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학교를 망치는가?
최근 미국의 학교 교육 정책을 이야기할 때 흔히 NCLB(No Child Left Behind)니 R2T(Race To The Top)니 하는 이름들을 거론한다. 이들 정책은 각각 부시(Bush) 정부와 오바마(Obama) 정부의 간판 정책이라 할 수 있으니 미국 학교 교육을 얘기할 때 으레 주목할 만하다. 두 정책은 이념적으로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정부가 내건 것이지만 매우 비슷한 데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시험을 중요한 수단으로 삼은 점이다. 학생들의 교육 성취를 시험 성적으로 가늠하고, 그 성적에 근거해서 지방 정부나 학교 교사 등의 업적을 평가하는 방안이 정책의 골간을 이룬다.
미국 정부가 이런 시험 위주 정책을 채택한 것은 물론 학교 교육을 발전시키려는 생각에서이다. 미국 학생들이 국제적인 학업 경쟁에서 처지고 있다고 진단하고(이런 사태가 계속된다면 세계 최고라는 미국의 국가 위상도 위협 받게 될 것이라는 위기의식에서) 미국 학교의 국제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채택한 정책인 것이다. 이런 정책에 최근 작지 않은 파문이 일고 있다. 적지 않은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정책에 반기를 들고 있다.
시험 위주 사회에서 살면서 학교와 시험을 묶어 생각하는 게 당연한 우리에게는 미국의 학교정책에서 특별히 문제될 게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적지 않은 미국 학부모들과 교사들은 심각하게 반발하고 있다. 시험이 학교 교육을 망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시험을 거부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Change the Stakes’나 ‘Teachers Talk Testing’과 같은 웹사이트를 방문해보면 분위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학부모와 교사들은 시험 성적으로 학교 교육 성과를 가늠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시험을 통한 학교 교육 개선 시도는 국가가 아동 학대를 공식적으로 재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비난한다. 이런 비판과 저항에 대하여 미국 교육부 장관인 Arne Duncan은 이렇게 반박한다. “교외 주택가에 살고 있는 백인 엄마들이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제 [시험 결과가 나오자] 새삼스레 자기 자녀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똑똑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 동네 학교가 생각했던 것처럼 좋은 학교가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어서 [시험을 반대하는 것이다].” 자녀들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학군의 명성과 함께 집값이 떨어지게 되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시험 성적이나 그 성적에 근거한 학교 평가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장관과 일부 학부모와 교사들은 서로 학교를 망치려 들고 있다고 맞서 비난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나라에서 교육(학교)에 대한 불만은 미국보다 격하다. 중요한 사회 문제를 거론할 때 교육문제가 빠지지 않는다. 흔히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이라고 얘기하지만, 학교 문제 역시 이에 못지않게 중대하다고 지적한다. 대통령 선거 때마다 교육 공약이 중요한 관심사가 되는 것을 보아도 학교 교육에 대한 불만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만은 일차적으로 교육 정책에 대해 불거진다. 정부가 학교 제도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해서 문제들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적절한 정책으로 문제를 예방하거나 해결하지 못해서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지적은 금세 납득할 수 있다. 학교가 문제라면 학교를 움직이는 정책이 문제일 것이고, 결국 그 정책을 관장하는 정부가 문제라고 쉽게 인과 지울 수 있다. 구체적으로 ‘원흉’을 지적할 때는 장관이나 관료를 지목한다. ‘정책실명제’를 하여 학교 망치기를 막자는 것과 같은 주장이 나오는 것은 그런 원흉에 대한 전제가 있는 것이다.
학교 문제의 원흉을 손가락질하는 일은 종종 정부 범위를 넘어서도 일어난다. 정부가 잘못을 저지르는 데 한 몫을 거들었거나, 아니면 정부 실책을 막았어야 할 위치에 있었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손가락질하게 된다. 이 대목에서는 교육학자나 교사들이 개인 또는 집단적으로 종종 도마 위에 오른다. 교육학자들에게는 ‘이론’을 잘못 세워 정책을 그르쳤거나 이론에 비추어 합당하지 않은 정책을 방조했다는 혐의를 두고, 교사들에게는 개인의 편익이나 기득권을 위해 학교의 공익에 눈감거나 소홀히 했다는 혐의를 두곤 한다. 특히 정부의 정책 과정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관변’이라는 수식을 붙이며 비난한다.
