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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생태적 전환과 교육의 과제 – 표준화와 다양화에 대한 교육철학적 소고

#621 현병호, 교육매체 계간《민들레》발행인 2021.03.31

다양화가 표준화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는 표준화와 함께 시작되었다. 언어의 표준화, 기술의 표준화, 부품의 표준화, 작업의 표준화가 근대문명을 일구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의 표준화에 발맞춰 교육의 표준화가 이루어진 것도 근대의 특징이다. 교재와 교육과정을 표준화하고 교사를 표준화하고 학교 건물을 표준화했다. 아이들은 표준말을 배워야 했고, 많은 아이들이 표준신장에 자신의 키를 맞춰 보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표준화의 본질은 대체가능성이다. 기계도 기술자도 심지어 교사도 언제든 대체가능한 존재가 되었다. 표준화는 물자와 인구의 유동성을 높임으로써 지구촌을 하나의 세계로 만들었다. 기후 위기와 코로나 팬데믹은 표준화에 기초한 근대문명의 필연적 결과인 셈이다.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었음에도 위기에 맞닥뜨려서야 대책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하는 것이 현재의 인류 수준이다. 하지만 이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전근대 사회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시행착오를 바로잡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표준화의 부작용이 적지 않지만, 표준화를 거부하는 것이 대안은 아니다. 표준화를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그걸 딛고 나아가야 한다. 표준말은 부족언어인 사투리를 넘어 서로 다른 부족들 간의 협력을 가능하게 해준다. 표준말을 포기하고 부족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인류의 대멸종이 일어나지 않는 한 70억 인구가 채집경제로 돌아갈 수도 없고, 산업사회를 뒤로 하고 농경사회로 되돌아갈 수도 없다. 역사는 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상호작용의 총량이 늘어나는 방향이다. 이는 우주의 보편 법칙인 엔트로피 법칙과도 통한다. 평형상태에 도달하기까지 상호작용이 부단히 일어날 수밖에 없다.

 

표준화가 진보의 상징이던 시대가 저물고 이제는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 곧 진보인 것처럼 인식되는 시대다.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성이 곧 공동선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문명사회에서 식인문화가 용인되지 않듯이, 개고기를 먹는 것 또한 문명사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식인 못지않은 엽기적인 행위로 비칠 것이다. 문화상대주의 운운하며 “남이야 뭘 먹든” 그러면 문명인 대접을 기대할 수는 없다.

 

프랜차이즈는 요식업을 표준화한 것이다. 맥도널드 매장은 세계 어디서나 비슷한 인테리어에 비슷한 메뉴를 갖추고 있다. 맛도 비슷하다. 한국의 맥도날드 매장에서는 불고기버거를 개발해 내놓기도 하지만, 그것은 표준화에 기반한 다양화 또는 현지화다. 한편 중국 음식점은 전 세계에 퍼져 있지만 프랜차이즈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중국 요리도 대체로 비슷하지만, 주방장의 솜씨에 따라 독특한 맛을 자랑하는 집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햄버거든 탕수육이든 기본을 갖춘 다음 맛의 변화를 시도한다. 눅눅한 탕수육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셰프 백종원은 우리나라 요식업 제도가 너무 느슨하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경우 일 년씩 기다려야 허가가 나는데 비해 우리는 기본요건을 갖추고 신고만 하면 누구든 식당을 열 수 있다.1 그러다 보니 하루빨리 돈을 벌고 싶은 욕심에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장사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밥도 제대로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 한식당을 열고 백반집을 차린다. 맛있는 쌀을 고르고, 쌀의 건조도에 따라 불리는 시간과 물의 양을 조절하고, 불의 세기를 가늠하는 것은 상당한 기술을 요하는 일이다. 밥맛이 좋은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

 

수확해서 갓 도정한 쌀로 지은 밥이 가장 맛있다. 고구마는 수확한 뒤 그늘에서 며칠 숙성시키면 맛이 더 좋아진다. 바나나가 가장 맛있게 익었을 때를 원숭이들은 귀신같이 안다고 한다. 간혹 이상한 입맛을 가진 사람이 있지만, 십중팔구가 인정하는 맛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입맛은 저마다 다른 거라며 포스트모던 식으로 접근하면 곤란하다. 다양성도 좋지만 먼저 표준화를 한 다음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기본을 다지고 응용을 시도하는 것이 일의 순서다. 표준을 부정하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은 기초도 놓지 않고 기둥을 세우는 격이다. 바닥이 균일하지 않으면 얼마 안 가 집이 무너진다.

