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Y 캐슬’, 다시 이야기 ⑤ : ‘피라미드’와 ‘사다리’
‘SKY 캐슬’에서 다시 보는 ‘피라미드’와 ‘사다리’
어떤 사람들은 ‘SKY 캐슬’에 뭐 그렇게 호들갑 떨만한 게 있느냐고 의아해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명문대학에 진학시키려고 하고, 그 목적을 위해서 특히 엄마들이 물불가리지 않고 달려든다는 것, 그리고 그 와중에서 다양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 이런 이야기가 한국 사회에서 새로울 게 어디 있냐고 반문합니다. ‘SKY 캐슬’에 새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적나라하게 까발렸다’는 데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캐슬’ 안에서 교양과 품위를 지키며 사는 것으로 간주되는(현실에서 직접 보기 어렵고 그래서 궁금한), ‘극상층’이 어떤 욕망을 가졌고 그런 욕망을 어떻게 분출하는지, ‘막장’에 이르는 강도로 그렸다는 게 새롭다면 새롭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여길만한 것은 전혀 아닙니다마는, ‘SKY 캐슬’이 새삼스럽게 확인시켜주는 한국 사회의 특징적인 면모 가운데 하나는 사회와 학교교육을 보는 통념입니다. ‘피라미드’와 ‘사다리’로 은유하는 인식입니다. 우리는(사실 한국인만은 아닙니다마는) 사회가 지위의 피라미드를 이루고 있다고 여기고, 학교교육은 그 피라미드를 올라가는 사다리라고 여깁니다. 한국인이면 으레 이런 생각을 품고 있다고 봐도 무리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문화는 그런 생각을 대놓고 드러내지 못하게 견제해왔습니다. 교육을 세속적인 출세 도구로만 여기거나, 지위나 권력을 명예보다 더 중시하면, 상스럽다고 따돌려지기 십상이었습니다. 웬만해선, 더욱이 ‘가문’을 들먹일만한 사람들이라면, 그런 속내가 있다 하더라도 꺼내 보이진 않을 법합니다.
그런데 ‘SKY 캐슬’의 인물들은 달랐습니다. 교양을 갖추고 우아하게 사는 외피(外皮)를 지닌 ‘교수’와 ‘사모님’들이 확고하게 ‘상스러움’을 드러냅니다. 세상은 피라미드이고, 학교는 그 꼭대기로 오르기 위한 사다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거침없이 외칩니다. 자녀가 그 사다리를 오를 수 있게 하려고(“대대로 ‘SKY 캐슬’에 살면 좋으니까”) 살인자 은닉까지도 서슴지 않는 행태를 보입니다.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던 우리 마음속의 욕망을 이렇게 ‘까발린’ 데 ‘SKY 캐슬’의 ‘펀치’가 있다고 합니다.
‘SKY 캐슬’의 두 캐릭터, ‘한서진’과 ‘차민혁’
이야기가 ‘드라마틱했던’ 만큼, ‘SKY 캐슬’에서 인물들의 표출도 꽤 극단적이었습니다. 우리 일상적인 사고와 행동의 ‘스펙트럼’에 대고 보면, 당연히 예외적인 인물들이 대부분입니다. 드라마라는 게 본디 그런 것이기도 하겠기에, ‘SKY 캐슬’에서 일반 시청자가 동일시할 인물들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이 가는 캐릭터’로 꼽았다는 인물은 ‘한서진’과 ‘차민혁’입니다. 드라마 속 행태만을 볼 때 결코 호감을 가질 수 없는 인물이지만, 욕망을 벗기고 보면 결국 그들은 우리와 제일 닮아있다고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SKY 캐슬’에서 ‘한서진’은 ‘강예서’의 엄마입니다. ‘예서’는 ‘명문 신아고’를 수석으로 입학했으며, “서울대 의대에 꼭 가고 말거야.”라는 집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딸의 꿈을 실현시키는 것은 ‘한서진’에게도 “절대 포기 못할” 목표입니다. 딸을 위한 집착이기도 하고, 인정 못 받는 며느리의 한을 풀 출구이기도 합니다. “아들 못 낳았다고 대놓고 무시”당하고 있지만, “3대째 의사 가문 만드는 게 평생의 소원”인 시어머니에게 딸의 서울대 의대 합격증을 보란 듯 내밀고 싶고, 그래서 “숨이나 쉴 수 있게” 며느리 자리를 확보하려고 합니다. ‘SKY 캐슬’의 얼개는 바로 이런 ‘한서진’을 중심으로 구성돼있습니다. 딸의 서울대 의대 진학을 위해 그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구사하는 것이 이야기 줄기에 얽혀있습니다. ‘한서진’은 자녀의 대학 진학에 자신의 삶 모든 것을 거는, 심지어 극악해질 수도 있는, 엄마를 보여줍니다.
