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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송지대’로 떠오르는 학교 교육

#910 강태중,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23.05.18
학교의 일이 송사로 번지는 사례가 많아지는 추세와 관련해서, 정부 정책이 원인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정책에 붙기 마련인 조밀한 지시와 지침이 결국 ‘절차상의 하자’를 문제 삼는 소송 가능성을 키우고, 궁극에는 학교 교육을 최저선(最低線)으로 타락시킨다고 정리했다. 학교와 교사를 신뢰하고 재량을 넓히는 정책이 대안일 수 있는데, 우리 문화가 그런 대안을 쉬이 용인하지 않으리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 방향에서 성찰하고 고심하는 게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학교와 교사가 소송에 휘말려 간다는데

 

학교의 ‘성적 처리’를 두고 간혹 송사가 일어난다. 큰 관심을 끌지는 않았지만, 최근에도 그런 소송 보도가 있었다. 한 고등학생이 시험 종료 후에 답안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0점 처리된 데 불복하여 ‘처분 취소’를 요구한 소송(행정소송)에 관한 것이었다. 법원은 이렇게 판시했다고 보도됐다.

 

“시험 당시 종료령이 울린 이후 서술형 5번과 7번 답안을 기재함으로써 피고 학교의 학업성적관리규정에 따른 부정행위를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서 성적 처분에 어떠한 절차상·내용상 위법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시험 과정에 부정행위가 개입될 경우 정확하고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없으므로 부정행위를 방지해야 할 공익이 크고, 엄격하고 일관된 대처가 필요한 점 등을 고려하면, 학교 처분에 어떠한 하자가 있다고 할 수 없다.”1

 

작년에는 학교의 0점 처리에 이의를 제기했던 중학생이 법원에서 취소 결정을 받아냈다는 보도도 있었다.2 학생은 책상에 스톱워치를 올려놓고 시험을 쳤는데, ‘유의사항’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0점 처리되었다고 한다. 서울시 교육청이 하달하는 ‘학업성적 관리 감독 교사 유의사항’에 따르면, “휴대폰, 무선 이어폰, 스마트워치 등의 전자기기를 소지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항목에는 “소지만 해도 부정행위로 간주되어 0점 처리됨. 교실 안(사물함, 책상 서랍, 가방 등) 어디에라도 불가함”이라는 설명도 붙어 있다. 학교는 이 규정을 따라 0점 처리했지만, 법원은 그 처리의 “집행을 중지하라”고 판결했다고 한다. 학생이 이용했던 스톱워치를 어떤 기기로 규정하느냐가 관건이었던 사건이다. 학교는 그것이 소지 금지 대상인 “전자식 화면표시가 있는 시계”(‘스마트워치’)에 해당한다고 보았고, 법원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던 것이다.

 

비슷한 사건에서 법원이 다소 다르게 판단했던 사례도 찾아볼 수 있다.3 이 사건에서 학생은 시험 시작 전 답안 카드가 배부되는 동안(다른 자료나 메모를 훔쳐보지 않고) 자신의 암기 내용을 책상에 메모했고, 그 상태로 시험을 쳤다고 한다. 나중에 그 메모를 발견한 학생이 신고하면서 학교의 ‘학업성적관리위원회’가 해당 학생의 건을 다뤄 부정행위라고 판단했고, 0점 처리했다. 학생은 “예비종이 울리고 ‘시험이 시작됐다’는 감독 교사의 말을 들은 뒤 메모를 적은 것이고, 부정행위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이의를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법원은 소송 자체를 각하하면서 이렇게 판시했다고 한다. “0점 처리 행위는 학업성취도 등 자료 작성의 중간 단계에 불과해 이 행위 자체로 인해 [해당 학생에게] 법률 효과가 발생하지 않으므로, 행정소송의 대상이 아니다.” 이런 판결은 교사(학교)의 성적 처리가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자체가 쟁점임을 시사한다.

