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량교육 바루기(1) – 역량기반교육의 성찰과 지식기반교육의 새로운 방향
1. 시작말
21세기 들어 가속화되는 기술의 발전과 세계화 흐름 속에서 지구촌이 마주한 사회·경제·환경 각 분야에서의 도전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세계의 많은 국가들은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지식기반교육으로는 미래 사회에 다가오는 도전을 극복할 수 없다는 위기감 속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역량기반교육이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역량교육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한국 역시 역량교육이야말로 무기력한 지식교육을 구할 수 있는 구세주인 것처럼 반겨 맞았다. 역량교육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물론 준비도 제대로 안된 상태이지만 2015개정 교육과정 총론에 핵심역량 6가지를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2015개정 교육과정을 통해 역량 교육을 도입한지 벌써 3년이나 지났다. 하지만 역량교육은 용어만 요란하며 내실 없이 겉돌고 있다. 교육청이나 학교현장은 지식교육과 역량교육이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지 또한 학교 교실의 맥락에서 역량을 어떻게 가르치고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제대로 연구와 검증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실은 여전히 지식기반 교육과정 체제인데도) ‘미래 역량 교육’이란 공허한 구호만 남발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이 도입한 역량의 개념(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능 중심의 역량이 아니라 삶을 위한 구성주의적 관점에서의 전인적 교육 차원에서의 역량)은 실체가 불확실한 면이 많다. 역량이 개인의 속성인지, 행동인지, 행위의 결과인지 모호하다. 전 세계적으로도 이런 역량을 학교교육의 맥락에서 어떻게 가르치고 평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 중에 있다. 한국의 경우 무엇보다도 역량교육을 할 여건 자체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한국의 역량 교육은 덩그러니 건물만 지어 놓고 안에는 가구도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으며 실제 입주해 사는 사람도 없는 집과 같다. 이 집이 머지않아 이웃집들의 시야만 가리는 흉물로 변해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된다.
OECD가 핵심역량을 소개한지 15년이 지난 지금 지식기반교육과 역량기반교육에 대한 관점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2015개정 교육과정에서 도입한 역량교육에 어떤 문제점이 있고 왜 개념 중심의 새로운 차원의 지식교육이 강조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역량교육의 특성과 한계
역량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가장 먼저 역량에 대한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역량에 대한 이해 없이는 역량을 가르칠 수도 평가할 수도 없다. 역량교육은 전통적인 지식교육과 매우 다르다. 내용 지식(content knowledge)은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회상해 사용할 수 있고, 이의 평가도 정답이 있는 닫힌 질문형태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역량은 지식과 달리 저장해 두었다가 필요할 때 불러와 사용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역량의 평가는 정답이 없는 열린 질문을 닮았다. 교실 상황에서의 역량 평가는 학습자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지적·사회적 과정을 수행할 때 관찰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런 수행은 과제의 종류, 수행자들의 구성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며 평가 결과도 측정할 때마다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역량 평가는 성적을 산출해 책무성 관리를 위한 자료나 입시 자료로 활용하기가 어렵다. 특히 일반역량(generic competencies)은 그 자체로 가르치거나 평가하기 어렵다. 이를 가르치거나 평가하려면 역량을 구성하는 복합적인 요소를 감당할 수 있는(manageable) 수준으로 단순화하거나 해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하다보면 그 역량의 고유한 진정성을 잃고 행동주의나 환원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역량 교육을 도입하고 있는 나라들도 지도(instruction)에 초점을 두지 점수(grade)를 매겨 성적을 산출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학교교육의 맥락에서 역량교육의 평가는 ‘학습을 위한 평가(assessment for learning)’나 자기평가, 동료평가, 교사의 관찰평가 등이 일반적일 수밖에 없다.
