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얼씽킹이 학습을 방해한다
몇 년 전부터 비주얼씽킹이 교수학습법으로 유행해왔다. 비주얼씽킹은 글과 이미지를 함께 이용해 생각한 것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거나 이해하는 교수방식이다. 한마디로 이미지를 중요하다고 보아 이미지로 생각하고 기록하는 습관이다. 이미지는 객관적인 사진, 그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주관적인 느낌에 가깝다. 특히 이는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널리 퍼져있는데 꼼꼼하게 따져볼 점이 여럿 있다. 비주얼씽킹이 실제의 학습에 효과적인가, 실제의 학습에 효과적이라면 어떤 절차에 따라 교실 수업에서 활용되어야 하는가 등을 들 수 있다. 초중고 교육을 돌아보면 교사들의 교과연구회는 긍정과 부정의 장면이 교차한다. 교사들이 교과연구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교육과정과 교과 내용을 탐구하고 바람직한 교수학습법을 고민하는 일은 무척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최근 10년을 보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교과연구회들이 실제로는 무척 흠이 많거나 학습과학을 위배할 수 있으며 한 철 피는 장다리꽃인 경우가 많은 교수학습법을 마치 큰 효과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언론이나 연수를 통해 전파함으로써 실제의 학습을 더디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런 현실은 우려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제약 시장에서 신약 하나가 완성되어 시장에 공급되기 전까지는 수차에 걸친 임상시험과 엄격한 검증을 거치는 일이 당연한데도 교육의 맨 일선에 있는 교사들이 한 가설에 불과하거나 어설픈 교수학습법을 매우 효과가 높다고 자평하는 것은 좋은 태도가 아니다.
비주얼씽킹은 실제로는 정보를 시각적으로 구조화시켜 나타내는 개념지도로서 오래전부터 써왔던 마인드 맵, 의미구조도, 워드 맵, 그래픽 오거나이저 등의 변종(變種)으로 기존의 개념지도와 비교하면 더 낫다고 할 수 없거나, 굳이 쓰겠다면 뇌의 발달을 고려하여 초등 저학년에 통용될 수 있는 교육 방식이다. 다만 기존에 널리 써왔던 개념지도법과 차이가 있다면 좀 더 사실적으로 대상의 이미지를 묘사하는 정도인데 오히려 수업에서는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흔하다. 학습은 기억이며 기억은 생각의 잔재이므로 어떤 것을 기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많이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학생들은 배운 것, 즉 생각하면서 배운 것을 장기기억에 보다 쉽게 저장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다수 학생은 비주얼씽킹 수업 중에 그림을 그릴 때 선을 긋거나 색깔을 칠하는 등 주목받는 표현을 하는데 보다 많이 신경을 쓰고 있다.
이미지는 개념적 이미지면 충분하다
비주얼씽킹을 효과적인 교수학습법으로 보는 배경으로는 사회 변화를 꼽을 수 있다. 현대 사회는 소통 수단이 텍스트의 시대에서 이미지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텍스트로 된 정보는 유용하지만 하나하나 검토하기에는 양이 많고 해석할 시간도 부족하지만, 텍스트의 많은 정보를 이미지로 압축하면 짧은 시간에 전달되기 때문에 활용도가 높다고 본다. 이 주장은 그럴듯하여 정보 전달에서 옳은 측면이 있다. 인지 구조상 자료를 텍스트보다는 이미지로 제시했을 때가 정보 수용자에게 훨씬 직관적이고 간결하게 다가온다. 예컨대 고등학교보다 중학교에서, 중학교보다 초등학교에서, 초등학교보다 유치원에서 수업 시간과 교실 환경에 이미지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비단 학교뿐 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서적, 가정과 사무실의 다양한 매체, 거리의 진열대와 광고에 이르기까지 그림이 빠져 있는 대상이 없으며, 무엇을 배우고 익히는 데도 하나의 학습 수단으로 그림이 활용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지가 텍스트보다 우수한 정보전달 도구라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는 상당히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라는 장점이 있지만 이미지의 시대에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수행하려는 작업을 구상할 때 이미지를 떠올린다. 즉 대상을 직접 보고 만지고 이리저리 조작하면서 마음에 떠오르는 시각적 이미지를 조작하는 등 구체적이고 적절한 계획을 구상한다. 책상 위를 정리하기 전에 잡동사니를 어떻게 정리하여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집에 가는 길을 생각할 때도 이미지로 떠올린다. 뇌는 정보를 이미지로 저장해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미지로 표현된 정보일수록 더 쉽게 받아들인다고 볼 수 있다. 텍스트 정보와 이미지 정보를 비교하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뇌가 글을 읽을 때는 기억 속에 저장된 형태와 맞추어 음소, 음절, 단어, 문장, 문단 순으로 읽고 텍스트의 왼쪽 위부터 오른쪽 아래로 순서대로 읽어야 하므로 망막 센서를 아무리 효율적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문해를 고려하면 분당 400∼500단어 정도만 읽을 수 있으며 더 빨리 읽을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글자를 소리로 바꾸고 다시 그 소리를 의미로 바꿔 이해해야 하므로 직접적 이미지인 그림에 비해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이 복잡하다. 하지만 이미지 정보는 눈으로 들어오는 순간 바로 받아들이므로 굉장히 직관적으로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문해력에는 차이가 있지만, 글보다 이미지를 이해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므로 문자로 이루어진 정보보다 시각적 이미지로 되어 있는 정보를 더 편하게 받아들이며 쉽게 처리한다. 요컨대 교수학습에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면 정보 전달에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로 표현된 정보를 쉽게 받아들인다고 하여 비주얼씽킹을 효과적인 교수학습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수업에서 학생의 발달을 고려하는 학습법만이 정당하다. 