 

 

촘촘한 정책 개입이 ‘교육 소송’의 소지를 키워

 

학교에서의 평가나 시험을 두고, 앞으로 소송은 더 많아질 것이다. 교사들은 평가나 출제 과정에서 쟁송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는 얘기를 오래전부터 해왔다. ‘교육적인’ 고려보다 트집 잡히지 않을 ‘소극적인’ 처신이 상책이라 여기게 되는 것이다. 변호사나 법무법인들도 학교 교육을 소송의 중요한 영업 ‘시장’으로 여기고 있다. 언론의 인터뷰나 일상적인 안내 또는 조언 형식으로 학교의 일에 대해 대중들에게 소송의 여지가 있다고 은근히 홍보하고 있다. ‘교육 소송’은 여러 이유로 더 부추겨질 것이고, 교육 사안을 ‘법대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더욱 빈번해지고 당연해지게 될 것이다.

 

이런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다양한 층위와 측면에서 여러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교육정책의 측면에서 좀 더 직접적인 것을 찾아본다면, 무엇보다도 두 요인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학교 시험이나 평가에 지나치게 큰 이익(stake)을 부착시켜 온 교육정책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시험 또는 평가에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해 온 관성이다.

 

대표적으로, 내신이나 학교생활기록부를 상급 학교(대학) 입학전형 자료가 되도록 엮어놓는 정책은 거듭 완고해져 왔다. 그런 정책 아래에서 학교에서 치는 모든 시험의 점수는 학생들에게 미래(진로)를 좌우하는 심각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학생들은 한 점 한 점에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게 되고, 한 점 한 점의 처리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다 여차하면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정부와 교육 당국은, 마치 책임을 다한다는 듯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시험과 평가에 대해 매우 세세하게 개입해왔다. 교육부는 ‘학교생활 기록 작성 및 관리 지침’이라는 훈령을 매년 상황 변화에 맞춰 개정하면서 하달해 왔고, 그것에 맞춰 각 교육청 역시 ‘학업성적 관리 지침’으로 촘촘히 학교 움직임을 규제해 왔다. 앞의 소송 사례에서도 보였던 것처럼, 시험을 어떻게 관리 감독해야 하는지, ‘학업성적관리위원회’는 어떻게 구성하고 운영해야 하는지 등 사소한 것까지 지시할 뿐만 아니라, ‘수행평가’를 어떻게 하고 주관식 문항을 어느 정도 비율로 포함해야 하는지와 같은 ‘교육적인’ 간섭에서도 서슴없다.4

 

이와 같은 절차나 규정은 결국 송사의 빌미를 준다. 평가나 점수 처리를 위한 규정이나 절차가 없다면, 학교에서의 시험이나 평가 문제는 ‘교육적인’(전문적인) 사안으로 남게 되고, 그것을 ‘법적으로’ 다룰 수 있는지 자체가 심각한 ‘영역 가름’의 이슈가 될 터이다. 학생의 답안에 몇 점을 부여해야 하는지, 그리고 특정 수험 행위를 ‘부정’이라 해석해야 하는지 등은 학교(교사)가 고유하게(전문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안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과연 법원이 학교의 ‘전문’ 경계를 넘어 개입할 수 있는 것인지는, 그 자체가 중대한 ‘전문성 이슈’가 된다.

 

한 사회 안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각 부문이 고유한 규범 아래에서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전제에서 보면, 학교 교육에 법원이 개입하는 것은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정부가 온갖 명령(정책)이나 지침으로(지켜야 할 ‘법률’로) 교육 실제를 강제해 놓음으로써 학교나 교사의 일거수일투족에 쟁송의 소지를 안기게 된다. 정부가 나서서 소송 가능성(litigiousness)을 계속 키워온 셈이다. 교육상 전문적인 판단이 전제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원이 나서기 어렵겠지만, ‘법률’을 제대로 지켰는지 따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원이 당연히 나서게 되기 마련이다. 학교 교육이 명문 규율로 규제될수록, 학생이나 학부모 그리고 심지어는 교원도 교육 문제로 법원의 심판을 요구하게 될 근거나 이유가 많아진다.