세계는 아직 역량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역량교육에 대한 연구의 진전이 매우 느리다. 개념의 진전에만 십수 년이 걸렸다. 역량은 원래 행동주의에 기반하고 직업세계에서 사용하던 개념이다. 이것이 학교 교실 맥락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구성주의적 역량으로 진화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역량 연구의 대표적 기관의 하나인 OECD도 최근 ‘Education 2030’ 프로젝트를 통해 과거 핵심역량(key competences)의 정의에 포함된 ‘지식, 스킬, 가치, 태도’와 같은 핵심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 더 구체화 하며, 역량이 반영된 교육과정을 개발할 때 필요한 기본 원칙을 매우 추상적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역량은 지식과 달리 실체로 존재하기보다는 발휘되는 순간에 존재를 드러내는 특질을 갖는다. 역량은 특정 영역의 특정 맥락 속에서(context-dependent & context-specific) 발휘되기 때문에 다른 영역으로의 전이(transfer)도 어렵다. 또한 어떤 특정 역량의 개발에 어느 정도의 기간이 소요되는지 또 어떤 역량이 어떤 단계와 순서로 발달하는지 잘 모른다. OECD의 Education 2030 프로젝트는 교육과정 설계 원리에서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범위의 주제와 프로젝트 선택지가 제공되어야 하고, 아울러 학생 자신이 관심이 있는 주제와 프로젝트를 제안하도록 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프로젝트를 할 때 개인의 선택을 권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역량교육은 기본적으로 학습자 중심 개별화 학습을 지향하기 때문에 학생들에 대한 평가 결과를 상호 비교할 수 없다.
또한 지식교육과 역량교육의 관계도 아직 모호하다. 역량교육의 비판론자가 “지식은 역량의 발휘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역량기반교육은 ‘지식의 확실하고 체계적인 습득’을 소홀히 하는 것 아닌가요?”라고 질문을 하면 역량기반교육 찬성론자들은 “역량에는 지식, 기능, 태도, 가치 등이 다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라고 답한다. 바로 이 지점이 지식교육과 역량교육에 대해 오해하기 쉬운 부분이다. ‘역량에는 지식, 기능, 태도, 가치 등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뜻은 역량이 발휘될 때 지식, 기능, 태도, 가치 등이 동원되고 총체적으로 발휘된다는 뜻이지 이것이 결코 역량기반교육을 하면 ‘지식, 기능, 태도, 가치 등’이 체계적으로 함양된다는 뜻은 아니다. 학교가 역량교육에 집중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체계적인 지식교육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어 인지적 학습의 성취도를 측정하는 표준화 시험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역량교육을 좀 더 일찍 실천해본 일본, 핀란드, 캐나다의 일부 주들은 이미 이런 경험을 해본 바 있다. 이렇게 역량교육은 순수한 교육의 목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이 정상적이고 바람직하다.
한국의 학교교육에서 역량교육을 전면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역량 교육은 학습자 주도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한국처럼 수능과 같은 표준화 시험이 존재하고 정해진 수업 시수를 엄격히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진정한 역량교육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그래서 역량교육을 전면적으로 도입하려 했던 핀란드는 한 학기 현상기반학습(phenomenon-based learning: PBL)을 필수화하는 것으로 축소 조정했고, 일본 역시 유토리 교육과 함께 역량교육을 일찍이 시도했으나 기초학력 저하 등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최소한의 역량교육을 하는 방향으로 후퇴했으며 영국은 2010년 아예 역량교육을 포기하고 지식교육으로 회귀했다. 미국도 21세기 들어 Partnership for 21st Century Skills (P21) 중심으로 역량교육운동을 펼쳤지만 역량교육을 도입한 주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역량교육을 먼저 실시한 나라들의 성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핀란드의 경우를 보자. 핀란드가 현상기반학습(PBL)을 도입한 후의 그 성과를 보면 우려스러운 면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 BBC 방송(2017)이 취재한 내용에 따르면 “PBL을 통해서는 깊이 있는 지식교육이 어렵다. 공부 잘하는 아동과 못하는 아동 간의 격차가 더 커지고 있고 이 격차는 갈수록 심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100년 전에도 이런 교육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PBL을 통해 교육의 성취도가 향상되고 있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등의 부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룬다. 핀란드는 역량교육과 교과 중심의 지식교육의 균형을 추구한다(seeking to place skills as much as subjects). 이에 반해 한국은 교육과정평가원이 앞장서서 ‘학교교육의 목표 = 핵심역량의 함양’이라고 선언할 정도로 역량교육에 대한 환상이 심하다. 세계 어떤 나라를 보더라도 역량교육은 전통적인 내용기반 교육에 역량교육을 통합하는 방식 위주로 하면서 부분적으로 PBL 등을 시도한다.
