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을바꾸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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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학교교육의 개혁을 가로막는 잘못된 믿음 15 (1)

#511 이찬승, 교육을바꾸는사람들 대표 2020.01.08

새해가 되면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고 새해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교육 변화에 있어서 새해 희망을 얘기하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지난 한 해도 스카이 캐슬 드라마를 통해 드러난 상류층의 행태와 조국사태를 겪으며 기득권층이 자녀에게 부와 문화자본의 대물림을 위해 어떻게 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지만 이것이 교육개혁의 새로운 계기로 작동하지 못했다. 깊은 성찰과 새로운 교육을 모색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엉뚱하게 대입제도의 정시를 늘리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이는 대입제도와 학교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 정부의 대응이 얼마나 단견적이고 무철학적이며, 무능력한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된다.

 

한국의 교육개혁이 의미 있고 근본적이지 못한 것은 정부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이는 교육개혁에 대한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 신념, 가치관, 문제해결 능력 등과 깊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앞으로도 상당 기간 기존의 교육문제가 그대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즉 교육개혁은 계속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교육의 정책결정자, 행정가, 언론, 교원단체, 교육 분야 시민단체가 가지고 있는 개혁에 관한 가설에 심각한 오류가 있거나 이들이 잘못된 믿음에 젖어 있기 때문일 수 있다. “교육변화의 실패는 한편으로는 기획자들이 내린 잘못된 가설 때문”이라는 풀란(Fullan)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2020년 새해 첫 칼럼에서는 학교교육 개혁과 관련된 잘못된 믿음 15가지와 이를 어떻게 해체할 것인가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이런 잘못된 믿음에 의해 포위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학교교육이 제대로 혁신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엔 필자의 편견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둔다.

 

 

잘못된 믿음1

한국의 학교교육을 혁신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학교교육 시스템을 중요한 것부터 한 가지씩 근본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한다.

 

기존의 학교교육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꾼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학교교육 시스템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얘기를 해왔다. 이들의 주장에는 국가수준의 교육과정을 지역 수준의 교육과정으로 전환하는 것, 교과서를 자유발행제로 바꾸는 것, 상대평가를 절대평가로 바꾸는 것, 수능과 같은 표준화 시험을 없애거나 자격고사화 하는 것, 무학년제를 실시하는 것, 단위 학교에 자율성을 대폭 확대하는 것, 지식 암기 중심의 교육에서 지식의 활용을 강화하는 교육으로 나아가는 것,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나아가는 것, 학급당 학생 수를 감축하는 것, 입시경쟁을 완화하기 위해 대학을 평준화하는 것 등이 포함되곤 했다. ‘문제의 미신1’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중요한 것부터 한 가지씩’이란 표현이다. 앞에서 열거한 이런 문제들은 상호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한 가지씩 변화를 시도해서는 기대하는 효과를 내기 어렵다. 시스템 전체(교육부, 교육청, 학교의 3수준 무두)를 동시에 바꾸는 접근을 하되 3~4가지의 핵심 과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Fullan). 이미 우리 사회는 하나씩 분절적으로 바꾸는 것의 폐해와 한계를 충분히 체험했다. 역량교육을 강조하지만 교육과정은 여전히 학문중심이고 수능 역시 지식을 측정하는 객관식 시험 그대로일 때, 각 개인이 배우고 싶은 것을 선택해 배울 수 있도록 고교학점제를 도입하고자 하지만 대입시와 내신이 여전히 상대평가를 통해 성적순으로 줄 세울 때 기대하는 효과를 얻기 어려운 것을 봐왔다. 학급당 학생 수 감축의 경우도 그렇다. 관련 연구가 ‘효과 없음’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교사의 교수법이 동시에 바뀌지 않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시스템 수준의 개혁을 하고자 할 때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연구와 시범운영, 여건 갖추기 등을 통해 매우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학교교육의 혁신이 반드시 시스템 전반의 개혁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교육의 혁신은 기존의 것을 송두리째 뒤엎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을 유지하는 일과 혁신하는 일이 균형을 이루는 접근이 현실적이다. 그리고 혁신에 대한 고정관념도 깰 필요가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을 탁월하게 해내는 일, 현장의 성공적 사례를 찾아 전국의 학교에 퍼지게 하는 일도 대표적인 혁신이다. 우리는 가장 기본적인 것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서 기본적이지 않은 것에 매달리는 면이 있다. 역량중심교육을 부르짖기 전에 역량교육의 기본 바탕이 되는 기본적인 지식·기능을 확실히 습득하는 일, 미래교육을 얘기하기 전에 현재의 교육부터 제대로 하는 일, 수월성 교육을 강조하기 전에 수많은 아이들을 일상적으로 배움에서 배제·소외시키는 일을 중단하는 일 등이 혁신의 기본이다.