 

 

소송의 소지가 커지면 교육은 궁핍해져

 

그야말로 학교 교육이 ‘쟁송지대’가 되면서 교육은 어떻게 바뀌어 갈까? 여러모로 궁핍해져 가겠지만, 두 측면(교육정책과 교원 불신)에서 생각해 봄으로써 그 추세의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점은 교육이 타락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학교 교육은 ‘법적인 하자’가 없는 행위나 활동이 되도록 위축되어 갈 것이다. 교육과정에 담긴 ‘정신’에 충실한 교육 활동보다 정책(상부) 지침에 대한 복종의 기록을 남기는 데 주력하는 활동이 일반화될 것이고, 교육의 의사결정에 교사의 식견과 안목보다는 공인된 평가와 측정의 값을 맹목적으로 적용하는 타성을 굳혀갈 것이다. 학생 개인이나 특정 학급에 대해 예외적인 배려가 필요한 경우라도, 그 필요를 포착하는 교사의 안목이나 판단이 법제적 요건이나 절차에 우선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정성적이거나 전문적인 판단에 근거해야 할 교육의 영역은 포기하고, 소위 객관적이고 절차가 공식화된 영역으로만 교육의 실천을 좁혀가게 될 것이다.

 

학교 교육의 맥락에서 법이나 지침은, 특히 그것이 세밀하고 구체적일수록, 교사의 현장 즉응적이며 전문적인 판단을 배제한다. 법이나 지침은 일률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만큼, ‘현장’(local)의 특수성을 무시하며 ‘법적’ 이론의 오류 가능성을 일축한다. 이를테면, 상위 4%가 1등급이어야 한다는 지침은 100명인 집단이나 10명인 집단이나 구분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시험에 ‘주관식’ 문항을 20% 이상 포함하라는 지침은, 그 비율로 주관식을 포함한 시험이 그렇지 않은 시험보다 ‘교육적’이라는 암묵적(‘법적’) 전제(이론)를 항상 옳다고 강제한다.5 그렇지만 정작 학교 교육 현실에서는 법령이나 지침을 그대로 적용하기보다 예외 조항을 적용해야 온당할 경우가 오히려 일반적이다. 정부도 늘 인정하듯이, 학교나 학생의 다양성(특수성)은 일괄의 규제로 ‘존중’하기엔 너무 벅차다. 학교나 교사의 ‘현장’ 판단이 ‘멀리 있는’ 정부의 규정이나 지침보다 교육적이고 현실적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교육정책은 현장의 전문성을 미덥지 않게 여기며 거듭 눌러왔다. 수많은 훈령과 지침으로 학교 안의 일에 대한 소송 가능성을 키우면서, 결국 교육은(학교나 교사의 행위는) ‘법대로’라는 최저선(最低線)의 선(善)에 머물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왔다.

 

학교 교육이 조락해가는 추세에는 교사의 윤리와 전문성이 ‘같잖게’ 여겨지는 풍토가 따라붙어 있다. 정부가 교육정책을 법령으로 묶고 시행 지침으로 학교 교육에 세세히 개입하는 행태는 교원에 대한 불신을 바탕에 둔 것이다. 교원 나름의 판단과 행위를 믿을 수 없다는 전제에서 교육적 실천을 하나하나 지시하고 규제하는 것이다. 정부가 이런 행태를 보이게 되는 배경에는 그럴만한 요인이 있을 터이다. 이를테면, 교사의 행위가 학생(국민)의 이익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하다면, 정부는 그런 영향력을 교사들이 재량껏 행사하도록 두고 보기가 두려울 테고, 국민 역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교사들을 정부가 엄밀하게 견제하도록 기대할 것이다. 특히 교원들의 부정과 부패를 경험했던 역사가 있는 마당에 그런 기대는 탱천할 수 있다. 교사가 전문성을 주장하고 자율권을 요구한다면 사회는 냉소로 응대할 것이다.

 

학교에서의 시험과 학생 평가가 바로 그런 국면의 핵에 자리하고 있다. 학교 교육의 가치가 오직 ‘인서울’ 대입의 가능성을 키우는 데 있다고 여겨지는 풍토 속에서, 그 가능성을 좌우할 수 있는 ‘평가’(시험)는 그야말로 누구에게나 좌시할 수 없는 사안이다. 학교와 교사들을 믿고 맡겨둘 수 없는 사안이라 여겨진다. 정부가 매해 대입제도를 만지며 조밀하게 학교와 대학을 규제하는 것은 당연한 책무로 받아들여진다.