‘차민혁’은 ‘로스쿨’ 교수입니다. 명문 ‘신아고’에서 3~4등 정도하는 쌍둥이 아들을 직접 가르치며, 아이들의 대입 준비를 위해 ‘캐슬’에 독서토론 모임을 만들어 이끌기도 합니다. 서울대 의대를 ‘학종’으로 합격한 이웃 학생의 ‘자소서’를 대신 써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수학 시험문제를 만족스럽게 풀어내지 못하는 아들에게 핏발을 세워가며 아래와 같이 주입합니다.
차민혁: 아빠가 말했지. 니 할아버진 초등학교도 겨우 나온 세탁소 주인이었다고. 아빤 그런 환경에서도 대통령이 되겠단 꿈을 꾸었어.
평생 남의 옷이나 빨다 간 네 할아버지는 바로 여기[모형 피라미드의 밑바닥을 가리킨다.] 피라미드 맨 밑바닥이었는데도, 아빠는 사법시험을 수석 합격하고 검사가 됐지. 그렇게 여기까지 올라왔어. [모형 피라미드의 중간 부분을 가리킨다. 그리고 조금씩 꼭대기로 지목의 위치를 옮겨 가면서 말을 이어간다.] 부장검사, 차장검사를 거쳐 검사장, 국회의원, 당 대표 그리고 [피라미드 꼭대기를 가리키며] 블루 하우스. 그렇게 꼭대기로 꼭대기로 올라가고 싶었는데, 네 외할아버지를 도와주다 아빠 꿈이 좌절됐다고. 그래서 비전을 바꿨지. 내가 아니라 내 아들이 바로 여기 [피라미드 꼭대기를 가리킨다.] 여기까지 올라가게 만들겠다고.
아빠가 못 할 것 같애? 이미 아빠가 기반을 다 닦아 놓았잖아. 니가 조금만 조금만 힘을 내면, 꼭대기까지 순탄하게 올라갈 수 있어. 우리 아들, 할 수 있지? [목소리를 높이며] 할 수 있어 없어?
아들: [울먹이며] 할 수 있어요.
차민혁: 더 크게!
아들: [겁먹은 듯 더 크게 답한다.] 할 수 있어요.
‘SKY 캐슬’을 보고, 엄마들은 ‘한서진’을 그리고 아빠들은 ‘차민혁’을 동일시한다고 합니다. 극단적으로 묘사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한국 사회의 엄마와 아빠를 가장 현실에 가깝게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차마 드러내지 못하는 속마음까지 뒤집어 보여주었다고 받아들여지는 듯합니다.
‘한서진’과 ‘차민혁’이란 캐릭터를 중심으로, ‘SKY 캐슬’은 한국 사회의 학교관과 사회관을 재확인시켜줍니다. 그것은 ‘사다리론(論)’과 ‘피라미드론(論)’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는 지위의 피라미드 구조를 이루고 있고, 학교는 지위를 높여가기 위한 사다리라는 생각인 것입니다. ‘론(論)’이라고 붙여가며 부연하는 게 억지스러울 만큼, 이런 생각은 우리가 일상에서 그냥 살고 있는 상식입니다.
‘피라미드론’으로 간과하는 것
피라미드론의 타당성은 자명해보입니다. 어느 사회이건 그곳에는 높은 사람이 있고 낮은 사람이 있고, 높은 사람은 소수이고 낮은 사람은 다수이며,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올라가야 합니다. 세계 어느 사회를 보나 피라미드 모형대로 구축되어 있는 듯합니다. 이와 같이 보편적이게 보이는 현상이나 생각에 관련해서,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를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모든 사회가 다 피라미드 같지는 않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꼭대기’와 ‘밑바닥’ 사이의 격차가 매우 큰 사회가 있는가 하면 매우 작은 사회가 있고, 꼭대기 쪽을 채우는 사람 수와 밑바닥 쪽을 채우고 있는 사람 수의 차이도 사회마다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사회의 지위 구조가 삼각 ‘뿔’이 아니라 펑퍼짐한 바가지를 엎어놓은 꼴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물론 삼각뿔에 가깝습니다. 꼭대기와 밑바닥 격차는 점점 멀어지고 있으며, 펑퍼짐한 모양보다는 뿔 모양을 그리고 있습니다. 반면, 핀란드나 덴마크,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의 나라들은 우리와 딴판입니다. 훨씬 둔하고 펑퍼짐한 구조를 보입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북유럽 사회들에서는 우리 사회에서와 같이 지위 경쟁이 살벌하지 않습니다. 이런 차이는 사회 구조의 차이와 깊게 관련돼 있을 터입니다.