학교 문제는 좀체 해결되지 않는다.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로 문제 해결이 더디거나 어렵다. 정부가 그렇게 많은 노력과 예산을 들이고, 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잘잘못을 따지고 나름의 대안들을 내놓고 기여하건만 학교 교육이 나아졌다는 평가를 들어보기는 어렵다. 정부 관료나 교육학자, 아니면 교사들이 그렇게 끈덕지게 학교를 망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세력이 배경에 있는가?
문제는 ‘문제’에 있을지 모른다. 말장난인 듯하지만, 진지하게 따져보면 그렇다. 학교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고 해결책을 강구하지만 진전 없이 사태가 헛도는 듯한 것은, ‘문제’를 문제로 여겨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 점이 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 자체에도 결함이 있기 마련이겠지만, 그에 앞서, 정책으로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전제되는 ‘문제’ 자체가 잘못 규정된 것일 수 있다는 뜻이다. 학교 문제를 해결해 가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그 ‘문제’라는 것을 면밀하게 성찰해보아야 할 것이다.
정책 행위는 문제를 전제로 이루어진다. 정책 결정자들도 그렇고, 교육정책에 관한 교과서들도 정책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의문의 여지가 없는 듯 말한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어디서 오는가?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겠지만, 정책 전문가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문제는 정부가 ‘문제’로 접수했을 때 비로소 문제가 된다고 여긴다. 개인들의 의견이 모아져서 여론을 만들고, 그 여론이 정부로 하여금 문제를 인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요컨대 정책으로 해결하여야 할 학교 문제라는 것은 국민 대다수가 문제로 여기는 사안일 것이고, 그래서 정부가 해결에 발 벗고 나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문제’에는 문제가 없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정책(또는, 그 정책에 연루된 인사들)에 문제가 있는 셈이 된다.
그렇지만 정부가 받아 안게 되는 문제가 어떻게 규정되는지 보자. 우리 사회에서 그 사태의 심각함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이는 ‘사교육’ 문제를 예로 보자. 사실 이 문제는 일제식민지기부터 오늘날까지 지속되어 왔고 아직도 우리 사회는 그 해결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를테면 이명박 정부에서는 사교육 문제를 “사교육비 절반”이라는 슬로건에 담아 규정하였다. 국민들이 과중한 사교육비 부담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선거 캠페인 중에 ‘절반’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급기야 그 슬로건은 국정과제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렇게 ‘사교육 문제’는 정부에 안겨졌고(재고 여지가 없는 ‘문제’로 규정되었고), 남게 되는 것은 과연 정부가(교육정책이) 그 난제를 해결하는가의 사안이다. 알다시피 정책에도 불구하고 사교육비 부담은 여전했고, 그래서 정책은 실패로 규정되었다. 이런 실책에 가담했던 인사들은 언젠가 교육(학교)을 망쳤다고 손가락질 당할지 모른다.
이런 사태에서 ‘사교육비 절반’이라는 과제(‘문제’) 설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한 번 되돌아 생각해보자. 교육학자나 전문가들이 사교육비 문제 해결이 절박하다고 진단하며 ‘절반’이 가능하다고 제안했을까? 학부모들이 절반 정도로 줄인다고 약속해야 표를 주겠다고 조건을 걸었을까? 대선 캠페인의 전략가들은 ‘절반’ 대안의 가능성을 엄밀하게 따져보고 현실성을 확인한 후에 후보 공약으로 확정했을까?
선거 캠페인과 같은 정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약속은 합리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캠페인은 설득하는 게임이 아니라 각인시키는 게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게임에서 약속은 그 가치나 이행 가능성으로 힘을 발휘하지 않는다. 이때 약속에서는 듣는 사람들의 뇌리에 붙일 수 있는(sticky) 언어의 자극성이 요체이다. 논리나 타당성을 배려할 여지가 거의 없다. “반세기 이상 경험에 비추어 짐작할 수 있듯이, 사교육 문제를 비용 부담 문제로 본다면 쉽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된다면, 그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는 없겠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연설할 후보는 없다. 문제 제기나 해결 대안에 대한 ‘진지한’ 설명은 지루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카피’(copy)이다. “학교 만족 두 배, 사교육비 절반”과 같은, 한 번만 더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대선 공약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설정된 문제(과제)에 대해서는 해결책이 사실상 없거나, 해결을 강구하면 할수록 학교를 더욱 망칠 가능성마저 있다. 사교육 문제와 같은 경우는 둘 모두에 해당할지 모른다. 길게 쓸 여유가 없으니, 이명박 정부의 ‘사교육 없는 학교’ 정책에 대해서만 잠깐 되돌아보자. 이는 학생들에게 사교육 필요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가 책임져 줄 수 있게 지원하려는 정책이었다.
