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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혁신교육과 마을공동체교육이 놓치기 쉬운 것

#743 현병호, 교육매체 계간《민들레》발행인 2022.04.06

이해찬 세대와 유토리 세대

 

“특기 하나만 있으면 대학 갈 수 있다.”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장관이었던 이해찬이 대입제도를 개편하면서 내건 프로파간다(propaganda)다. 그리고 고등학교의 야간자율학습과 월말고사, 모의고사를 폐지하는 개혁을 단행했다. 이후 수능시험 난이도가 들쑥날쑥하면서 입시에 대혼란이 일어나고, 특출한 역량을 인정받은 소수의 특기생들만 혜택을 누리게 되면서, 대부분의 평범한 학생들에게는 ‘특기도 필요한’ 제도로 인식되어 스펙 경쟁이라는 새로운 부작용이 생겨났다.

 

물론 부작용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강제적인 야간자율학습이 금지되고 체벌 가이드1가 제시되면서 체벌이 만연하던 학교문화가 바뀌고 학생인권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은 이해찬 장관의 공이 크다. 야간자율학습이 사라지면서 특기적성교육이 강화되고, 학원만 다니던 아이들이 생활기록부에 적을 거리를 만들기 위해 봉사활동도 다니게 되었다. 그의 재직 기간이 2년이 안 됐고 대학입시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3개 학년에 그쳤지만, 당시의 교육개혁이 지향한 방향은 이후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자유학기제도를 신설한 박근혜 정부, 고교 평준화와 혁신학교를 확대한 문재인 정부의 교육정책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20여 년 동안 학교문화는 학생인권과 자율성을 존중하는 쪽으로 꾸준히 변화해왔다.

 

‘이해찬 세대’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유토리(ゆとり) 세대’2가 등장했다. ‘여유 있는 교육’을 뜻하는 ‘유토리 교육’은 주입식 입시교육을 지양하고 자율성을 강조하며, 사고력과 표현력, 남을 위한 배려심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한 전인교육의 일본 버전이었다. 학습량을 줄이고자 교과 내용의 30%, 전체 수업 시간의 10%를 줄였다3. 그 결과 학생들의 기초학력이 눈에 띄게 떨어지고, 자율성을 강조한 나머지 교사가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입시경쟁이 완화되고 사교육이 줄어들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학력 저하를 우려한 부모들이 공립학교를 기피하고 사립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 교육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결국 일본 문부성은 10여 년 만에 유토리 교육의 실패를 인정하고 학력을 강화하는 교육으로 되돌아갔다.4 그 후 일본 사회에서 유토리 세대는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사회적응력이 떨어지는 세대’로 인식되면서, 기업들도 유토리 교육이 폐지된 2011년 이후 중등교육을 받은 세대나 사립학교 출신을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조직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신입사원들을 대상으로 ‘직장에서 혼나는 법’을 교육하는 곳들도 생겨났다. 한자를 잘 읽지 못하면 “유토리입니까?”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흔히 유토리 세대의 부정적인 면으로 꼽는 몇 가지가 있다.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권리에는 민감하지만 책임감은 약하다, 싫은 소리를 못 견딘다, 자기주장은 강한데 남의 말은 듣지 않는다, 문해력이 떨어진다 등이다. 한국의 ‘이해찬 세대’와 일본의 유토리 세대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상당히 달랐다. 이해찬 세대가 ‘성급한 교육개혁의 피해자’로 인식되는 데 반해 유토리 세대는 ‘공부 안 하고 놀다가 멍청해진 세대’로 인식되어 조롱의 대상이 되다시피 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단지 유토리 교육의 결과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학교교육의 영향력이 그렇게 절대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개인주의가 발달하면서 권리 의식이 높아지고, 형제자매 없이 부모의 과잉보호를 받으며 자란 ‘우쭈쭈’ 세대의 특징이 유토리 교육에 덧씌워진 측면도 없지 않다. 거기에다 학교에서 치열한 경쟁을 경험해본 적이 없고, 좋아하는 것만 하면서 힘든 과정을 극복해본 경험이 없다 보면 직장생활이 힘든 것은 당연하다. 『미움 받을 용기』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이런 사회적 배경 때문일 것이다.