또 주변 여건을 볼 때 선택한 학습법이 장점보다 단점이 드러날 개연성이 높으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특히 교사가 수업에서 합리적인 교수학습법을 찾으려고 애쓴다면, 그 기준은 실제의 학습에 두어야 하며 실제의 학습은 곧 ‘기억’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 뇌에 기억된 이미지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인간은 외부정보의 70%를 시각으로 받아들인다. 망막을 통해 맺혀진 시각 정보는 여러 전달경로를 거쳐 뇌의 시각중추인 후두엽에 도착한 후에 뇌 속에서 전체적인 이미지로 재구성된다. 반면 상상의 이미지가 있다. 상상의 이미지는 외부에서의 입력 없이 뇌 속에서 형성된 가상의 이미지이다. 두 개가 입력된 경로는 다르지만, 뇌 속에서 재구성된다는 점과 결과적으로 뇌 속에서 하나의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점은 동일하다. 그런데 뇌는 이 상상과 현실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반응한다. 또 상상은 실재에 없는 것이라고 하여 무조건 잘못된 사고라고 할 수 없다. 이 과정은 바로 창의력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특별하게 중요하다. 물론 단순하게 상상하는 것과 상상을 실현하는 과정은 다른 차원의 일이므로 동일시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려낼 수 있을 때, 더 나은 목표를 정할 수 있고 행동할 방향을 알거나 수정할 수 있게 되므로 상상은 생존에 긍정적이다. 그러므로 이미지로 된 정보가 수용 능력이 높다는 것은 상상이든 현실이든 뇌 속에서 이미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된 정보를 쉽게 작업기억에 끌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비주얼씽킹에서 유의할 점이 있다. 그리고 수정해야 할 미신이기도 하다. 우리의 뇌가 모든 이미지를 동등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지를 끌어낼 때도 개념화된 이미지를 먼저 끌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뇌에는 하나하나의 구체적이고 세밀한 이미지도 있지만, 기억에서 이미지 원형을 끌어내려면 시간과 집중이 필요하므로 뇌가 최소한의 에너지로 과제를 수행하려는 습성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뇌는 구체적인 이미지의 단축 정보로 개념적 이미지를 장기 기억으로 만들어 놓고 보다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수용되는 이미지가 개념적으로 체계화되지 않는 정보라면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응당 처리 속도는 지연된다. 비주얼씽킹 수업에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이미지는 사물의 전체를 표현하지 말고 핵심적인 장면 등 특징으로 간단하게 표현하도록 하는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이 점에서 비주얼씽킹을 통한 학습 효과는 이미지의 표현 자체보다 이미지가 체계적으로 표현되어 있느냐에 좌우된다. 요컨대 도식화하는 등 체계적이지 않은 이미지를 남용하는 수업방식은 비주얼씽킹의 기대효과와는 다르게 학습을 더디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의미를 세밀하게 이해하는 보조 도구일 뿐이다
어떤 것을 설명하거나 내용을 전달할 때 꼭 그림이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처음부터 설명 글의 핵심만 잘 추려내고 쉬운 단어들을 몇 개 추가하면 충분히 상대에게 내용을 잘 전달할 수 있다. 정보를 전달할 때 문장과 함께 이미지를 포함시키는 것은 ‘편의성’과 ‘구체성’ 때문이다. 한 예를 들어보자
| 「그의 팔다리는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나는 그의 몸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노력했다. 그의 노란색 피부는 잘 잡힌 근육과 핏줄을 감추지 못했고, 머리카락은 윤기가 흐르는 검은색이었다. 치아는 진주처럼 하얗게 빛났다. 눈부신 모습이었지만 그의 희멀건한 눈동자와 대비되며 어쩐지 볼수록 소름이 끼치는 느낌을 주었다. 거기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안면과 거무죽죽한 입술이 합쳐지자 마치 어두침침한 백열등과 같은 분위기가 풍겨 나왔다.」
–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배우고 기억하는가 |
위의 글은 프랑켄슈타인의 외양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학생들이 글로 읽는데 30초 정도 걸린다면 캐릭터에 대한 이미지를 써서 보여주면 0.2초 정도면 충분하게 인식한다. 물론 처음부터 프랑켄슈타인에 등장하는 괴물이라고 간단히 묘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20세기 동안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수십 가지로 변형되어 왔다. 그러므로 프랑켄슈타인 괴물의 변천사에 대한 긴 설명을 시각적인 이미지 없이 이어나갔다면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이 머릿속으로 서로 동일한 이미지를 떠올린다고 볼 수 없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가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우리가 보는 단어나 글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방법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이미 알려진 인지과학이므로 글에 대한 해석은 다를 것이다. 즉 교사가 수업에서 사진이나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은 주제와 관련된 사실에 대해 모든 학생이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림을 지나치게 사용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텍스트에 하나의 그림을 추가하면 사람들은 더 잘 기억하게 할 수 있지만, 열 장의 그림을 추가하면 이미지는 악덕이 된다. 사람들은 매우 빠르게 이미지를 분석하고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속도는 한 번에 하나의 이미지로 제한된다. 동시에 나타나는 여러 개의 이미지를 이해하려면 차례대로 각각의 이미지를 처리해야 한다. 이 경우에 주의력도 고갈되고 기억력도 손상된다. 특히 내가 표현하려는 주제와 꼭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이미지만 텍스트의 핵심내용과 함께 사용해야 한다. 