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치료사와 함께 보는 마음 미술관 No.2] 은석이 이야기

영화 ‘지상의 별처럼’의 주인공, 이샨
‘지상의 별처럼’이라는 영화는 난독증이 있는 이샨이라는 소년이 나온다. 아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 상상력이 풍부하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글을 읽거나 쓰는 것이 어려워 선생님에게 잦은 꾸중과 질책을 당하고 결국 학습 부진으로 부모와 떨어져 기숙학교로 보내진다. 이후 이샨은 평소 사물과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던 밝은 모습이 사라지고 눈빛은 생기를 잃었으며, 치료사가 보기에도 소아 우울에 가까울 정도로 무기력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샨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미술 선생님은 아이의 난독증을 알아채고 아이가 어려워하는 부분을 아이 눈높이에서 교육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함께해 주었다. 또한 아이의 미적 재능을 표출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아이가 지속적으로 미술 활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아이 곁에서 도왔다. 결국 아이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세상에 닫아 버렸던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미술 선생님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샨에게 미술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자신의 지지자였고, 친구였으며, 스승이었다.
은석이와의 첫 만남
서두부터 영화이야기로 이번 마음미술관 문을 연 이유는, 집단프로그램 중 만났던 은석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은석이는 초등학교 5학년 남학생이며 처음 만났을 당시 저돌적인 눈빛으로 치료사인 나를 응시했다. 맨 뒤에 앉아 벽에 의자를 비스듬히 기대어 놓고 첫 시간 내내 연신 언제 끝나는지 묻기를 반복했다. 옆 친구들에게 지우개 가루를 던지는 장난을 계속했다.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은 전혀 없어 보였다. 다른 아이들도 은근히 은석이의 행동을 못마땅해 했지만 누구하나 은석이 행동을 뭐라고 하지는 못하는 분위기였다. 내가 첫 시간에 제안했던 주제는 현재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단어와 색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아이는 처음 보는 치료사가 제안한 주제에 대해 ‘귀찮다’라는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주황색으로 종이를 가득 채웠다.

아이의 행동을 본 치료사도 인간인지라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라는 답답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 중에 최선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 준 아이의 행동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인정하고, 수용하기로 했다. ‘귀찮다’라고 표현은 했지만 사실 아이의 그림 속에는 귀찮다는 문구와는 사뭇 다르게, 공간 전체를 색으로 칠하는 넘치는 에너지가 엿보였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보다 이렇게라도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한 은석이가 내심 얼마나 고맙고,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 후, 은석이와의 만남
두 번째 만남에 은석이는 늦게 입실하여 뜻하지 않게 치료사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자리에 가겠다면 친구들에게 자리를 비키라고 하였으나, 치료사가 옆에 앉도록 권유하자 싫어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활동을 하며 친구들에게 다소 짖궂은 장난을 걸기도 했으나 은석이는 개인 활동 시간에만큼은 자신을 표현하는 일에 매우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 은석이에게 나는 그림 결과에 대한 평가보다는 지난 시간보다 긍정적으로 향상된 집중력과 끈기, 적극적 표현력을 칭찬하며 다음 시간이 더 기대된다는 말을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은석이가 이 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나자, 나는 은석이에게 프로그램 시간에 필요한 간단한 도구들을 준비해 달라는 도움 역할을 맡겼다. 그리고 활동 중에도 은석이에게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한 번은 프로그램 전에 준비물을 옮길 일이 있었는데 은석이가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흔쾌히 치료사의 부탁을 들어 주기까지 하였다.
몇 번의 활동을 하고 난 후였을까? 프로그램 중 2~3명이 함께하는 공동 작업 시간 중이었는데 은석이는 “저 혼자 해도 돼요?”라고 질문하였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물론이지!”라고 아주 흔쾌히 답했다. 은석이는 혼자 무엇을 할지 고심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벗더니 종이에 자신의 옷을 표현해 보고 싶다고 하였다. 종이 크기부터 표현할 매체까지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한 후, 아이에게 모든 것을 맡겨 버렸다. 아이는 이후 2회(무려 총 4시간)에 걸쳐서 의도했던 작품을 완성해 내었다. 자신의 옷을 표현했던 시간동안 아이는 평소 장난기 가득한 모습은 사라지고 온전히 자신의 주제에 집중하였고 몰입하였다. 첫 만남에서 느꼈던 은석이의 그 높은 에너지는 이 작업에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거침없이 밖으로 표출되었고, 작품을 완성 한 후 아이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얼마 후에 있을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이 전시될 것에 대해 기대하고 설렘을 느끼는 눈치였다.

이후 아이는 프로그램 시간에 다른 친구들을 비난하거나 장난하는 행동이 현격히 줄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좋아하는 일을 할 때에 놀라운 집중력을 보이게 된다. 그것이 놀이든 공부든 일이든 즐길 수 있을 때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몰입하게 되어 있다. 은석이는 충분히 몰입하고 집중할 수 있기를 원했다. 또한 미술치료시간이 아이에게는 수업이 아닌 좋아하는 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는 끈기와 집중까지 더해졌다.
은석이와 나
사실 아이의 내면에는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쳤다. 학습적인 환경에서는 칭찬과 인정을 받는 경험이 부족했지만 미술치료 활동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장을 만나고, 마음의 빗장을 걷어 내자 아이의 에너지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산되었던 것이다. 아이가 그럴 수 있도록, 맘껏 하고 싶은 대로 에너지를 자유롭게 방출할 수 있도록 해 준 것, 아이가 스스로 마음의 빗장을 걷어 낼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치료사인 내가 한 유일한 일이다.
프로그램 마지막 시간에 은석이는 단짝친구와 함께 평소보다 5분 일찍 교실에 도착하였다. 치료사 앞에서 쭈뼛쭈뼛 서더니 갑자기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끝까지 열창을 하고 나서는 부끄러운 듯 자리에 앉아 버리는 은석이의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지만 부끄러움에 몇 번이나 고민하고 용기를 내었을 아이의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울컥하였다. 나는 아이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만날 때에는 우리 둘 다 더 멋진 모습으로 만나자고 이야기 나누었다.
이 땅의 모든 별들이 반짝일 수 있기를
은석이는 영화에 나오는 이샨처럼 난독증 같은 어려움을 지닌 아이는 아니었다. 다소 반항적인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순수하고 에너지가 많은 아이었다. 나는 이샨의 선생님처럼 은석이의 많은 부분을 면밀하게 살펴보진 못했지만 은석이가 가진 에너지가 좀 더 자신을 위해서 쓰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치료사로서 은석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받기에는 부족함이 많았지만, 은석이는 자신을 조금이라도 알아봐 준 나에게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하지만 은석이는 치료사로서 조금 지쳐있던 나에게,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에 대한 의미를 안겨 주었다. 긴 어두움을 뚫고 나서야, 반짝이며 모습을 비추는 고마운 샛별과도 같았다.
세상에 은석이와 같은 별들이 자신이 가진 빛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돕는 일, 그 아이들이 세상을 향해 제 빛을 더욱 반짝이며 뽐낼 수 있도록 돕는 일, 그리고 아이의 빛이 어두움 속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지를 스스로 알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나와 이 땅의 어른들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어둠 아래 갇혀 있지만, 그 고운 빛을 잃지 않고 홀로 반짝이고 있는 수많은 아기별들에 대해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