 

 

혁신교육이 성공하려면

 

한때 유토리 세대를 이해찬 세대와 비교하기도 했지만5 그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혁신교육 세대와 비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2009년 김상곤 교육감이 쏘아올린 혁신학교 정책을 2010년 지방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진보 교육감들이 전국으로 확대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 자유학기제가 제도화되고 ‘꿈과 끼’를 강조하면서 대안학교의 전매특허품 같던 꿈이 공교육 현장으로도 널리 퍼져갔다. ‘경기꿈의학교’ 같은 장밋빛 프로젝트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지난 10년 동안 펼쳐진 혁신교육이 유토리 교육처럼 중도 폐기되는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인교육을 지향한 일본의 유토리 교육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 10여 년 만에 폐기된 반면, 비슷한 교육철학을 견지하고 있는 서구에서는 어떻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국토에 비해 인구가 적고 개개인의 특성을 배려하는 문화적 토양이 있는 서구에 비해 인구가 밀집되고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일본의 현실에서 개인의 자율성에 기반한 비경쟁적인 교육을 전면적으로 시도한 것이 무리였다고 분석된다. 또한 서구에는 엘리트 교육의 전통이 있어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의 학습 강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전반적인 학력 저하 현상이 나타나지 않아 학력을 둘러싼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점도 큰 차이다.6

 

한국의 경우 이해찬 세대의 혼란이 짧게 끝나고, 자사고나 특목고 같은 학교들이 전반적인 학력 저하 현상을 막는 역할을 하면서 한동안 학력 논란을 비켜갈 수 있었다.7 하지만 혁신학교가 늘어나면서 비슷한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 유토리 교육을 피해 사립학교로 아이를 보냈던 일본의 부모들처럼 혁신학교를 기피하는 학부모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초기에 혁신학교로 지정된 학교들은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지역의 학교여서 학습에 흥미를 잃은 아이들을 위한 혁신적인 교육이 효과를 발휘한 반면, 중산층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학력 저하 논쟁이 불거지는 것은 예상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하다. 인구밀도가 높으면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싱가포르나 홍콩의 경우는 경쟁교육의 부작용을 감수하는 전략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경쟁에서 밀려난 경우도 일자리를 얻는 데 어려움이 없어 청년실업 문제가 없다시피 했기에 가능한 전략이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 수도권의 인구밀도가 싱가포르 못지않음에도 경쟁교육의 폐해를 줄이는 쪽으로 방향 전환을 한 것은 교육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이해찬 장관의 교육개혁과 진보 교육감들의 혁신교육 정책은 전교조 교사들과 이른바 386세대 학부모 중심으로 일어난 교육민주화운동에 부응하는 정책이기도 했다.

 

일본 사회가 학력 저하 문제를 달리 해결하면서 유토리 교육을 계속 밀어붙였더라면 더 민주적으로 발전했을까? 정보화 사회로 접어들어 산업 환경이 급격히 변하면서 일본 사회에서도 유토리 세대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8 IT산업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분야에서는 장인 중심의 기업문화가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함을 깨닫게 되면서 유토리 세대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다. IT기업에서는 장인정신이나 상명하복과는 거리가 먼 유토리 세대의 자유분방함이 장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2012년 이후 PISA 순위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한 것이 유토리 교육의 효과가 서서히 나타난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학력 문제는 단기적인 결과만으로는 판단하기 힘들다. 또 환경이 바뀌면 학력의 의미도 달라진다. 혁신교육에 대한 평가 또한 신중할 필요가 있다. 편향된 이념을 가르치는 일부 교사로 인해 논란이 일어나고 학력이 떨어진다는 소문이 돌면서 혁신학교 지정을 반대하는 학부모 시위가 벌어지기도 하지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2018년에 발표한 「혁신학교 성과 분석」 보고서는 학력에 대한 다른 데이터를 보여준다. 초기에는 혁신학교 학생들의 성적이 일반학교 학생들보다 낮았으나 학년이 올라가면서 성장률이 더 높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연구 결과를 혁신학교 전반으로 일반화하기는 힘들며, 확산되고 있는 혁신학교 학력저하론을 방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박제원 교사는 주장한다.9

 

 

‘삶이 곧 교육’이라는 말

 

삶과 동떨어진 근대교육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교육의 흐름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경험을 통한 학습(learning by doing)’을 주창한 존 듀이를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 교육이 한 흐름이라면, 또 한 흐름은 ‘삶의 교육’을 주창한 자유교육의 흐름이다. 실용주의 교육은 20세기 중반 미국 공교육에 접목되면서 진보주의 교육의 한 축을 이룬 반면, 자유교육은 공교육 바깥에서 생겨난 프리스쿨의 철학적 토대가 되었다.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교육’을 표방한 일본의 유토리 교육과 ‘삶의 힘을 키우는 교육’을 강조하는 한국의 혁신교육은 존 듀이의 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삶을 위한 교육’을 표방한 덴마크 자유교육을 비롯해 70년대 서구의 프리스쿨운동과 한국의 대안교육운동은 자유교육의 흐름 속에 있다. 자유교육과 실용주의 교육은 둘 다 지식보다 경험을 중시하고 아이들의 자율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지난 100년 동안 두 흐름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교육의 흐름을 만들어오고 있다.