 

다양성은 애써 추구하지 않아도 자연에 원래 있는 것이다. 되도록 자연을 건드리지 말고 그대로 두자는 것이 자연주의, 생태주의다. 하지만 농사혁명 이후 인류의 문명은 자연을 통제하고 조절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우량종자를 표준화하고 농사기술을 표준화함으로써 식량문제를 해결해왔다. 산업혁명 이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기아의 공포에 시달리다 20세기 초 화학비료가 발명되면서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오늘날 자연농법. 생태적 농법으로 70억 인구를 먹여 살리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화학농법의 단점을 보완해가면서 유기농법을 병행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일 것이다. 모든 ‘주의’의 함정을 경계할 일이다.

 

 

표준과 평균에 대한 오해

 

<표준전과>로 표준말을 익히면서 표준화 시험을 치러야 했던 베이비붐 세대는 아파트라는 표준화된 주택에 살면서 일생 동안 표준에 부합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심초사해왔다. 그러다 표준화된 인생이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는 멀쩡한 아파트를 리모델링하며 자신만의 집을 꾸미기도 하지만 그런다고 삶의 질이 달라지기는 힘들다. 게 중에는 전원으로 삶터를 옮겨보지만 표준화에 길든 몸이 전원생활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도시로 돌아오는 이들이 태반이다.

 

표준은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로 작용한다. 표준말을 배워야 하는 사람이나 키가 표준신장에 미달하는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다. 표준화에 기반한 근대문명을 비판하는 『평균의 종말』은 억지스러운 평균화로 인한 다양한 실패 사례를 소개하면서 개개인성과 다양성의 가치를 역설한다. 전투기 개발 초기에 평균 체형에 맞춘 조종석 설계로 인해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대응이 늦어 사고가 잦았다고 한다. 모든 면에서 평균 체형을 갖춘 사람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운전석을 운전자 개개인의 체형에 맞출 수 있게 설계하자 사고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양한 체형을 배려한 설계는 평균치에 근거한 표준화를 기반으로 그 위에 개별성을 가미한 것이지 표준화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평균의 종말』에서 저자는 표준과 평균의 의미를 혼동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평균은 표준화에 필요한 데이터로서 가치가 있다.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상하체 비율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키 큰 사람은 보편적으로 팔다리가 길다. 대부분의 운전석은 보편성을 기반으로 각자의 체형에 따라 의자를 앞뒤로 밀거나 등받이 각도를 조절할 수 있게 설계된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도량형 통일부터 추진한 것은 일찍이 표준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이다. 표준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탈근대 시대에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상호작용이 활발해질수록 표준의 중요성은 커지기 마련이다. 미터법이 도량형의 국제 표준으로 자리 잡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도량형 단위를 달리 계산하는 바람에 대형사고가 일어나곤 한다.2 1999년 미국의 화성탐사선이 폭발한 것은 탐사선 제작사가 파운드 단위로 계산한 추진력을 나사(NASA)에서 미터 단위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영어가 국제적 공용어가 되어가는 것도 표준화의 커다란 흐름 속에 있다. 모든 분야에서 인류의 상호작용은 더 활발해지고 세계화는 더 진척될 것이다. 언어가 표준화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지역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마을공동체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글로컬’이라는 말처럼 세계화와 지역화, 표준화와 다양화는 각각 다른 층위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현상이다. 하나의 층위만 보면 세계화 또는 지역화가 부각되지만, 전체 차원에서 보면 보편성과 개별성이 함께 살아나고 있다.