수업 참여와 학습은 동의어가 아니다. 수업에 참여하는 것은 배울 준비가 되어 있을 뿐이지 참여한 모든 학생이 실제로 뭔가를 배웠다는 것은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케릭터, 웃음을 유발하는 코믹한 케릭터, 주제나 대상과 무관한 케릭터를 그림에 포함하는 것은 교사와 친구들의 웃음과 관심을 이끌 수는 있지만, 학습에는 분명 지장을 초래한다. 그러므로 비주얼씽킹 교수학습법으로 그림을 그리면 학생의 참여도는 높일 수 있지만 반드시 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집중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어 있지 않으면 단연코 학습을 방해할 뿐이다. 그런데 여러 개의 비주얼씽킹 수업지도안이나 수업 과정을 그림이나 영상으로 보면 학생이 모둠이든 각자든 그린 그림에서 주제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그림은 찾기 어렵고, 사실적 그림을 그리려고 애쓰는 탓에 뇌를 고려하면 기억의 회수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아 보인다.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이 어떻게 실제의 학습에 기여할 수 있는지 필자는 몹시 우려스럽고, 우려스러움을 넘어 학습부진, 학력저하의 현실을 더욱 깊게 하는 교수학습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뇌 효과에 대한 미신을 품고 있다
그러나 비주얼씽킹 미신을 따르는 교사들은 텍스트를 재구성하여 그림을 통해 표현하는 것을 창의적인 설명이라고 본다. 즉 비주얼씽킹이 이미지를 활용하는 교수학습법은 맞지만, 단순하게 이미지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서 수많은 정보를 단 한 장의 이미지로 담기 위해 상당한 고등사고력이 뒷받침되어 있고 창의적인 해석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이 비주얼씽킹을 통해 표현한 그림에는 이미 드러내려는 정보가 어떤 내용인지를 이해하고 있으며 그 정보를 표현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은 무엇인지, 보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한 결과로 주제가 표현되었다고 본다. 다만 기존에는 텍스트, 표, 정확한 수치를 중심으로 정보를 전달했다면 비주얼씽킹은 전달수단을 시대적 흐름에 맞춰, 직관적이고 전체적인 정보 전달에 주목하여 사물 전체보다 특징적인 이미지로 간단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이라고 한다. 또한 학생들이 이미지로만 정리하는 경향을 제어하기 위해 그림으로 표현하기 전에 포스트 잇 등을 활용하여 핵심 단어 및 주요 구절, 문장 찾기 등 선행학습을 하도록 하거나 단어 프리즘 카드를 활용하여 한 개의 단어를 선택한 후에 이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함으로써 그림의 남용을 예방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교사가 전달한 몇 가지의 핵심 지식을 재연의 단서로 삼아 자신이 찾은 지식을 그림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서툴러도 자신만의 생각을 갖게 하고 발표를 통해 서로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비주얼씽킹을 활용한 수업은 교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만든 수업이고 평가임과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와 끼를 드러내는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스스로 개념을 정리하며, 창의적으로 사고하고, 협력적으로 지식을 구성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으므로 권장할만한 수업 방식으로 보고 있다.
먼저 분명하게 해 둬야 할 점이 있다. 비주얼씽킹을 찬미하는 교사들과는 다르게 그림을 통한 의사 표현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거나 창의성을 보여준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몇 가지의 중요한 조건이 필요하고 이것이 수반될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도 이러한 믿음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인간의 두뇌를 좌뇌와 우뇌로 구분하고 우뇌형 학습효과가 크다는 속설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좌뇌와 우뇌가 담당하는 기능은 다르다. 좌뇌는 읽기, 쓰기, 말하기, 계산, 소리의 인식에 관여하며 우뇌는 음악감상, 패턴과 공간인식, 그림과 영상, 표정 읽기 등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또 이미지로 된 정보를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림은 우뇌에서, 언어는 좌뇌에서 역할을 담당하는데 우뇌의 기억용량이 좌뇌보다 10∼100배 이상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좌뇌에서 강아지를 읽고 우뇌에서 강아지 영상을 생각한 후에 다시 좌뇌로 넘어가 강아지라고 판단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뇌의 역할에 기초하여 그림과 영상을 적극 활용하는 방식이 효과적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인간이 우뇌형 인간, 좌뇌형 인간으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처럼 증폭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뇌형, 좌뇌형 인간으로 구분되었거나 우뇌를 활용하는 수업방식이 학습에 효과적이라는 믿음은 부정확한 가설인 미신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수학은 논리적 사고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좌뇌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수학은 논리적일 뿐 아니라 매우 창조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놀라운 발상으로 해결되지 않은 수식을 풀어낸 수학자는 좌뇌형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또 예술적 창조도 감성이나 감각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예술은 치밀한 계산과 정확한 사고가 반영되어야 한다. 