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논설] 교육감 선거판에 투영된 우리 교육 현실
| 교육감 선거에 나온 공약들이 교육이 근본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를 간과하고 있으며, 우리 사회의 집합 지성을 높여야 할 언론도 이 문제를 짚고 있지 못하다고 비판합니다. |
교육감 후보 공약에서 교육 이야기 찾기 어려워
낼모레로 다가온 교육감 선거에서 한 표를 줄 후보자를 찾기 어렵다.1 ‘차악(次惡)’을 선택하려 해도 난감하다. 교육을 보는 안목이나 정책 숙의의 지도력이 미흡하다는 점에서, 후보들은 키재기가 무의미한 ‘도토리’ 같다. 교육의 정곡 문제가 무엇인지, 교육 정책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깊이 고심해 본 티라곤 찾아볼 수 없다. 표를 얻을 수 있으리란 계산이 서는 이슈나 소재이면 무엇이든 구호로 치환해선, 나름의 ‘정책’이라며 낱낱으로(정합성 아랑곳없이) 외치고 있다. 어느 후보가 교육에 해(害)를 덜 끼칠지조차 가늠이 어렵다.
무엇보다도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교육감 선거판인데도 진정한 교육 이야기를 들어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후보들이야 모두 교육을 걱정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내놓은 공약 또한 ‘교육’ 발전을 위한 것이라 뻗대겠지만, 들여다보면 동의하기 어렵다. 그들은 하나같이 AI, 교권, 사교육 등을 ‘교육 문제’로 들먹이고 있다.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린 뉴스거리들이라, 유권자들의 ‘가려운 곳’이려니 타산해 긁고 있는 듯하다. 이야기가 똑같은 것은 물론 아니지만, 문제 인식이 피상적이고 교육 본령에서 빗간다는 점에서는 후보들이 한결같다.
AI로 하겠다는 ‘맞춤교육’?
AI를 두고 보면, 교육 효과를 높이는 데 적극 활용하겠다거나, ‘미래 세대’가 AI에게 지지 않도록 키우겠다는 얘기가 대종이다. 이런 주장을 ‘교육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겠지만, 과연 그런지 반문해 볼 일이다. 이를테면, AI를 활용해 효과를 높이겠다는 ‘교육’은 어떤 교육인가? 흔히 돌아오는 대답은 ‘맞춤교육을 할 수 있어서 모든 학생의 성취도를 높일 수 있지 않느냐’는 정도이다. 이때 ‘맞춤’은 필경 ‘정답’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벗어나지 않게(또는 ‘지름길’로 가게) 유도하는 것이고, 궁극의 성취도란 다름 아닌 ‘점수’일 것이다. 이런 짜임에서, AI가 이끄는 ‘맞춤교육’은 과연 바른 교육인가? 그 끝에서 얻게 되는 ‘점수’는 교육 성과의 전부인가? 후보자들이 상정하고 있는 학교 교육을 거쳐 학생이 갖추게 되는 ‘역량’이란 것은 어떤 것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어떤 자아를 실현해 갈까?
후보자들도 자신이 무슨 주장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하는 듯하다. 시쳇말을 그냥 되풀이하고 있다. AI로 맞춤교육을 할 수 있고 그렇게 ‘교육 대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이다. 지난 정부의 교육부가 내걸었던 기치인데, 그 기만성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시중의 상식으로 굳어버렸다. 특히, 교육부의 조어를 빌미 삼은 ‘AI 사교육’ 과장 광고들이 그런 혼선에 힘을 실었다. AI는 교사보다 더 유능한 ‘교육로봇’이란 통념이 굳어졌다. 후보자들은 이 통념에 철석같이 매달려 거듭 허황한 구호를 되뇌고 있다.
후보자들은 AI에 대한 환상 속에 있다. 학생에 대한 ‘데이터’만 입력하면 AI는 바로 학습 ‘필요’를 진단하고 프로그램을 처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AI에 학교 교육을 분담시키면 근대 교육의 ‘이질(異質) 학급’ 문제는 곧 해결된다는 환상이다. 후보자들은 자신이 ‘팔고’ 있는 AI(교육부 조어로는 ‘AI 디지털교과서’)의 정체를 모른다. 바로 수업에 들어갈 교사 수준으로 만들어질 수나 있는지, 만들어진다고 하더라도 AI를 부려서 이루어지는 ‘교육’이 과연 학교가 해내야 할 교육이기는 한지, 깊이 고심해 본 기미도 없고 필요마저도 느끼지 않는 듯하다.