 

‘삶이 곧 교육’이라는 말은 교육이 삶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자칫 교육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 중에 삶과 무관한 것이 없으니 교육 아닌 일이 없는 셈이고, 세상 모든 일이 교육이라는 말은 달리 교육이라고 할 것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교육을 무화시키는 셈이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 무위의 교육을 이상적인 교육이라 여기는 것도 이와 통한다. 이는 사실상 교육 포기나 다름없다. 교육 과잉의 시대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일시적 현상으로 보아야지 이를 교육의 금과옥조처럼 여긴다면 교육도 사회도 퇴보하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현실의 삶을 시뮬레이션하듯 성적(점수)대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제도교육이야말로 ‘삶이 곧 교육’이라는 철학을 실제로 구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자유교육은 경쟁을 터부시하고 삶의 일면만을 아이들에게 보여주려는 경향이 있다. 협력적이고 공동체적인 문화 속에서 아이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그렇게 자란 아이들이 이 사회를 보다 공동체적인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아이들이 세상에 나와서 느끼는 것은 혼란과 무기력인 경우가 많다. 세상은 개인이 바꾸기에는 너무 거대하고 기성제도가 갖는 관성의 힘은 압도적이다.

 

‘삶이 곧 교육’이라는 명제는 딜레마를 안고 있다. 인간의 부정적인 면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삶은 그다지 교육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삶에서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온갖 비리가 난무하지만 그런 환경을 바람직한 교육환경이라 여길 사람은 없다. 진보적 교육자들도 근거 없는 낙관주의자가 아니다. 삶이 곧 교육이라고 주장한 듀이 역시 아이들에게는 나쁜 것을 배제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정선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배움터는 또 다른 의미에서 온실 같은 곳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온실을 잘 관리하는 요령은 식물이 냉해를 입을 염려가 없을 때는 낮에 문을 활짝 열어두는 것이다.

 

삶과 교육을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혁신교육과 더불어 오늘날 마을공동체교육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삶의 교육’을 지향한다고 해서 학교가 아닌 마을에서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전주 완산고등학교 교사 박제원은 이렇게 말한다. “마을과 연계하지 않으면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미신이 교육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는 현실은 누구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 혁신학교든 아니든 학교는 학습의 중심지이며, 학교의 역량 역시 학습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주위를 자꾸 기웃거리게 되면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10

 

학교 본연의 역할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마을공동체교육에 대한 환상을 경계하자는 말이다. 학교와 지역사회의 벽을 허물면서 인턴십을 비롯한 경험 중심의 교육과정을 고등학교 과정에 성공적으로 도입한 메트스쿨이 미국 공교육의 개혁 모델로 주목받으면서 한국에도 활발히 소개되었지만, 영국의 리치아카데미가 전통적인 지식 위주의 교육으로 메트스쿨 못지않게 학생들의 학력을 높이는 데 성공했음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11 교사중심의 강의식 수업이 학생중심의 플립러닝12보다 못한 학습방식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리치아카데미 역시 메트스쿨처럼 중하위층이 사는 지역에 있는 학교다. 혁신이라는 것이 반드시 새로운 뭔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교육은 복잡계다

 

조지프 슘페터가 기업의 혁신으로 꼽는 5가지가 있다. ‘새로운 제품 생산, 새로운 생산 방법 도입, 새로운 조직 구현, 새로운 판매처 개척, 새로운 구입처 개척’이다. 생산과 판매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면 기업은 성장하기 마련이다. 학력이 우수한 아이들을 길러내어(인재를 생산해) 사회에 내보내는(판매하는) 관점으로 본다면 기업의 혁신 원리를 학교에 적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첨단 기자재를 활용해 지식을 보다 효과적으로 전수한다면 더 훌륭한 인재가 배출되고 혁신이 일어날까?

 

실리콘밸리에 세워진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학교였던 알트스쿨의 실패담은 교육에서의 혁신이 기업의 혁신과 어떻게 다른지를 말해준다. 페이스북 등 IT기업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첨단 기자재를 도입하고 유능한 교사들을 투입했지만 결과는 학습부진아의 양산이었다. 등하교를 아이들 자율에 맡기고, 학습할 내용을 아이들이 선택하게 한 것은 사실상 교육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출퇴근을 자율에 맡긴 벤처기업이 성공하기 힘든 것은 동료들 간의 상호작용과 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5년이 지나지 않아 알트스쿨 9개 중 5개는 폐교되고, 4개는 다른 학교에 흡수되었다.