뇌를 보면 우뇌를 활용하는 그림을 중시하는 교수법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좌뇌와 우뇌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희끄무레한 물질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물질을 뇌를 연결한다고 해서 ‘뇌량’이라고 한다. 뇌량은 2억 5000만 개의 신경섬유로 되어 있으며 초당 40억 개의 정보를 주고받는다. 즉 뇌량은 좌뇌와 우뇌의 정보를 즉각 맞바꾸어 주는 역할을 한다. 뇌량의 역할 덕분에 한쪽 뇌가 하는 일을 다른 한쪽 뇌가 바로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보 전달의 효율적 수단으로 이미지로서 사실적으로 세부적으로 묘사된 그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념화된 그림이 기억되어 있으면 충분하고 텍스트를 깊게 이해하는 문해력과 언어를 명료하게 다루는 능력이 의사소통의 핵심 도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비주얼씽킹은 고등사고력을 강조한다고 하면서 이 점을 소홀히 하거나 학습이 기억이라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학생들의 표현을 중시하기 전에 표현되기 이전의 학습 수준인 기억력이나 명징한 언어를 쓰기 위한 제반 절차는 립 서비스에 그친다고 보여진다. 비주얼씽킹에서 강조하듯 자신의 창작물인 그림을 바탕으로 한 발표는 분명 학습 수준을 높이는 고도화된 기억 행위이다. 기억은 암호화, 저장, 회수의 3단계로 구성되었고, 그 중 회수가 학습에 가장 밀접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회수는 뇌로 들어간 정보(암호화)가 박혀 있다(저장)가 다시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아주 가까운 미래에만 써먹을 기억이 목표라면 마음껏 암호화와 저장에만 힘을 쏟으면 된다. 그러나 학습은 평생 적용될 수 있는 깊고 지속적인 기억을 만드는 과정이므로 기억의 초점은 회수에 두는 게 맞다. 어떤 영화를 단 한 번 보았어도 오래 기억하는 것은 친구들과 그 영화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토론을 벌이고, 인터넷에 올라온 영화평을 검토하고, 마음에 남았던 명장면들을 종종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같은 회수 작업을 통해 그 영화에 대한 기억이 더 깊어지고 강력해지고 향후 접근하기도 더 쉬워진다. 회수는 깊고, 오래 지속되는 접근하기 쉬운 기억을 형성하는 열쇠이며 그 유형으로 ‘리뷰(반복)’, ‘재인’, ‘회상’이 있고 뒤로 갈수록 기억력에 효과적이다. 즉 학습효과가 크다는 것이며 비주얼씽킹을 추종하는 교사들이 이 수업방식을 분석, 협력, 비판, 창의가 모두 들어가는 교수학습법이라고 극찬하는 것은 회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분명하게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발표나 토론을 그림을 통해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회수할 때 뇌에 암호화가 충분하게 되어 있지 않거나, 암호화가 되어 있어도 박혀있는 정보가 오개념이거나 오개념을 확실하고 분명한 개념으로 수정하지 않고 창의적 사고라고 미화하게 되면 활동수업에서의 회수는 접근하기 쉬운 기억을 형성하고 쉽게 외부정보를 받아들일 뇌 메커니즘을 구축할지는 모르지만, 삶의 문제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문제해결을 방해하는 인지적 간섭을 하는 정보로 기억되어 있을 뿐이다.
디지털 네이티브를 문해력 바보로 만들고 있다
비주얼씽킹을 극찬하는 교사들은 지금 학교에 있는 아이들이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하면서 그 특성에 주목한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대한 거부감 없이 각종 디지털 기기를 자연스럽게 활용해 왔으므로 수업 시간에 진득하게 앉아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하고 글을 쓰거나 읽는 것을 매우 지겨워하며 전통적인 수업 방식에서는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아이들은 오랫동안 사색하고 앉아서 무엇인가를 하기보다 짧은 시간 동안 집중하여 멀티테스킹으로 작업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특성을 고려하여 이미지 중심의 교수학습법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교수학습관은 몹시 우려스럽고 안타깝다. 주위에 쉬운 글은 읽을 수 있지만 비교적 어려운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나 성인을 보는 일은 드물지 않다. EBS는 2021년 중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문해력 수준을 평가했는데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무려 27%의 학생이 적정수준에 미달했으며, 11%의 학생들은 초등학생 수준의 문해력을 보였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 읽기 영역의 경우, 평균적인 학생들의 성취보다 저조한 것으로 분류되는 2수준 미만 학생의 경우 2006년 5.7%에 불과했으나 2018년에는 15.1%로 급증했다. 성인들이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2008년 국립국어원 조사를 보면 우리 국민 중 한글을 깨치지 못한 문맹률은 1.7%로 낮았지만 성인 960만 명은 실질 문맹자였다. 자세하게 살펴보면 기초적 읽기, 쓰기, 셈하기를 하지 못하는 비문해 성인 인구는 311만 명인 7.2%로, 초등 1∼2학년 학습이 필요한 수준이다. 문자를 해독하더라도 병원이나 약국에서 처방된 투약설명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등 일상생활이 불편한 인구는 217만 명인 5.1%로 초등 3∼6학년 학습이 필요한 수준이다. 일상생활에 큰 불편은 없지만 보험 규정을 이해하는 등 공공 경제생활에서 읽기, 쓰기, 셈하기가 어려운 중학교 1∼3학년 수준의 학습이 필요한 성인 인구는 432만명인 10.1%로 집계되었다. 2013년 OECD(경제협력 개발기구) 국제성인 역량 조사(PIAAC)에서도 한국인 16∼65세의 언어능력은 평균인 3수준 이하가 91.5%로 나타났다. 심지어 구미 봉곡초등학교의 교사들은 초등학생들의 낮은 문해력에 대한 깊은 우려를 하고 있는 지경이다.
| 초등교육은 문해력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국어 능력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중학교를 보내는 것이 초등교육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교과서에 나오는 제재를 이해하고 분석할 수조차 없는 아이들이 우리 반에 많다. 우리 반만 그런가?
