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시대의 교육 담론(6): 사람만이 권리의 주체가 되는 정당성의 근거는 무엇인가?
인공지능 시대 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민주시민교육의 근간이 되는 인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개념이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사람을 지구상의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존엄한 존재로 보는 근거가 모호하다는 것.
그동안 사람은 오랫동안 자연의 위계, 존재의 위계라는 개념에 익숙했다. 특히 플라톤-기독교 전통에서 이 존재의 위계는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위계에서 위에 있는 존재는 아래에 있는 존재의 목적이 되며, 아래에 있는 존재는 위에 있는 존재의 도구, 수단이 된다.
이 위계는 무생물보다 생물을 우위에 두고, 생물 중에서도 식물보다 동물, 동물 중에서도 포유 동물, 그리고 이들을 모두 포괄한 ‘자연’ 위에 ‘사람’을 두는 위계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위계를 인정하는 한 “사람으로 태어났다”라는 이유만으로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인권’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이 용어가 사용된 영국이나 프랑스의 각종 선언문에서는 그저 ‘rights’라고 한다. 즉 권리라는 용어에 구태여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사람만이 권리의 주체이며,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리의 주체가 될 수 있었다.

“사람만이 이러한 특별한 권리를 누리는 근거가 대체 무엇인가?”
20세기가 되기 전 까지만 해도 이 물음을 심각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니까 권리를 누리는 것이지 여기에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이것은 다름 아닌 자연의 질서이며, 그 질서는 자연 바깥, 자연보다 우월한 존재로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자연의 질서는 다른 말로 옮기면 인격을 가진 존재인 신이 될 수도 있고, 추상적인 법칙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야훼 3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사람과 다른 모든 존재 사이에 선을 긋는다. 오직 사람만이 신의 숨결, 즉 영혼을 가진 존재이며, 신이 자신을 본 따 만든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그 자체 움직이는 신상이며, 신의 분신인 성령이 임한 성전이다. 따라서 사람은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한 지배권을 위임 받았으며, 다른 모든 피조물을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야훼 3교의 전통은 종교가 아닌 철학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심지어 근대적 사고방식의 선구자로 알려진 데카르트 조차 사람은 물질을 초월한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다른 모든 존재와 구별된다고 보았다. 다른 존재들은 동물과 사람의 신체를 포함하여 모두 물질에 불과하지만 오직 영혼, 정신이 사람을 다른 존재와 차원을 달리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는 사람이 특별한 존재라는 서양인들의 믿음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그림에서 사람은 단순한 피조물이 아니라 신과 계약관계를 맺는 상대방으로 묘사되고 있다. 거만한 자세로 지상에 누워 신과 눈을 수평으로 맞추고 있는 아담은 자신이 신과의 계약을 통해 지상의 모든 것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의식하고 있다.
문제는 사람을 다른 존재와 구별하게 만드는 이 ‘정신’, 그러니까 저 그림에서 신이 인간에게 내려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이를 ‘이성’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이성은 단지 수학적 논리적 합리성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의미의 이성은 rationality라고 하고, 이 경우에는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여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의 의미를 가지는데, 특별히 대문자로 Reason이라고 쓴다.