AI에게 이길 수 있는 인재 양성?
AI에게(‘로봇’에게) 일을 뺏기지 않을 ‘미래 인재’를 키우겠다는 식의 구호도 상투적이긴 마찬가지이다. 후보들은 ‘인간적인 감성’, ‘비판적인 사고력’, ‘건강과 인성’ 등을 열거하며, AI를 물리칠 이 ‘무기’들을 학생들에게 장착시키겠다고 외치고 있다. AI가 인간의 지분을 약탈하는 ‘미래’는 피할 수 없다고 종말론자들처럼 신봉하고 있고, 그런 미래에서 살아남으려면 감성, 사고력, 인성 등의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믿음에도 완고하다. 그런 역량이 어떻게 키워지는지 아직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았다는 사실엔 아랑곳없다. ‘어떤 프로그램’을 학교에 새로 투입하기만 하면 인재는 저절로 길러질 것처럼 허황하게 외친다.
AI에 대적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인성이나 감성 그리고 비판적 사고력 등이 과연 그런 ‘특정한’ 효능에 붙여 거론되는 게 합당한지, 후보자들은 무슨 근거로 그 효능을 확신하는지 모두가 의문이다. 해명은 없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란 듯이 공언하고 다닌다. 사실, 그런 능력이나 성향이 언젠들 필요 없었던 적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인성, 감성, 비판적 사고력 등이 학교 ‘교육의 목표’로 각인된 지는 아주 오래다. 문제는, 학생들이 이제까지와는(교과 수업을 받고 자치/특별/체험 활동 등을 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프로그램’을 밟아야 할 듯이 후보자들이 역설하는 데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도 모르면서 말이다.
학교 교육에는 인성, 감성, 비판적 사고력 등을 함양하려고 애써 온 긴 역사가 있다. 그런데도(후보자들이 외치듯이) 성과가 미흡해 모종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면, 우선, 이제까지 수업이나 활동들이 제대로 이루어져 왔는지부터 검토해야 할 터이다. 문제에 합당한 성찰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타당한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 후보자들은 왠지 다짜고짜 달려들고 있다. 어떤 ‘역량’이 필요하다는 유행 언설이 나도는 데 맞추어, 그것에 상응하는 ‘모듈’을 만들어 덧붙이는 게 ‘교육 발전’이라 여기는 것이다.
교육은 모듈들을 맞춰 조립하면 그만인 ‘어셈블리’ 공정이 단연코 아니다.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된 수업과 활동들을 경험의 정합적인 총체로 엮어 내야 비로소 제 몫을 하게 되는 활동이다. 그렇게 엮어 내는 과업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인류는 지금까지도 확연히 알아내지 못한 형편에 있다. 교육과 문화의 전통으로 완만히 수행해 왔을 뿐이다. 그렇게 아직 미완이지만 여전히 추구해야 할 인류 과업에 대한 외경(畏敬)을 후보자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각도 없는 채 그저 ‘미래 교육’에 돌입하겠다고만 선언하고 있다.
자녀가 번듯한 직업에 종사하며 평생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어느 부모에겐들 없겠는가. 그렇다고 교육이 오직 직업(미래)을 향한 사다리 오르기 경쟁이라고 우리가 믿고 산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교육은, ‘먹사니즘’에 빠지기보다,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정체를 구축하는 데 눈을 두도록 이끄는 과업이어야 한다는 믿음은 여전히 건재하지 않을까. 일상이 경쟁인 생태계에서 교육관은 누구에게서나 때로 흔들리겠지만, 적어도 나라(지구)의 미래와 국민(인류)의 행복을 염두에 두고 교육을 걱정할 때, ‘인재 양성론’이나 ‘경쟁우위 선점론’에 몰두하는 교육감 후보들을 수긍하기는 어렵다. 유권자를 얕보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교권’은 어떤 것?
