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11) – “4월혁명과 교육”
| 4월혁명은 교육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입니다. 여기서는 현대교육사 안에서 4월혁명이 지니는 의미를 중등학생운동과 교원노조라는 두 주제를 중심으로 조망합니다. |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눌던, 검은 구름짱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잠깐 빛났던, 당신의 얼굴은 우리들의 깊은 가슴이었다(신동엽, 「금강」에서).1
이차대전 이후 독립한 신생국가들 중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민혁명이 일어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었고 그것이 1960년의 4월혁명이었다.2 4월혁명의 직접적 계기가 된 3·15 부정선거에서 시작해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 이후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제2공화국이 성립하고 장면이 이끄는 내각이 등장한 이후 일년도 되지 않아 이듬해 5·16 군사정변을 맞이하기까지의 정치사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상당한 연구가 축적되어 왔기 때문에 새롭게 드러낼 만한 역사적 사건들은 많지 않다.
여기서는 교육사의 시각에서 4월혁명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그런데, 교육사적인 시각에서 4월혁명을 고찰해 보면 주목할 만한 교육제도나 구조의 변화가 그 혁명을 통해 전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학제가 바뀌지도 않았고 교육체제에 변동이 발생하기에 4·19에서 5·16에 이르는 1년 남짓한 기간은 너무 짧았다. 그나마도 4·19에서 8월 말까지는 허정 과도정부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 이후에 들어선 장면 정권 하에서 문교부장관으로 일했던 오천석은 국회의 입법 과정에 영향력을 발휘할 만한 정치력을 갖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4월혁명은 여전히 교육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사적 사건이다. 여기서는 현대교육사 안에서 4월혁명이 지니는 의미를 중등학생운동과 교원노조라는 두 주제를 중심으로 하여 조망할 것이다.
4월혁명의 배경
전쟁의 종료 이후 미국의 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한국 경제는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원조가 잉여농산물의 수입이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급격히 몰락하게 된다. 4·19를 전후하여 약 2백50만 명의 완전실업자와 50만 명의 잠재실업자, 20만 명의 전쟁고아, 그리고 하루 세 끼 식사를 할 수 없는 3백만 명의 절량(絶糧) 농가가 존재하고 있었다.3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체제는 영구집권을 위한 정치 공작에만 몰두했다. 그 조짐은 한국전쟁 당시부터 이미 나타나고 있었다. 1952년에 이승만은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부결되자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는 재차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야당의 개헌안에서 일부를 발췌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으로 회자된 직선제 개헌안 통과는 이른바 ‘부산 정치파동’으로 불릴만큼 파행적인 것이었다. 다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영구집권을 위해 더욱 노골적인 행보에 나선다. 1954년 민의원 선거에서 노골적인 관권선거로 절대 다수당이 된 자유당은 ‘대통령은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다’는 당시의 헌법 규정을 1954년 9월에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규정으로 다시 고치는 개헌안을 제출했다. 이 개헌안이 통과되려면 당시 국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 즉 136표를 얻어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투표 결과 개헌 정족수에서 한 표가 모자라는 135표의 찬성표에 그쳐 국회에서 부결 선포되었다. 그런데 자유당은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명이므로 사사오입하면 135표가 개헌안 통과선’이라는 억지 논리를 들이대 다시 가결을 선포하는 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다. 그렇게 해서 치러진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유세 도중 사망함으로써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부통령으로는 야당 후보인 장면이 당선되었다. 영구집권을 안심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이 선거에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216만여 표를 얻은 조봉암을 2년 후에 ‘진보당사건’으로 처형했다. 1958년의 제4대 민의원 선거에서 노골적인 부정선거를 통해 자유당을 압도적 다수당으로 만들었으며,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파행 통과시키고 1959년에는 반공청년단이라는 극우 조직을 결성하여 야당과 반정부 인사에 대한 노골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그해 4월 30일에는 심지어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경향신문』을 폐간하기까지 했다.4 이런 상황에서 1960년에 네 번째 대통령·부통령을 뽑는 선거가 다가왔다. 자유당은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을 지명했고 야당인 민주당은 후보로 각기 조병옥, 장면을 지명했다. 그런데 60년 2월 중순 조병옥이 갑자기 병사함으로써 3월 15일의 대통령 선거는 이승만의 사실상 단독 출마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했던 이승만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엄청난 선거부정을 저지르게 되고 그것이 결국 4월혁명을 초래하여 이승만 체제는 종식을 맞이한다.
