다. 이 점에서 교육부의 개혁 논리는 반교육적이다.

 

교육부의 반교육적 논리에 비추어보면, ‘미래 교육’은 결국 ‘미래맞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 가정, 지역, 산업·사회 등 다른 맞춤의 부문과 달리, ‘미래’ 부문은 특이한 데가 있다. 교육부나 미래론자들이 흔히 얘기하는 바에 따르면, 미래는 ‘느닷없이’ 오며 그래서 ‘불확실’하다. 학생, 가정 등에서 요구되는 교육맞춤에 대해서는 적어도 사실적인 표적이 주어질 수 있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는 얘기이다. 미래의 ‘필요’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미래 교육’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어떤 필요에 부응하려는 것이라는, 자기모순의 정책 방안인 셈이다.

 

‘미래 교육’이 품고 있는 모순성 때문에, 정책 문서들은 미래 대비(즉 맞춤)를 위해서 ‘스위스 아미 나이프(Swiss Army Knife)’ 같은 ‘역량’을 내세운다. 다양한(불확실한) 상황에서 쓸모를 지닐 도구(역량)를 장착시키기 위한 교육이 바로 미래 교육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도,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반교육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미래에 대비한다는 생각 역시, 교육이란 세계에는 고유의 가치와 실천 표준이 없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역량론’은 그 자체로 실체를 지니지 못하는 허구이다. 느닷없이 닥칠 미래가 불확실한 만큼, 그런 미래에 대응할 역량은 흔히 ‘유연한 창의적 사고력’ 같은 모호하고 수사적인 ‘인지 도구’로 정의된다. 어느 경우에든 쓰일 수 있는 도구인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모르는’ 상황에 쓰일 도구를 마련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불성설일 뿐만 아니라, 그런 역량이 어떻게 키워지는지 적어도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머지않은 미래에 밝혀질 것 같지도 않다. 요컨대 미래 교육은 온갖 가설(짐작)을 토대로 시행착오하며 미래를 준비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 과정에서 교육만 본연의 가치를 잃어가게 될 것이다.

 

 

‘미래 교육’은 반교육적이며, 거기에 미래 없어

 

미래맞춤의 논리(‘미래 대비론’)가 반교육적인 점은 더 근본적인 데서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미래 교육’은, 미래론자들의 부실한 주장들을 철석같이 믿으며, ‘느닷없이’ 닥칠 미래를 대비해야 한다고 표방한다. 그러나 미래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듯 오는 게 아니다. 미래는 현재가 지속되어 가는 시간일 뿐이며, 현재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로 그 성질이 규정되는 시간이다. 말하자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이야기하는 ‘미래’에 이미 미래가 있는 것이다. 바람직한 미래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그런 미래는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는지, 오늘 우리가 머리를 맞대어 고심하는 이야기 속에서 미래는 만들어지고 있다.

 

교육이 훌륭한 인격(인류 구성원)을 추구하고 행복한 인류 사회를 꿈꾸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늘 미래를 이야기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한다. 교육은 정체 모를 어떤 ‘미래 역량’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문제를 공동선의 견지에서 함께(대체로는, 학교에 모여) 고민하며 풀어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과업이다. 적어도 인류의 교육 전통을 따른다면, 교과를 교과답게 가르치고 사회 연대를 구축해 줄 활동들에 가담시키는 것이, 더도 덜도 아닌, 미래 세대를 교육하는 일일 터이다.

 

