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된 학생중심의 교수학습방식이 좌측 전두엽의 발달을 저해한다
「통찰력 있는 지식인이라면 이런 흐름을 꿰뚫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은 입을 다문 채 대중을 종속시키는 이런 음모에 가담합니다.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우리는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것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택시기사로 삶을 끝마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교육제도가 선별 작업을 합니다. 교육제도가 순종과 복종을 조장합니다. 이런 제도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배제됩니다.」
노엄 촘스키 <촘스키, 누가 무엇으로 세상을 지배하는가>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교육에는 거센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에는 성장도 후퇴도 함께 있었다. 학교문화를 ‘학생 중심적으로 바꾸려는 여러 시도는 긍정적이지만 교수학습방식이나 교육개념에 대한 성급한 적용 등으로 인한 혼란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뜨거운 폭염에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바람은 좋은 일이지만 영장류인 인간의 종적 차이나 문명의 지속 및 이성과 합리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를 위협할 정도라면 호풍(好風)이라고 할 수 만은 없다. 한국 교육의 누적된 여러 문제를 새롭게 바꾸려는 선의를 인정하지만 각 시도 교육청 중에는 2015 국가교육과정을 지역적으로 재구성할 경우에 권위 있는 ‘유권 해석’ 등 여러 해석적 방법을 총체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특정한 사상에만 치우친 ‘학리 해석’을 일반화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교육과정과 관련해 특정한 부분을 과장하고 축소하여 해석했는데도 마치 진리처럼 우상화 하였고 조직에서도 ‘지위와 권력의 복합체’를 구성했다.
「존 듀이에 의하면 역량을 구성하는 한 요소인 ‘사실적 지식’을 배울 필요는 있지만 학습방식이 중요하다. 학생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경험하여 배우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교사는 어떤 지식, 기능, 태도든지 학생에게 이론적으로(개념적으로) 가르쳐 배우게 할 수 있지만 부득이한 경우에 한정해야 하지 일반적이거나 보편적인 학습법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 까닭은 어떤 인간이든 그 스스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능동적인 본성을 갖고 있다.」
데이지 크리스토툴루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일곱 가지 교육미신>
구성주의 교육철학자 존 듀이의 의견을 따르면 지금 한국의 교사들 대다수는 학생들에게 주로 개념적으로(이론적으로만)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게 하는데 이는 바람직하지 않다. 학생의 체험을 돕는 교육과정이 본질이고 우선적인데 강의식으로 이론적으로만 지식을 전달하는 까닭이다. 도시의 경우에 초·중·고 학급 인원이 거의 25명에 달해 이론적 교수학습방식이 불가피하더라도 주변적이고 보조적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며, 교사들은 가능하다면 수업에서 ‘경험적 교수학습의 방식’을 적용하려고 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의 중반부에서 ‘동굴의 비유’를 통해 실재의 문제를 다루는데 인식론적 가치가 매우 높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이 비유가 오랫동안 회자되는 까닭은 ‘현실의 모순에 대한 통찰적 인식’을 높이 평가하는 까닭이다.