 

표준화와 다양화, 보편성과 개별성은 서로를 부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개별적 존재들이 공유하는 토대가 보편성이다. 70억 인류가 공유하는 토대가 있고, 인종과 민족이 공유하는 토대가 있다. 다양한 층위의 보편성이 존재한다. 개별성을 주목할 때 그들이 공유하는 보편성의 토대를 놓쳐서는 안 된다. 표준화와 개별화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토대가 기둥을 받치듯 표준은 개별성을 부각시킨다. 표준화 교육이 개별화 교육을 가로막는 것처럼 인식되어온 것은 아이들을 인적자원으로 간주한 근대 학교교육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표준화 교육과 개별화 교육

 

아이들의 개별성을 배려하지 않는 표준화 교육이 많은 부작용을 낳으면서 근대 학교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20세기 초부터 꾸준히 이어져왔다. 대체가능한 인적자원을 대량생산 방식으로 교육하던 시스템은 지난 한 세기 동안 꾸준히 변화해왔다. 오늘날 대부분의 선진국은 아이들의 보편적인 발달단계를 감안하여 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 개별적 편차에 대한 배려를 교사의 역량에 맡긴다. 플립러닝(flipped learning3)이나 ‘배움의 공동체’는 표준화 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고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고유성을 살리고자 하는 시도다.

 

오늘날 진보주의 교육의 비판 대상이 되고 있는 표준화 시험은 사실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정책가들이 20세기 중반에 도입한 것이다. 하지만 객관식 시험이 학생의 역량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기에 부적절하고 평등의 가치를 담보하기도 힘들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의 대입제도는 학생부 종합전형 방식으로 바뀌었다.(SAT 시험성적은 대학에서의 수학능력을 검증하는 자료로만 쓰인다.) 한국사회에서 수능 비중이 줄어든 것도 비슷한 이유다. 수시전형과 논술은 표준화 시험을 통한 입시로 사장되는 아이들의 가능성을 발굴하기 위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진보주의 교육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교육, 이른바 학습자중심의 맞춤식 교육을 지향한다. 하지만 이런 개별화 교육은 방법론이어야 하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시민을 기르는 교육은 보편성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개별성을 배려해야 한다. 반대로 개인의 특성을 배려하고 살리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되고 그것을 보편적인 교육과정으로 달성하려 드는 것은 마차를 말 앞에 매다는 격이다. 오늘날 혁신교육이 자칫 그런 방향으로 흐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표준화 교육이 획일화 교육은 아니다. 표준화를 넘어 개개인성을 살리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공교육은 보편교육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개개인성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들을 함께 교육하는 통합교육은 실제로는 아이들의 개별성을 배려하는 개별화 교육이다. 평준화 교육과 영재교육도 병행할 수 있다. 수월성 교육에 대한 진보 진영의 비판은 계급재생산의 기제가 되는 데 대한 비판이어야지 영재교육 자체를 향해서는 곤란하다. 사회의 진보를 위해서는 건강한 시민 못지않게 건강한 엘리트들을 길러낼 필요가 있다.

 

다양성을 기치로 내건 대안교육운동은 자칫 또 다른 획일화 교육으로 흐를 위험을 안고 있다. 가치지향적인 대안학교들의 경우 아이들에게 특정 가치를 주입하는 경향도 없지 않다. 영화 매트릭스에 빗대어 빨간약만 먹인다는 비판이 아이들 속에서 나온 것은 주목할 점이다. 유기농 음식만 먹고 자란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치킨과 콜라 맛에 빠지기 쉬운 것처럼 부모나 교사의 신념을 강요하는 교육은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방해하기 십상이다.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홈스쿨링의 경우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건강도 위협할 수 있다.