 

정부나 정책의 규제가 촘촘해질수록 교사들의 전문적 권위나 교육적 전문성은 퇴색하기 마련이다. ‘전문성’은 그야말로 ‘재량’을 그 바탕에 두는 것이다. 그것의 발휘가 ‘행동적으로’ 상세화된 지침이나 준거로 지시되거나 평가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전문성은 주체의 주관적인 판단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용인되며, 그만큼 윤리적인 덕과 함께 갖추어져야 하는 역량이다. 학교나 교사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규정과 지침으로 구속하는 현상은, 뒤집어 보면, 학교 교육에 그런 역량이 발휘될 소지를 남겨두지 않는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교원은 ‘매뉴얼대로’ 작동하는 학교라는 기계의 부품이거나, 매뉴얼대로 기계를 돌리는 기능인이 될 수밖에 없다. 전문성을 발휘하려는 시도는 주제넘은 ‘월권’으로 제재되고, 소송의 표적이 된다.

 

학교에 하달되는 법과 지침이 조밀해지고 학교 교육이 (교육적이 아닌) 법제화되어 법적 심사와 재단의 대상으로 굳어질수록 교원은 소심해져야 한다.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시도는(때로는 양심적인 시도까지도) 학교 교육에서 금물이 된다. 그런 시도가 제도적인 ‘미비 지대’에 속하거나 사익에 충실한 ‘수요자’의 불만을 낳을 경우, 송사가 불거질 가능성은 커진다. 소송 결과에 따라오는 ‘법적 책임’은 온전히 교사에게 씌워진다. 송사는 교사의 공적 지위를 흔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사상의 배상까지 덮어씌울 수 있다. 결국 교사들의 행위는 겨우 ‘평균’으로 수렴하게 될 터이다. 법적인 요구에 미달하는 교사라면 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힘을 더 쓰게 될지 모르지만,6 법적 지시를 초월(무시)하여 참된 ‘스승’일 수 있었던 교사라면, 교직을 떠날 것까지 각오하지 않는 한, 몸을 사려야 할 것이다.

 

요컨대 법은 일상 덕목의 최저선을 긋는 것이다. ‘법대로’라는 접근은 양심과 식견보다 타산과 전략을 세상사의 이치로 전제한다. 학교 교육을 오직 법과 지시로 끌고 가려는 정부 행태는 결국 교육을 최소한의 체면치레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을 뿐이다. 정부의 조치로는 개인들 사이의 타산과 전략의 충돌을 다루는 데 필요한 기준과 절차는 갖춰두게 되겠지만, 양심과 식견에 바탕을 둔 교원들의 헌신을 끌어낼 수는 없다. 교육을 인간적이기보다는 기계적이 되도록 끌고 갈 공산이 크다. 곧, 교육이 교육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교사의 재량을 좁히는 길밖에 없을지

 

정부도 그렇고 사회 일반에서도 그렇고, 교사의 전문성과 자율권을 인정하자는 의견에 선뜻 동의하지는 않으리라 짐작된다. 우리 교육의 역사는 어쩌면 교사를 불신하도록 증언하고 있다. 시험이나 평가에 대해서만 보더라도, 과거에 교사들은 뇌물을 받고 문제를 유출하기도 했고, 평가의 자율권을 주자 ‘내신 부풀리기’와 같은 행태로 남용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행태는 끊임없이 불거지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어떻게 교사에게 규정이나 지침 대신 재량과 자율을 줄 수 있겠냐고 충분히 반문할 만하다. 그러나 역사의 증언은 그 맞은편에 대해서도 있다. 교육사에서 우리는 교직의 타락이나 부패만 경험하지 않았다. 정책결정자들의 편견과 안일 그리고 무능도 아울러 경험했다.