「죄수들이 동굴 벽을 향해 쇠사슬에 묶여있는 장면을 생각해 보라. 죄수들은 일생 동안 그곳에 묶여 있었으며, 그들의 머리는 동굴 벽을 향해 고정되어 벽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볼 수 없다. 그들 뒤에는 불이 있고, 불과 그들 사이에는 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데, 그들의 그림자가 동굴 벽에 드리워진다. 어떤 사람들은 동물 모양의 것들을 운반한다. 동굴 내부의 죄수들은 언제나 오직 그림자들만 볼 뿐이다. 그들은 그 그림자들이 실제의 사물들이라고 믿는다. 그들은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결코 실제의 사람들을 보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죄수들 중 하나가 사슬에서 풀려 실제의 불을 볼 수 있게 된다. 처음에 그는 눈이 부셔 불꽃을 전혀 볼 수 없지만 점차 익숙하게 되어 주변 세계를 보기 시작한다. 다음에 그는 동굴 밖으로 나가게 되어 햇빛을 완전히 보게 되지만 이번에도 밝은 빛에 눈이 부셔 당황한다. 이제 그는 서서히 전에 자신의 삶이 얼마나 가련한 것이었는지 자각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그는 그림자의 세계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밝게 빛나는 충만한 실제 세계가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제 그는 눈이 밝은 빛에 적응함에 따라 동료 죄수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보며, 그들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게 된다. 드디어 그 빛에 완전히 익숙하게 되자 태양을 직접 볼 수 있게까지 된다. 다음에 그는 다시 동굴로 돌아간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이 그림자의 세계에 익숙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동료 죄수들이 쉽게 발견하는 그림자들을 더 이상 식별하지 못한다. 동료들은 그가 동굴 밖으로 여행을 다녀온 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실체의 세계를 보았다. 동료들은 여전히 피상적인 현상 세계에 만족하고 있다. 그들은 비록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할지라도 동굴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플라톤 <국가>
‘실재’란 본질이며 변하지 않는 이데아(idea)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을 읽을 때에 ‘실재’라는 의미에 집착하지 않아도 좋다. 그보다는 ‘우상에 대한 맹신’을 경계하는 태도에 주목했으면 한다. 플라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은 동굴 안의 죄수들처럼 그림자와 같은 현상의 세계에 사로잡혀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산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은 동굴 밖으로 나가 실재 세계의 일들을 경험하고자 한다. 그렇게 할 때만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과 지위 및 부만을 추종하거나 찬미하는 피상적인 지각의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며 불완전하지만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형상(이데아)’의 세계는 완전한 세계이다. 또한 그 세계는 오감(경험, 감각)을 가지고 지각될 수 없다. 실재는 오직 사유에 의해서만 경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사유를 통한 실재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한마디로 ‘비판적 사고’이다. 어떤 대상이든지 객관적이고, 개방적이며, 상대적이며, 성찰적으로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비판적 사고를 하는 경우라면 문제적 상황에 대해 사실을 객관적으로 직시하려고 하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기준을 정해 가치를 추론하고 다시 사실에 적용시킬 때에 실재를 규명할 수 있고 자명한 언어로 타자에게 설명할 수 있다. 그처럼 사실과 가치라는 두 안경으로 삶과 세상을 조망할 때만이 ‘창의적 사고’로 나아갈 수 있다.
자기 주도적이며 경험적인 교수학습방식을 찬미하는 교사들은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을 강조한다. 기존의 학교교육이 강의식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이론적인 개념 위주의 학습’을 강제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이 삶과 세상을 탐구하여 ‘역량’을 키우는 학습에 흥미를 잃었고, 교사는 교과 진도에 맞춘 수업 등 타율적인 교수학습방식을 강행하여 학교수업에 활력이 사라졌다고 본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수행할 과제에 꾸물거리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지연행동’을 하는 까닭도 그런 교수학습방식 탓이라고 본다. 무엇보다도 지금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과정이나 학생활동이 그들의 삶의 배경인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배경을 무시하거나 삶과 유리된 지식 위주의 과정으로 채워져 있다고 비판한다. 즉 교과의 내용이 학생들의 삶을 반영하지 못하는데 이론적으로 가르치고 배우기만 하기 때문에 학생의 역량을 기를 수 없고 결국 교육은 학생의 자아실현에 기여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쉬운 말로 이론위주의 교수학습방식은 ‘교사 따로, 학생 따로’의 모습으로 유리된 학교를 만들었고 그 모습이 지금의 학교라고 본다. 학생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학생들에게 수학 과제를 냈는데 수행하지 않은 학생에게 “왜 숙제를 하지 않는 거야?”라고 질문해보니 “집에다 숙제를 두고 왔어요.”,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 “시간적으로는 공부를 많이 했고 의욕은 있는데 교과가 너무 어려워 과제를 하지 못했어요.”라고 답한다는 근거를 제시한다. 이러한 경향은 교실에서 이뤄지는 모둠활동에 대한 수업지 평가에서도 나타난다고 말한다.