 

또한 바람직한 교육 혁신은 바람직한 철학에서 출발해야 한다. 학생의 다양성이 급증하고 교육불평등이 심화되는 이 시대 교육 변화의 초점은 ‘공정하고 포용적 교육을 통해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모든 아동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키워주는 것’에 둘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앞으로 학교교육의 혁신은 특별한 지원이 필요한 하위 30%아동에 대한 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여 격차를 줄이는 일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교육은 전형적인 복잡계다. 교육의 문제 해결을 분절적으로 접근하면 실패한다. 그래서 세계의 주요국들은 교육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시스템 사고(systems thinking)의 기법을 동원하다. 가장 먼저 가령 2035년을 향한 교육비전을 온 국민의 열망을 담아 먼저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교육개혁은 이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것이어야 한다. 일관성(coherence)이 없는 교육개혁은 소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관련 연구에 의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은 교육과정, 수능시험을 포함한 대입제도, 교과체계의 재구조화, 내신평가 방법 등의 개정이나 개선을 분절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기존의 학교교육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자기모순도 큰 문제다. 학교교육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자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기존의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일에 열심히 공헌하는 경우를 자주 목도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믿음2

교육부나 교육청이 합리적인 교육개혁 안을 입안하고 이의 실행에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공급한 다음 감독, 평가, 보상, 지원 등을 효율적으로 하면 현장에 기대하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교육부나 교육청이 합리적인 교육개혁 안을 입안하고 이의 실행에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제공한 다음 감독, 평가, 보상, 지원 등을 효율적으로 하면 현장에 기대하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현재의 교육부나 교육청이 택하고 있는 가설이자 행동이론(Theory of Action)이다.

 

“국가는(교육청은) 무지막지한 둔기와 같은 집단이다.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를 하나 정하면 지역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실행을 강요한다.” (Micklethwait & Wooldridge)

 

교육부나 교육청의 최고 정책결정자들은 개혁 아이디어를 통해 새로운 제도의 도입 그 자체에 관심이 크다. 가시적인 실적을 내서 차기 집권에 유리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하향식 관리와 표준화를 특징으로 하는 관료제가 매우 효과적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육개혁은 일관되게 이런 접근을 해왔다. 실제 학교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수업의 질이 향상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교사의 의식이 바뀌고, 집단적 유능감을 키우며 학교가 배움의 공동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교직 문화를 바꾸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교사는 여전히 섬처럼 고립된 존재로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교사의 성공과 실패 사례는 좀처럼 학교 내, 학교 간에 공유되지 않는다.

 

그동안 정부는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정책 아이디어를 실천 매뉴얼과 함께 끊임없이 현장으로 내려 보내고 실천을 독려하는 방식을 반복해왔다. 한편 학교 교사들은 현장적합성이 떨어지는 정책에 대해 냉소적인 반응과 함께 마지못해 따르는 시늉을 하며 학교교육을 점점 더 복잡하게 만드는 교육부와 교육청에 대한 불신만 쌓아왔다.

