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논설] 5월에 새삼 교육을 되돌아보자
5월이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이 이어지는 달이다. 가정의 달이라고도 한다. 아이 키우는 몫일에 대하여, 곧 교육에 대하여 새삼 곱씹어 보지 않을 수 없다.
경쟁 무기를 갖추는 교육 이야기
아이를 키우는 데 성공한 ‘엄마’ 이야기들이 신문 기사나 책으로 시중에 적지 않게 나돈다. ‘엄친아’를 키운 엄마 이야기들이 대종이다. 아이 셋을 모두 서울대 보낸 엄마, 과외시키지 않고 의대에 진학시킨 엄마 이야기 같은 것들이다.
나라에서도 교육을 ‘성공적으로’ 하겠다고 시시때때로(특히, 정부가 바뀔 때마다) 각오를 밝힌다. ‘엄마들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즘은 ‘AI 인재’로 키우겠다는 구호가 대세이다. 사람의 직업을 빼앗으려고 인공지능을 장착한 기계들이 몰려오니, 그런 미래에도 살아남을 틈새를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아이를 AI 인재로 키우겠다고 공약 소리 높인다.
‘오피니언 리더’들도 덩달아 대세에 영합하며 교육 훈수를 둔다. 언론사 가운데 2025년 매출액이 최고라는 한 신문의 칼럼에서, 과학기술 분야 명문으로 이름난 한 대학의 총장은 “AI 시대 교육 방향[의] 첫째는 창의성 중심의 교육”이라고 역설했다. ‘창의성’은 AI로 “쉽게 대체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학교에선 “지식의 전달보다 질문하고 문제를 발굴하는 방향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토도 달았다. 그런 ‘방향’의 가르침과 ‘지식 전달’이 모순인 듯 엮고 있지만 얕고 허술한 논리이다. 더할 나위 없이 상식적인 주장이어서 ‘합리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사실 교육의 참뜻을 간과한 터무니없는 얘기이다.
‘지식 전달’은 교육에서 버려야 할 것도 아니지만 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교육의 정수(精髓)이다. 다만, ‘전달’이 명제를 그저 받아들이게 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명제를 의심하도록 이끄는 것이어야 할 뿐이다. 그렇게 전달된다면 지식은 물려받는 이에게 진정한 창의성의 바탕이 된다. 안타깝게도, 교육정책을 결정하며 최고 교육기관을 이끄는 지위에 있는 이들마저 ‘상식적인’ 언사로 교육을 훼손한다. 세상 이치를 정곡으로 깨닫고 삶의 의미를 깊게 사유하게 할 교육을 암암리에 냉소하길 서슴지 않는다. 흔히 들리듯, 교육을 ‘AI 시대’에 살아남을 ‘전략 무기’ 생산 공정 정도로 깎아내리고 있다.