흔히 지연행동을 하는 학생에 대해 집중력이 부족한 학생이라고 구분하는데 사실 이들은 의욕은 있지만 학습피로를 금방 느끼는 학생이다. 그러다 보니 그 학생들은 교실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어떤 경우에는 집중하지 못하는 상황인데도 스스로 학업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지연행동의 원인은 무엇인가? 감정 중추인 구 피질(변연계)이 이성 중추인 대뇌 피질(신피질)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대뇌 피질에 속한 전두엽은 어떤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게 하는 조절기관으로 오른쪽 전두엽(우뇌)은 ‘예술적 감성’, ‘언어발성’과 관련되어 있고 왼쪽 전두엽(좌뇌)은 ‘논리적 사고와 집중력’, ‘문자와 기호의 이해’를 관장한다. 전두엽은 뇌의 중추이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 생각, 추리, 기억을 통해 상황의 본질을 파악하고 계획을 세우는 목표지향적인 행동을 주관한다. 전두엽은 하등동물에서 고등동물로 진화하면서 커진 곳으로 대뇌 피질에서 전두엽이 차지하는 비중은 개는 7%, 침팬지는 17%, 사람은 30%이다. 즉 진화적 맥락에 있다. 변연계는 감정의 중추로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감정을 조절하는 ‘편도체’와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 자율신경의 컨트롤 센터인 ‘시상하부’ 등과 같은 인간의 감정과 기억에 관계하는 기관이 모두 모여 있다. 따라서 전두엽의 통제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으면 변연계는 원시적인 감정을 그대로 행동으로 드러낸다. 안와전두엽은 눈 바로 위에 있는 뇌의 일부인데 지성을 관장하는 전두엽과 감성 중추인 변연계 사이에서 양쪽의 균형을 잡아주고 각자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조정한다. 대뇌 피질과 변연계 사이의 신경회로는 오직 안와전두엽을 통해서만 조절되기 때문에 그 부분에 이상이 생기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다.
버지니아 대학 심리학과 교수인 조나단 헤이트는 ‘이성’과 ‘감정’을 사람과 코끼리로 비유한다.
“우리는 코끼리(구피질)위에 올라탄 기수(전두엽)가 고삐(안와전두엽)를 쥐고 있기 때문에 코끼리가 가는 방향을 결정할 것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기수의 통제력은 크게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기수가 코끼리와 비교하면 너무 작기 때문이다. 기수와 코끼리가 가는 방향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게 되면 코끼리는 멋대로 할 수 있다. 즉 기수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즉 전두엽이 안와전두엽을 통해 변연계를 효과적으로 통제해야만 지연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변연계는 본능적으로 게으르고 눈에 보이는 단기적 쾌감을 추구한다. 그런 까닭에 미래를 위해 참고 기다리기보다는 순간의 쾌락과 편안함에 매달린다. 이러한 뇌의 구조는 이성적 주체로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 교육을 통해 전두엽을 강화하는 학습과 훈련이 이루어져야 하는 근거가 된다. 물론 전두엽의 기능만 강화하는 학습은 문제는 있다. 전두엽만 강화되면 지나치게 분석하고 사고를 오래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선택장애’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교육과 관련해 전두엽에게는 강의든 책이든 외부에서 올바른 방향과 미래를 제시하고 변연계에는 성과에 대한 보상을 통해 의욕과 동기를 끌어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교사는 교실에서 학생의 자기주도성에 의존하여 모둠활동에만 치중하는 수업방식을 재고해야 한다. 즉 모둠학습에서 학생들은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지만 교사가 각 단원의 성취기준에 근거하여 명확한 방향을 제시하지 않는 경우에는 지연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학생에게 단 하나의 선택을 강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주어진 선택의 폭이 넓을수록 전두엽의 발달이 더딘 학생의 경우에 이성은 지쳐가며 ‘선택마비’를 일으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우려되는 점은 그처럼 선택이 많아지면 인간은 뇌에 각인된 가장 익숙한 패턴으로 행동하게 되는데 그 패턴이 교육적 성과와 무관할 수 있다. 