한국의 역량기반교육에 대한 접근은 신중할 필요가 있고 역량교육에 대한 막연한 선호에 대해서는 좀 더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2015개정 교육과정에서 각 교과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교과에 역량 교육의 도입을 전면화한 것이나 교육과정평가원의 관련 연구나 연수 자료에서 ‘학교교육의 목표 = 핵심역량의 함양’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은 학교교육을 전면적으로 역량교육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매우 우려스럽다. 역량교육에 대해 세계 주요국들도 아직 연구와 파일로팅(piloting) 단계에 있는데 역량기반교육을 지식기반교육의 대안인 양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2015개정 교육과정의 연구진도 역량을 이런 목적으로 총론에 넣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황규호, 2016). 역량교육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OECD의 ‘Education 2030’의 중간 연구도 개념적 지식(conceptual knowledge)을 중시하는 지식·역량통합교육(content-competency integrated education)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평가에 대해 가장 민감한 국가 중 하나인 대한민국에서 평가 결과를 선발이나 질 관리 도구로 쓸 수도 없는 역량교육을 학교교육의 주된 목표로 삼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3. OECD가 제시하는 역량교육의 새로운 방향
OECD가 2005년 DeSeCo 역량 연구의 결과물로 핵심역량을 발표한 이래 이는 세계의 학교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연구는 PISA 평가의 준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의외로 영향력이 켰다. OECD의 DeSeCo 연구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핵심역량(core competences)을 ‘3개 영역에 9개의 하위 역량’의 형식으로 발표한 것이 전부다. 이를 학교교육의 맥락에 어떻게 적용하고 평가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연구도 없었다. 구체적이지 못해 한계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많은 나라들로 하여금 역량교육의 도입에 큰 관심을 갖게 했으니 OECD가 회원국에 미치는 영향은 의외로 컸다고 하겠다. 물론 세계적 역량교육의 붐이 OECD의 DeSeCo 연구에서만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다.
OECD는 지금 1기(2015-2018), 2기(2019~2021)로 나누어 새로운 역량교육 연구를 추진 중이다. 이 연구 프로젝트의 정식 명칭은 ‘교육의 2030 미래와 스킬(The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 2030)’이고 줄여서 통상 ‘Education 2030’이라고 부른다. 이 연구의 목적은 회원국들이 다음 2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을 돕기 위해서다.
• 오늘날 학생들이 잘 성장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지식·스킬·태도·가치를 필요로 할 것인가?
• 교수체제(instructional systems)가 이러한 지식·스킬·태도·가치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가?
이는 이전의 핵심역량 연구와는 크게 다르다. 이전의 핵심역량 연구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What to teach)’에 관한 것이 주였다면 이번에 새로 착수한 연구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How to teach)’까지 포함한다. 교육과정은 어떻게 개발하고 수업지도와 평가 원리까지 연구해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Education 2030’ 연구 프로젝트는 이미 작년에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전환적 역량(transformative competences)’ 3가지(새로운 가치 창조 능력, 책임감 갖기, 긴장과 난제의 대처 능력)를 새로 발표했다. 이렇게 OECD Education 2030 프로젝트는 What to teach를 넘어 How to teach/assess까지 연구의 폭을 넓히고 있다.