 

이상과 같은 악순환의 고리는 어떻게 끊을 수 있는가? 우선 정책결정자와 정치가들이 교육이 변화하는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 대통령부터 교육에 대한 올곧은 철학과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국민들 간에 공유된 의미(shared meaning)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직선제 대통령과 교육감들의 교육공약이 급조되는 경향이 있고 유권자의 단기적 요구에 영합하는 경향이 강하다. 공약들 간의 긴밀한 연계와 일관성(coherence)은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교육정책이 성공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장 실천가들과 함께 입안될 필요가 있다. 학교 현장을 잘 모르는 외부자들이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 매뉴얼을 만들어 아래로 전달한 다음 이를 따르라는 전통적 교육행정은 중단되어야 한다. 이의 해결을 위해서는 상향식을 중심으로 하되 하향식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거버넌스의 구축이 그 시작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하향식 교육개혁 관행이 지속된다면 한국의 학교교육의 혁신 전망은 암울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육의 변화는 교사들의 ‘주관적 현실’과 ‘객관적 현실’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이때의 ‘주관적 현실’이란 새로운 정책이 도입될 때 교사들이 치르거나 겪게 될 대가, 혼란, 부담, 냉소, 불신, 두려움 같은 것을 말한다. 한편 ‘객관적 현실’이라 교육과정의 잦은 개정, 학습량이 많아 진도 나가기에 급급한 상황, 역량교육의 강조, 과정중심평가의 강조, 학생부 기록의 중요성, 생활지도의 어려움, 잦은 학부모 민원, 만성적인 시간 부족 등을 말한다. 어떤 정책이든 이의 성공 여부는 실천의 중심에 있는 교사가 새로운 정책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또 어떤 태도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렸다. 교사들은 새로운 정책이 현장을 잘 모르는 상부에서 결정되어 내려와 현장에 도입하려는 순간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을 너무나 오랫동안 경험했다. 그래서 교사들의 인지모형(mental model)은 “어떤 정책도 실패할 것이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방관자, 냉소주의자, 불신자로서의 태도가 견고한 상태다.

 

이런 교사들이 변화를 수용하게 하려면 교사의 주관적·객관적 현실의 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변화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변화와 관련된 지식과 정보가 충분해야 한다. 교사들과 함께 정책을 논의하고 입안함으로써 새로운 정책의 도입에 대해 이들의 긍정적 태도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정책의 타당성, 정책의 도입 방식, 실행을 위한 여건의 조성 등에 대해 교사의 태도가 긍정적일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내재적 동기를 유발할 수 있어야 한다. 기존의 중앙집권적 하향식 정책은 복잡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학교 현장에서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다.

 

“현 상태를 강화시키는 요인은 시스템 전반에 걸쳐 존재한다. 현재의 시스템은 다양한 형태로 여러 분야에 걸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시스템 내에 만연해있는 고립주의와 개인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이를 해결하려는 것은 무리한 시도이다. 교사들이 함께 협력하여 공동의 계획을 세워 실행하고, 서로의 수업을 관찰하며, 교수전략을 배우고 실험하고 수정하도록 하려면, 장기간 지속적이고 강력한 실천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개혁이란 단지 최신 정책을 시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교실과 학교, 학구, 대학 등의 문화 전체를 바꾸는 작업이다. 교육개혁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혀있다.” (『학교개혁은 왜 실패하는가』 31쪽)

 

“우리는 점점 더 공유된 의미(shared meaning)에서 해결책을 찾고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해결책 마련에 개인과 집단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변화 프로세스가 매우 중요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한편, 대부분의 사회개혁이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변화의 현상학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현장에서 사람들이 변화를 어떻게 경험하고 받아들이는지는 변화의 도입 의도와는 완전히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학교개혁은 왜 실패하는가』 31-32쪽)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수많은 변화를 경험하며 변화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변화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일이 드물다. 더욱 주목할 점은 변화의 대상이 될 사람들에게 변화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 거의 생각해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변화의 핵심은 이러한 현실을 각 개별 주체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하느냐에 있다.” (『학교개혁은 왜 실패하는가』 47쪽)

 

“간단히 말해서 교사들은 위에서 추진되는 변화가 가치 있다고 믿을 이유가 없고 실제로 시도해볼 유인책은 미미하며 그에 대한 대가는 큰 것이다. 현재의 정책과 전략은 교사들이나 그들의 업무에 특별히 깊은 의미를 주지 못한다. 40여 년 전에 했던 하우스(House)의 다음 논평은 여전히 유효하다.”