4월혁명의 전개
이승만 독재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항거는 학생들로부터, 그것도 고등학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 2월 28일에 일어난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그것이다. 일요일이었던 같은 날 대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부통령 후보 장면의 선거 유세에 투표권도 없었던 고등학생들이 참가하는 것을 막으려 학생들의 등교를 명령한 학교 측의 조치에 저항하여 경북고교 학생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낭독하며 시위에 나섰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책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東亞)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 말고 일어서라!5
경북고교가 포문을 연 시위는 곧바로 대구고, 경북여고 등 다른 고교로 확대되었다. 대구에서 일어난 “2·28 시위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전란 이후 관제 시위나 행사의 동원 대상으로만 파악되어 온 학생들에 의하여 시도된 최초의 자발적·주체적 시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또한 2·28시위 이후 계속된 학생들의 시위가 독재정권에 저항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민중들에게 심어주고 민중들의 잠재된 정치의식을 각성시켜 현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2·28 시위는 3·15 마산 민중항쟁의 도화선으로서, 나아가 4월 민중항쟁의 불씨로서 일정한 역사적 기능을 담당했다.”6 이는 사실상 대한민국 성립 이후 최초의 민주화운동이었다.7
대구의 고교 학생운동은 곧바로 부산 등 경상도의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8 3·15 선거 이후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더욱 큰 규모로 격화되었으며 경찰이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사망자 10명, 총상자 123명에 이르는 사상자가 발생했다.9 특히 시위 도중에 행방불명된 마산농고생 김주열 군의 사체가 열흘 남짓 지난 후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전국적으로 불타오르게 된다.
2·28 대구의 학생시위는 ‘고등학생’의 시위였으며, 3·15 부정선거 이후의 시위도 대부분 고등학생이 주도했지만, 4월 18일의 고려대생 시위를 계기로 대학생들의 시위 참여가 본격화된다. 4월 19일에 서울 시내의 여러 대학 학생들이 국회가 있던 세종로와 경무대로 몰려들어 시민들과 함께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면서 저항은 전국적인 규모로 본격화된다.
4월 19일 당일 시위는 서울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역시 적지 않은 희생자를 낳았다. “부산에서는 7만 명이 모여 6곳의 경찰서를 비롯해 군청, 소방서, 대한반공청년단 지부 등을 파괴했다. 광주에서는 시위대 2만여 명이 경찰서와 지방 관청, 자유당 지부를 파괴했다. 이날 숨진 이들은 경찰의 추정으로도 서울에서만 104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이고, 6,026명이 부상을 당했다. 역사는 이를 ‘피의 화요일’이라고 기록했다.”10 연이은 시위 끝에 4월 25일 대학교수단의 시위가 정점을 찍으면서, 그 이튿날 이승만은 마침내 하야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4월혁명에 참여한 학생들의 시위에서 주력은 고등학생이었으나 중학생도 적지 않게 참여했고, 특기할 만한 것은 국민학생들의 시위 참여였다. 4월 19일 ‘피의 화요일’에 서울 세종로에서 피격되어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전한승(全漢昇)’이라는 수송국민학교 6학년 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인 4월 23일에 『조선일보』사를 방문한 수송국민학교의 4학년 학생 강명희 양이 시위 사상자에게 보내달라는 기탁금과 함께 시 한편을 기고했다.
