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석의 역설: 출석은 어떻게 계층을 드러내는가
| 미국에서는 ‘만성 결석’이 늘어나며, 출석이 교실 안의 문제가 아니라 교통·돌봄·주거·건강 같은 삶의 조건을 드러내는 지표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개근 조롱’이 등장하며, 하루도 빠지지 않는 출석이 성실의 상징이 아니라 ‘빠질 수 없는 조건’을 드러내는 표지로 읽히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는 결석의 미국과 개근의 한국을 나란히 놓고, 출석이 어떻게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가시화하는 언어로 작동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미국에서는 학생이 학교에 자주 결석하는 현상이 사회문제로 다뤄지는 반면, 한국에서는 오히려 ‘개근’이 놀림의 대상이 되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다. 겉으로 보면, 한쪽은 결석이 많아 문제가 되고, 다른 한쪽은 결석이 적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근 두 사회에서 출석을 둘러싼 언어는 비슷한 방향으로 흔들리고 있다. 미국에서는 예전처럼 결석을 두고 “학교에 안 오는 건 성실하지 못해서, 공부할 의지가 부족해서”라고 단정 짓는 도덕적 서술이 점점 설득력을 잃고, 교통·주거·돌봄·건강 같은 조건이 등교 가능성을 좌우한다는 설명이 전면에 등장하는 추세다. 한국에서도 출석이 곧 성실이라는 상식이 자연스럽게 작동하던 시기가 약화되고 있으며, 오히려 “학교를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인식이 교실 문화로 스며드는 장면이 보고되고 있다. 이러한 역전된 풍경은 출석이 더 이상 학교 규율의 내부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어떤 시간표를 살아내는지, 어떤 이동을 감당할 수 있는지, 어떤 경험을 선택할 수 있는지와 같은 사회경제적 조건과 결합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신호로 읽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출석이 ‘좋은 학생/나쁜 학생’을 가르는 단순한 인성 지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출석은 오히려 아이의 일상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가정이 일상을 어떻게 조직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학교 밖의 시간과 공간을 얼마나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조적 조건의 거울이 된다. 미국에서 만성 결석이 폭증했다는 사실은 ‘학생들이 갑자기 게을러졌다’는 뜻이 아니라, 학교에 가는 행위 자체가 교실 밖의 불안정과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해석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개근을 조롱하는 문화가 생겼다는 것은 ‘학생들이 성실함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라, 학교에 빠지지 않는 삶이 일부 학생에게는 선택이 아닌 제약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글이 집중하는 초점은 “결석이 얼마나 늘었는가/줄었는가”라는 통계 수치의 경쟁이 아니다. 핵심은 출석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으며, 그 의미 변화가 사회경제적 조건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밝히는 데 있다. 출석은 흔히 교육의 문제로만 다뤄지기 쉽지만, 실제로는 돌봄, 노동, 이동, 건강, 여가, 경험의 분배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놓여 있다. 결국 이 글이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결석이 많으냐 적으냐”가 아니라, 출석이 ‘도덕의 지표’에서 ‘조건의 지표’로 이동하고 있는 이 전환기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있다.
결석의 의미
이 글에서 말하는 미국의 ‘만성 결석(chronic absenteeism)’은 대체로 학년도 수업일의 10% 이상을 결석하는 상태를 뜻한다(U.S. Department of Education, n.d.). 결석 사유가 정당한지 여부와 무관하게, 누적 결석 자체를 위험 신호로 읽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중요한 점은 이 범주가 ‘무단결석’처럼 규범 위반을 가려내려는 장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만성 결석은 학교에 제때 도착하기 어렵게 만드는 생활 조건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조건이 학습의 축적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즉 결석을 ‘누가 규칙을 어겼는가’로 이해하기보다, “누가 일상을 유지하기 어려운가”로 이해하도록 렌즈를 바꾸는 개념이다.