 

“새로운 혁신을 시도할 때 개인적으로 치러야 하는 대가는 크기 마련이다. 시도하는 혁신이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 보여주는 지표 역시 거의 없다. 혁신은 믿음의 행동이다. 즉각적인 보상을 기대할 순 없겠지만 결국은 열매를 맺고 개인적인 투자에 상응하는 값어치를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혁신이 가능하다. 또한 혁신을 위해 치러야 할 대가도 크다. 새로운 혁신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신기술을 배우거나 새로운 역할이 요구되는데 여기에 투입되는 에너지와 시간은 혁신에 대한 저항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유용한 지표가 된다.” (『학교개혁은 왜 실패하는가』 61—62쪽)

 

 

잘못된 믿음3

학교교육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국가수준의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지역의 다양성을 반영한 학교기반교육과정(school-based curriculum)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의 학교교육은 매우 경직적인 국가수준의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운영해 왔으며 점차적으로 자율성을 점진적으로 높여가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교육과정의 유연성을 높여도 수능시험이라는 고부담 표준화 시험이 존재하고 이것이 교육과정 운영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서 교육과정의 유연화 등은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현 정부는 초중등교육의 모든 사무를 지방 17개 시도교육청에 이관하겠다는 언급을 종종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국가교육위원회를 만들어 여기서 교육과정 개발은 물론 주요 교육정책을 심의·결정하겠다는 이중성도 보이고 있다.

 

기존의 국가수준의 교육과정 운영이 매우 경직적인 것은 사실이다. 단위학교에서는 교육과정의 성취기준 하나를 변경하지도, 또 새로 설정할 수도 없다. 그래서 교육과정의 유연성을 지금보다 더 강화하려는 접근의 방향성은 옳다. 그렇다고 해서 초등학교 수준에서 국가수준의 공동 교육과정을 포기하고 지역수준의 교육과정을 운영하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최근 일부 교과서에 한해서 발행 방식을 국정에서 검정으로 바꾼 것도 다양성을 의식한 조치다.

 

다만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자율성을 높이는 일은 매우 신중해야 한다. 프랑스의 경우가 좋은 예다.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 200주년을 맞아 1989년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전면 미국식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 기존의 공동체 중심(community-centered), 지식 중심(knowledge-centered) 교육 대신에 개인중심(individualized) 역량 중심 교육(skill-centered)을 지향하기로 한 것이다. 교육과정과 교수법을 하루 하침에 전면적으로 바꾼 것이다. 프랑스는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이런 교육의 결과를 종단연구를 통해 분석했다. 그 결과 모든 인구 계층별로 성취도가 일률적으로 하락했고, 불평등도 급증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동의 발달에 맞추어 나이, 본성에 적합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 개인별 맞춤 교육을 제공하는 것, 모든 아동들에게 공통적으로 비판적 사고력과 핵심역량 개발을 요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한 연구를 한 허어시(Hirsch) 교수는 초등학교 때는 공동체성을 키우기 위해 공공영역의 관습이나 전통적인 양식 등을 익히게 해야 하고, 지역에 상관없이 동일한 내용을 교육과정으로 배우게 해야 하며, 초등학교에서는 아동의 자주성(autonomy)과 평등한 기회의 제공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허어시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지과학적 연구, 발달심리학, 사회과학적 지식까지 동원한다. 그는 일곱 살 난 아이들 중 학습에 뛰어난 아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은 학습이 느린 아이들에게도 똑같이 유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한다.

 

나다운 나를 찾고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는 교육이 반드시 자율과 선택의 폭을 넓히는 교육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발전을 생각하면서 다양성이 존중되는 문화 속에서 서로 어울려 함께 배우는 사회적 학습이 나다운 나를 더 잘 키울 수 있는 방법이다.

 

21세기 들어 탈표준화(poststandardization)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런 주장에 대해 필자도 일면 이에 동의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탈표준화를 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선 매우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과격한 탈표준화는 프랑스의 실패 사례처럼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역기능을 낳는다. 공통성과 개별성, 사회화와 개인화는 서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이의 균형과 조화을 추구하는 교육이 효과적이고 바람직하다.