아···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며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 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 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먹고 저녁도 안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11
마침내 국민학생들 스스로가 직접 시위에 나섰다. 4월 26일, 국민학생 시위대는 ‘군인 아저씨들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우리는 민주 정의를 위하여 싸운다’ 등의 구호가 쓰인 플래카드를 앞세우며 거리를 행진했고, <어린이날 노래> <3·1절 노래> <해방의 노래> <애국가> 등을 불렀다고 한다.12
[그림 1] 1960년 4월 26일 수송국민학교 학생 시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즈)

초등학생이 정치적인 시위에 나선 이 희유의 사건은 오늘날의 시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역사를 떠올린다면 오히려 그들을 어린이로만 바라보는 우리 시선의 편향을 문제삼아야 할 지도 모른다. 식민지기에 항일의식이 가장 강했던 집단은 식민교육을 받은 학생 집단이었고 학생운동이 식민지배 당국의 만성적인 골치거리였다. 1929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대외비 보고서 『조선에서의 동맹휴교의 고찰(㊙ 朝鮮に於ける同盟休校の考察)』에 다음과 같은 분석이 실릴 정도였다.
이렇게 발흥하는 향학열 안에는 이미 불순하다고 할 만한 어떤 것이 잠재되어 있다고 인식되며, ··· 동맹휴교의 이면에는 자연히 민족적 사상의 흐름이 다분히 흐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특히 초등학교에서까지 동맹휴교가 행하여지는 것은 분명히 조선의 한 특색이다[斯の如くして勃興せる向學熱の中には旣に不純とも云ふべき或るものゝ潛在が認識され、··· 同盟休校の裏には、自然に民族的思想の流れが多分に漂つて居ることは明かである。殊に初等學校に於てすら同盟休校が行はれることは確に朝鮮の一特色である].13
총독부 경무국은 초등학교였던 보통학교 학생들의 동맹휴교가 ‘조선의 한 특색’이라고 지적했지만, 그것은 달리 말하면 초등학생들의 행동은 고정된 소여의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 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과 그들이 갖게 되는 자의식이 만들어내는 역사사회적 산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민지기의 그러한 역사적 경험이 1960년 4월 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의 시위에서 다시 모습을 바꾸어 부활한 셈이다.
이승만의 하야 이후 들어선 허정(許正) 과도정부는 서둘러 학도호국단 폐지 정책을 발표했다. 1960년 5월 10일 대통령령 제1573호 「대한민국 학도호국단규정 폐지에 관한 건」의 공포가 그것이다. 그와 맞물려 전국의 중고교에서는 학내 민주화운동이 빈발했다. 1950년대의 중등 학생운동이 주로 재단의 전횡이나 교장·교감의 비리 등 학내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한다면 4·19 이후는 “권력에 빌붙어 교육자의 양심을 저버린 이들을 ‘민주반역자’, ‘민주학원 건설의 암’으로 규정하고, 퇴진을 요구”하는 학내 민주화운동으로 발전했다. 부산 지역만 보더라도, 부산공고, 경남중·고, 부산여고, 경남상고(현 부경고), 동래중학교, 남여중과 남여상, 영남상고, 혜화여중·고, 대양중·고, 금성중·고, 항도고(현 가야고), 개성중학교 등 다수의 학교에서 교장과 교감 및 교사를 축출하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14
그러나 총체적으로 평가할 때, 허정 과도정부 그리고 1960년 8월 말 이후의 장면 정부가 이끄는 ‘제2공화국’의 정치권력은 학생을 포함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 등 변혁의 요구를 수용하기에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보수적이었으며, 그것은 교육 관련 정책에서도 역시 드러났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4월혁명기 교원노조의 출현과 그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었다.
교원노조의 결성과 투쟁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23일에 부산고등학교 시위를 주도한 한 고교생은 자신을 가르친 교사들의 위선과 비겁을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나는 이때껏 보아왔다. 존경하며, 마땅히 존경을 받아야 할 선생님들이, 생각하기에는 의(義) 아닌 것은 모조리 미워하는 듯한 스승들이, ··· 이 썩어가는 사회상을 보고도 한마디의 입도 열지 않는 꼬락서니를. ··· 그들이 사회부패의 일면에서, 그 부패를 부패되게 하는 온갖 행위를 보아왔다.15
이승만 체제 하에서 학교 교사들은 이런 질타로부터 자유롭기 어려웠다. 3·15부정선거에 교육자들이 총동원된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당시 서울대 교수 한태연은 그들을 ‘공범자’라고 비판했다.