지난해 ‘7세 고시’라는 신조어가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떠돌았다.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다큐는 고등학교 수학을 ‘선행하는’ 초등학생들을 비추었다. 한 아동이 자신의 꿈을 조심스럽게 밝힌다. “의대에 갈 수 있을진 모르겠는데 한번 해보고 싶긴 하네요.” “왜요?”하고 묻자 답한다. “돈이 최고니까요. 돈 때문에.” 미래 세대도 자신들에게 부과되는 교육의 이유를 익히 안다. 그들도 교육은 ‘계층 사다리’를 오르는 경쟁 절차이며, ‘먹사니즘’의 핵심 전략 포인트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어린이날의 뜻은 질식해 있어
우리 전통의 일상에서 ‘출세’는 늘 교육에 따라붙는 주제이긴 했지만, 교육을 오직 먹사니즘에 종속시켜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굶더라도 모름지기 언행이 발라야 한다고 여겨 왔다. 지성(知性)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정직하며, 처신도 앎에 일관하고 윤리적이라 자연히 주변의 신망도 얻게 되는 이들을 가리켰다. 우스개가 아니라면, 교육 담론에서 ‘먹사니즘’을 공공연히 교육의 근간이라 거론하는 행태는 상상할 수 없었다. 1923년 첫 번째 어린이날 행사의 구호도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갑시다”였다. 경쟁을 뚫어야 한다는 ‘생존 역량’의 기치 같은 언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인생과 세계의 현상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자아를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교육을 이야기하던 기억은 희미하다. 교육에선 으레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쓸모를 찾는다. 공익과 공존을 도모하기보다 경쟁을 통한 사익과 배제를 추구한다. 그러해 온 교육의 ‘성과’는 (‘어버이’들의 양육 문화를 거쳐) 청소년들의 말과 행동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어린이들 사이에는 ‘빌거’나 ‘휴거’와 같은 유행어가 있다. ‘빌라’에 살거나 ‘휴먼시아’라는 이름의 임대주택에 사는 아동들을 ‘거지’라 손가락질하는 말이다. 어버이들이 ‘거지’들과 놀지 말라고 했단다. 대학생들(특히, 명문대 학생들) 사이에선 ‘지균충’, ‘기균충’, ‘분캠충’과 같은 ‘벌레(蟲)’ 이야기가 돌곤 했다. ‘지역 균형’ 선발이나 ‘기회균등’ 선발 등 배려 전형의 경로로 입학한 학생들과, 같은 대학이더라도 서울 캠퍼스가 아닌 ‘분교 캠퍼스’에 재학하는 학생들을 따돌리는 멸칭(蔑稱)이다. 대학 ‘배지’는 수능 점수로 얻어야 제격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세태에서, 스승으로서 또는 어른(어버이)으로서, 어린이에게 “참 되라, 서로 사랑하고 도우라”고 훈계한다면 비난받거나 냉소당할 것이다. 5월이 되면 으레 그런 격려나 훈화가 ‘상투적’으로 돌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애써 찾아도 들어보기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는 ‘교육지표’를 내거는데, 아직도 협력이니 공동체니 하는 단어들이 퇴화 기관처럼 남아있기는 하다. 그러나 핵심어는 ‘미래 역량’이니 ‘창의 인재’니 하는 것들이다. 살아남기 위한 싸움의 살기(殺氣)가 시쳇말로 숨겨져 있다.
‘메리토크라시’가 내려준 교육의 위세
학교나 대학은 이제 생존을 위한 훈련장이자 전쟁터이다. 상대(친구, 이웃, 다른 나라)를 물리치고 ‘나’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사력을 쏟아야 하는 곳이다. ‘5.31 교육개혁’ 과정에서 정책 결정자들은 ‘교육 고통’이라는 말을 만들어 유행시켰다. 대중 정서에 영리하게 야합하며 교육을 왜곡했는데, 과연 ‘성공한’ 학생들은 갖은 전략과 ‘노력’으로 (온갖 고생을 하며) 교육 고통의 터널을 통과해 낸다. 험악한 과정이었다고 느끼게 되는 만큼, 자신이 거둔 결실에 대해서는 배타적으로 한없이 누릴 ‘자격’을 갖추었다고 자부하게 된다.
본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는 불평등한 사회를 비판하고 비웃으려는 조어였지만, 이제 성공한 학생에 대한 ‘승자독식’의 보상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고 있다. ‘열심히 산 사람’에게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돌아가는 건 당연하다고 ‘다수’를 설득하는 힘찬 관용어가 되었다. ‘학생 성공’을 뒷받침하는 ‘배경’의 세습성이나 ‘학생 실패’ 이면에 도사린 가난, 소외, 차별 등의 사회정치적 요인들에 대해서는 눈을 주지 않게 막는 ‘현혹어’이기도 하다.