문해력이 바탕이 되지 않으니 프로젝트 수업이 어렵다. 예를 들어 프로젝트 수업 후 평가할 때 참 재미있었다, 즐거웠다 등 단순한 표현밖에 하지 않는다. 더 깊게 읽고, 제대로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을 길러주고 싶다.
사회나 과학 프로젝트를 할 때 학생들에게 사료, 텍스트를 주면 이해하지 못한다. 다음 단계를 가야 하는데 갈 수가 없다. 교사는 조급해지고 결국 아이들이 해결해야 할 것들을 교사 주도로 설명하고 있을 때가 있다. 프로젝트를 수행할 바탕이 약하다.
늘 대충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고 수업을 진행하였는데 안 될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읽기 능력을 기르는 방식을 알고 가르쳤으면 좋겠다. 제대로 된 읽기 능력을 가르치기 위해선 어떻게 수업을 해야 하나? 아직 나는 모르겠다. 그냥 해서 좋았다는 보여주기 방식의 수업이 아니라 일상 수업에서 문해력이 증진되는 수업을 경험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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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그 원인을 규명하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여 문해력을 높이려고 하지 않고 이미지라는 그림, 그것도 비체계적이고 무질서한 그림에 기대어 교수학습하는 방식을 어떻게 옳다고 할 수 있나? 인간에게 의사소통은 생각이나 감정을 교환하는 총체적인 행위다. 타자에게 자신의 욕망을 전달할 수 있어야 개인적으로 불만족이나 좌절에서 벗어날 수 있고 사회적으로도 문명의 도약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의사소통이 처음부터 원활하지는 않았다. 간단한 몸짓이나 눈짓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몸짓 언어를 사용했지만 거리가 조금 떨어져도 의사소통은 어려워서 이는 자연스럽게 도태되었다. 다윈은 그 원인을 몸짓언어로 소통하려면 신체 모두를 써야 하고 어둠 속에서는 실행될 수 없는 탓이라고 봤다. 그래서 그림으로 의사소통을 했지만 개념적 사고를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었으므로 그림은 주요 소통수단에서 멀어진 것이다. 그리고 문자 언어를 만들고 나서야 인간은 비로소 의사소통의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부모와 교사는 인간의 고유성이 글자 언어에 있음을 인지하고 본격적으로 언어의 뇌가 발달하는 초등학교 무렵부터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와 관련된 언어 기술을 가르치는데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포유류와 조류가 울음소리를 통해 욕구와 감정을 표현하며 소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침팬지는 배가 고플 때 내는 소리, 위급할 때 내는 소리, 다른 침팬지를 부를 때 내는 소리 등 대략 서른 가지 서로 다른 소리로 소통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타고난 자연 언어는 인간 언어에만 있는 ‘표상 능력’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직 인간의 글자 언어만이 의사 표현 수단에 그치지 않고 거의 온전하게 경험을 기억하거나 상상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학교급과 학년이 올라갈수록 교사는 학생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함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의사소통을 잘할 것인가에 중심을 두고 사고 기술과 언어 기술을 가르치고 학생들에게 배우도록 해야 한다. 즉 상대의 의도와 지적 수준인 맥락을 고려하며, 애매하거나 모호하지 않은 명료한 언어를 쓰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학습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비주얼씽킹 수업을 보면 정작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기술이나 언어기술, 개념을 명료하게 구사하는 어휘학습 등은 소홀히 하는 듯이 보인다. 심지어 언어적 개념에 대한 조작적 정의를 삶의 맥락이나 창의성이라는 허울을 붙여 자유롭게 쓰도록 하며 개념을 모호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마저 정당화함으로써 오개념을 인식하도록 하고 새로운 지식이 들어올 때에 학습 수준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누적적 결손을 심화시키는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니 현실에서는 학습 수준 저하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도해는 간결하고 학습원리에 따라 만들어져야 한다
그림을 교수학습에 활용하는 방식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그림이 중심이 되는 교수학습, 불필요한 세부적 그림, 비체계화된 그림이 오히려 학습을 방해하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도해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몸을 움직여 수업 내용을 익히고, 개념을 연결짓는 수업이라면 우수한 수업이 분명하다. 그렇게 되려면 도해는 간결하고 학생이 그림을 그릴 때 꼭 따라야 할 방법이 지켜지도록 교사는 지도해야 한다. 첫째, 추상적 정보를 구체적 형태로 제시하고 있는가? 둘째, 사실과 개념 간의 관계가 묘사되고 있는가?, 셋째, 새로운 정보를 기존 지식과 연결하고 있는가? 넷째, 모형과 인식도처럼 되어 있어 뇌에 이미지 패턴을 조직하는데 효과적인가? 예를 들어 순서도, 벤다이어그램, 개념지도, 문제해결 챠트 등 도식을 활용하는가? 다섯째, 뇌는 덩어리째로 생각하거나 무언가를 연결하려고 하므로 어휘력을 넓히거나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는 단위로 내용이 쪼개어져 구성되어 있는가? 여섯째, 글의 구성인 원인과 결과, 전제와 결론, 주제와 세부 사항, 사건과 특성, 사건의 시공간적 흐름, 유사점과 차이점, 은유와 비유 등을 고려하여 그림에 대한 세부설명이 이루어지는가 등을 더욱 중요하게 고려한 수업을 해야 한다. 특히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에 대한 사실적이고 분석적 이해를 할 수 있는 사고능력이 뒷받침되도록 교수학습해야 한다. 