어떻든 3·15선거에서의 부정에 동조한 수많은 군상들 가운데서 또 하나의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공범자의 하나가 바로 그 스스로를 청렴하다고 자부하는 한국의 교육자다. ··· 정부와 여당은 지난번의 3·15선거에 있어서는 모든 교육공무원을 선거운동의 전선에 동원케 했다. 특히 지방일 경우에는 국민학교 교장의 진두지휘에서 그 교원이 직접으로 학부형을 예방하면서 여당입후보자에의 투표를 권유하는 것을 그 주요한 직무로 했고, 또한 소극적으로는 야당측의 집회장소의 이용을 거절하는 것을 예사로 했다.16
이와 같은 교원들의 정치적 동원은 “교원의 인권을 유린하고 교육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것으로써 교사들을 자괴감에 빠지게 했고, 이승만 정권의 붕괴 이후 교육개혁의 기치를 내세운 교원노조 설립 운동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7
교원노조 결성으로 교사들을 분기시킨 또 다른 요인은 당시 그들이 처해 있던 어려운 생활조건이었다. 1960년 12월의 교원노조 조사에 따르면, “1960년 11월의 서울시내 각급학교 교원의 가구당(5.5인) 월평균 지출은 8만1천5백69환이었는데 비하여 서울시내 봉급자 가계지출의 평균액은 17만8천2백72환(한국은행조사월보 1960.9.)이며 교사들의 한 달의 보수는 3〜4만환”18이었다. 이런 상황은 교원들에 의한 부조리와 비리의 온상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컸다. 그만큼 교원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확보와 향상은 교육 정상화를 위한 절실한 과제였다.
교원노조 결성은 1960년 4월혁명 이후에 본격화되지만, 1950년대에 그와 관련된 구상이 없지 않았다. 1949년에 「국가공무원법」(법률 제44호, 1949.8.12. 제정)이 제정되었고 그 제37조에 “공무원은 정치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며 공무 이외의 일을 위한 집단적 행동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되었다. 이것만으로 보면 교원의 노동조합 조직 권한은 없는 듯 했다. 그런데 1953년에는 「노동조합법」(법률 제280호. 1953.3.8. 제정)이 제정되었고 그 제6조(노동조합조직가입의 제한)에 “근로자는 자유로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할 수 있다. 단, 현역군인, 군속, 경찰관리, 형무관사와 소방관사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됨으로써, 교원의 노동조합 조직권이 합법화될 소지가 마련되었다. 이에 근거하여 일부 노동법 학자들이 교원의 노동조합 조직의 합법 여부를 당시의 노동조합 관련 주무관청인 보건사회부에 질의했다. 보건사회부는 다시 법무부에 정부의 유권해석을 의뢰했는데, 법무부는 교원들도 노동조합을 조직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그 근거는 신법(노동조합법)이 구법(국가공무원법)에 우선한다는 원칙에 의한 것이었다(1953년 6월 8일 법무부 제200호).
