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한 자아, 따뜻한 사회, 춤추는 민주주의
지난 8일과 9일 나는 한바탕 춤바람에 빠졌다. 평생 춤춘 시간보다 이날 더 오래 춤을 췄다. 그것도 대형 공연장의 너른 무대 위에서였다. 막대기에 가까운 몸치가 전문 춤꾼처럼 무대에 올라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자유롭게 춤추며 해방감은 물론 기쁨과 평화를 온몸으로 느꼈다. 나 혼자만 그런 게 아니다. 100명 남짓한 일반시민들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무용과 조기숙 교수가 예술총감독을 맡아 ‘춤 몸 그리고 치유’라는 주제 아래 진행된 서울시민 몸 축제 자리에서였다.
서울시민 몸 축제는 ‘몸학’(somatics)의 이론과 실천에 앞장서 온 분들의 한바탕 축제였다. 여기에 참여한 경험으로 그동안 용어만 접했던 몸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조금 맛볼 수 있었다. 몸의 현상이 복잡 미묘한 만큼 몸학에도 많은 갈래가 있었다. 몸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진 생명의 보금자리로 본래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몸의 신비에 매혹된 이들은 몸을 소우주에 비유해왔을 만큼 몸은 유기적 복잡계다.
몸은 인간이 만지고 느끼며 움직이고 다치는 직접적 대상이기에 어디서나 몸을 중심으로 직접적인 수많은 어휘와 비유가 생성돼왔다. 그 결과 역사적으로는 몸학이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을 훨씬 선행하는 학문이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천 년 전에 이미 요가 등 몸 수련법의 체계화가 이뤄진 것이 그 증거다. 서양의학은 건강회복과 증진이라는 제한된 목적을 가진 몸학, 그것도 몸의 과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전문의학이 눈부시게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럴수록, 질병 치유와 무관한 탓에 일상적 영역으로 남겨진 몸의 이해와 감수성은 오히려 약화돼 왔다는 점이다. 현대의 몸학은 전문화된 의학이나 추상적 소우주 담론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몸에 대한 직접적 이해와 감수성을 되살리려는 종합적인 시도가 아닌가 싶다.
현대의 몸학은 몸의 이해와 자각, 감수성 회복이 주체성의 출발이라는 대명제 위에 서있다. 몸은 죽거나 노예가 되기로 마음먹지 않은 이상 마음대로 양도하거나 처분할 수 없다. 다 잃어도 생명이 있는 이상 몸 하나는 남는다. 모든 이의 최후의 재산인 셈이다. 그 몸에는 주인의 모든 속성이 보금자리를 튼다. 영혼도 정신도 마음도 감각도 의지도 몸에 깃든다. 이런 총체적 의미의 몸이 곧 개인으로서 ‘나’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이해하고 몸의 감수성을 깨우고 높이는 일은 나를 온몸으로 아는 일이자 내가 온몸으로 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가 결국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다양한 개인들의 조화로운 상생과 연대를 의미한다고 할 때 몸 주체성의 각성과 존중은 모든 층위의 주체성의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몸학은 몸의 세세한 근육과 관절을 기능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물론 그것의 작은 움직임에도 깨어있으라 가르친다. 그것이 얼마나 사회적 산물인지도 자각하라고 가르친다. 유심히 살펴보면 몸짓도 성별이나 계급에 따라 몹시 다르다. 손짓도 발짓도 자세도 다 다르다. 몸의 작은 움직임조차 규범과 규칙, 권력에서 자유로운 영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보다 미시적으로는 몸의 작은 움직임에서도 습관이나 성격을 읽어낼 수 있다. 몸의 작은 움직임이 습관이 되고 그것이 다시 성격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몸의 눈을 뜨고 몸이 깨어있다는 것은 몸의 구성과 움직임, 그 감각과 기능에 눈뜨는 것은 물론이고 몸에 각인된 사회적 정체성과 그 배후에 똬리를 튼 규범과 규칙, 권력에도 눈뜬다는 이중의 각성을 뜻한다.