아래 [그림1]은 Education 2030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학습 목표 프레임이다. 종전의 것에 비해 다소 복잡해졌다. 앞단에는 ‘학습자 행위주체성(learner agency)’이란 것이 붙었고 핵심역량의 우측에는 3가지 전환적 역량이 추가되었으며 학습의 가장 높은 목표로 개인적·집단적 웰빙이 제시되었다. 종전에는 학습의 최종 결과로 ‘개인의 성공’이 중시되었다면 2030년대를 향한 미래교육에서는 ‘개인적·집단적 웰빙’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부의 편중과 불평등의 증가를 생각하면 너무나 지당한 교육목표의 변화라고 생각된다. Education 2030 프로젝트에서 강조하는 학습자 행위주체성도 주목할 만하다. 전환적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학습자 행위주체성이 필수적임을 암시한다. 이는 학생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성찰하며 변화를 이끌기 위해 책임 있게 행동하는 것을 말하며, 학생이 자신의 삶과 주변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려는 의지와 능력을 통해 발현된다. 이의 발휘는 정체성, 소속감의 발달, 동기, 희망, 자기 유능감(self-efficacy), 성장 관점(growth mindset), 목적의식(sense of purpose) 등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핵심역량은 물론 새로운 전환역량의 실현을 위해서 학습자의 행위주체성이 강조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핀란드(2016)도 새로운 교육과정에서 학생 행위주체성(student agency)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림 1] Education 2030 학습목표 프레임(OECD 2018)
역량교육에 대한 연구와 경험이 축적되면서 역량교육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종전에는 지식교육과 역량교육을 대척점에 놓고 주된 담론의 흐름이 ‘지식교육에서 역량교육으로’였다면 핵심역량의 발표로부터 근 15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지식·역량 통합교육으로(content-competency integrated)’라는 접근으로 변해가고 있다. 여기에 ‘개념중심’이 추가되어 ‘개념중심 지식·역량통합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OECD Education 2030 중간보고서). ‘개념중심(concept-focused)’이란 지식의 위계(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개념적 지식, 핵심원리)에서 개념적 지식(conceptual knowledge)을 중시하는 것을 의미한다. OECD 역량 연구의 이런 관점 변화는 최근 들어 세계의 권위 있는 대학부설 출판사들을 통해 인지과학의 연구 결과를 근거로 역량기반교육보다 지식기반교육을 강조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는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개념적 이해를 매개로 깊은 이해를 수반하고 개념을 중시하는 지식기반교육과 역량기반교육은 서로 어떤 관계에 있을까?
4. 21세기 학교교육의 새로운 방향 – 개념중심 지식·역량통합 교육
아래 [그림 2]는 21세기 교육이 지향하는 교육과정의 한 모델이다. 이는 지식 체계의 상단에 개념적 지식과 일반화된 지식을 위치시키고 있다. 한국의 교육은 현재 사실적 지식의 습득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지식의 활용을 강조하고 있는 상태다. 이제 21세기 교육이 지향해야 할 점은 사실적 지식(factual knowledge)과 절차적 지식(procedural knowledge)을 넘어 전이가 가능한 개념적 지식(conceptual knowledge)의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21세기 학교교육이 ‘개념중심 지식·역량통합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그림 2] 21세기 교육과정 모델 – 지식체계(Richard M. Cash, 2017)
한국의 경우 2015개정 교육과정에서 ‘핵심개념(big idea)’을 도입하고 내용체계에서 ‘일반화된 지식’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실은 개념적 지식과 아직 거리가 멀다. 개념적 지식은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 진도빼기식 수업으로는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없고 개념적 이해에 이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국의 학교교육이 아직 전이가 불가능한 지식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2015개정 교육과정이 미흡하기는 하지만 깊은 이해와 전이가 가능한 개념적 지식의 습득을 강조한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다음 [그림 3]이 지식 체계와 개념중심 수업과의 관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림 3] 21세기 교육과정 모델(Erickson, 2008)