‘메리토크라시’로 위장한 현실의 부조리가 지배층 공작의 소산이라고 넘겨짚는다면 큰 잘못이다. 불평등의 골이 깊어질수록(우리나라나 미국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능력(merit)’에 근거한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은 실패의 벼랑으로 몰리고 있는 쪽에서 오히려 증가한다. 약자를 혐오하며 몰아내려는 ‘극우’에 어떤 사람들이 몰려드는지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엘리트’는, 의식적인 공작 없이도, 주어진 제도(기회) 아래에서 최선의 노력으로 성공을 일군 ‘리더’로 추앙받을 수 있다.
교육 전장(戰場)의 패자를 변호할 정의의 여지는 갈수록 사라지고 있다. 사회 불평등은 심화하고 있고, 그 사태를 해결하련다는 정책은 ‘기회균등’을 고집하는 데 그친다. 불평등의 정도가 어떻건 그것이 ‘균등한’(‘교육’이라는 똑같은) 기회를 가지고 싸운 결과라면 승복하라고 관성적으로 외치는 것이다. 결국 모두가 교육 경쟁에 ‘올인’할 수밖에 없다.
‘금수저’ 등급이 ‘흙수저’ 등급에 ‘거지’니 ‘벌레’니 하며 천연덕스럽게 손가락질하는 세태는 새삼 놀랄 현상이 아니다.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바닥을 까는’ 개인들은 으레 게으르거나 무능하다고 단정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복지를 논란할 때, 그들에게 선택의 여지 없이 채워진 ‘가정 배경’과 불운의 족쇄가 고려되는 일은 거의 없다. 족쇄를 찬 그들의 악착같은 생존 노력도 간혹 ‘필수 과업(essential work)’이라 추켜질 뿐, 운이 좋았던 승자들에겐 늘 조롱감이다.
교육의 본연은 서로 돕고 살도록 이끄는 데 있어
인류의 특징적인 행태로서 교육의 역사를 짚는다면 적어도 200만 년 정도는 거슬러 이야기해 와야 할 것이다. 진화의 길을 가르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은 후세에게 배울 기회를 건네는 배려나 관용의 ‘본능’을 인류 진화에 허용했다. 순전히 생존과 번식의 필요에 적응하는 양상이었을 초기 ‘교육’은 그 본능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언어의 매개 없이 몸짓 모방에 의존했을 터이므로 그 효력은 희미했을 것이고, 수백만 년의 역사인 석기시대는 그런 교육이 지탱했을 것이다. ‘발전’은 미미했고 세월은 유구했지만, 그 진화에 교육의 개입은 분명했다.
인류에게 언어와 문자가 안겨지는 사건은 교육의 양상을 현저히 바꾸었다. 교육(전승)의 충실도는 완벽에 가까워졌고 그 파급은 어마어마했다. 선대가 깨친 지혜는 이야기(신화)와 문헌으로 남겨지며 손상 없이 후대에 물려졌으며, 기록과 저술 등으로 확보된 ‘외장 기억’은 그것들(주장과 이론)에 대한 비판과 혁신을 ‘기하급수적으로’ 촉진했다. 오늘날 인류가 더 이상 ‘자연’을 위협으로 느끼지 않게 되고, 오히려 ‘버튼’ 하나로 지구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을 만큼 ‘에너지’를 내장하게 된 건 바로 그 기하급수적 촉진이 낳은 ‘현실’이다.
지질학적인 연대에서 ‘인류세(Anthropocene)’를 구획하자는 생각은 대체로 수긍되는 듯하다. 인류는 이제 지구의 구속을 받기보다 지구의 미래를 손에 쥐었다. 교육의 진화가 뒷받침한 ‘눈부신 문명’의 덕으로 인류는 자연선택에 더 이상 복속하지 않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류가 자연에서 독립하는 데 교육의 공은 지대했지만, 그 ‘교육’은 사적 생존의 용도로 기능하지 않았다. 교육이 궁극적으로 개체의(‘이기적 유전자’의) 생존과 번식을 도운 건 맞지만, 그런 귀결은 개개인에게 경쟁력을 갖춰주었기에 일어난 게 아니다. 교육이 ‘각자’로 하여금 사욕을 누르고 ‘사회’로 유기적인 결속을 이루도록 엮어낸 데서 온 것이다. 교육의 본연은 인류가 서로 힘을 모아 대대로 살아내도록 이끄는 데 있었다.