 

개인 맞춤형 학습을 추구하는 홈스쿨링이 아이들의 성취도를 높이지만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바람직한 대안일지에 대해서는 좀 더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팀플레이 역량을 기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집단이나 한 사회의 역량은 개개인의 역량보다 팀플레이 역량이 결정한다. 개인의 성취도를 우선시하고, 상대평가제의 내신등급으로 ‘만인에 대한 만인의’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사회 전체의 역량을 떨어트린다. ‘배움의 공동체’에서 시도하는 모둠학습은 팀플레이 역량을 기르는 데 적합한 학습방식이다.

 

강의식 수업이나 표준화 교육의 단점이 많지만 개인 맞춤형 교육이 곧 대안은 아니다. 공교육 체제 안에서 시도하기에는 너무 많은 에너지가 들고,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도 그다지 권할 만한 방식은 아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맞는 학교를 지향하더라도 강의식 수업이나 표준화 교육의 장점을 폐기할 필요는 없다. 강의식 수업과 모둠 학습 또는 개별 학습을 적절히 조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교과 학습과 동아리 활동의 적절한 조화도 필요하다. ‘배움’의 공동체에도 교육은 필요하다.

 

개성을 살리는 교육, 학습자중심의 교육이 강조되듯이, 탈근대 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다양성을 살리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다품종 소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대량 생산 방식의 근대적 산업 시스템도 변하고 있다. 3D 프린터로 시제품을 만드는 일도 아주 쉬워졌다. 산업혁명이 근대학교 시스템을 만들어냈듯이 정보혁명과 기후 위기는 새로운 교육 시스템을 만들어낼 것이다. 학교 시스템에 작용하는 관성의 힘이 크다 해도 경제의 변화는 교육의 변화를 추동할 수밖에 없다. 교육은 사회의 종속변수이기 때문이다.

 

 

심리는 물리를 이길 수 없다

 

자연생태계는 다양성을 생명으로 한다. 표준화는 생태계의 다양성을 파괴하므로 생태주의는 표준화를 비판하고 다양성 예찬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생태적 전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간다. 인간 역시 지구생태계의 일부일 따름이며 생태계를 복원함으로써 인류의 지속가능성 또한 높아질 거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사회가 자연생태계에 맞춰 삶의 패턴을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인류가 타고 있는 지구호는 이미 정원 초과 상태에 여기저기서 고장 경보가 울리고 있지만 지구호를 버리고 다른 배로 바꿔 탈 수도 없고, 어떤 승객을 임의로 하차시킬 수도 없다. 함께 타고 가면서 배를 수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항로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인문학과 승객들 간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사회과학, 배를 수리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교육의 역할이다. 오늘날 인류가 맞닥뜨린 위기는 생태적 각성이나 공동체 의식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1989년에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 동식물종 거래에 관한 국제 협약’이 발효되었음에도 상아는 여전히 주요 밀거래 대상이었고 밀렵도 계속되었다. 아프리카의 국가들은 군벌들이 지배하는 부족연합체에 가까워서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곳이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코끼리 사냥과 상아 거래를 엄격하게 금지한 케냐와 탄자니아에서는 코끼리 개체 수가 더 줄어든 반면, 상아 거래는 금지했지만 코끼리 사냥은 허용한 짐바브웨와 남아공에서는 오히려 코끼리 수가 급증했다. 소유지 내에서 일정 기간에 정해진 개체 수만 사냥을 허용한다는 단서를 달자 각 지역 군벌들이 스스로 소유지 내의 코끼리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한 때문이다.

 

케이크 하나를 두 아이에게 나눠줘야 할 때 가장 효율적이면서 공평한 방법은 한 아이에게 케이크를 자르게 하고, 다른 아이에게는 우선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그러면 자르는 아이는 최대한 공평하게 나누어야 자기 몫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우선선택권을 갖는 아이 역시 만족할 수 있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최대한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의 원리다. 공공자원이 개인들의 자율에 맡겨질 경우 일어나는 공유지의 비극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 이 이론은 2007년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코끼리를 보호하는 일은 동물에 대한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과학적 지식과 정치적 역량이 요구되는 일이다. 가치지향적인 시민단체 마인드로는 한계가 있다. 인간에 대한 냉철한 이해와 사회적 역학 관계에 대한 지식, 전략적 마인드가 필요하다. 형제들 사이에서 케이크를 나누는 문제라면 형제애로 풀 수도 있겠지만,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사회문제는 개인의 선한 마음이나 공동체성에 기대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문제는 심리학이 아니라 사회과학과 물리학이 작동하는 영역이다.