이후 1957년에는 체신노조의 결성을 계기로, 체신부에서 국가공무원의 노동조합 가입에 관해 법무부에 질의서를 제출하였던 바, ‘단서조항에 명시되지 않은 일반공무원은 노조를 조직·가입할 수 있다’는 요지의 회답을 보내옴으로써 교육공무원인 교원들도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공극우적인 1950년대의 이승만 체제 하에서 교원노조 결성이 현실화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960년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극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그 변화의 흐름은 4월혁명의 포문을 연 2·28 학생시위의 고장, 대구에서 먼저 만들어졌다. 1960년 4월 29일, 대구에서 대구시교원노조결성준비위원회가 조직된 것이다. 이것이 이후 1960년 한국교원노조연합회라는 전국적인 교원노조 창출의 시발점이 된다. 대구시교원노조 결성에서부터 전국적인 노조 조직까지 교원노조운동을 태동시키고 이끌었던 지도자의 한 사람, 이목은 이후 1989년에 쓴 『한국교원노동조합운동사』(푸른나무)에서 2·28과 교원노조의 관련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원노동조합이 대구에서 가장 먼저 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활발한 활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되었음은 2·28 학생시위에서 겪었던 울분과 회한에 연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20
실제로 4월 29일, 대구시교원노조결성준비위원회에서 발표된 격문 「전국 교원동지의 분기를 촉구한다」 안에는 교원노조 결성의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자괴감이 토로되어 있었다. “‘선생님! 정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는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정열에 불타던 그 눈동자! ‘비겁합니다! 선생님’ 하고 외치던 그들의 울부짖음! 그들의 모습! 우리는 여기 양심의 가책과 자괴가 없을소냐.”21
이 준비위원회는 5월 7일의 대구시 중·고등학교 교원노조 결성 및 대구시 국민학교 교원노조 결성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교육사상 최초로 교원노조가 탄생하게 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 당시 허정 과도정부의 문교부장관 이병도는 5월 19일에 교원노조 결성을 허용치 않는다는 불허 방침을 발표함으로써 이후 문교부와 교원노조는 노조합법화를 둘러싼 대결 국면에 들어간다.
대구시에서 탄생한 교원노조는 곧 도 단위의 지역교원노조 연합회로 발전한다. 1960년 5월 29일, 경북교원노조연합회가 결성되었다. 『한국교원노동조합운동사』는 경북교원노조연합회 결성과 그 규모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5월 29일 상오 11시에 대구시내 종로국민학교 강당에서 경상북도 26개 시·군 35개 조합에서 파견된 대의원 및 위원장 등 2백여 명이 참가하여 경북지구 교원노동조합연합회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사로서는 역사적인 순간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 가입 교사 수는 초등이 24개 조합에 5천6백19명, 중등이 11개 단위조합에 1천4백18명이었으니 실로 놀라운 실적이었다.22
경북교원노조연합회는 강령으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를 내걸었다.
1. 우리는 교육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학원의 민주화를 기한다.
1. 우리는 총단결로서 여하한 정당 및 관권에서의 독립을 기한다.
1. 우리는 교원의 신분보장을 확립하고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을 기한다.
1. 우리는 교육능률 향상을 도모하고 학생의 건전한 성장발전을 기한다.
1.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의 육성과 세계평화에의 공헌을 기한다.23
이들 다섯 강령 중 으뜸은 ‘교육의 자주성과 학원의 민주화’였고 그와 함께 ‘교원의 신분보장’ 및 ‘교육능률 향상’을 내걺으로써, 교원노조가 교육에서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운동 조직인 동시에 교원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이익단체, 그리고 교육의 질 개선을 위한 전문적인 직능단체임을 천명했다. 이들 강령 어디에도 이른바 ‘용공’으로 내몰릴만한 이념적 요소나 특정 정당과의 결탁을 보여주는 정파적 요소는 없었다. 또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단기간에 상당한 가입률을 실현할 수 있었다.
도 단위의 교원노조 결성에도 불구하고 허정 과도정부는 교원노조 해체 입장을 견지했다. 6월 16일, 법무부는 교원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단체교섭, 단체행동을 할 수 없다는, 1953년의 그것과는 정면으로 반대되는 유권해석을 내렸고, 6월 22일에는 문교부장관과 보사부장관이 교원노조 해체를 지시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교원노조는 경북을 초월하여 전국 단위로 확산되어 나간다. 7월 3일에 교원노조전국대표자대회가 대구에서 개최되었고, 7월 17일에는 서울에서 제1차 교원노동조합 전국대의원대회가 개최되어 전국 단위의 교원노조연합회가 결성되었다.