 

교육의 질이 정말 교사의 질에 달렸다면, 교사의 질에 변화를 가져올 방도를 모색할 이유가 충분히 쌓였다. 교원보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에게(그들이 만드는 법이나 지침에) 의존하는 것이 학교 교육에 더 바람직하다고 볼 이유도 이제는 소진된 듯하며, 법원의 판단에 교육 향방을 맡기면 교육이 바로잡힐 것이라 기대하는 것도 뜬금없다. 이제까지 교육정책을 지탱해 온 패러다임을 이제는 재고해 봄직도 하다. 교사의 재량을 좁히는 데만 주력해 온 틀을 의심해 볼 만하다.

 

교육 부문에서 소송이 빈발해지는 사태는 교육이 행정적인 규정이나 절차로 정의되는 바가 지나치다는 점을 시사하며, 교원이나 학교의 재량 또한 지나치게 위축되고 있다는 사실도 드러낸다. 이런 추세를 유지해서는 교원의 질(전문성과 윤리 의식)을 결코 확보할 수 없다. 교원의 질은 미래 교사가 윤리적이고도 전문적인 헌신을 전제로 교직에 들어설 때 그나마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미덥지 못하다며 학교 모든 영역에 정부가 개입하고, 심지어 그들의 행위가 온당한지를 법원의 판단에 맡기게 되는 환경에서는 결코 ‘전문적인’ 교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른바 진퇴양난에 처한 듯 사태를 본다. 한 나라에서 학교 교육의 모습은 ‘문화적인 정의’에 달렸다고 얘기해서 크게 틀리지 않을 터이다. 일상에서 교육을 무엇이라 규정하고 교사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느냐에 따라 학교 교육은 달라질 터이다. 교육을 ‘특권층’에 편입하기 위해 ‘회원권’을 얻어내는 과정이라 여기고, 교사는 그 회원권을 배분하는 과분한 ‘권력’을 가진 ‘공무원’ 정도로 여긴다면, 학교에 대해선 견제가 난무하기 마련이고 교사에 대해선 회유와 협박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학교와 교사를 철저하게 감시하는 일은 불가피하다고 여겨진다. 교사에게(학교에) 재량이 허용된다면 부패와 타락은 불 보듯 뻔한 결과라 여길 것이다. 교사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자율을 허용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대학의 서열’과 그것에 따르는 대입 경쟁을 완화해야 하리라는 게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이 일은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진퇴양난’의 사태에서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느 쪽으로 난국을 타개해 나아가야 옳을지 장담할 수 있는 근거도 아직은 없다. 교원(학교)을 믿는 게 먼저이어야 할지 아니면 대학 서열(입학 경쟁)을 반반히 만드는 게 먼저이어야 할지, 우리는 예단할 수 없다. 두 측면(교원 불신과 진학 경쟁)의 현실이 모두 우리의 역사와 일상 문화 속에 깊숙이 뿌리 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교육 밖의 다른 세계와 얽힌 게 어떻게 풀어보아야 할지 모를 만큼 복잡하다. 그리고, 위에서 비쳤듯이, 교원 불신과 대입 서열화의 두 양상은, 좀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교육과 교사를 정의하는 우리의 문화 안에서 얽혀있다. 교육을 계층 이동의 수단으로 여기고 학교와 교사를 이동 경쟁의 판이자 심판으로 여기는 문화로 얽혀있다.

 

결국 그 얽힘을 풀어가려면,7 교육과 교사에 대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나누는 이야기(신화 또는 문화)를 해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우리 사회에 심어야 한다. 이 작업은 물론 지극히 어렵고 오래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을 덮어두고 학교 교육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다. 이제까지처럼 학교와 교사를 채찍질하며 감시하는 데 정책의 온 힘을 쏟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일이다. 교사 본인들에게 그들에 대한 우리의 문화적 ‘편견’을 깰,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탄생시킬 기회를 부여하는 것은 ‘신화 해체’를 시도하는 유력한 방안일 수 있다. 일단 교사와 학교의 재량을 넓혀가는 것이다.8

 