그런 책무를 자임했던 ‘사교육 없는 학교’는 실상 어떤 학교였는가? 언론에 보도된 모범 사례들을 찾아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사교육 없는 학교’는 사교육이 없는 학교가 아니었다. ‘사교육’을 적극적으로 해버리는 학교였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사교육 시장의 서비스를 학교 안에서 제공하며 학생들을 밤늦게까지 학교에 ‘잡아두는’ 학교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책은 학생들이 일찍 하교하여 사교육 시장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막고, 그만큼 비용 부담도 줄여 주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학교는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학교의 ‘서비스’와 사교육 시장의 서비스의 구분이 사라지게 되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학교가 학원과는 달라야 한다고 믿어왔다. 이런 믿음은 이제 유효하지 않은 것인가?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느라 ‘학교의 학관화’를 무릅써야 하는가? 그렇게 사교육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 오히려 학교를 망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사교육 시장에서 제공되는 서비스가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학교 교육이 사교육 시장의 서비스보다 더 ‘교육’이고 더 낫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런 사안들에 대한 궁리(논의)가 먼저 필요하다고 얘기하려는 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논의를 건너뛰고 ‘사교육’을 덥석 ‘문제’라고 전제해버리면, 그리고 오직 그 문제 해결에만 매달리면, 그런 노력의 가치나 성과는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다. 진정한 문제가 아닌 문제에 맹목적으로 매달린 셈이 되는 것이다.
맨 앞에 꺼냈던 미국 얘기로 돌아가 보자. 시험의 비교육성을 우리만큼 겪은 나라도 드물 것이다. 이제는 새로울 것 없는 문제여서, 우리 사회에서는 시험의 문제를 거론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미국 학부모와 교사들은 시험 부담 때문에 학생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구토까지 한다고 울면서 증언하고, 시험 거부 운동을 벌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시험 성적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이 없던 해가 없었을 정도이지만, 시험을 거부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우리가 미국인보다 더 독한 것일까? 아마도 그래서는 아닐 것이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가 구성하여 지닌 ‘의미’를 살아간다. 분명하게 지적하여 얘기할 수는 없지만, 그 사회의 역사와 경험이 정착시킨 의미를 살아간다. ‘잘 산다’는 것의 의미, ‘행복’의 의미, 국가와 정부의 의미, 교육의 의미, 학교의 의미 등을 사회 구성원들은 공유하며, 그 의미에 비추어 생을 가꾸고 추구하는 것이다. 모든 구성원이 한 치의 차이도 없이 그 의미를 공유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배척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의미의 엄연함을 부정하지 못하는 양상으로 공유한다는 것이다.
학교 문제를 포함하여 사회의 문제는 각 사회의 ‘공유 의미’를 바탕으로 규정된다. 미국 사람들이 시험의 부작용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데 비하여(그래서 그것을 매우 심각한 학교 문제로 보는 데 비하여) 우리가 그렇지 않는 것은, 그들과 우리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살기 때문이다. 교육이 무엇인지, 공부가 무엇인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하여 그들과 우리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문제’는 ‘사회’가 규정하는 것이다. 특정하게 누구라고, 또는 어떤 세력이나 집단이라고 지목할 수 없는, ‘우리’가 문제를 정의하고 있다. 대선 캠페인에서 ‘사교육 절반’이라는 슬로건이 나오게 되는 것은 대통령 후보나 그 캠페인 진영의 탓이 없지 않지만, 그들이 그런 슬로건에 낙착을 보게 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함축한 여러 공유 의미들이 작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학교에 문제가 있다면,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면, 일차적으로 그런 문제와 그것의 해결에 연루된 사람들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책임은 ‘우리’가 공유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가 공유한 의미로 인하여 학교 문제는 ‘지금처럼’ 규정되고 있는 것이고, 그런 문제를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시시포스(Sisyphus)와 다름없는 형국에서 그 문제 해결에 기약 없이 진력하는 사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학교를 망치고 있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이다.
학교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해야 할 많은 일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진전이 더디더라도 좀 더 나은 ‘의미’를 구성하기 위하여 꾸준히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가 과연 문제인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과연 학교의 본연을 지키는 것인지 논의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교육에 대하여, 학교에 대하여, 공부에 대하여, 우리가 좀 더 바람직한 의미를 구축하고 서로 공유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