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존재론적·인식론적 비판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교조적 태도, 역사적으로 성찰해야
조국 서울대 교수가 법무부장관으로 지명되고 임명되자 사회적 논란이 크다. 그 배경에는 한국 사회의 여러 갈등이 내재하지만 장관의 딸이 대학에 가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의혹이 국민정서를 자극한 까닭도 있다. 더구나 그 전형이 ‘특기자 전형’인데 학생부종합전형에 불꽃이 튀었다. 교육부는 사상 처음으로 학생부종합전형 선발 비중과 전체 정원 대비 특수 목적고·자율형 사립고 출신 선발 비율이 높은 13개 대학을 중심으로 학생부종합전형 실태조사에 나서기로 했고, 자료 조작이나 허위 기재 등이 나타나면 즉시 특별감사로 전환한다고 발표했다.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공정성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최근 10년 동안 학생부교과전형과 학생부종합전형의 비중이 늘어나고 정시수능 비중이 줄어들자 공정성 논란은 커졌고 특히 학부모들은 크게 반발했다. 강남은 강남대로, 지방은 지방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그 사유는 다르지만 정서적 반감은 매우 컸다. 심지어 “정시 수능전형이 중산층 이하 계층의 자녀에게는 크게 유리하지 않거나 오히려 학생부종합전형이 실질적 평등에 기여한다.”는 여러 교육적 연구가 발표되었지만 국민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처럼 잠재된 정서에 언론과 검찰이 조국 장관의 딸 입시에 초점을 맞추니 이 지경에 이르렀다. 그동안 국민은 학생부종합전형이 평가기준을 미공개하는 등 불공정 요소에 대해 반발이 거셌는데 대학은 학생의 성장 및 사교육비 축소, 경쟁 완화라는 명목으로 그 비중을 해마다 늘리고 교육당국은 고교정상화라는 명목으로 재정지원을 크게 강화한 것도 한 몫 했다. 정부만이 아니다.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교육시민단체, 교사단체도 침묵의 책임이 있다. 국민은 아우성인데 장기간 침묵하거나 오히려 ‘학생부종합전형을 강화하라’고 집단적 발언을 하였으니 지금 그 단체들이 학종 개선안을 내놓아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교육계 내부적으로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교육적으로 명분이 옳고 장점이 있어도 국민적 거부감이 크다면 사유해야 한다. 학종을 반대하는 국민 중에는 경쟁과 서열화에 반대하는 교사나 교육전문가가 상당수 있고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는 까닭이다. 나는 객관식 수능 비중을 확대하거나 대학 서열화에 강하게 반대하지만 객관식 수능의 구악(舊惡)을 청산하기 위해 신악(新惡)으로 나타난 학생부종합전형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도 선(善)을 이루려면 최선만 고집하는 교조적 방향은 신악으로 변질되었고, 미래도 마찬가지라고 전망한다. 더구나 학생부종합전형을 중심전형으로 채택하는 국가는 단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한국 교육에서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중심전형으로 제도화했기 때문에 지금의 사단이 났다.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까닭이 있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다른 이성적이고 사회적인 존재이지만 동물처럼 생명체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한계를 넘을 수는 없다. 그런데도 그 한계를 무시하고 권력을 가진 개인이나 집단이 특정한 제도나 사상을 사회성원들에게 강제하고 해석하는 지점에 역사는 항상 파국으로 응답했다.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중세의 십자군 전쟁’, ‘20세기 초의 독일과 이탈리아, 일본의 극우 파시즘’, ‘소련의 극좌 파시즘’, ‘중국의 극좌적인 문화대혁명’, ‘미국의 극우적인 메카시즘’ 등에서 보듯이 역사적 비극은 집단의 신념을 불변의 진리로 정당화할 경우에 나타났다.