사회 구조와 관련해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그것을 위계적인 모형으로 그리더라도, 하나의 모형에 사회 전반의 구조를 단일하게 담을 수 있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여러 개 모형을 난립시켜야 담아낼 수 있는 사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피라미드와 같은 하나의 모형으로 사회가 그려진다면, 그 사회에서는 ‘상층’ 사람들이 모든 분야의 이익들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특히 돈이 매우 광범위한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돈 가진 사람이 다른 모든 것을 몰아가질 위험이 큽니다. 이를테면 돈을 밑천으로 학벌도 갖추고 권력 강한 지위에도 오르며, 공적으로 인정하는 명예까지도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어쩌면 이런 사회에 가까울지 모르겠습니다. ‘돈이 전부’라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일반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 사회와는 다르게, 하나의 위계 모형에 전체 구조를 수렴시키기 어려운 사회가 있습니다. 정치권력의 ‘위아래’ 모형이 있는가 하면, 경제 자산의 위아래 모형이 있고, 학문이나 예술 분야의 모형도 따로 있어야 하는 사회가 있습니다. 분야마다 다른 모형들로 표상해야 비로소 사회구조 전체의 윤곽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가 있는 것입니다. 분야마다의 위아래 위치나 분포가 중첩되지 않아서, 단일한 모형으로 포섭해버릴 수 없는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가 바로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일 것입니다. 한 분야의 가치가 다른 분야의 가치를 휩쓸어 버리지 않는 사회입니다. ‘돈이 전부’인 사회에서는 결코 상상해볼 수 없는 사회입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마스터’를 지향하여 꾸준히 노력하게 되고, 그런 노력이 분야마다 고유한 긍지와 자부심을 보장해줄 수 있는 사회입니다. 이른바 ‘선진 사회’란 바로 그런 사회일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피라미드와 사다리, 그리고 학교교육
‘SKY 캐슬’이 보여준 한국 사회는 펑퍼짐한 구조의 다양한 사회가 아닙니다. 뾰족한 피라미드 구조이고,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거리는 멀며, 올라가기 위한 경쟁은 첨예하기 짝이 없습니다. 캐슬 안의 주민들은 ‘상위 0.1%의 극상층’이라는데, 그 안에서도 경쟁으로 인한 갈등과 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엄마들끼리도 싸우고 아빠들끼리도 싸우며, 자녀들끼리도 싸웁니다. 정보를 위해 싸우고, 지위를 위해 싸우며, 성적을 위해 싸웁니다. 이 싸움들은 ‘피라미드론’과 ‘사다리론’의 바탕 위에서 서로 엉켜있습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각자 처한 맥락에서 영일(寧日) 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SKY 캐슬’이 높은 시청률을 얻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은, 바로 우리 사회가 그렇게 늘 싸우는 사회라는 점을 알려줍니다.
‘SKY 캐슬’ 현상이 암시하는 대로, 우리 사회는 하나의 피라미드로 압축되는 획일적이고 독점적인 사회이고, 꼭대기의 삶과 밑바닥의 삶이 현격하게 다른 차별적인 사회입니다. 상층이 돈과 권력 그리고 위신까지 두루 차지하고 있는(다양한 부문의 고유한 노력과 성취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사회이며, 상층에 오르지 못하면 물질적으로 곤궁할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사회입니다.