최근 논란이 증폭된 교권 문제를 다룰 때도 후보자들의 공약은 교육을 간과한다. 교사를 보호해 교육을 바로 세우겠다고 한결같이 외치긴 한다. 특히, 법제를 보강하고, 교사에게 힘을 보탤 ‘인력’을 더 투입하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대책은 실질적일 수 없다. 교사나 학교에 ‘사적(私的)인’ 기대와 요구를 표명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을 때 책임을 추궁할 ‘권리’가 마땅히 학부모(‘소비자’)에게 있다는, 우리 ‘교육 문화’가 위력을 지니는 한 교권은 보호될 수 없다. 학교와 교사를 향하는 손가락질과 민원 그리고 소송의 위협을 법조문으로 막고 그 ‘방어 업무’를 분업시킨다고 해서 교권이 지켜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후보들의 공약이 이행된다면 교사들이 소송당할 걱정이 줄고 체험학습 엄두도 낼 수 있게 되고, ‘악성 민원’은 교육청이나 교장실에서 해결해 줄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다. 작지 않은 성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로 지켜진 ‘교권’은 어떤 것이고, 그런 교권을 바탕으로 교사들은 어떤 교육을 얼마나 더 잘하게 될까? 극단적인 걱정은 덜겠지만, 교사들은 아마도 ‘교육’에 앞서 ‘법조문’을 들추며 자신 행동의 ‘안전 구역’을 확인하고 그 ‘선’을 넘지 않으려고 조심할 것이다. 교사와 학생의 ‘전인적인 만남’을 기대하긴 어렵다. 교사에게 왜 ‘스승’이 되지 못하느냐고 타박하려면, 법조문에 기대려는 정책 타성부터 거두어야 할 것이다.
교사가 교육을 ‘법대로’ 해야 하는 사태와 전문성을 바탕으로(소명 의식으로) 하는 사태는 천양지차이다. 교사 개인에게만 다른 게 아니라, 교사-학생의 상호작용(교육) 자체가 판이할 것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경구에 공감한다면, 교권은 ‘마을의 문화’로 구축하고 또 지탱해 가야 한다. 법조문으로 감싼다고 교권이 교권답게 지켜지지 않는다. 교육감 후보들은 교육에 대해 ‘나만큼 아는 사람 없다’고 과시하는 데 여념이 없지만, 그 허세는 교권 공약에서도 드러난다. 법적인 대책들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교육감 노릇을 하려면 그런 응급책 너머 마땅히 추구해야 할 교육의 본지(本旨)에 시선을 두어야 한다.
선거 과정에서 정론으로 집합 지성을 키워야 할 언론도 제 몫 못해
교육감 후보들의 교육관이 빈궁함은, AI나 교권 얘기뿐만 아니라, 다른 거의 모든 의제와 공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사태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주체보다도 언론이 엄중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도록 앞장서 감시할 사명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중앙 일간지’들을 보면, 고작 지적하고 있는 것은 교육감 후보자들이 ‘선심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는 정도이다. 현금을 주겠다는 식의 공약을 비난한다. 그른 지적은 아니지만, 언론마저 교육을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기는 후보들 공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언론의 고발대로, 교육감 후보자들은 다양한 이유를 들며 돈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아이를 돌보고 취학시키는 데 들어가는 가계 비용을 분담해 주겠다고 하고, 사교육비까지 보조하겠다고 나선 후보도 있다. 언론은 ‘선심 공약’이니 ‘포퓰리즘’이니 비판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칠 문제가 아니다. 어떤 선출직이건, 선거에서 후보자로 나선 이들이 ‘돈’을 공약하는 건 일반적이지 예외가 아니다. 대부분 공약이 들여다보면 결국 돈 주겠단 얘기다. 당신의 자산 가치나 수입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겠고, 당신 동네에 돈이 돌게 하겠다는 식이다. 돈이 생존의 기반인 만큼 ‘정치적인’ 공약에서 ‘돈’이 빠질 리 없다.