교육의 ‘현대적인’ 의미를 곱씹어야
인류의 미래는 이제 유전자보다 문화에 달려 있다. 자연을 지배하게 된 인류에게는 서로 힘을 합쳐 물리쳐야 할 적(敵)이 더 이상 없다. 자연은(생태계는) 인류에게 적응의 압력을 행사할 여지를 잃었다. 인류에게 생존을 위해 순응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사회문화적 규범과 제도뿐이다. 자연선택이라는 압력에 대해 견고한 문명의 방어벽을 쌓은 인류는 이제 그 안에서 오직 서로를 겨냥한 생존 경쟁에 몰두하게 되었다.
오늘날 인류에게 ‘상생(相生)’은 야합적인 쓸모 외에 달리 보편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승전 전략으로 때때로 협력을 도모하지만, 경쟁은 결국 배타적이며 각자도생을 부추긴다. ‘현대’의 생태계에서 교육은 그런 경쟁의 요충에 있다. 지구 어디에서나 교육은 개인이 생존을 위해 순응해야 할 구심적인 압력을 행사한다. 생존의 적자(適者)가 되려면 이젠 교육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야만적인 경쟁’은 한국에 국한된 현실이 아니다.
수십억 년의 진화 과정에서 운 좋게도 인류는 교육할 수 있는 쪽으로 선택압(選擇壓)을 받아 적응해 냈고, 교육을 통하여 지구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세계와 삶에 대한 두려움과 외경도 무너뜨렸다. 교육은 ‘과학’으로 신화를 퇴화시켰으며, ‘개인’을 탄생시키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데 공헌했다. ‘선진국’들은 이제 모두 자유와 평등의 질서를 표방하며, 사회 제도와 규범은 개인의 권리와 공공의 복지를 보장하도록 기대된다.
이와 같은 기대에 맞물려 교육은 ‘실력 본위’란 미명으로 사회정의를 규정하는(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톱니로 끼워져 있다. 개인이 차지하는 지위나 권리는 당연히 교육 수준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오늘날 민주사회에서 사익과 공익의(사유권 보장과 사회 불평등의) 긴장은 고조될 수밖에 없는데, 그 긴장은 교육제도로 잠정 제어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형국에서 교육은 말 그대로 ‘형해화’되어 버렸다. 본질은 잃은 지 오래고, ‘분류 장치’(sorting machine)로서만 완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교육의 이유는 의대 진학이나 AI에 대적할 진로를 추구하는 데 있다. 수능 점수로 ‘스카이의 진골’과 ‘지잡대의 벌레’를 갈라 마땅하다는 ‘정의론’은 그런 교육 관념이 키웠다.
인류는 교육을 바탕으로 ‘동물적인’ 생존 굴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 결과로 얻은 것은 새로운 생존 굴레이다. 이제는 스스로 창안해 낸 제도압(制度壓)에 적응해야 하는 형편에 처했다. 생존 경쟁은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이전과 다르다면, 생태계가 자연에서 사회/문화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제라면 문명의 결실을 지구 전 구성원이 ‘N 분의 1’로 나누어 누려도 풍족할 테지만, 오직 나의 몫을 늘리기 위한 경쟁에 죽기 살기로 매달린다. 교육은 그 ‘무한경쟁’의 기틀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교육의 의미는 바로 그런 뼈대만으로 앙상해져 있다. 교육의 이 ‘현대적인’ 의미를, 우리는 이 5월에 새삼 곱씹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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