이런 우리 사회에서 지위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매우 심각한 문제이지만1 그 치열한 경쟁이 온통 학교로 수렴된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학교가 지위 경쟁의 ‘사다리’가 되면, 그것도 다른 대안이 없는 거의 유일한 사다리가 되면, 학교교육은 본질을 유지할 수 없게 됩니다. 학교에서 교육이 증발해버리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서와 같이, 학교 외에 달리 뚜렷하게 ‘교육기관’이 발달해 있지도 않은 형편에서는, 사회에서 교육 그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꼴이 됩니다. 사회에서 교육이 사라지면 미래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바로 이런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마는, 마치 ‘끓여지고 있는 개구리’처럼2, 우리는 ‘사다리론’에 안존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사다리로 보는 상식이 우리 사회에 더욱 깊이 박히고 완고해지면, 그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SKY 캐슬’을 시청한 뒤, “돈이 없고 실력과 정보가 없어서 그렇지, ‘한서진’이나 ‘차민혁’ 정도 된다면 나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반응했다고 합니다. 이런 반응이 놀라울 것 없다면, 그만큼 우리 학교교육은 피라미드론과 사다리론의 굴레 안에서 비틀리고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사다리론’을 품은 교육정책
‘사다리론’에 젖어있는 우리 사회에서 학교 교육이 어떻게 본질을 벗어나게 되는지는, 지난 번 글(「‘SKY 캐슬’, 다시 이야기 ④: 학교의 모습에 대하여」)에서 어느 정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에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그런 학교 모습을 더욱 굳혀가고, 교육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어 갈 가능성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큰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사다리론’은 대대로 내려온 우리 교육정책의 기조입니다.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대통령부터 거리낌 없이 사다리론을 공인하고 확산시킵니다. 학교교육이 사다리 오르기 경쟁이란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공공연히 강조합니다. 학교가 본디 지위를 높여갈 수 있는 단단한 사다리였는데 이제는 그게 부실해졌다고 탄식하며, 단단한 ‘희망 사다리’로 복원하겠다고 약속도 합니다. 이런 공약은 ‘국정과제’로 번안되어 정권마다 교육정책의 근간을 이루게 됩니다.
보수와 진보의 구분도 사다리론 앞에서는 무색해집니다. 흔히 보수 진영에서는 교육을 개인의 선택과 ‘시장 경쟁’에 맡기겠다고 합니다. 이 논리에서 학생들은 학교라는 사다리계단을 올라설 때마다 다음 선택을 쟁취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도록 전제돼 있습니다. 이 경우에 비해 덜 살벌할지 모르겠지만, ‘진보적인’ 논리에서도 사다리론은 굳건하게 유지됩니다. 진보 진영의 전형적인 구호는 ‘교육기회 균등’이고, 현재 정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종종 ‘출발선 평등을 보장하겠다’고 공언합니다. 이런 구호와 발언에도 학교교육은 ‘경주’라는 전제가 함축돼 있습니다. 학생들이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달리기 시작하는(상층 가정의 자녀들이 훨씬 앞에서 달려 나가기 시작하는) 현실을 종종 무시하는 보수 진영에 비해, 진보 진영에서는 모두가 같은 선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사전에 불리한 학생들을 지원하겠다고는 합니다. 그러나 두 진영 모두 학교교육이 사다리로써 기능해야 한다고 전제하는 데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학교교육이 사다리 오르기 경쟁일 뿐이고, 그 경쟁이 우리 사회에서와 같이 지극히 치열해지면,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닌 ‘경쟁관리 장치’로 전락하게 됩니다. 사회의 지위 경쟁을 모두 수렴해서 관리하는 ‘국가기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구 안에서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 안에서의 활동을 ‘교육’이라 부르기는 하겠지만, 그 진상을 보면 경쟁에서 이기려는 온갖 술수가 모아져 있을 뿐일 것입니다. 이런 양상은 지난 번 글에서 이야기한 대로입니다.
사다리론이 굳어지면, 학교는 교육을 방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사다리 게임’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학교 아닌 다른 어떤 기관이나 시설에서 버려진 교육을 살려낼 리도 없습니다. ‘대안학교’가 진정한 교육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다리 게임에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학교’가 생존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습니다.3 학교 성적표와 졸업장이 아닌, 다른 ‘대안의’ ‘증서’를 가지고 사회적 지위를 얻어낼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에서 한 자리(지위)를 차지해 살아가는 것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 한, 학교교육을 우회할 대안적인 방도를 강구하는 것은 무위할 뿐입니다. 학교에서 교육이 죽으면 결국 우리 사회에서도 교육이 죽게 됩니다.
‘사다리론’을 걷어차려면?
학교교육의 본연을 살리려면 ‘사다리론’을 걷어차야 합니다. 이 일은 물론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2천년도 더 묵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재구성하려는 것과 같은 어마어마한 도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둘러보면, 우리에 비해 훨씬 더 교육적인 학교를 가진 나라들이 수두룩합니다. 경쟁을 관리하는데 학교를 옭아매지 않는 나라들이 많습니다. 적어도 이런 사례들이 있는 만큼, 학교교육을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있습니다.