 

교육은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는 아이들이 그런 실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일이기도 하다.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개인의 성취나 자립 능력을 넘어 사회가 나아가는 방향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역할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다. 각각의 전문 분야 일도 있지만, 사회의 메커니즘을 설계하는 일도 누군가는 맡아야 한다. 인류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시행할 수 있으려면 인문학적 통찰력과 사회과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이념이나 성찰, 진정성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의 원인을 찾는 데는 성찰이 도움이 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면 물리적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실력이 필요하다. 생태주의 철학에 기초한 대안교육 현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난 20여 년 동안 성찰을 하고 또 했지만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은 물리적 환경을 바꾸지 못한 때문이다. 재정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천하고,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교사의 실력을 길러야 한다. 그럴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을 하나하나 만들어가지 않으면 백날의 성찰도 공염불이다.

 

심리는 물리를 이길 수 없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수도 있지만 그만한 물리적 시간이 요구된다. 현재의 지구적 차원의 기후 위기는 시간을 다투는 일이다. 1만 년 동안 물방울을 떨어트려 바위를 뚫기 전에 세상이 망할 가능성이 더 높다. 문명의 생태적 전환을 꿈꾼다면 낭만적인 접근이 아니라 물리적 해법을 찾아 과학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워터제트가 고압의 물을 분사해 돌을 자르듯이 현실적인 시간 안에 가능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앞선 세대가 저지른 일을 후세대가 해결하면서 문명이 지속된다. 인류는 석기시대부터 후손의 도시락을 까먹으면서 연명해온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갈등과 위기를 해결해온 과정이다.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새로운 문제가 등장한다. 문제를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린 생태적 위기는 무위자연이 아니라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또한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 교육을 통해 후세대가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도와야 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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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음식점 개업을 위해서는 위생교육을 받고, 보건증과 사업자등록증, 영업신고증만 발급받으면 된다.
  2. 199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일어난 대한항공 화물기 추락 사고도 미국의 항공체계에 따라 피트 단위를 쓰는 한국 조종사가 미터법을 쓰는 중국 공항 관제탑의 지시를 피트 단위로 오인해 저공비행을 하다 일어난 사고였다.
  3. ‘거꾸로 교실’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집에서 과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미리 내준 학습자료로 집에서 공부를 하고 학교에 와서 실습과 과제를 하는 방식이다. 교실에서 학생 중심의 수업이 가능한 장점이 있는 반면 가정형편에 따른 학습 격차가 커지는 단점이 있다.
교육매체 계간《민들레》발행인 현병호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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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1. 김태균 수정 삭제

    참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가고 생각과 고민을 하게 만드는 글이라 저에겐 많은 의미를 준 글 같습니다. 다만 현병호 선생님께서 표현하신 “교육이 사회의 종속변수”라는 것은 교육을 통해 사회를 바꿀 수 있기를 소망하는 저에게는 다소 힘들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교육이 사회 속에서 이뤄지기는 하지만, 교육이 사회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현병호 선생님도 ‘교육’을 강조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2. 배근우 수정 삭제