물론 교사(학교)들은 주어지는 재량을 두려워해 거절할 수도 있고, 주어진 재량을 악용하거나 남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부수되는 문제들은 그것대로 다루면서(그런 ‘부작용’ 문제에도 불구하고), 교사의 재량권 자체를 거두어들이지는 않는 정책적 인내가 필요하다. 교사들의 소극성이나 불법 행위를 다스리되, 그런 행태를 이유로 정책 자체를 회수하지는 않는 것이다. 정책의 지구성(持久性)을 높이면 교직 사회도 주어지는 재량에 호응해 갈 수 있을지 모르며, 우리의 문화도 그 흐름에 맞게 조율되어 갈지 모른다. 교원에게 재량의 기회를 부여하고 그에 따르는 문제를 해소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신화와 상식이 개정될 수 있다. 교사와 교육에 대한 기존의 정의(定義)를 문화적으로 개정해 갈 수 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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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경북일보(2023년 5월 4일). “시험 시간 종료령 울렸는데도 답안 작성…대구지법, ‘0점 처리’ 정당”
  2. 연합뉴스(2022년 9월 17일). “스톱워치가 부정행위 도구? …법원은 다르게 봤다”
  3. 한겨레(2013년 11월 4일). “‘중간고사 0점 처리, 부당’ 중학생 소송 냈지만…”
  4. 정책이나 지침이 세밀하게 교원의 전문 영역에까지 파고들게 되는 원인이, 교육부나 교육청은 종종 학교와 교원의 요청에 있다고 얘기한다. 굵고 개방적인 지침으로 학교와 교원의 재량 여지를 열어두면, 학교로부터 오히려 더 상세한 지침을 달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 경향은 실지로 없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것은 지침 의존의 관성이 굳어져 재량의 역량 자체가 교원들에게서 퇴화해 버린 현실을 보여준다. 이런 현실은 교육 당국이 계속해서 엄밀한 지침을 제공할 이유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퇴화하고 있는 교원의 자율(전문) 역량을 되살려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5. 규정을 만들고 지침을 내리는 정부나 교육청은 항상 예외를 인정한다고 변명할 것이다. 그렇다. 어느 경우에나 예외는 당연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는 말이 왜 ‘격언’이겠는가. 그러나 제도가 촘촘하게 구속하는 현실에서는 ‘예외’로 적용받기 위한 절차나 요건 또한 까다롭기 마련이다. 그런 과정의 수고를 하느니 차라리 법이나 지침에 고지식하게 순응하는 게 ‘지혜로운’ 일이 된다.
  6. 이런 일이 실지로 일어나기는 어렵다. 법으로 강제되어야 행위를 바꿀 정도의 양식을 가졌다면, 그런 사람은 법에 따라 행위를 고치더라도 ‘요령’을 부리는 데 불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7. 여기에서는 진학 경쟁과 교원 불신(학생 평가와 생활 기록에 대한 통제)이란 두 측면만 정책의 ‘저울’ 위에 올려놓고 이야기했지만, 다른 측면들을 더 고려한다고 해도, 교원의 재량 범위를 고심하는 문제에는 으레 이익(stake)이 크게 붙어 있는(진학 경쟁과 같은) 사안이 맞물려 있다. 그런 사안은 ‘공정하게’ 처리되어야 한다고 여겨지고, 공정하게 처리한다는 것은 객관적이고 일률적인(교원의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는) 절차나 지표(점수)를 적용하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 요컨대 학교 교육에 부착된 이익을 줄이지 않으면 교원에게 재량을 허용할 여지가 생기지 않는다는 통념이 항상 교원의 전문성(‘질’) 논의를 막아서게 된다. 이 점에서 여기 이야기를 교육정책 전반에 대해 일반화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이다.
  8. 정부는 이미 그런 정책을 펴고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정책 보도에서도 종종 ‘학교의 자율 허용’이나 ‘학교 자체의 해결 역량 증진’과 같은 어휘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슬로건 아래에는 학교와 교사의 재량을 인정하고 넓히는 대안보다 학교와 교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대안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 교원의 전문성과 재량을 인정하려면, 그 정책이 우선 진정성(authenticity)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강태중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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