 

 

잘못된 믿음4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교육제도, 입시제도가 바뀌는 문제는 초정권적인 국가교육위원회의 설치·운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교육정책은 최소한 30년지대계로 운영되는 것이 옳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교육정책이 요동쳐 왔다. 이는 수많은 혼란을 야기한다. 이런 폐해를 막고자 초정권적인 국가교육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하자는 제안이 오랫동안 검토되어 왔고 현 정부는 이를 임기 내 출범시키고자 한다. 필자는 이런 접근에 대해 부정적이다. 따져 보자. 지금까지 교육제도가 바뀐 것이 정권의 입맛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정책이 졸속으로 바뀌다보니 얼마 가지 않아 수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그래서 다시 바꿀 필요성이 있어서인가? 필자는 후자가 더 큰 이유라 생각한다.

 

문제의 핵심은 교육을 개혁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관행과 절차에 있다. 지금까지 모든 개혁은 정부가 주도하는 하향식이었다. ‘잘못된 믿음2’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학교교육의 변화는 이제 더 이상 하향식으로는 실질적 개선이 불가능할 만큼 현장이 각기 다르고 복잡하다. 개혁의 방식에 패러다임의 대 전환이 필요하다. 의사결정 프로세스의 질을 높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의사결정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의사결정의 질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의사결정의 질은 의사결정을 위한 프로세스의 질과 깊은 관련이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교육과정, 대입제도 등의 개선을 위한 프로세스는 매우 미흡했다.

 

지금 현 정권은 금년 하반기 국가교육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차기 교육과정 개정을 맡기려 한다. 만약 위원회가 예정대로 금년 하반기에 출범하고 이 위원회가 차기 교육과정 개정을 맡는다면 가장 먼저 교육과정위원회를 구성하게 될 것이다. 차기 교육과정 개정의 중요성과 과제들을 생각하면 개정의 방향만 잡는데도 상당한 기간이 걸릴 것이다. 게다가 교육부, 교육청 간의 사무 이관과 역할 분담까지 고려하면 모든 것이 급하게 결정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국가교육위원회의 첫 단추부터 잘못 꿰지기 시작할 것이 불을 보듯이 뻔하다. 이런 무리한 변화의 추진은 의사결정 기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진정한 교육의 변화를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 것이다.

 

국가교육위원회의 정책 결정의 프로세스와 질이 교육부의 것보다 더 나을까? 도긴개긴이거나 오십보백보일 가능성이 높다. 차기 교육과정 개정을 상상해 본다면 여전히 정치적이고 졸속 개정이며 문제를 해결하는 역량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국가교육위원의 구성 방식으로 인한 새로운 문제점들이 많이 노정될 가능성이 크다. 위원의 구성에 있어서 대표성과 전문성 두 가지를 다 갖추려는 접근은 어느 한 가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할 수 있다. 합의제(合議制)에 의한 심의·의결의 결과를 현장에서 흔쾌히 받아들일 가능성 역시 매우 낮다. 현장과 동떨어진 정책을 도입하고 이를 하향식으로 추진할 것이란 점에서 교육부의 기존 독임제(獨任制)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 국가교육위원회는 초반부터 시간에 쫓겨 졸속 심의·의결을 거듭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잃고 학교교육의 복잡성만 증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높다.
문제해결의 핵심은 누가 의사결정을 하는가가 아니라 충실한 기초 연구의 바탕 위에서 제대로 된 프로세스를 따라 의사결정의 질을 높이는 일이다.

 

 