즉 정보를 분석하면서 요점을 찾아내 간추리는 학습 능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업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발표에 집중하며 정작 발표한 내용은 텍스트를 제대로 요약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을 적용했는지에 대한 평가가 미흡하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학습은 기억이고 기억을 빌릴 수는 없다. 기억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 수반되는 정보를 빌리는 것으로 고도의 전자계산기에 불과한 AI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전이능력과 창의성을 높이는 기억을 고려한 학습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것에 급급한 수업 방식은 메타인지를 높일 수도 없다. 특히 비주얼씽킹은 일종의 프리젠테이션으로 프리젠테이션의 중심은 발표와 표현이 아니라 과제와 관련된 정보의 분석력, 이를 압축하는 요약능력, 그리고 명료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대안제시능력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학습능력이 낮아 예측된 상황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불확실한 미래, 지금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문제해결방식을 보완하겠다는 창의적 사고에 중심을 두는 인터리빙적 교수학습법을 염두에 둔 비주얼씽킹은 마치 날개도 없는 새에게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다고 하는 환상을 심어줄 뿐이다. 이미지로서 도해학습은 중요하지만 그 도해가 어떻게 수업에서 활용되는가, 선차적 요소는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유행을 따라 하는 교수학습방식은 값비싸 보이지만 전혀 실용적이지 않은 명품옷을 입고 생선을 다듬는 것과 같다. 분석, 종합, 비판, 창의로 이어지는 인지 흐름을 고려한 교수학습법과 학습이 기억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만이 실제의 학습이 이루어지며, 도해는 이를 위한 적절한 보조 수단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교과 내용을 세부적인 그림을 통해 묘사하고 요약하고 정리하여 발표하는 방식이 무조건 적절한 교수학습방식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지에 대한 과잉기대이자 이미지에 감춰진 의미의 중요성을 가리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미지가 우리의 사고를 얼마나 허구적으로 조작하는가에 대하여는 딱히 거론할 필요성도 없다. 이미지의 왜곡은 논리적 사고를 저해하고, 인간 이성을 토대로 하는 사회적 역량 및 삶의 지배적 억압을 유지시키는 인간주의적 교육과도 배치된다. 그러므로 이미지를 쓰지만 체계적으로 그리고 제한적으로 쓰며 텍스트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이해하며 언어의 개념을 명료하게 하는 수업방식으로 우리 학생들이 폭넓은 혜안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림에 대한 해석이 시냅스 연결을 다양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게 하고 더 굵어져 정보 전달을 빠르게 할 수 있어도 정보의 손실이 적어지게 하려면 더 촘촘해지게 하도록 해야 하며 시냅스가 더 멀리 뻗쳐 나가게 하는 창의적 사고는 제대로 된 정보를 바탕으로 할 때에 의미가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요컨대 이미지로써 그림을 활용하기보다 텍스트를 유창하게 읽고 분석적으로 읽어내는 문자 언어를 중심에 둔 교수학습방식이 우선되어야 하고 교수학습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 본 글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예탁결제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사회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 교육청 사회문화 집필 위원, KDI 경제교육교재 집필 위원,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충남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출제위원, 전북 및 전남 교육연수원 강사, 전북대학교 교사 연수 강사, <새전북신문>, <열린 전북>, <전북교육신문>, 인문 웹진 <아홉시>, 네이버 비즈니즈 블로그 <인터비즈>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지금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교육저널인 「교육 제4의 길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미래 교육의 불편한 진실, EBS, 2021>,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을 출간했다.
다양한 상황(교실환경, 가르치는 내용 등), 다양한 학생들을 고려하여 거기에 맞는 교수학습법을 선택하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이를 위해서 교사들은 다양한 교수학습법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함께 이를 실천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여기에 집중할 수 있는 학교 환경도 필요하고(행정업무 감소 등), 교사의 전문성을 높이려는 교사 스스로의 마음가짐도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 글이 많은 교사분들께 작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네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비주얼 씽킹에서 가져와야 할 것, 지워야 할 것등을 구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비쥬얼씽킹을 미신처럼 믿는 이들에게 통쾌한 한 방이군요. 문해력의 측면에서 오히려 저해된다는 지적에 매우 공감하며, 저도 평소에 생각하던 지점과 비슷합니다. 비쥬얼씽킹에 대한 비판적 해석이므로, 오히려 새로운 비쥬얼씽킹 교수학습 방안에 대한 연구에 가깝다고 봅니다.
너무 미흡한 글을 격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 학습은 지적인 노동을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이 노동을 통해 발전해온 것처럼 학습도 마찬가지이고 교사가 기억해야 할 일이라고 봅니다. 비주얼씽킹의 목적이 학습효과를 높이자는 취지에 있다면 지금처럼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봅니다. 꾸벅
교육을 바꾼다는 말이 이상하다 생각합니다.