교사의 역할을 경시하고 학생의 자기 주도 학습만 강조하게 되면 학생은 즉흥적이고 쾌락적인 선택을 하거나 깊은 사고를 하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학생이 학습을 통해 과거보다 성장하는 학습 성과가 있어도 그 성장이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몫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 세심하게 따져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두엽은 청소년기까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데 그 시기에 교사와 학교 교육과정이 전두엽에 채워져야 할 여러 고차원적 기능을 위한 영양분을 충분하게 제공하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자기 주도 학습과 관련해 약방의 감초처럼 주어지는 현상이 ‘칭찬’인데 칭찬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발달심리학자 클라우디아 뮐러(Claudia Mueller)와 스탠포드 대학교 케럴 드웩(Carol Dweck)에 의하면 “난이도가 낮은 시험에서라도 칭찬을 받은 아이들은 칭찬을 위협받는 어려운 문제에는 도전하지 않지만 난이도가 높은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도전하는 학생들은 그 수준을 넘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이는 교과목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통해 학생의 자기 주도 학습을 도모하거나 각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구실로 성취기준이 낮은데도 칭찬하는 통념이 오히려 학생들에게 역효과를 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자유와 방종은 사회규범을 어기지 않는 경우에는 외적으로는 크게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행위자의 내적 심리구조는 매우 다르다. 모든 개인의 자유로운 삶은 그와 타자의 경계를 인식하지만 방종하는 삶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그와 타자의 경계를 수시로 침범한다. 더구나 방종하는 삶의 태도가 습관화되면 ‘민주성’, ‘책임성’, ‘합리성’과 같은 고도의 사회적 가치는 크게 성장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에 대해 공존하는 의사결정에 이르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교사가 우선순위를 정해주지 않고 자기주도성만 강조하는 교수학습방식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 더구나 자기 주도적이고 경험적인 교수학습을 인정해도 즉각적인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보상체계가 없이는 변연계는 작동하지 않고 관심과 흥미는 일어나지 않는다. 구피질의 영역은 감정의 영역으로 동물적 영역이다. 그 점에서 교사가 학생에게 과제를 부과했을 때에 과제에 대한 보상이 적절하지 않기에 학생은 과제를 완수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또한 과제에 대한 보상이 차등적으로 주어졌기에 문제가 아니라 그 보상제도가 불공정한 나눔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고 차별이 지속된다고 보아야 한다.
전두엽은 고등사고 능력의 경로가 이론적이거나 경험적이거나를 따지지 않는다. 전두엽이 따지는 것은 그것이 각인되는 과정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졌는가만 본다. 그런데 기존의 교사가 주도하는 강의식 교수학습방식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과정을 성찰하지 않고 그 자체가 마치 변연계의 기능을 무시했다고 보면서 감정을 강조하는 교수학습방식을 학교교육으로 권력적으로 추진하거나 학생 스스로의 ‘자기 주도 학습’만을 강조하는 행태는 그나마도 전두엽의 기능이 약하거나 전두엽이 지나치게 강한 학생들을 차별하는 태도이다. 그런데도 그 방식을 유일한 선이자 이데아적인 본질이라고 고집하면 학교교육이 오히려 우리 사회 상위집단에 있는 계층이나 계급을 더욱 공고하게 만드는 역설을 일으키는 현상은 당연하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예탁결제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사회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 교육청 사회문화 집필 위원, KDI 경제교육교재 집필 위원,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충남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출제위원, 전북 및 전남 교육연수원 강사, 전북대학교 교사 연수 강사, <새전북신문>, <열린 전북>, <전북교육신문>, 인문 웹진 <아홉시>, 네이버 비즈니즈 블로그 <인터비즈>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지금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교육저널인 「교육 제4의 길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미래 교육의 불편한 진실, EBS, 2021>,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