잘못된 믿움5

대학서열을 완화하면 경쟁이 줄어들고 학교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대입시를 향한 경쟁교육의 폐해는 매우 크다. 그래서 오랫동안 대학 서열의 완화는 이를 해결하는 핵심과제로 논의되어 왔다. 국공립대학 통합 네트워크를 우선 만들고 사립대를 공영형으로 전환한 다음 공동 선발, 공동 학위제를 실시하자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이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공약(2012, 2017)에도 포함된 바 있으나 현재 국정과제에서는 빠진 상태다. 대신 정부는 지난해 ‘(지방) 국립대학 육성 사업’ 정책을 내놓았다. 지방 국립대학을 우선 지원해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지원을 통해 세계 수준의 연구중심 대학 육성을 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국공립대학 통합 네트워크의 접근은 지방대의 소멸을 막는 데는 유효한 전략일 수 있지만, 이것이 입시중심의 경쟁교육을 개선해 학교교육을 정상화할 수 있을 것이란 가설은 미신에 가깝다. 서울과 경기를 중심으로 한 수도권의 인구가 약 2천만 명으로 전국 인구의 50%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국공립대 네트워크를 출범시켜 대학을 평준화해도 수도권 대학에 대한 선호는 여전할 것이다. 강제로 수도권에 사는 학생을 지방에 소재하는 대학에 임의 배정할 경우 발생하는 불만과 비효율도 상당할 것이다. 또한 네트워크에 속한 대학들의 수준차가 명백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인위적인 통합은 우수한 학생들의 해외 유출을 부추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울러 분명히 인식해야 할 점은 대학의 신입생 모집 인원수가 대학진학을 원하는 학생 수를 능가하는 시점이 이미 코앞에 다가왔다는 점이다. 상위권 대학을 향한 경쟁 교육은 일부 학생들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따라서 학교교육의 정상적 운영을 방해하는 요인을 대학 서열화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도 이젠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따라서 다양한 학습자의 필요와 장래 희망을 고려해 다양한 교육과정의 제공으로 학교교육을 정상화하려는 노력을 할 때다. 교육과정의 다양화를 넘어 ‘학교 안 작은 학교’ 운영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실험해볼 때가 되었다. 입시경쟁교육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대학을 인위적으로 평준화하려는 접근보다는 수능의 자격고사화, 유자격자 추첨제의 도입, 기업의 블라인드 채용의 정착 등을 통해 대입시를 향한 경쟁의 강도를 줄이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경쟁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되 그 경쟁이 교육적인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학교교육을 정상화하는 현실적인 접근일 것이다.

 

 

잘못된 믿음6

학교자치를 강화하고 단위 학교에 더 많은 자율을 주면 교육의 질이 향상될 것이다.

 

이제까지의 교육행정은 전형적인 중앙정부의 하향식, 통제 중심이었다. 그래서 교육 정책의 실패 원인을 중앙통제 중심인데서 찾는 경향이 강했다. 그 결과 마치 학교 중심의 교육 자치를 강화하는 것이 최선의 대안인 것처럼 이야기 되고 있다.

 

학교자치를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있다. 이의 핵심은 국가수준의 교육비전과 목표 그리고 이를 달성할 때 적용할 핵심가치를 설정하고 이를 현장 실천가들과 공유하는 일이다. 이런 비전의 공유, 가치의 공유가 교육 자치를 위한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이런 공유를 통해서 국가적 교육목표가 일관성 있게 달성될 수 있다. 학교 자치란 교육의 목표와 추구하는 핵심가치 등도 단위학교가 마음대로 결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학교자치의 강화란 학교의 자율성만 높아지고 책무성(accountability) 관리가 약해지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학교 자치는 교사들이 그동안 정부에 대해 갖던 책무성 대신에 각 학교들의 집단적 책임감(collective responsibility)과 학생과 학부모와 지역사회에 대해 더 강한 책무성을 지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학교 자치라는 용어의 긍정성에 이끌려 실시하는 ‘순진한 학교 자치’는 대부분 실패한다. 한국의 경우, 입시중심 교육이 불가피하다는 특수성을 고려할 때 특히 교육과정 운영 측면에서 학교 자율성의 강화는 입시중심 교육의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자율성 강화는 다양한 측면에서 교육불평등을 심화시킬 우려가 매우 크다.

 

뉴질랜드가 21세기 초반 단위학교의 자율성을 강화하기 위해 위로부터의 통제와 간섭을 전면 줄이는 개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결과 교육이 더 나아진 것은 전혀 없었다. 이는 자율성을 높이면 교육의 질이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 순진한 생각임을 깨닫게 해준 역사적 사례라 하겠다. 이런 사례를 소개하는 것이 단위학교의 자율성을 강화하지 말자는 뜻은 아니다. 자율성의 신장만으로 학교교육의 질이 개선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스템 전체를 살피는 시스템적 사고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선형적 접근은 전형적인 문제 있는 행동이론이다.