교육은 하거나 받는 것이지 바꾸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다른 전제가 존재하거나 말이죠. 그럼 그런 교육을 하자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기억이 전부인 것은 맞습니다. 기억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봅니다.
즉석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기억과 약간의 회상 장치를 통해서 기억하는 것 말이죠.
잊은 줄 알았는데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예로 볼 수 있겠습니다.
비주얼씽킹의 한계는 분명하고 명확합니다. 그렇다고 학습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보기엔 과하게 오판한 거라고 지적하고자 합니다. 학습이 뭔지를 분명하게 한다면 ‘배우고 익히는 것’이 학습이라고 할 수 있다면 학습에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텍스트를 읽고 쓰고 이해하는 것만 ‘학습’이라 말한다면, 방해라기보단 ‘지연’이란 단어를 쓰고 싶습니다.
더 정학하고 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시는 게 어떨런지요
자동차는 바꿀 수 있는데 왜 교육은 바꿀 수가 없을까요? 이런게 비주얼 싱킹이 괜찮다고 하는 수준인 것입니다. 애초에 자동차도 단어, 교육도 단어로 봐야 함에도 내 안에 있는 이상하고 잘못된 이미지 때문에 그걸 받아들이는 게 힘든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이미지는 “그렇게 여기는 개인”의 머리에 있는 것이지 타인에게 논리적으로 증명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꾸다는 것은 A를 A가 아니게 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교육이 그것에 해당하지 않음을 증명하려면 그래야만 하는 충분한 근거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근거는 내 이미지적 망상이 될 수가 없고, 결국 누구나 알 수 있는 수학적 조건만이 가능합니다. 텍스트는 수학적이지 않는 것들을 조건화 해둔 것이죠. 반대로 교육은 정확하게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어디서나 계속 바뀌는 것입니다. 그 바뀌는 것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 우리는 가치 판단적으로 (옳게) 바꿀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가치판단의 근거와 상황은 적어놓아야겠죠. 위처럼 잘 적어놓아야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죠.
비주얼 싱킹의 한계가 명확하고 분명하다면 애초에 “과하게 오판”한다는 말은 나올 수 조차 없습니다. 누가 멋대로 명확하다고 믿고 과하다고 믿는게 아니라면 수학적으로 명확한 상태를 멋대로 과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게 가능하려면 당연히 비주얼 싱킹 자체가 “모호”하거나 학습을 방해하는 것이 모호해야 가능합니다. 물론 그런 까닭으로 아무 쓸 데 없는 말이 되겠지요. 학습을 배우고 익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학이시습지를 말하겠죠. 그런데 그렇다면 당연히 그렇게 말씀하신 공자님의 입장에서 비주얼 싱킹은 지나가는 개소리만도 못한 것이 됩니다. 공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사관이 글을 비워놓고 헀으나 지금은 그런 좋은 풍속이 사라졌다. 또한 소인은 천명을 알지 못하므로 두려워하지 않고, 대인을 함부로 대하며, 성인의 말씀을 업신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비주얼 싱킹은 바로 그 업신여김에 속합니다. 책을 쓰거나 배우고 있는 것을 처음으로 말씀하신 “분”은 비주얼 싱킹따위나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런 하찮은 “것”이 감히 자기 멋대로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그 처음으로 말씀하고 적으신 “분”을 능멸하는 것이니 공자가 보면 무덤에서 뛰쳐나올 일입니다. 배우고 익힌다는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주얼 싱킹이 가지는 제일 큰 문제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비주얼 싱킹은 배움에 독입니다. 배우지 못하게 만듭니다. 왜? 배우기 위한 질문은 뻗어나가야 하는데 비주얼 싱킹은 오히려 안으로 굽어듭니다. 그리지 못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 의문을 확장시켜야 배움이 일어나는데, 멋대로 그려버리고 그걸 괜찮아하고 있는 것이니 정말 옛 성현들의 입장에서는 개가 짖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일 뿐입니다.
사람이 1000명이 있다면 그 중에서 선천적으로 텍스트를 더 중시하는 사람은 1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기억하는 그 대다수의 천재들은 바로 그 1명에서만 나왔습니다. 항상 이미지를 중시하는게 대다수 사람이다보니, 이러한 천재들의 말이 바로 왜곡이 되어버립니다. 천재들이 “이미지”를 중시한다고 했을 때 유감스럽게 이 이미지는 철저한 수학적 정의 아래의 이미지를 말합니다. 일반인들은 당연히 그 지식적 수준상 떠올릴 수 조차 없는 수준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예시의 대표적인 것으로 디랙을 들 수 있습니다. 디랙은 친구 학자의 여동생이 실뜨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흥분해서 실을 뜨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나머지 한가지는 이거야라고 보여주었다는 일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동생은 내가 한건 겉뜨기이고 니가 한건 속뜨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곧잘 얼마나 천재적인 학자들이 일상생활에 어둡냐는 예시로 쓰이지만 정말로 중요한 핵심은
이게 학자들이 말하는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왜? 이 학자들은 결코 이런 ‘이미지’를 자기 경험따위에서 끄집어 올 정도로 “멍청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이 이미지를 빠르게 창조하고 배열하여 만드는데 경험따위를 끄집어 오지 않으니 이 이미지는 철저한 수학적인 형상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선천적으로 텍스트를 더 중시하는 사람이지만 이미지를 중시한다는 말인데 그 앞부분이 빠지니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걸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학생들을 가르치면 먼저 텍스트를 중시하는 학생은 정말 한 학년에 하나도 보기 힘듭니다. 텍스트를 중시하면 수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이미지의 함정에 빠지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수준의 사람들에게 이미지를 활용한 걸 시키겠다는 것은 그냥 너희는 멍청하고 생각 없는 노예로 살라는 말과 사실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문제인 것은 항상 그 원인을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개소리를 진실로 받아들이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사람은 1000명에 1명도 텍스트를 먼저 받아들이는 습성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텍스트를 먼저 받아들인다는 개소리와 함께 이미지를 생각하는게 중요하다는 헛소리를 하는 게 그와 같은 것입니다.