학생부종합전형은 성장평가제
『하수(河水)는 두 산 틈에서 나와 돌과 부딪쳐 싸우며 그 놀란 파도와 성난 물머리와 우는 여울과 노한 물결과 슬픈 곡조와 원망하는 소리가 굽이쳐 돌면서, 우는 듯, 소리치는 듯, 바쁘게 호령하는 듯 항상 장성을 깨뜨릴 형세가 있어, 전차(戰車) 만승(萬乘)과 전기(戰騎) 만대(萬隊)나 전포(戰砲) 만가(萬架)와 전고(戰鼓) 만좌(萬座)로써는 그 무너뜨리고 내뿜는 소리를 족히 형용할 수 없을 것이다. 모래 위에 큰 돌은 흘연(屹然)히 떨어져 섰고, 강 언덕에 버드나무는 어둡고 컴컴하여 물지킴과 하수 귀신이 다투어 나와서 사람을 놀리는 듯한데 좌우의 교리(蛟螭)가 붙들려고 애쓰는 듯싶었다. 혹은 말하기를, “여기는 옛 전쟁터이므로 강물이 저같이 우는 거야.” 하지만 이는 그런 것이 아니니, 강물 소리는 듣기 여하에 달렸을 것이다. 산중의 내 집 문 앞에는 큰 시내가 있어 매양 여름철이 되어 큰비가 한 번 지나가면, 시냇물이 갑자기 불어서 항상 거기(車騎)와 포고(砲鼓)의 소리를 듣게 되어 드디어 귀에 젖어 버렸다. 내가 일찍이 문을 닫고 누워서 소리 종류를 비교해 보니, 깊은 소나무가 퉁소 소리를 내는 것은 듣는 이가 청아한 탓이요,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것은 듣는 이가 분노한 탓이요, 뭇 개구리가 다투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교만한 탓이요, 대피리가 수없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노한 탓이요, 천둥과 우레가 급한 것은 듣는 이가 놀란 탓이요, 찻물이 끓는 듯이 문무가 겸한 것은 듣는 이가 취미로운 탓이요, 거문고가 궁우(宮羽)에 맞는 것은 듣는 이가 슬픈 탓이요, 종이창에 바람이 우는 것은 듣는 이가 의심나는 탓이니, 모두 바르게 듣지 못하고 특히 흉중에 품은 뜻을 가지고 귀에 들리는 대로 소리를 만든 것이다.』
박지원 <열하일기>
“인간은 현상을 오직 개별적이고 주관적이며 상대적으로만 인식할 수 있으며 객관적 이해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가 어떤 관찰과 직관을 해도 그의 경험적 지식은 개별적 지식이며 근본적으로 일반화나 개념화는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확실한 결론에 이르기 위해 일반화에 집착하면 불일치와 갈등으로만 나타난다. 그의 지식은 어떤 경우에도 개별적이고 주관적인 지식으로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지식이 될 수 없다.”
학생부종합전형은 종합전형이라고도 불리는데 ‘정시전형’이나 ‘학생부교과전형’과는 다르게 ‘정량평가’가 아닌, ‘정성평가’로 학생을 선발하는 대입전형이다. 넓은 의미에서 교육 평가방식에서 학생이 지닌 능력에 비추어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가를 평가하는 ‘능력(참조)평가’이고 그 전의 교육과정에 비해 어느 정도 교육적 성장이 이루어졌는가를 평가하는 ‘성장(참조)평가제’이다. 즉 고등학교에서 교과활동 및 창의적 체험활동에 따른 최종 성적이나 순위보다는 중학교나 그 전 학년의 교육경험과 비교하여 교육적으로 얼마나 성장했는지에 대해 관심을 두는 평가방식이다. 즉 학생이 특정한 성취수준(각 교과에서 정한 교육목표에 도달한 정도)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초기에 비해 그 능력이 향상되거나 어떤 특성의 변화가 이루어졌는가를 측정하여 평가한다. 대학은 고등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지만 학교생활기록부에 기록된 교과 및 비교과활동(창의적 체험 활동)을 사실적이라고 신뢰하고 간접적으로 학생의 성장을 측정하고 평가한다. 특히 학생의 생활기록부에 기재된 성장에 대한 해석이 타당하여 사회적으로 수용되려면 사전에 측정한 성장기록과 현재 측정한 기록이 모두 신뢰할 수 있어야 하며 사전 측정치와 현재 측정치 간에는 상관이 낮아야 한다. 또한 어떤 학생의 최종 성취수준이 다른 학생에 비해 낮더라도 학교의 교육프로그램을 통해 성장이 이루어졌다면 우수하다고 평가하며, 학생의 개별적인 성장을 강조하므로 다른 학생과의 지나친 경쟁을 지양하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성장평가제는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해도 학생이 새로운 교육경험을 통해 그 수행이 바뀌고 향상되었는가를 신뢰할 정도로 관찰하고 측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대입 진학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한 사회에서 중심적인 선발방식으로 채택하기에는 부담이 크다. 교수학습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형성평가(과정중심평가, 다수의 교육학적 견해는 교수학습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학습자에게 피드백을 주고 교과과정과 수업방법을 개선시키기 위해서 실시하는 평가이다. 즉 각 교과의 성취기준에 이르기 위한 수행과정에서 그 활동의 부분적인 수정, 보완, 개선에 필요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서 실시하는 평가활동)나 소규모 집단 및 사회적 갈등이 크지 않은 교육목표를 위해 활용할 경우에 효과적이라는 의견이다.