정권은, 그 색깔이 어떠하든, ‘개혁’으로 정당화를 시도한다. 역사의 정수(精髓)를 읽으며 전통을 제대로 이어가려는 노력은 국민에게 진부하고 ‘일하지 않는’ 행태로 비칠 수 있다. 그런(사실은 바람직한) 노력으로 일관할 때 정권은 표를 잃고 권좌를 잃기 십상이다. 사회에 문제는 으레 있기 마련이고, 그것들을 뒤적여 찾고 ‘엎는다는’ 개혁을 표방할 때 정권은 유지될 수 있으리라 계산된다. 이런 타산이 사회적으로 해롭기만 하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교육에 대해서는 심각한 폐해를 낳고 있다. 교육은 본질상 ‘개혁’이 아니라 ‘진화’로 바뀌어 가게 되어 있는지 모른다. 이 점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미래 교육’의 결정적인 맹점이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미래 교육’을 외치기보다 교육 전통을 되짚어야 할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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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교육이 이른바 에듀테크(특히, AI)를 채용하여 ‘대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서는, 어째서 문제인지, 이전 칼럼(‘대전환’을 외치는 교육부 ‘3대 정책’의 공허)에서 어느 정도 다뤘다. 좀 더 얘기해야 할 점이 남아 있지만, 다른 기회로 미뤄둔다.
  2. 2016년에 발간한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이라는 제목의 책.
  3. ‘The Future of Employment: How Susceptible are obs to Computerisation’이라는 논문.
  4. 그들은 직업(직무)을 직접 분석하지 않았다. ‘기계학습’(machine learning) 연구자들에게(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며 몇 명인지 논문은 밝히지 않았다), 70개 직업에 대한 미국 노동부의 직무 기술(job description) 자료를 보여주며, 컴퓨터화할 수 있는지 없는지 ‘예/아니오’로 판단하도록 요청했고, 그 결과(‘데이터’)를 바탕으로 ‘기계’를 학습시켰다. 그렇게 학습한 기계에게 702개 직업의 직무 기술에 대해 확대해서 컴퓨터화 가능성을 예측하도록 했고, 기계의 반응을 바탕으로 ‘25년 이내에 현재 직업의 47%가 사라진다’는 식의 예상을 논문에 담았다. 이런 예상은 설사 미래에 ‘맞은’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연구 자체의 타당성을 입증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만에 하나 25년 안에 47%의 직업이 사라지는 일이 실지로 일어나더라도, 그 변화는 연구에서 적용한 원인인 ‘컴퓨터화’’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모르지만 다른 어떤 요인들이 작용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 경우에 47%라는 숫자는 우연히 맞아떨어졌을 뿐이다. 논문(기계)의 분석은 실재하지 않는 현상에 대해 ‘허구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분석 결과라는 것은, 처음 70개 직업에 대해 기계학습 연구자들이 내놓았던 대답에 가장 근접하게 답하도록 훈련된 기계들이, 702개 직업에 대해서 대답을 요구받았을 때 내놓은 반응이었을 뿐이다. ‘기계학습’의 속성상, 기계들이 어떤 근거로 그런 반응을 내놓았는지도 알 길이 없다.
  5. 현재의 재산권 이야기가 자명하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사실은 많은 이의가 제기될 수 있다. 여기에서 이 논의는 덮어둔다.
  6. 교육부. 2023년 1월 5일. 보도자료. ‘교육개혁, 대한민국 재도약의 시작-2023년 교육부 연두 업무보고’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강태중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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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1. 나그네 수정 삭제

    제 머리 속에 있던 막연히 불편한 감정이 교수님의 논리적인 글에 시원해진 기분입니다.
    입장은 다양하겠지만, 제 경우 학교와 교육청, 교육부에 이르는 미래교육을 향한 묻지마
    진격 분위기에 늘 불편한 마음이었습니다.
    미래를 위해서라면, ‘미래 교육’을 외치기보다 교육 전통을 되짚어야 할 것이다.
    – 이 문장만큼 지금 교육상황에 어울리는 게 있나 싶습니다.

  2. 희망 수정 삭제

    안녕하세요 교수님,
    칼럼 내용에 공감합니다. 교육 현장에 있으면서 미래교육의 필요성은 막연하게 느꼈지만
    인재상이나 지향점 등 방향성이 애매하다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하지만 소수만 명문대에 진학하여 사회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는 현실도 개선점이 필요해보입니다.
    학생들이 명문대를 못 가면 자존감이 낮은 것, 사회에서 중소기업과 대기업의 급여 차이가 크니 교육에 집중하는 현상도 이해는 됩니다.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교육전통’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교육의 목적은 인간의 고유함도 생각하며 사회에 진출할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미래교육에 미래가 없다면 현재 교육체계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어떠한 개선점이 필요한 상황일까요.

    교육현장에서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학생들만 피해보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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