몸의 가장 직접적 표현이 걸음걸이라면 춤은 그것에 호흡과 리듬을 붙인 것이다. 그래서 춤은 몸을 가진 누구나 출 수 있다. 이른바 병신춤을 만들어낸 공옥진 선생이 살아생전에 입버릇처럼 그러셨다. 오장육부가 있고 희로애락을 느끼는 누구나 춤출 수 있다고. 장애가 있다고 다르지 않다고. 노인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혼자 추는 독무가 그때그때의 자아가 느끼는 생명력과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표현한다면 2인무 이상 공동체가 함께 추는 군무는 공동체의 모습을 빼닮는다. 예로부터 2인 이상 공동체는 군무로 자신을 표현해왔다. 군무에선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협동이 기본이다. 춤추는 공동체에선 분리와 단절, 배제가 없다. 이렇게 볼 때 춤추는 공동체는 자율적인 인간들의 신명나는 축제 상태로서의 민주주의를 가장 잘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누구도 춤추며 총질하진 않는다. 싸우고 욕설하며 함께 춤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춤은 몸으로 추는 것이라 인위적 권위와 서열의 가면을 벗긴다. 춤은 순수한 기쁨이고 몰입이다. 그렇지만 만날 춤만 추고 살수는 없다. 춤추는 사이사이에도 몸 주체성을 자각하고 몸에 깨어있는 것이 현실적인 최대치에 가깝다. 이렇게 깨어있는 사람은 자신의 몸은 물론 타인의 몸에도 깨어있다. 모든 깨어있음은 내게서 비롯되어 타인, 특히 이웃에게 향한다. 깨어있는 사람이 공동체와 함께 공동체 안에서 춤출 때 깨어있는 시민이 된다. 깨어있는 시민은 서로에게 매혹된다. 서로에게 매혹되어 서로를 환대하는 깨어있는 시민들만이 춤추는 민주주의를 만들어낼 수 있다.
누누이 강조하지만 몸학적 몸의 이해는 당당한 자아, 따뜻한 사회, 춤추는 민주주의의 토대다. 돌이켜보면 나는 관학(정부론)에서 민학(인권론)을 거쳐 몸학으로 점점 미시적인 접근을 해온 편이다. 하지만 몸학에서 민학, 관학의 순으로 접근하는 것이 더 순리일 수 있다. 자율과 자치의 단위를 점차 확대해나가는 방식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더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축제 같은 민주주의를 꿈꾸는 분들을 몸학과 춤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지만 현대의 몸학은 아직까지 초중고 공식 교육과정에 편입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변방과 재야의 학문이다. 하지만 머지않아 공식 교육과정의 일부로 편입될 날이 올 것이다. 몸학은 체육, 무용, 연극, 보건 교육 등 광범위한 공식 교육과정의 공통의 토대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에 필요한 주체성 각성의 미시적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알파고의 승리로 충격을 받은 인류가 과연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양극화를 극복하고 보다 평화롭고 평등한 자유주체의 공동체로 진화하며 춤추는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는 보통사람들이 집단지성과 창조성을 얼마나 발휘할지에 달려있다. 그 관건이 주체성의 각성이라고 할 때 몸 주체성의 회복을 돕는 몸학과 위축된 자아의 해방과 치유를 돕는 표현과 창조로서의 춤이 하루바삐 공식 교육과정으로 편입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서울법대와 펜실베니아대 로스쿨에서 수학한 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교수로 재직하며 노동법, 사회보장법, 공정거래법, 인권법을 가르쳤다.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과 사무총장을 역임했으며 5.18 시민상을 수상했다. '행복한 교육혁명'을 가치로 2010년 6월 2일 서울교육감으로 선출돼 공교육의 표준 교체와 교육행정 혁신을 시도했다. 대표적 교육정책으로는 체벌금지와 학생인권, 문/예/체 교육과 혁신학교가 꼽힌다. 인사, 사학, 시설, 구매 등 모든 교육행정에서 시민참여와 투명성을 북돋으며 사회적 책임을 불어넣기 위해 애썼다. 701일이라는 짧은 교육감 재임기간에도 불구하고 공교육 2.0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를 놓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2014년 4월부터 펙트TV에서 '곽노현의 나비프로젝트, 훨훨 날아봐'로 진보적 관점의 교육전문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는 <징검다리 교육감> 등이 있다. 본래 강자를 법의 지배 아래, 약자를 법의 보호 아래 두는 법치주의의 전사였으나 이제는 교육계 사람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