학생부종합전형의 존재론적·인식론적 한계
학생부종합전형은 개념적으로는 학생이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여 개별적으로 성장하고, 학습으로서의 평가를 지향하며, 학습과정을 하나의 평가로 받아들여 연속적으로 학습역량을 키우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해도 사회적 가치인 ‘공정성’을 그만두고라도 인간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한계를 부정한다. 그 까닭에 의도치 않지만 사회적 갈등을 키우거나 오히려 기득권층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특정한 사례들에서 보편적인 결론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이끌어 내는가? 우리는 아는 바를 어떻게 아는가? 우리는 주어진 대상들이나 사건들에서 관찰한 바가 그것들의 다른 속성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칠면조가 한 마리 있다. 주인이 매일 먹이를 가져다준다. 먹이를 줄 때마다 ‘친구’인 인간이라는 종이 순전히 ‘나를 위해서’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이 삶의 보편적 규칙이라는 칠면조의 믿음은 확고해진다. 그런데 추수감사절을 앞둔 어느 수요일 오후, 예기치 않은 일이 칠면조에게 닥친다. 칠면조는 믿음의 수정을 강요받는다. 과거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어떻게 미래를 알 수 있는가? 좀 더 일반화해서, 이미 알고 있는 ‘유한한’ 것에 근거하여 미지의 ‘무한한’ 것의 속성들을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다시 칠면조 먹이 주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칠면조는 어제까지의 사건들에서 내일 있을 사건을 알아낼 수 있는가? 아마도 상당히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을 테지만, 아무튼 그것은 칠면조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적다. 그리고 이 ‘적은’ 것이 모든 것을 바꿔 놓는다. 칠면조는 관찰을 통해 배웠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그 방법이다. 친절한 먹이 주기의 횟수가 늘어 갈수록 칠면조의 믿음은 견고해지며, 그리하여 도살의 순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데도 칠면조는 점점 더 안심한다. 칠면조의 안심이 최고점에 도달한 그 순간이 생명의 위험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임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이 문제는 좀 더 폭넓게 일반화될 수 있다. 이 문제는 경험적 지식 자체의 성질을 겨냥하고 있다. 과거에 내내 통했던 것이 어느 순간 예기치 않게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며, 우리가 과거로부터 배운 것은 최선의 경우에 쓸모없어지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파국을 낳는다.』
–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 스완>
“과거의 경험적 지식으로만 어떤 것을 추론하거나 일반화할 경우에는 그 지식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개인이 추론하는 그 순간에도 그가 인지하든 못하든지 관련된 새로운 사건은 발생할 수 있는데 그는 그 사건을 모두 경험할 수 없다. 이처럼 인간의 경험능력은 분명한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개인적 관찰을 바탕으로 추론하는 일반적 개념은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없다. 즉 인간은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상황을 추론하거나 일반적인 개념을 끌어낼 수 있지만 그처럼 얻게 된 지식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이거나 모든 상황에 일관되게 적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확실한 지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가 추론하는 순간에 어떤 사건이라도 발생하지 않으면 그 지식은 객관적으로 명징(明徵)한 지식이지만 그 경우는 희박하다. 