반대로 한국에서 ‘개근’은 오랫동안 성실과 규율의 상징이었고, 학교는 이를 상장과 표창의 언어로 보상해 왔다. 개근은 단지 결석이 없었다는 행정적 사실이 아니라, “학교의 시간표에 완전히 맞춰 살아냈다”는 사회적 칭찬의 형태였다. 그런데 최근 개근을 둘러싼 조롱과 냉소는 이 상징의 전복으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도 핵심은 학생의 태도나 인성이 아니다. 어떤 학생은 체험학습·여행·가족 일정 등으로 학교를 ‘빠질 수 있는’ 선택지를 갖지만, 또 어떤 학생은 그런 선택지를 거의 갖지 못한다는 점이 중요하다(이옥진, 2023). 다시 말해 시간·비용·정보·대체학습 자원이 불균등하게 분배되는 현실이 개근을 둘러싼 감각을 바꾸고 있다.
또 하나의 핵심은 ‘출석’이라는 말이 사실 서로 다른 두 가지를 동시에 의미해 왔다는 점이다. 하나는 행정적으로 “학교에 있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교육적으로 “학교에 참여했는가”다. 과거에는 두 의미가 어느 정도 겹쳐 있었다. 학교에 있으면 참여도 일정 부분 담보된다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학교에 없더라도 학습을 대체하는 경로(학원, AI, 과외 등)가 늘어나면서 그리고 때로는 이 경로들이 학교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를 지니게 되면서, “학교에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되었다. 즉, 이때 출석은 더 이상 참여의 충분조건이 아니며, 결석은 더 이상 학습 포기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이러한 변화는 출석을 도덕적으로 재단하던 언어를 약화시키고, 출석을 “조건과 대체 경로의 문제”로 읽도록 사회적 의미를 이동시키고 있다. 결국 두 사회 모두에서 출석은 교육행정의 단순 지표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자원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체화되는지를 보여주는 창이 되고 있다.
출석 정책이 복지 정책이 되는 순간
미국에서 만성 결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학교에 오지 않으려는 학생”을 가려내는 기준이 아니라, “오고 싶어도 올 수 없는 조건”이 얼마나 넓고 깊게 퍼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도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등교는 아침에 아이를 깨우고 버스를 타면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부모의 근무시간과 돌봄 공백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주거가 얼마나 안정적인지, 집에서 학교까지 이동 가능한 교통이 존재하는지, 아이의 신체·정신 건강이 출석을 지속할 수 있는 상태인지, 지역사회 서비스가 위기 상황을 완충할 수 있는지 같은 변수들이 동시에 작동한 결과가 등교다. 이때 결석은 태도가 아니라 ‘조건의 누적’으로 나타나기 쉽다.
예를 들어 부모가 새벽이나 야간 근무를 하고, 집에서 아이를 챙길 성인이 일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등교는 매일의 작은 ‘업무’가 된다. 아이가 스스로 일어나 준비하는 능력만의 문제가 아니라, 아침 루틴을 유지해 주는 구조가 가정 안에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바뀐다. 주거가 불안정해 이사를 자주 하거나 임시 거처를 전전한다면 학교까지의 거리와 교통 수단이 계속 바뀌고, 그 자체가 만성 결석의 토양이 된다. 여기에 건강 문제가 겹치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천식과 같은 만성 질환, 치료 일정, 정신 건강(불안, 우울 등) 문제는 출석을 ‘의지’로 해결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팬데믹 이후에는 이 조건들이 더 복합적으로 얽히게 되었다. 가족의 소득이 흔들리고, 돌봄망이 약화되고, 공공서비스 접근이 끊기고, 학교와의 관계가 멀어지는 경험이 누적되었다. 이때 만성 결석은 학생 개인의 결핍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가 학생을 붙잡아 두던 관계적 장치가 느슨해졌고, 가정이 일상을 조직하던 기반이 흔들렸으며, 지역사회가 이를 완충하던 서비스가 부족해졌다는 구조적 진단에 가깝다.