인간은 이 분별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옳고 그른 일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다. 달리 말하면 인간만이 ‘죄 지을 수 있는’ 존재다. 만약 그른 일을 했다면 충분히 분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로 그른 행동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성에 대비되는 힘이 본능적인 충동이다. 이 충동은 보통 감정이라는 형태로 발현된다. 본능적 충동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신을 가지지 않은 동물들은 본능적 충동에 따라 움직이며,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선택할 수 없다. 따라서 동물들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다. 사람 중에서도 장애나 여러가지 질병으로 분별력에 문제가 있는 경우 죄를 묻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서양에서 발원한 근대 민주주의가 모든 사람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는, 사람 간의 평등과 아울러 세계 내에서 사람과 다른 피조물들 간의 불평등에 있었다. 사람 그 자체가 자연계 전체 차원에서 보면 일종의 특권층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같은 특권층으로서 평등하다. 비록 기독교에서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부르지만, 이는 왕정 하에서 귀족들이 군주 앞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고, 군주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중학교 교과서에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로 ‘인간의 존엄성’을 드는 것도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천하거나 평범한 존재와 대립할 때만 성립 가능한 용어가 바로 ‘존엄함’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과도한 이성 중심주의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감정의 억제야 말로 비인간적이며, 감정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야 말로 진정한 ‘사람다움’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한 가장 대표적인 사상가는 장 자크 루소, 그리고 요한 볼프강 폰 괴테다. 루소는 감정을 감추고 억제하는 것에 기반한 이른바 예절이니 문명이니 하는 것이 오히려 인간성을 파괴하는 타락이라 부르며 “자연으로 돌아가라!”라는 유명한 구호를 남겼다. 이것이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혹은 충동과 감정에 따라 멋대로 살자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자연스러운 충동과 감정을 죄악시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표현하라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명작 ‘이성과 감정’은 근대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 갈등을 서로 다른 등장인물들을 통해 보여준다. 이성을 대표하는 언니 엘리노어는 객관적 상황에 맞춰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욕구, 사랑, 감정을 억누르고, 객관적 상황이야 뭐가 되었건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며 살아가려는 어머니와 동생 때문에 마음 고생을 하며 때로 갈등한다. 반면 동생 매리앤은 그런 언니를 답답해 하며 사회적 관습이나 평판 따위도 무시하고 감정에 충실하다. 결국 이 둘은 서로의 특징 때문에 아픔을 겪고, 그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아간다. 이와 같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 충동의 복권을 요구하는 운동이 바로 ‘낭만주의’다. 하지만 낭만주의는 19세기 중반의 일시적인 흐름으로 끝났고, 계몽주의적 합리적 인간관에 대한 보충적 지위에 머물렀다. 괴테의 낭만적 인물들은 그 매혹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딱딱한 관습과 차가운 이성에 맞서 자연스러운 감정을 대변하던 베르테르나, 현실의 난관 따위 무시하고 가슴 속의 이상을 위해 살아가던 에그몬트나. 이게 근대 사회의 냉정한 모습이었다. 누가 뭐래도 근대는 이성의 시대, 근대사회는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다.
반면 동양권에서는 사람과 다른 피조물의 차이를 질적인 차이라기보다는 양적인 차이로 보는 전통이 있었다. 불교에서 사람은 수많은 전생의 공덕을 쌓아야만 환생할 수 있는 높은 서열의 삶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가장 높은 단계도 아니며, 특별한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다. 지금 무심코 밟아 죽인 벌레도 수없이 많은 윤회를 거듭하다 보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이라 해도 악업을 계속 쌓으면 얼마든지 벌레나 짐승같은 이른바 미물로 전락할 수 있다. 사람과 미물의 차이는 차곡차곡 쌓인 업의 차이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피조물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을 특권을 가지지 않는다. 피치 못해 다른 피조물을 죽이고 섭취하겠지만, 그때마다 악업이 쌓이며, 이를 풀기 위해 부지런히 선업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악업을 쌓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아예 육식을 하지 않으며, 채식도 가급적 뿌리째 뽑지 않고 가장자리의 잎이나 열매를 먹는다.