사다리론을 폐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핵심적으로 공들여야 할 일은, 학교를 전형자료를 만드는 기관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입니다.4 학교가 단계별 진학을 위한 전형자료를 만드는 곳도 아니고, 노동시장의 고용을 위한 전형자료를 만드는 곳도 아니란 생각을 확고히 견지하는 것입니다. 철석같은 우리의 관습과 버릇 때문에 많은 사건과 부작용이 따르겠지만, 경쟁을 관리하는 ‘사회 과업’에 학교를 동원하지 말고, 학교를 독립시켜주는 것입니다. 교육정책의 초점이 여기에 모아져야 합니다. 사회에서 지위 경쟁을 어떤 절차와 방법으로 판가름 짓든, 학교는 그 사태에 초연하게, 독자적으로 오직 교육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그 고민의 결과를 구현하는 데 정진할 수 있게 배려해야 합니다.5 그런 정책 와중에 필경 부정과 비리가 터지겠지만, 그것들은 그것들에 합당한 법으로 엄정하게 다스릴 뿐, 그런 사건들을 피하기 위해 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려선 안 됩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늘 그래왔는데, 그래서 학교가 오늘날의 꼴이 됐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의 ‘교육적 독립 원칙’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해, 당장 학교를 신뢰할 수 없는 마당에, 무슨 가당찮은 제안이냐고 힐책하리라 짐작 못할 바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은, 그동안 우리 사회가(정책이) 학교에 신뢰를 쌓을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고 사회의 비난과 벌을 받아가면서라도, 꾸준히 독립 조직으로서 정련되어 올 수 있었다면, 적어도 우리가 비교할 만한 외국에서 볼 수 있는 정도로는, 우리 학교가 사회적인 신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학교에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던 만큼, 지금부터라도 주고 기다려보는 것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안일 것입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 평등하지 못한 사회일수록(그래서 경쟁까지 첨예해지면) 사회 구성원들이 불행하다는 사실은 이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회 전반의 신뢰도와 안녕감이 떨어지고 범죄율이나 자살률 등이 올라가는 양상은 많은 국제 비교 연구에서 일관되게 확인되고 있다.
-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바로 튀어나오지만, 알맞게 따뜻한 물에 놓으면 안온하게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물을 서서히 끓여 올리면, 자신이 삶아지는 줄도 모르고 계속 머물러 있어 죽게 된다는 우화에서 비롯된 비유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생물학계의 정설이다.
- ‘사다리 게임’에 동참하지 않고 버텨내는 ‘대안교육’ 운동이 없다거나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 사회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런 운동이 결국은(해외 유학이나 검정고시 등을 통해 결과를 입증해야 하는 경우처럼) 사다리 게임에 빨려 들어가거나, 끝까지 버텨낸다 하더라도, 그런 운동의 씨앗은 너무 예외적이어서 한 사회를 포섭할 교육의 양식으로 키워내기 어렵다는 뜻이다. 물론, ‘대안학교’와 일반 학교를 구분 지을 필요가 없는 제도를 갖출 수 있게 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러나 그런 제도를 얻어낼 수준에 다가가게 된다면, 아마도 여기서 거론하는 우리 학교교육 문제 역시 대체로 풀려있게 될 것이다.
- 말 그대로 그렇게만 하면 다 된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동반되어야 할 정책들이 무수할 것이다. 우선, 전형자료 만드는 데 소모되던 자원이나 노력들을 온전히 교육다운 교육에 돌릴 수 있게, 교원들이 바르게 양성되어야 할 것이다. 학교가 전형자료를 만들지 않아도 탈 없으려면, 학교나 대학이 입학전형에 관련해서 지녀야 할 역할이나 전문성도 지금과 크게 달라야 할 것이고, 기업의 인재 발굴이나 채용방식도 구태를 벗어나야 한다. 이외에도 정책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과제는 거듭 생겨날 것이다. 어떤 과제나 역풍이 일어도, 요체는, 그런 ‘주변적인’(전형이나 채용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학교를 동원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교육보다 다른 일을 우선하는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는 원칙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이다.
- 이런 주장에 대해, 학교가 직업 준비도 시키지 않고 사회화도 하지 않도록 ‘독립시켜야’ 한다는 뜻이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요컨대 그렇다. 직업 준비와 사회화를 명시적인 목표로 내걸고 교과와 활동을 운영하는 경우보다, 교육(사람을 키우는 일)이란 목적을 고집하고 고심하며 운영할 때 더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직업 준비나 사회화는 학교교육이 명시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부수적으로(교육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수확하게 되는 성과일 것이라는 주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