OECD의 새로운 역량 연구가 소개하고 있는 ‘개념중심 지식·역량통합 교육’은 실제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 마침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British Columbia: BC) 주가 바로 이런 교육을 실행하고 있다. BC의 교육시스템은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이 주는 스킬과 역량을 실질적으로 함양할 수 있고 이에서 한발 더 나아가 유연성과 선택의 폭을 넓힌 개인별 맞춤학습을 강화한 교수학습을 지향하고 있다.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아직 ‘알다, 할 수 있다’라는 2차원적인 ‘지식-역량 교육’의 패러다임에 머물고 있는데 비해 아래 [그림 4]에서 보듯이 BC는 깊은 이해의 단계인 ‘이해하다’의 수준까지 이를 수 있도록 하는 3차원 교육을 하고 있다. BC는 지식을 ‘사실적 지식(know), 절차적 지식(do), 개념적 지식(understand)’처럼 3가지 위계로 나누고 이것이 통합적으로 발휘되는 것을 곧 ‘역량’이라고 보고 있다. 지식과 역량은 이렇게 만난다. 지식과 역량과의 관계 혹은 지식교육과 역량교육과의 관계는 상호보완적인 측면이 있다. 지식교육이 뒷받침되지 않는 역량교육을 상상할 수 없고 역량으로 발휘되지 않는 지식교육은 쓸모가 적다.
[그림 4] 교육과정 모델(British Columbia)
출처: https://curriculum.gov.bc.ca/curriculum/overview
개념기반 21세기 교육과정 모델의 가장 큰 특징은 ‘이해하다’에 있다. 이때의 ‘이해하다’는 블룸의 교육목표 분류표에 기반을 둔 ‘이해하다’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는 Wiggins와 McTighe의 이해중심교육과정(Understanding by Design: UbD)이 지향하는 다음 <표 1>의 6가지 측면을 의미한다.

<표 1> ‘이해하다’의 6가지 측면(UbD)
이때의 ‘이해하다’란 새롭게 배운 내용을 자기 언어로 설명할 수 있고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관점까지 바뀔 수 있고 나아가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자신을 평가까지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우 훌륭한 학습의 목표다. 이런 측면에서 개념적 이해를 최상단에 두는 BC의 교육과정 모델은 한국의 2015개정 교육과정과 닮았다. 문제는 어떻게 실제 이런 교육이 이뤄질 수 있게 할 수 있는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한국이 지향해야 할 교육과정의 방향은 역량중심교육이기보다는 OECD의 새로운 역량교육 연구가 언급하고 있는 ‘지식·역량통합(content-competency integrated)’ 교육과정임이 분명해 보인다.
학교교육의 새로운 방향은 질 낮은 지식교육은 현재대로 둔 채 역량교육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사실적 지식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현행 지식교육을 개념적 지식(conceptual knowledge) 수준으로 그 질을 높이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완전학습이며 지식교육이 개념적 이해(conceptual understanding)라는 높은 수준의 이해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역량교육의 선행 조건도 ‘기초적인 지식과 기능의 완전한 습득’이다. 일본의 최근 교육과정 개정이 이런 관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이번 교육 대개혁에서 신학력을 <기초적인 지식·기능의 확실한 습득, 기초적인 지식·기능을 활용해 과제를 해결하는 힘(사고력, 판단력, 표현력), 학습 자세 및 인성>처럼 정의하고 있다. 일본은 ‘기초적인 지식과 기능의 철저한 습득’을 바탕으로 ‘사고력, 판단력, 표현력’이라는 역량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설계했고 역량도 최소한의 종류로 국한시키고 있다. 전이 가능한 학습은 개념적 이해에 이를 때만 가능하다. 깊은 이해가 수반되지 않는 사실적 지식으로는 역량교육도 어려우며 전이는 더 더욱 불가능하다.