 

기업의 주요 목표가 수익을 내어 재투자를 함으로써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있다면, 학교의 목적은 학교의 성장이 아니라 아이들의 성장에 있다. 비리를 저지르는 사학재단들처럼 학교를 성장시키기 위해, 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아이들을 이용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교육자가 아니라 교육사업가들이다. 그 속에서도 아이들의 성장은 일어나겠지만, 그것은 의도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또는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아이들과 교사가 모여 있기만 해도 상호작용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자율성과 경험교육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교사의 역할, 지식교육의 필요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기초학력은 모든 배움의 토대다. 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읽기와 수학, 과학 영역의 성취도를 평가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초학력 없이는 다음 단계의 학습도, 토론도 이루어지기 힘들다. 혁신교육이 성공하려면 표준화교육의 강점을 살려 기초학력을 다진 위에 개별성을 살리는 전략이 필요할 것이다. 학습결손이나 학습장애를 겪는 아이들에게는 일찍부터 개별화 교육이 필요할 수도 있지만, 전체적인 교육의 방향은 표준화교육과 기초학습을 기본값으로 하고 그 위에 개별성과 다양성을 가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교육은 삶과 마찬가지로 복잡계다. 학교는 제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아이들의 성장이 일어나는 곳이다. 성장시키고자 한다고 성장이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인풋에 따라 아웃풋이 결정될 거라는 단선적 사고는 교육에서 언제나 배반당해왔다. 권위적인 교육이 반드시 체제순응형 인간을 길러내지도 않는다. 영국의 권위적인 청교도 문화 속에서 민주주의 정신이 꽃을 피운 것처럼, 한국 사회에서는 유신시대의 억압적인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가 민주화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반면에 자율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오히려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인간이 되기도 한다. 물리세계에서처럼 정신세계에서도 반작용의 힘이 작용한다.

 

교육은 의도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인간이 기계가 아님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삶과 동떨어진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학교와 지역사회를 연결하려는 움직임은 바람직하지만, 학교 또한 삶터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과 교사들이 낮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학교는 배움터이면서 동시에 삶터이자 일터이기도 하다. 학교를 삶터와 동떨어진 공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교육 문제의 해법을 자꾸만 학교 바깥에서 찾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이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배움의 기쁨을 맛보고, 교사들이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은 마을보다 학교 안에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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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당시만 해도 체벌이 당연시되고 교육적 의미까지 덧씌워져 있어 체벌을 금지하는 급진적인 정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2. 유토리 세대를 구분하는 명확한 정의는 없다. 1970년대 후반부터 시범적으로 시행해오던 유토리 교육을 전국의 소학교와 중학교에 확대 시행한 것이 2002년이어서(고등학교는 2003년부터) 대체로 1987년생부터 1999년생까지를 일컫는 말로 쓰인다.
  3. 2003년 통계에 따르면 OECD 국가 평균인 804시간보다 99시간이 적었다.
  4. 2003년, 2006년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순위가 급락하자 2007년부터 탈 유토리 교육으로 전환했다. 초등학교는 2009년부터, 중등학교는 2010년부터 유토리 교육이 전면 폐지되었다.
  5. 2000년대 초반에는 유토리 세대를 이해찬 세대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었다.
  6. 탈 유토리 교육으로 전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03, 2006년도 PISA 순위가 연속 급락하여 한국보다 낮아지면서다. 일본에서는 이를 ‘PISA 쇼크’라 부른다.
  7. 한국의 PISA 순위는 2000년대 이후 꾸준히 상위권에 속한다. 다만 읽기 능력에서는 하락 양상이 나타나 원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8. ‘유토리입니다만, 무슨 문제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드라마(2016)도 이런 변화의 조짐을 보여준다.
  9. ‘혁신학교 성과 분석 보고서, 혁신학교 전체를 대변하나?’, 에듀인뉴스, 2019.1.4.
  10. 박제원, 혁신학교가 혁신교육의 메카가 되려면, 《교육, 제4의 길》, 교육을바꾸는사람들, 2021.01.06.
  11. 박제원, 국가 교육과정을 폐지한다고 자기 주도성이 높아지지 않는다, 《교육, 제4의 길》, 교육을바꾸는사람들, 2020.12.02.
  12. ‘거꾸로 교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 과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미리 내준 학습자료로 집에서 공부를 하고 학교에 와서 실습과 과제를 하는 방식이다. 교실에서 학생 중심의 수업이 가능한 장점이 있는 반면 가정형편에 따른 학습 격차가 커지는 단점이 있다.
교육매체 계간《민들레》발행인 현병호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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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1. 김태균 수정 삭제

    “아이들이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배움의 기쁨을 맛보고, 교사들이 삶의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은 마을보다 학교 안에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그럼에도 이것이 학교를 정책의 시험장으로 만들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정당화해주는 것으로 왜곡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교를 통해 올바른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검증되지 않은 정책들을 학교로 무작정 내려보내고 시행해서는 교사들만 소진되고 정책과 정부의 신뢰는 지금처럼 계속 낮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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