또한 만성 결석은 학업 성취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원인으로 작동하는 순환을 만들기 쉽다. 출석이 깨지면 수업 이해가 늦어지고, 이해가 늦어지면 학교에 가는 동기가 약해지며, 동기 약화는 다시 출석을 흔드는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미국의 학교에서는 결석이 학점 이수 실패로 곧장 연결되기 쉽고, 학점 실패는 ‘학교에 가도 소용없다’는 감각을 키우며 악순환을 강화할 수 있다. 결국 미국 사례의 핵심은 학교에 오지 않는 아이를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등교를 가능하게 만드는 생활 조건과 관계의 토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라는 사회경제적 질문으로 이동한다.
이 때문에 미국의 출석 대응은 단순한 출석 체크 강화나 벌점 부과 같은 ‘단속’만으로 설명되기 어려운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다. 만성 결석이 커질수록 학교는 결석을 규율 위반으로 처리하는 것만으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그래서 일부 학군에서는 멘토링, 가정 방문, 학교-가정 소통의 재설계, 지역 기관과의 연계 같은 다층적 개입이 출석 정책의 핵심으로 들어오는 흐름이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출석률을 올려라’라는 목표가 “학생을 학교로 데려오는 기술”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멘토링은 단순한 상담이 아니라, 학생이 학교에 올 이유를 회복하도록 돕는 관계 장치이다. 가정 방문도 ‘감시’가 아니라 학교가 가정의 조건을 이해하고 자원을 연결하는 통로로 설계될 때 효과를 낸다. 지역 기관 연계도 마찬가지다. 결석의 원인이 교통이라면 버스 노선과 등하교 지원이 출석 정책이 되고, 돌봄 공백이라면 방과 후 돌봄이나 지역 돌봄 서비스 접근이 출석 정책이 된다. 주거 불안이 원인이라면 학교는 학생의 등록과 통학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행정적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또 하나의 변화는 출석이 학교가 성적을 올리기 위해 관리해야 하는 지표가 아니라, “학교가 학생의 삶을 떠받치기 위해 읽어야 하는 경보”로 재정의된다는 점이다. 이때 출석은 성과평가 지표이기 이전에 학생 지원의 출발점이 된다. 출석이 흔들리는 학생을 처벌하기보다, 출석이 흔들리는 이유를 추적하고 그 이유에 맞는 지원을 연결하는 것이 정책의 방향이 된다. 이는 교육정책과 복지정책의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학교는 교육기관이지만, 만성 결석 앞에서 학교가 생활기관의 역할을 떠맡게 되는 현실이 드러난다.
다만, 이러한 접근에는 비용과 인력의 문제가 동반된다. 멘토링과 가정 방문, 지역 연계는 모두 사람의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다. 따라서 미국의 만성 결석 논의는 필요적으로 “학교에 무엇을 더 요구할 것인가”와 “학교에 무엇을 더 제공할 것인가”라는 재정·인력 논쟁으로 이어진다. 출석을 단속하면 값싸게 보이지만, 효과는 제한될 수 있다. 반대로 지원 중심 접근은 비용이 들지만, 출석을 사회경제적 조건의 문제로 이해할수록 그 비용은 ‘교육비’가 아니라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투자’로 재해석된다.
변해버린 개근의 상징: 성실에서 제약으로
한국에서 ‘개근 조롱’이 나타나는 장면은 출석이 성실의 상징으로 작동하던 문법이 약해지고, 개근이 오히려 ‘평일에 학교를 빠질 수 없는 상태’를 드러내는 표지로 재해석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전에는 결석이 규범 위반의 언어로 쉽게 읽혔다면, 최근에는 결석이 반드시 문제행동을 뜻하지 않는 장면이 늘고 있다. 체험학습, 가족여행, 개인 일정, 혹은 사교육·온라인 학습을 통한 대체 학습 경험이 “학교를 빠져도 된다”는 감각을 만들고, 그 감각은 학생들 사이에서 새로운 위계와 문화로 번역된다.