5. 맺음말
세계 주요국들의 역량교육 추세가 어떻게 될지 무척 궁금하다. 역량교육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과 긍정적 시각이 공존한다. 역량의 정의 자체만 보면 기능주의 관점에서 구성주의적 관점으로 크게 진화했지만 역량이 특정 영역과 맥락 속에서만 발휘되는 성격이 강해 전이가 어렵다는 점, 그리고 그 자체로 가르치기도 평가하기도 어렵다는 점(구성요소로 해체해야 지도와 평가가 가능), 지식처럼 객관적인 평가가 어렵다는 점(관찰을 통한 평가가 주가 됨), 아직 특정 역량이 어떤 단계를 밟아 발달되는지 연구가 거의 되어 있지 않다는 점, 가르칠 교과목과 과목별 시수가 엄격히 규정되어 있는 학교교육 상황에서 프로젝트 수업 등이 주류가 되기 어려운 점 등의 수많은 약점과 한계가 있다. 특히 역량교육을 학교교육의 맥락에서 평가하고자 할 때 많이 당황하게 될 것이다. 역량이란 ‘발휘하는 사람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고, 어떤 과제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또 누구와 함께 과제를 수행하는가에 따라 다르고, 교사가 어떤 시점에 학생을 관찰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서술형 채점지침(rubric)을 어떻게 작성하는가에 따라 다르고…’ 그래서 아직 학교교육이 입시준비를 위한 교육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 역량기반교육이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발전할 수 있을지 매우 불확실하다.
한국의 역량교육은 아직 재검토되어야 할 점이 많다. 몸은 아직 지식교육에 머물고 있는데 마음만 실체도 불분명한 역량교육을 쫓는 형국이다. 역량교육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행 교육과정의 기조가 ‘지식교육에서 역량교육으로’이었다면 이제는 ‘개념중심 지식·역량통합 교육으로’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UNESCO의 한 역량 연구도 전통적인 지식교육과 역량교육이 조화를 이룰 것은 권고하고 있다. 역량교육에 대한 깊은 이해와 내실 있는 준비도 없이 교육과정의 겉옷만 역량으로 바꿔 입혀 놓는 것은 수많은 혼란과 비효율을 야기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2015개정 교육과정이 내용체계에서 ‘일반화된 지식’을 도입함으로써 핵심개념(big idea)을 중시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변화의 방향이라고 생각된다. 차기 개정 때는 BC의 교육과정 모델처럼 개념이해를 중시하는 3차원 지식기반교육 모델과 역량기반교육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점도 교육과정 모델 도표를 통해 분명히 나타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전이 가능한 교육방식이 ‘개념적 이해 중심의 새로운 지식교육’인지 ‘역량교육’인지 또한 양자 간의 어떤 균형을 추구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고 지금까지 잘못된 접근이 있었다면 그 부작용이 더 심화되기 전에 개선해 주기 바란다.
<예고> 다음 칼럼은 2회로 나누어 아래 10개의 질문과 답을 통해 2015개정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역량교육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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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nier.go.jp/kankou_kiyou/146/b08.pdf
• UNESCO(2016). Assessment of Transversal Competencies.
• Wiggins, G & McTighe, J., (2005). Understanding by Design. ASCD.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하고, 짧은 직장 생활을 경험한 후 지금의 능률교육(NE능률)을 창립하여 30년을 경영하면서 영어교과서와 참고서 등 다양한 저술활동을 했다. 2009년 회사를 매각하고,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 이란 비영리 공익단체를 설립하여, 현재 이 단체 대표직을 맡고 있다. 국가 교육시스템 재 디자인과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 청소년들도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치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교육개혁에 특히 관심이 많다. 수업혁신과 교육격차 완화를 위해 학습과학의 연구와 전파, 그리고 교원 연수에도 힘쓰고 있다.
- 이메일 : eduinnovator@21erick.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