저는 1000명에 1명이 있는 텍스트를 먼저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공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생각이 가능한 조건이 역설적으로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아야 함에도 이 자체가 안되는데 여기다 “씽킹”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니 이게 실제로 가능하다면 세상 모든 게 안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백날천날 이미지를 떠올려봐야 “무의미”하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머리가깨어 있지 않는 것입니다. 언어란 그 자체가 세상을 조건화 하여 분류시켜놓은 것이기에 다시 그 조건화되기 전의 것을 내가 떠올리는 것은 가능하지 않음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아이들은 이미지밖에 기억하지 못하기에 제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부 텍스트의 중요함을 아는 아이들은 1분만 공부하면 이미 다 공부가 끝났는데 억지로 나머지 시간을 붙잡혀 앉아 있어야만 합니다.
비주얼 싱킹같은 개소리를 하는 사람에게 솔직히 저는 한자 공부나 시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자가 실제로 비주얼 싱킹의 완벽한 예시입니다. 현실을 그대로 이미지를 떠서 개념화 시키고 분절화 시켜서 만든 문자가 바로 한자입니다. 그런데 그 “한자”로 표현한 것을 이미지로 압축하겠다는 말은 듣도보도 못한 마약을 빨아야 가능한 헛소리가 될 것입니다. 결국 이 과정은 죽었다 깨어나도 오히려 반대인 압축을 풀어내는 과정이 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오히려 매우 쓸모없고 가치 없는, 때로는 잘못된 것들이 마구 끼어들어가서 결국 그 자체도 쓰레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월광이라는 단어조차 사실은 비주얼 싱킹으로 그려낼 수가 없다는 것이 진짜 진실입니다. 특히 일반인이 생각하는 이미지는 웃기게도 사실적인데 저 단어는 애초에 사실적이지 않죠. 또한 언어를 배우고 공부를 하는 까닭은 당연히 의사소통을 위해서인데, 비주얼 싱킹은 그 의사소통 자체를 방해합니다. 1000명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할 때 똑같이 그리지 않는다는 건 뒤집어 말하면 1000명이 아는 게 다 다르고 그렇다면 당연히 이것은 “이야기할 가치”가 없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 비주얼 싱킹은 그냥 미술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괜챃다고 할 것이면 이때는 교육과 배움이 가치가 없게 됩니다. 교육도 배움도 누구나가 그렇게 여겨야할 공통점이 일단 존재해야 그 시작이라도 가능하니까요.
그래서 결국 비주얼 싱킹이라는 말은 그냥 사이비교주의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결국 그 비주얼 싱킹의 효과가 뭐냐는 말에 사람들은 개소리만 늘어놓습니다. 그걸 간단하게 “텍스트”로 정리하면, 복잡하고 싫은 공부는 하기 싫고 그냥 그림 그리고 놀면 기분이 좋다.로 요약이 되는 것이죠.
비주얼 싱킹이 개소리인것은 위에서도 밝혔지만 한자가 증명합니다. 왜 문자가 생겨나고 글자가 생겨났는지 우리가 그 까닭을 이해한다면 비주얼 싱킹만큼 개소리가 없을 것이고, 그 뛰어난 천재들이 왜 그림을 그리려고 하지
않았는지도 금방 이해를 할 것입니다. 물론 “수학”을 그려놓은 것을 보고 그들이 생각하는 “그림” 운운하면 그건 진짜 답이 없겠지요.
우연히 접한 글에 댓글을 남깁니다. 비주얼씽킹에 의존하는 경향을 통렬하게 비판하신 논지에 공감합니다. 교육의 중심이 그림그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다만, 제목만 보았을 때에는 약간 의아했습니다. ‘비주얼씽킹이 오히려 학습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적극 동감하는데, ‘비주얼씽킹이 학습을 방해한다.’는 진술은 좀 너무 나간 느낌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비주얼씽킹만을 하는 것이 문제이고 비주얼씽킹을 그림그리기로 오해하는 것이 문제이지, 비주얼씽킹 자체가 학습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다양한 학생들을 위해 다양한 교수방법이 시도될 필요가 있고, 비주얼씽킹도 그 중 하나일 수 있다고 봅니다. 마인드맵이나 시각화는 이미 효과적인 기억술이 될 수 있음은 연구를 통해 검증된 바 있으며 비주얼씽킹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주얼씽킹을 ‘그림그리기 수업’으로 오해하지 않으면서 교사의 여러 무기 중 하나로 이해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씀드리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