여기서 개근 조롱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비속어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출석이 도덕적 칭찬의 언어에서 벗어나, “무엇을 더 경험할 수 있는가”라는 경험 경제의 언어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학생들은 학기 중에 빠져도 되는 활동을 점점 더 ‘특별한 경험’으로 인식하며, 그 경험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은 가정의 자원과 연결된다. 예컨대 평일 여행은 단지 비용의 문제가 아니다. 부모의 휴가 사용 가능성, 가족 일정 조율 능력, 이동 수단과 숙박, 그리고 결석 이후 학습 공백을 메우는 대체 자원까지 포함하는 종합 패키지다. 이 패키지를 감당할 수 있는 가정에서는 결석이 “문제”가 아니라 “선택”이 된다.
반대로 그런 선택지를 감당하기 어려운 학생에게 학교는 사실상 유일한 시간표가 된다. 이때 개근은 칭찬받을 성실이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없는 상태’로 오해되거나 희화화될 위험이 커진다. 다시 말해 개근이 조롱받는다는 말은 학교가 제공하는 경험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뜻만이 아니다. 학교 밖 경험을 살 수 있는 지원 격차가 교실 안 문화로 번역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번역의 결과가 “개근=못 빠짐”이라는 상징의 전복이다.
또한 한국의 학교문화는 오랫동안 “출석=책임”이라는 규범을 통해 학생을 조직해 왔다. 생활기록, 담임 지도, 학급 운영, 상벌 체계가 출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학생들이 출석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기 시작하면, 학교가 사용해 온 규율 언어는 설득력을 잃기 쉽다. 학생 입장에서는 매일 와야 하는 이유가 성적이나 생활기록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개근 조롱이 등장하는 장면은 학생들의 가치관 변화라기보다, 출석 규범을 지탱하던 사회적 합의가 약해지고 있다는 구조적 징후로 읽을 필요가 있다.
특히 ‘선택 가능한 결석’이 늘어날수록 출석은 참여의 척도라기보다 시간 주권이 어떻게 분배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변한다. 어떤 가정은 평일에 이동할 수 있고 비용을 감당할 수 있으며, 결석 이후의 학습 공백을 보충할 자원을 갖고 있다. 반대로 어떤 가정은 그런 선택지를 거의 갖지 못하고, 그 결과 아이는 학교에 매일 오는 것 외에 다른 시간표를 상상하기 어렵게 된다. 이때 출석은 평등한 규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평등한 조건 위에서 작동하는 표지로 기능한다.
이 변화는 단지 여행 여부의 문제가 아니라 “대체 경로의 존재”와 결합될 때 더 강력해진다. 어떤 학생은 학원을 통해, 어떤 학생은 온라인 강의나 과외를 통해 “수업을 빠져도 따라갈 수 있다”는 감각을 갖게 된다. 이 감각은 결석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고, 학교에서는 잠을 자고 학원에서 수업을 듣는 것과 같은 학교 수업의 상대적 가치를 낮추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점은 이 대체 경로 역시 사회경제적 자원에 의해 차등 분배된다는 사실이다. 즉 결석의 선택 가능성은 빠질 수 있는 돈과 시간뿐만 아니라 빠진 뒤에 메울 수 있는 학습 인프라까지 포함하는 복합 자원이다. 그러므로 선택형 결석의 확산은 곧 출석이 계층화되는 방식의 확산이기도 하다.