개인은 그의 고유한 경험을 통해 확실한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어떤 교사든 학교에서 국가교육과정을 기준으로 학생의 교육적 수행을 관찰하고, 그 이전의 교육적 상태를 고려하여 수행을 해석하고 생활기록부에 기록할 수 있다. 가령 학기 초와 학년 말 또는 분기별로 비교해 새로운 교육활동으로 어느 정도 성장했는가에 대해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학생이 성장하고 이를 기록한다고 해도 정성적 평가에 따랐기 때문에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다면 학생이 진학과 관련해 어떤 대가를 어느 정도 받아야 정의로운가에 대하여는 객관성이 부족하다. 즉 생기부에 기록된 성장지표를 객관적이라고 보고 학생들의 대학진학에 따른 선택적 분배기준으로 적용하면 사회적 갈등을 피할 수 없다. 더구나 박지원의 ‘열하일기’나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블랙스완’에서 보듯이 교사든 교사가 아니든 인간은 모두 관찰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학생의 유의미한 학생 활동을 모두 다 경험할 수 없고, 학생 간의 유의미한 활동을 비교하여 우열의 지표로 삼게 되면 도덕적으로 부당하다. 가령 홍길동이라는 교사가 수업에서 특정한 단원의 핵심개념과 관련해 학생의 이해력이 성장했다고 판단하고 기록했다고 가정하자. 그 과정은 홍길동 교사의 뇌가 학생의 수업활동에 대해 눈(시각)과 귀(청각)로 입력받은 전기신호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즉 교사는 수업과 평가를 통해 그 학생이 단원의 핵심개념 및 세부지식을 이해하고 특정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적용했다고(수행했다고) 판단하였기에 학생부에 그 이전에 비해 성장했다는 기록을 남긴다. 그리고 교사와 이를 바탕으로 평가하는 대학은 그 평가와 기록이 사실이자 진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교사가 학생이 성장했다고 판단한 기록은 그의 주관을 한정되게 드러내었을 뿐이지 학생의 학교활동에 대한 관찰을 모두 기록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합리적 판단기준이 없는 경우에는 그 성장이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가를 판단할 수 없다. 그런데 학생부종합전형은 합리적 판단기준을 객관적으로 정할 수 없다. 어떤 판단기준이 다른 판단기준보다 우월한지도 말할 수 없다. 가령 2015 개정교육과정이 추구하는 핵심역량에서 ‘자기관리역량’과 ‘지식정보처리역량’를 비교할 수 있지만 어떤 역량이 우수하거나 열등한지를 정할 수 없는 경우와 같다. 그 문제는 교사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사가 아닌 대학의 입학사정관이나 나아가 교육부 장관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도 마찬가지이다. 학생의 수행을 모두 관찰할 수 없기 때문에 관찰 가능한 경험만으로 개념화를 통해 일반화해서 생기부에 기록하여 학생의 대학진학을 결정하면 인간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오류에 빠진다. 학생부종합전형은 근본적으로 교사의 교육의지나 부주의와는 무관하다. 그 문제의 근원은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 때문이다. 학생부전형의 문제를 정리하면 첫째, 교사든 그 누구든 생물학적으로 학생의 성장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 수 있을지 몰라도 모두 알 수 없다. 그런데도 그것을 일반화하여 사회적 분배기준의 지표로 삼는 제도는 사회적으로 공동체의 갈등과 해체에 이르게 되는 부작용을 일으킨다. 둘째, 그 기록이 학생의 성장을 기록했다면 사회성원이 모두 인정하거나 권위에 근거한 해석이 가능해야 하는데 다른 성원들도 주관적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어떤 학생의 기록을 우위에 있다고 인정하거나 제 3자가 동의하기 어렵고 특정한 권위에 근거하려면 그 권위가 사회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교사, 학부모, 학생 상당수가 신뢰하지 않는다. 셋째, 교사가 착각할 수 있다. 학생의 수행을 외적으로 관찰해 측정하고, 성장했다고 평가하고 기록했지만 그 수행을 측정할 때 사용하였던 여러 기준이 교과의 성취 기준에 맞지 않거나 아주 낮은 성취수준이었다면 그 기록을 고등학교 수준에서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있다. 즉 학생부의 학생 활동에 대한 기록은 학생의 전인적 성장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표가 되지 못한다.