공약을 두고 문제 삼아야 할 초점은 돈이라는 액면에 두기보다 그 돈이 어디에 쓰이도록 주겠다는 것인지에 두어야 한다. 교육감 후보자들이 주겠다는 돈은 주로 사적으로 쓸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입학한다고 주고, 졸업한다고 주고, 교육적으로(문화적으로) 소비하라고 주겠다 하고 있다. ‘무상교육’이라는 기본적인 정책을 이유로 ‘지원하겠다’는 공약에서마저도 교육의 본질적인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가계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선심’의 포인트를 드러내고 있다.
“교육감 쩐의 전쟁”이란 통속적 고발로 충분?
교육감 후보들의 타락한 공약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기사들이 그나마 있어 다행이긴 하다. 그러나 언론이 단순히 ‘선심성’ 또는 ‘포퓰리즘’이 나쁘다고 손가락질하는 데 그친다면 ‘제4의 권력’이라 빗대지는 게 민망할 듯하다. 그런 공약 행태가 만연해지는 현실의 근원을 짚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사들은 늘 있던 ‘분석’을 다시 들먹일 뿐이다. 교육감 후보자들에게는 선거 조직이 없고 정당 공천이 주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리고 자녀가 학교에 다니질 않으면 유권자들도 교육에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인지도’를 위해서 그렇게 공약한다는 분석들이다. 조금 새로운 얘기가 있다면 교육재정이 크게 불면서 생긴 부작용이란 부연 정도이다. 으레 그런 ‘분석’을 제공하는 ‘전문가’ 취재원들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에 의존하고 마는 언론의 책임이 면제될 수 없다.
돈 얘기로 이목을 끌지 않으면, 특히, 자녀들이 학교에 다닌다는 ‘사적인 이해’에 연루되지 않으면 교육감 선거(학교 교육)에 관심 둘 이유 없다고 추론하게 되는 현상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흔히 말하듯, 교육이 개인뿐만 아니라 나라와 인류의 장래를 중요하게 결정한다면, 많은 구성원이 그 경위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현실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언론에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런 현실에 대해 캐고 세상을 각성시켜야 할 책임이 있다. 유권자가 양식(良識) 있는 판단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민주적’ 선거가 우리 삶을 낫게 만들 수 있겠는가. 선거를 앞두고 언론이 내놓은 기사들에서는 투철한 소명 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선거 제도나 교육재정이 문제라는 기사들은, 바꾸어 말하면, 후보자들이 인지도를 쉽게 얻도록 선거 제도를 고치거나(예컨대, 자치단체장의 러닝메이트가 되게 바꾸거나) 교육재정 규모를 대폭 삭감해 버리면 교육감 선거가 바람직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실지로 그런 주장이 나오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후보자들이 더 나은 안목이나 태도를 갖춰 타락한 행태를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적인 충고 정도를 덧붙이고 있다. 실망스럽고 순진한 비평들이다.
후보 ‘인지도’나 선거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고 선심성 공약이 잦아들 리도 없거니와, 설사 그렇더라도, 그렇게 변화시켜서 얻게 될 이득은 무엇일지 생각이나 해 보았는지 모르겠다. 선거 열기가 후끈하고 후보들이 널리 알려진다고 해서 교육을 바르게 이끌 교육감이 생겨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허튼 데 돈 쓰겠다는 공약을 막자고 재정 자체를 줄여야 한다는 기사 논리도 어쭙잖기는 마찬가지이다. 재정의 요체가 돈이 교육에 제대로 쓰이게 하는 데 있지 않고, 마치 선심 공약을 막는 데 있다는 듯한 주장이다. 그야말로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을 연상시킨다. 재정 규모가 과다해서 그렇다고 단정하기 전에, 재정 배분에서 소외되어 말라 비틀리고 있는 교육 부문이 없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돈을 써야 할 데가 많은데, 왜 선심 공세냐고 지적해야 언론의 도리에 걸맞다.
교육을 이야기하지 못하면서 교육 발전을 기대하는 건 당착
교육감 후보자들이나 언론이 한결같이 흘려버리고 있는 교육의 고갱이는 무엇인가? 이제까지 보았듯이, 후보자들이 공약들로 해결하겠다고 전제한 ‘문제’들이 교육 문제가 아니고, 언론이 지적한 대로 뒤틀린 공약 행태를 바로잡는다고 해서 교육이 나아질 리도 없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도 교육 가십은 풍성해졌지만, 교육 문제를 정곡으로 논의하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이대로 누가 교육감으로 선출되건, 학교 교육이 나아지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문제를 포착하지도 못했는데 문제를 해결한다는 건 말 그대로 어불성설이다.