한편, 7월 29일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그 결과 민주당이 압승을 차지하여 8월 23일, 허정 과도정부에서 장면 내각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그런데 허정 과도정부에서 장면 내각으로 정권이 이행하는 과도기에 주된 인사조치를 새 정권 성립 시까지 보류하라는 허정 과도내각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8월 6일, 경북에서 돌발적인 변수가 발생했다. 당시의 경북도지사 조준영이 경북교원노조 간부 전원을 시골 벽지 등으로 전보배치 발령한 것이다. 이는 명백히 교원노조 결성을 저지하기 위한 돌발적인 억압 조치였다. 경북교원노조연합회는 이에 항거하여 8월 13일, 「학부형 제위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하여 대국민 호소운동을 전개했다.
우리 교조는 교원들의 양심의 결합체이며 민주교육의 교두보이며 교원의 생명입니다. 교조가 죽으면 교원은 다시 관권의 노예가 될 것이며 교육은 정략의 도구화할 것이며 학생들은 건전한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조는 신념을 가지고 이 땅에 민주교육의 터전을 닦고 장차 지하에 돌아가 4월혁명에 산화한 사랑하는 우리 제자들을 떳떳하게 만나겠습니다.24
‘장차 지하에 돌아가 산화한 제자들을 떳떳하게 만나겠다’는 호소문의 결의는 교원노조의 존재 이유가 민주교육의 실현에 있으며, 노조의 투쟁이 사월혁명정신의 계승임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었다. 한편, 경북교원노조는 도지사를 상대로 ‘행정처분집행정지 가처분신청’ 및 ‘행정처분무효확인 내지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새 정부 수립 직후인 1960년 8월 25일에 대구고등법원 특별부가 한 ‘행정처분집행정지 가처분신청’을 수용함으로써 이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교원노조의 합법화는 여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었다. 새롭게 들어선 장면 정권은 이전의 허정 과도정부에 비해서는 다소간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으나 여전히 교원노조 승인은 보류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장면 정권과 함께 새롭게 문교부장관에 취임한 이는 바로 미군정기 교육개혁의 주요 핵심인물이었던 오천석이었다. 그는 1960년 8월 23일부터 1961년 5월 2일, 5·16 군사정변 직전까지 8개월여 간 장면 정권 하에서 문정을 주도했다. 그는 문교부장관으로 임명되기 직전인 8월 21일 시점에서 신문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그의 교육개혁관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었다.
··· 새로 세워질 우리 정부는 사월혁명의 뒤를 이어 생겨난 정부다. ··· 따라서 그에게는 혁명이 부과하는 특수한 임무가 있다. 즉 민주혁명의 완수다. ··· 현재의 중앙집권제도를 고쳐 지방자치제를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 이와 동시에 신정부는 교육의 중립성의 확립을 위하여 투쟁하여 줄 것을 기대한다. ··· 요청되는 것은 교육행정가 특히 노년에 속한 교육지도자들의 재교육이다.25
사월혁명을 ‘민주혁명’으로 규정하고 그 혁명 이념의 실현을 위해 교육자치제, 교육의 중립성 확보, 교육지도자의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이 과제들은 그가 십여 년 전 미군정기에 민주주의적 교육개혁을 목표로 실현하고자 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한 미완의 과제들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오천석의 문교부는 ‘교원노동조합의 명칭을 교원연합회 또는 교원조합으로 바꾸고 단결권은 인정하나 단체행동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발표함으로써 허정 과도정부 하에서의 이병도 장관의 그것에 비해 다소간 나아가기는 했어도, 여전히 교원노조의 요구 수용에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오천석 장관이 교원노조의 해체를 지시하는 허정 과도정부에 비하면 교원노조의 존재 자체는 인정하는 상대적으로 전향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사실상, 교원노조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실체로 존재하고 있으며 상당한 규모의 조직률을 보여 그에 대한 일반 교원들의 호응이 매우 강하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오천석 장관은 국회 민의원에서의 9월 7일자 답변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 우리나라에는 국민학교와 중고등학교 교사가 약 7만 5000명 있읍니다. ··· 이 7만 5000명 가운데에 ··· 교조에 참가한 사람의 수효가 약 2만 2000명 가량 됩니다. 