 

학교자치와 교육의 질 개선에 관해 마이클 풀란의 아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많은 개혁가들은 좋은 교사를 채용하고 보상하며 유지하면, 또한 관료주의의 질곡으로부터 이들을 해방시켜 이들이 할 줄 아는 것들을 하도록 자율성을 주면, 대규모의 학교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의도는 좋지만 이 관점이 놓치고 있는 부분은, 개선이란 각자가 근무하는 환경에서 작동 가능한 올바른 동인들(right things)을 적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학교개혁은 왜 실패하는가』 397-398쪽)

 

“시스템의 성공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개인의 자율을 확대하는 것은 개인이나 집단에게 좋지 않다. 교육시스템 작동을 설명하는 데 필자가 사용하는 개념은 ‘연대 속의 자율성(connected autonomy)’이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자율을 누려야 하지만, 적어도 3가지의 연대관계가 필요하다. 학교 내 협업, 관계망을 통한 타학교 및 교육자들과의 협력, 그리고 주정부의 우선순위 높은 정책과의 연계이다.” (『학교개혁은 왜 실패하는가』 438-439쪽)

 

학교 자치란 말이 깊이 없이 회자되는 것이 조금 불안하다. 중압집권적 거버넌스를 개선하는 최선의 방법이 학교 자치가 아닐 수 있다. 학교 자치라는 고전적 개념을 잠시 접어두고 캐나나 온타리오주가 발전시켜 세계 여러 나라로 전파되고 있는 중간리더십(Leading from the Middle)에 대해 진지하게 그 의미와 가치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풀란은 중간리더십을 “중간의 역량을 키우고 내적 연계성과 일관성을 확보하고 조직의 성과를 향상시키기 위해 초점과 목적이 분명한 전략으로서 위로는 주정부 아래로는 학교와 지역사회 간에 효과적인 파트너십을 발휘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대규모 개혁의 주요 딜레마는 통제가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느슨한 것과 관련이 있다. 하향식(top-down) 변화가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방법으로는 사람들이 개혁에 대한 주인의식과 충성도를 가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개혁의 성격조차 명확히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 송이의 꽃을 피게 하라’는 비유로 대변되는, 상향식(bottom-up) 변화도 그 규모와 상관없이 성공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천 송이 꽃이 다 필 수도 없으며 설령 꽃이 피더라도 영구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은 ‘실천에 초점두기’이며 이것이 변화를 위해 하향식과 상향식의 조화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학교개혁은 왜 실패하는가』 34쪽)

 

“상층부(주 정부)가 중심이 되어(top down) 전체 시스템을 이끌기에는 한계가 있다. 상향식 전략(bottom up)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인데 변화에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와 아래를 이어주고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시키는 중간 역할이 필요한 것이다.” (『학교개혁은 왜 실패하는가』 348쪽)

 

학교자치의 전제조건으로 비전의 공유, 가치의 공유, 교직자로서의 올곧은 사명감, 새로운 책무성 등이 필요한 것 외에 학교장의 리더십 변화가 필수적이다. 학교장이 질서, 감독 등을 강조하는 기존 교육부·교육청의 관리모드를 이어간다면 학교 자치를 통한 진정한 변화를 이루기는 어렵다. 학교장의 공유리더십(shared leadership)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학교장은 지도자의 역할로 ‘방향제시(path-finding), 한 방향 정렬(aligning), 권한 위임(empowering)’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Covey,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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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바꾸는사람들 대표 이찬승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짧은 직장 생활을 경험한 후 지금의 능률교육(NE능률)을 창립하여 30년을 경영하면서 영어교과서와 참고서 등 다양한 저술활동을 했다. 2009년 회사를 매각하고,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이란 비영리 공익단체를 설립하여, 현재 이 단체 대표직을 맡고 있다. 국가 교육시스템 재 디자인과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 청소년들도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개혁에 특히 관심이 많다. 수업혁신과 교육격차 완화를 위해 학습과학의 연구와 전파, 그리고 교원 연수에도 힘쓰고 있다.

  • 이메일 : eduinnovator@21eric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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