유교 역시 사람의 존재를 특별하다고 보지 않는다. 이른바 천지인 삼재라 하여 사람을 하늘과 동격으로 두었다고 알려지지만, 이때 천지는 자연 전체를 의미한다. 즉 사람이 천의 명을 받아 지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천지인이 모두 하나다. 사람이 곧 우주이며, 우주가 곧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 vs 나머지 존재’의 대립은 성립되지 않는다. 비록 유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불교도처럼 살생에 민감하여 고기를 먹지 않거나 하지는 않지만, 자연을 훼손하는 일에 민감하기는 마찬가지다. 흔히 지맥, 수맥을 따지는 전통은 자연 그 자체를 의인화하여, 자연과 인간사회를 묶어 하나의 공동체로 사고하는 유교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양권에서 보편적 인권의 개념, 사람으로서의 평등의 개념이 발달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자연계의 여러 질서와 마찬가지로 사람 사회의 위계질서 역시 자연적인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가령 그림의 예를 들면 미켈란젤로가 한창 활동하던 시기인 이른바 르네상스 3대가는 그동안 유럽의 화풍을 인물화를 중심으로 집대성했지만,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는 산수화를 중심으로 화풍이 정립되었다. 그런데 중국 회화의 집대성자라 불리는 왕휘의 작품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그림들은 산수화가 아니라 산수인물화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의 집합인 자연이 신의 모사품으로서 존엄을 가진 사람의 배경 역할 정도에 머무르거나 아예 생략되었지만, 유교적 전통에서는 자연과 인물을 하나로 엮어서 풍경을 만들었다. 이때 인물은 그림의 중심이 아니라 전체적인 자연 속의 한 부분으로 겸손하게 자리잡았다. 이렇게 천지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위키피디아: https://zh.wikipedia.org/wiki/%E7%8E%8B%E7%BF%AC#/media/File:Wang_Hui10.jpg)
그런데 신기한 것은 사람이 그 부분에 불과하다며 겸손을 떠는 이 자연에도 동물은 없다는 것이다. 산수와 사람이 하나가 되어 자연을 이루지만, 그 산수 속에 살고 있는 동물들은 여전히 주변적인 위치에 머무른다. 유교적 전통은 사람과 다른 동물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을 긋는다. 사람은 살아있는 것을 대표하여 저 막막한 대 자연 속에 들어가 하나가 되지만 다른 살아있는 것들은 사람의 수단이 될 뿐이다. 심지어 불교에서처럼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다음 생에 짐승으로 전락할 가능성도 없다. 그래서 유교에서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산 것에 대한 조심스러움이 보이지 않는다. 공자는 말이 끄는 수레가 없으면 나다니지 않았고, 잘고 고르게 썬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그렇다면 유교에서는 사람과 동물 간의 이런 현저한 위계의 근거로 무엇을 내세우는 것일까?
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매우 적은데,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내버리고 군자는 그것을 보존한다. 순임금은 사물의 이치에 밝았고 인륜을 꿰뚫어 보았다. 행동이 인과 의로부터 왔지, 인과 의를 행하지 않았다”(맹자, 이루편). 이 말을 풀어보면 결국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별 게 아니다. 인의예지라는 고차적인 정신 능력으로 희로애락이라는 본능적인 감정을 잘 갈무리할 수 있다는 것,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가려낼 수 있는 분별력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유대 기독교 문화권이나 유교문화권이나 모두 감정과 본능을 절제하고 옳고 그름을 추론하여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이 사람의 본질이라고 본 것이다. 이들은 모두 대뇌피질의 존재와 기능을 알지 못했지만, 이들이 내세우는 사람의 본질은 결국 대뇌피질의 기능이다.
신체에서 1.5 킬로그램에 불과한 대뇌, 그 중에서도 0.2 킬로그램에 불과할 대뇌피질 일부 영역이 50킬로그램이 넘는 나머지 영역에 앞서 사람인지 짐승인지를 가려내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짐승이 아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된다. 사람은 짐승보다 우월하다. 대뇌 피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대뇌 피질이 하는 작용, 즉 이성적인 추론과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유교 세계와 기독교 세계의 인간관은 크게 다르다. 유교에서는 사람을 자연 속의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대뇌피질은 단지 짐승 대비 우월성의 근거일 뿐, 산과 강을 포함한 자연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주장하는 근거는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자연 속에 인륜의 근원이 되는 질서와 법칙이 새겨져 있다고 보았다. 자연은 격물치지를 통해 인륜을 배울 교과서와 같았다. 반면 서양에서는 사람이 짐승 뿐 아니라 모든 다른 피조물에 대해 우월한 존재라는 인식이 강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이 신 앞에 평등한 존귀한 존재라는 사고방식이 점차 확산되어 근대 민주주의의 씨앗이 되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 사회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중학교에서 24년간 사회를 가르쳤고, 서울대, 상명대, 방송대 등에서 강의하였다. 서울시교육연구정보원에서 정책연구를 담당했고, 현재 계간 우리교육 편집위원이다. '학교라는 괴물', '그많은 똑똑한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등의 교육 비평서, '민주주의를 만든 생각들', '거짓말로 배우는 10대들의 경제학', '세상을 바꾼 질문' 등의 청소년 교양서들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