이때 학교가 흔히 택하는 반응은 출석 규정을 더 엄격히 하거나, 체험학습을 제한하거나, 결석에 대한 행정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응은 현상을 ‘규율’로만 읽는 방식이다. 반대로 출석이 흔들리는 이유를 ‘학교 경험의 매력 저하’와 ‘대체 경로의 계층화’로 읽으면 질문이 달라진다. 왜 어떤 학생은 학교를 ‘빠질 만한 곳’으로 인식하고, 왜 어떤 학생은 학교를 ‘빠질 수 없는 곳’으로 인식하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한다. 이 질문은 곧 학교의 역할을 재정의하도록 만든다. 학교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곳이 아니라, 학생이 누구든 ‘의미 있는 경험’을 기본값으로 얻을 수 있는 공공 인프라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출석이 사회경제적 신호가 될 때
미국에서는 결석이 사회경제적 제약을 가시화하는 신호가 되고, 한국에서는 개근이 사회경제적 제약을 가시화하는 신호가 된다는 점에서 두 사례는 결국 같은 질문으로 수렴한다. 출석이 도덕의 언어로만 해석될 때 우리는 학생을 쉽게 ‘성실/불성실’로 분류하지만, 출석을 조건의 언어로 읽기 시작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은 사회가 아이에게 허용하는 이동성, 돌봄, 건강, 그리고 시간표의 분배 구조이다. 미국의 만성 결석은 “학교 밖 조건”이 등교를 얼마나 강하게 결정하는지 드러내고, 한국의 개근 조롱은 “학교를 빠질 수 있는 선택” 자체가 이미 지원에 의해 차등 분배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 대비가 전하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출석이 두 사회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계층을 드러내는 지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는 출석을 유지하지 못하는 쪽이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타나며, 반면 한국에서는 역설적으로 출석을 완벽히 유지하는 쪽이 구조적 제약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즉 한 사회에서는 “결석 많음”이, 다른 사회에서는 “결석 없음”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회경제적 조건의 흔적이 된다. 같은 지표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의미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출석 문제를 단순히 교육정책의 기술로만 다룰 때 어떤 오해가 생기는지를 보여준다.
출석을 교육의 문제로만 다루면, 한 사회는 결석을 처벌하고 다른 사회는 개근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서로 다른 형태의 왜곡에 머물 위험이 있다. 처벌과 조롱은 모두 “조건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바꾸어 버리는 언어다. 반대로 출석을 사회경제적 조건과 연결된 지표로 읽는다면, 출석 정책은 규율 강화가 아니라 ‘오고 싶고, 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방향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출석을 복지·보건·교통과 연결하는 통합 접근이 중요해지고, 한국에서는 학교 경험의 공공성과 의미를 회복하면서 선택형 결석이 만들어내는 경험 격차를 어떻게 완충할 것인지가 핵심 과제가 될 수 있다.
참고문헌
• 이옥진 (2023, 4월 15일). ‘개근거지’란 말에 화들짝 … 초등생 엄마들 부랴부랴 비행기 티켓 예매한 까닭.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04/15/SVQG4Y46WNDZJHAOEOCOMEOZMM/?utm_source=chatgpt.com
• U.S. Department of Education. (n.d.). Chronic absenteeism.
https://www.ed.gov/teaching-and-administration/supporting-students/chronic-absenteeism?utm_source=chatgpt.com
|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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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플로리다주립대학교에서 교육 정책과 교육과정이 학생들의 교육 경험,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식, 그리고 향후 진로 결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하고 있다. 특히, 대학 입시 정책이 고등학교 재학생들의 학업 경로와 학교생활 전반에 어떠한 방향성을 부여하는지에 주목하고 있으며, 아울러 개별 학교들이 이러한 정책적 맥락을 어떻게 해석하고 실행에 옮기는지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 중에 있다. 이 과정에서 학교는 단순한 정책 수용의 장이 아니라, 정책을 재해석하고 학생 경험을 매개하는 주체로서 기능함에 주목하고 있다.

이런 글이 “개근거지” 현상을 재생산할까봐 그것 역시 염려스럽습니다.
글을 잘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그러한 문제가 일어나는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자는 것 같은데 말이죠~ 무작정 덮어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요~
개근 거지 이야기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벌써 7년 전에 대학교에서 ‘출석거지’라는 말로 나왔던 단어입니다. 그때 저는 초, 중, 고, 대학 시절까지 조퇴 한 번 없이 16년 간 개근을 한 사람이었기에 씁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교육의 흐름으로 볼 때 이러한 칼럼이 나왔다고 해서 이 현상이 재생산되는 것을 염려하신다면 늦은 감각이십니다. 많이 진행이 된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해 학생안전부장을 하면서 근태 관련하여 학생생활교육위원회를 개최하면서 과연 근태로 징계를 주는 것이 교육적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던 중 이런 글을 보게 되어 무척 반갑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