이처럼 학생부종합전형은 근본적으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으로 평가 지표적 한계가 분명하며 그 한계는 사회 이전에 자연적 존재로서의 한계이다. 따라서 교사는 의도하지 않더라도 학생의 실제적인 학습과정을 왜곡하거나 편파적으로 작성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학생부종합전형에서의 비리에 대해 그 전형을 옹호하는 교사나 입학사정관 및 교육단체가 “어떤 교사나 입학사정관이 특정한 학생에게 특혜를 주는 것은 그가 불성실하기 때문이지 학생부종합전형은 구조적으로 선이다.”라는 평가는 수긍하기 어렵다. 즉 학생부종합전형은 아무리 교사가 성실하게 주의를 집중하여 학생의 교육활동을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기록하려고 해도 근본적으로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와 이로 인한 사회적 불공정과 부정의라는 필연적 결과를 태생적으로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부종합전형을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겠다고 그 전형에 우호적인 교사나 교육단체가 “교사가 기록하는 학생부의 ‘과목별 세부능력특기사항’을 중심으로 대학이 평가하면 공정성 문제에 대해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국가와 사회라는 인위적 공동체의 지속성 및 안정성을 위한 공정성은 그만두고라도 한국의 대학구조를 차등적인 불평등한 상태로 둔 상황에서 학생부종합전형을 주류적 평가방식으로 정하자는 주장은 비합리적이다. 사회적으로 수긍하기 어렵고 대학진학을 둘러싼 편법적 꼼수를 막을 수 없다.
대입제도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개인적으로 바람직한 대입제도를 밝혀보고자 한다. 바람직한 대입제도는 몇 가지 특성을 갖춰야 하는데 시대적 당위성에 부합하면서도 교육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또한 시대적 과제나 교육적 목표에 부합해도 그에 이르기 위한 ‘효율성’이나 평가과정에서 ‘사회적 공정성’을 무시할 수 없다. 현행 대입제도와 관련해 첫째, 학생부종합전형을 100% 폐지해야 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한계 이외에도 미처 언급하지 않았지만 ‘사회적 공정성’이나 ‘공공성’의 측면에서도 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인의 역사적, 문화적 정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교과 내신 성적을 100% 반영하는 ‘학생부교과전형’을 없애야 한다. 그러나 대입에서 어떤 대학이든 내신 성적의 반영비율을 50%로 하게 함으로써 교실수업을 활성화해야 한다. 또한 내신 성적의 등급구간을 현행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줄이고 원 점수 절대평가 방식으로 전환하며 중기적으로 특정 교과에서 일정한 성취수준에 이르지 못한 학생은 재수강의 기회를 주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 셋째, 지금의 객관식 수능 비중을 늘리지 않아야 한다. 객관식 고사는 학생의 교과이해력을 측정하는데 한계가 있다. 특히 수능을 ‘자격고사’로 바꿔 합격과 불합격만을 정해 고교졸업의 기준으로 삼고 대학진학에서 평가항목으로 반영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넷째, 지금보다 논술고사와 구술형 면접고사를 강화해야 한다. 그 출제는 고교교육과정으로 분명하게 한정하지만 대학은 논술이나 구술시험의 반영비율을 50%로 하여 학생의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측정하고 평가함으로써 실질적으로 초중고에서의 수업과 평가의 양상을 바꾸어야 한다. 정리하면 수능을 자격고사화화고, 대학진학을 위한 반영요소를 내신과 논술고사와 구술고사로만 한정하여 내신비중 50%, 논술시험이나 구술시험 또는 둘 다 고려한 50%의 비중으로 대학진학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섯째, 지금보다 사회적 소수자를 배려한 사회적 약자 전형을 의무화해서 역시 내신 성적과 논술구술고사로 선발하지만 각 대학이 최소한 30% 이상 뽑도록 의무화하여 실질적 평등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그 경우에 이해중심교육과정에서 분명한 한계를 보이는 객관식 수능의 고질적인 병폐를 없앨 수 있고, 설령 자사고, 특목고를 유지해도 전형방식에서 그 학교들이 대학진학에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 더구나 학교는 ‘이해중심의 교육과정’을 통해 학생의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사고를 키울 수 있다. 국민도 지금의 학생부종합전형을 더 이상 ‘깜깜이 전형’이라고 비판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 ‘공정성’ 시비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무엇보다도 학교가 그 본질인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학생을 ‘비판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로 키우는 교수학습과정을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활성화하게 되어 학생과 더불어 가르치는 교사의 실질적인 교육적 성장도 끌어낼 수 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예탁결제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사회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 교육청 사회문화 집필 위원, KDI 경제교육교재 집필 위원,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충남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출제위원, 전북 및 전남 교육연수원 강사, 전북대학교 교사 연수 강사, <새전북신문>, <열린 전북>, <전북교육신문>, 인문 웹진 <아홉시>, 네이버 비즈니즈 블로그 <인터비즈>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지금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교육저널인 「교육 제4의 길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미래 교육의 불편한 진실, EBS, 2021>,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