    다양화, 다양성을 쟁점으로 사회의 갈등이 첨예하다. 한 편에서는 다양성을 향한 움직임을 보며 ‘지나치게 유난 떤다’ 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다른 한 편에서는 다양성을 목소리 높여 부르짖는다. 최근 들어서는 전자 쪽에서도 후자 쪽의 문제점을 성토하며 목소리를 서서히 높여가는 분위기다. 엔트로피의 총량은 증가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혹자의 말처럼 교육은 사회의 종속변수다. 사회는 교육과정 영역에서 교육목표와 교육내용을 결정하는 세 요소 중 하나로 당당하게 자리하며, 사회의 필요를 반영한 교육을 통해 아이들은 사회의 규범과 가치를 내면화하고 사회의 유지, 종속과 발전을 지향하는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자란다. 그런 교육이기에, 전술한 사회 풍토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본고에서 저자는 교육계에서 나타난 다양화를 지향하는 움직임인 대안교육, 진보주의 교육을 비판한다. 방법론이어야 할 개별화 교육이 그 목표로 자리하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 말이다. 지당한 말이다. 사회 전반에서 ‘권위’는 구시대의 잔재 취급을 받고 있으며, 특히 교육 영역에서 권위의 복권을 주장하는 이들은 소위 ‘꼰대’ 취급을 받으며 거센 비난을 면치 못하는 것이 현황이다. 권위를 사장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사회가 질서를 잃지 않고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규범과 가치가 존속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권위적인 교육이다. 복종을 종용하는 권위주의적인 교육이 아닌, 학생에게 허용되는 영역을 명확하게 제시해주고 그 영역 안에서의 확실한 자유를 보장해주는 권위적인 교육 말이다. 교육은 ‘인간 행동의 계획적인 변화’로 가장 간명하게 정의된다. 일정 수준의 권위와 위계를 동반할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학생의 자기주도적인 삶을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내면화를 통한 초자아 발달이 수반되어야 한다. 권위를 동반하는 공교육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시각 역시 획일화의 산물이다. 배타적인 시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이는 교육이 보편, 평균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인간들을 양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다. “보편적인 발달단계를 감안하여 교육과정을 운영하면서 개별적 편차에 대한 배려”가 따라야만 한다. 교사의 역할이 지대하다. 교과 담당 교사, 담임교사는 전문상담교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상호 조력하며 학생의 지적, 정의적 발달단계를 모니터링해야 한다. 부진한 아이들에게는 선별적, 우선적인 개입으로 발달을 촉진하며, 교육 전반에서 실질적 의미에서의 형평성을 구현해야 한다.
    본고는 읽는 내내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 수려한 글이었지만, 본고를 읽으며 감히 아쉬운 마음이 든 부분도 있다. 첫째는 교육의 표준화와 다양화를 다루는 글에서 요식업 시장을 예시로 든 부분이다. 요식업 시장에서의 성공은 전적으로 소비자들의 선호, 수요를 척도로 한다. 자칫 잘못 읽힌다면, 교육 역시도 시장에서의 수요에 가장 기민해야 한다고, ‘사회에서의 쓸모’라는 외재적 목적에 치중해야 한다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비유라고 생각한다. 둘째는, ‘심리는 물리를 이길 수 없다’는 장 전반의 내용이다. 저자는 심리학을 가치지향적이고 주관적인, 실질적이지 못한 학문 수준으로 해석했다. 백 번 그르다. 사회가 진보하는 데 심리학은 빠질 수 없다. 물리에만 치중한 근대 산업사회가 낳았던 수많은 병자들이 그 증거다. 심리는 우리가 탄 지구호를 수리하는 학문이다. 연료를 얼마나 든든하게 싣고 항로를 얼마나 잘 개척을 했든, 지구호 자체가 무너져버리면 항해는 말짱 꽝이다. 구성원들의 심리를 주의 깊게 살피고, 적절한 처치를 제공해 그들이 최적의 효율로, 말끔한 마음으로 과업을 수행하도록 돕는 심리가 없다면 지구호는 항로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교육계에서도 최근 사회성 – 감성 학습에 주목하는 움직임이 커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겠다.

    표준화라는 반석 위에서 다양화라는 집은 튼튼하게 설 수 있다. 허우대만 멀쩡한 가치를 좇는 일이 어쩌면 사회의 주춧돌을 부수고, 대들보를 갉아먹고 있지는 않은지. 이제는 성찰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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