교육 문제는 사람마다 달리 느낄 테고, 이론들도 달리 규정한다. 그렇게 무한히 다양하게 마련인 ‘문제’를 공공정책이 모두 풀 수 없고 또 풀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집합적인 삶의 질서에 관한 것이다. 개인은 사회 안에서 살고 사회는 그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결속시키고 존속한다. 개인들이 생존에 성공해서 사회가 규모를 갖추어야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허용되는 각자도생의 방편이 사익 추구 한계를 넘어 공동선을 해치며 사회의 존속을 해치게 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세계에서 교육은 개개인에게 생존 요량과 수단을 전수하면서, 동시에, 사회문화 전승의 바탕 위에서 공동체 규범을 거듭 세련시키며 개인 삶의 지향을 승화한다.
진화 과정에서 인류에 장착된 교육의 원초 기능은 더 이상 작동되지 않고 있다. 근대로 오면서 민주 정치 체제가 생겨나고 과학 기술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그런 기능 체제는 재정립될 여유 없이 흐트러졌다. 대략 2차 세계대전 이후, 개인의 자유 또는 사익 추구를 공익의 이유로 제어하는 사회문화 기제들이 급격히 쇠락했고, 이 사태를 적기에 해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숙의와 정책 결정의 체제는 아직 마련되지 않았다. 선거는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타락해 있다. 사회 문제를 확인하고 그 해결책을 논의하며, 집합 지성을 높이고 사회 리더십을 세우는 데 실패하고 있다. 교육감 선거의 터무니없음이나 그 사태를 견제해야 할 언론의 빈약함은 바로 그런 지구적(인류) 현실의 한 단면일 것이다.
교육이 부족주의적 내전(內戰)의 소재로 전락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학교 교육의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가 그 역할 또는 기능에 대한 통념이 바뀐 데 있다고 짐작한다. 교육은 오랫동안 개인의 인성(인격)을 함양하고 사회의 공동선을 지탱하는 과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 학교 교육은 자격을 인증하는 절차(기관)에 불과하다. 이를테면, ‘삼전닉스’에 취업하는 게 생존 성공의 지름길이고 이때 ‘고졸’이라는 자격이 유리해 보인다면, 대학 교육 특히 ‘문과’ 대학 교육을 ‘가치 없다’ 규정하는 게 오늘날 당연지사이다.
우리 사회의 ‘당연지사’에 교육감 후보자들은 열렬히 공감하며, 그 바탕 문화를 강화한다. 언론도 그런 후보자들을 탓해야 할 이유를 보지 못한다. 교육감 후보들은 말하자면 미래의 ‘삼전닉스’에 취업시켜 주겠다고 공약하고 있고, 언론은 그런 공약을 이행할 후보나 대안들이 안 보인다고 지적한다.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을 지속시키고 굳히면서 ‘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공언한다면, 이때 교육 문제는 전통적으로 우리가 해결을 고심해 온 그런 문제는 아니다. 가치나 윤리의 측면에서 그리고 공동체 행복과 인류 공영의 측면에서 이야기해 온, 그런 교육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일 테다. 교육에 관한 한, 교육감 후보자들이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교육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공공 활동’이라는 데 한 목소리인 듯하다. 후보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파당(派黨)에 있다. 공약들은 각자 속한 파당의 ‘당론’을 담고 있다. ‘진보’에 속하면 절대평가, 서열화 폐지, 무상교육 등을 내걸고, ‘보수’에 속하면 상대평가, 학력 제고, 교육 선택권 등을 내거는 식이다. 교육감 선거는, 다른 선출직 경우도 다르지 않지만, 정략부족(政略部族) 간 내전(內戰) 같다. 이런 전쟁 형국에서 교육이 사회 통합을 본질로 품어 온 전통을 숙고하게 될 여지는 없다. 교육감이나 언론이나, 교육은 마치 분열에 종사해야 마땅하다는 듯이 강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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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교육 제4의 길> 편집실에서는 논급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안에 대하여 적절한 형식으로 의견을 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