약 3할은 봐서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 가장 교조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는 도는 경상남북도인데 경상남도에 있어서는 교원의 약 9할이 교조에 참가하고 있읍니다. 경북에 있어서는 약 7할이 교조에 참가하고 있읍니다. ··· 우리 신생공화국에서 헌법이 보장한 결사의 자유는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존중을 해서 교원의 결성권을 우리가 부인할 도리는 없을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7만 5천여 명에 달하는 교원들 중 1/3 가량이 결성 세 달도 되지 않은 교원노조에 조합원으로 가입했다고 하는 엄연한 사실을 그는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미군정기에 ‘대한교육연합회’(당시의 명칭으로는 조선교육연합회)의 산파역을 자처할 때 갖고 있던 교직관, 즉 성직자적 교직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국회 답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보수적 교직관을 천명하며 교원노조의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 교원 되는 사람은 결코 일반적 관념으로 생각하고 있는 노동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교사의 임무는 국가에 대한 봉사에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 만일 이러한 숭고한 사명을 가지고 있는 교원들이 노동조합 같은 것을 만들어 가지고서 마치도 단순한 노동자인 양 거리에 나가서 투쟁을 한다든지 혹은 기타 단체행동을 취한다고 하는 것은 ··· 우리 교육자의 긍지를 스스로 낮추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제 생각으로서는 교원의 교권을 충분히 인증하며 보호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기는 만들되 그것을 다른 노동조합 같은 그런 형태로서 발전시켜서는 안 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읍니다.26
오천석의 이러한 교직관은 교원 ‘노조’가 아닌 교직 ‘단체’를 위한 법률을 문교부가 구상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어 교원노조의 저항을 불렀다. 그가 구상한 ‘교원단체법안’은 결국 1961년 2월 12일에 자진 폐지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더욱 힘겨운 장애물이 새롭게 추가되었다. 9월 13일에 민주당의 곽태진 의원 등에 의해 ‘노동조합법개정법률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이다. 그 주된 내용은 「노동조합법」 제6조의 노조가입제한규정에 ‘교육공무원’을 새롭게 추가하는 안이었다. 이 개정법률안이 통과된다면 교원노조의 존재 자체가 불법화될 수밖에 없었다.
일관되게 교원노조 합법화 투쟁을 이끌어온 경북교원노조는 노동조합법 개정법률안 철회를 위한 가장 강력한 투쟁 방법으로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1960년 9월 26일에 대구역 광장에서 교조불법화반대 집단농성·단식농성 결행선언대회를 개최하며 집단 단식에 돌입한 것이다. 이 단식 투쟁은 조합원들의 수업 진행과 함께 전개되었다. 이튿날인 9월 27일에는 전국 교조원의 단식으로 확산되었으며, 9월 30일까지 84시간 단식투쟁이 계속하여 전개되었다.
[그림 2] 교원노조 단식투쟁에 학생 호응
(『조선일보』 1960.9.29.조간)

단식투쟁은 교원노조 조합원들만의 투쟁으로 그치지 않았다. 대구지역 고교생들이 ‘분필을 쥐고 교단 위에서 쓰러져 가는 스승들의 모습을 이 이상 더 묵과할 수 없다’고 외치며 동조 단식투쟁에 돌입했던 것이다. 경북여고에서는 3학년 학생들이 동교 강당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고, 경북고 학생 1,500명, 능인고등학교, 대구농업고등학교 학생들도 동조 단식투쟁을 전개했다. 대구상고 학생들 1,800명은 ‘스승없는 학도는 있을 수 없다’, ‘마비 상태의 학원과 쓰러져 가는 스승을 국회는 책임지라’, ‘쓰러진 스승을 투쟁으로 구출하자’ 등의 결의 사항을 채택하고 대구역 광장에서 시위를 벌였고, 영남고등학교 학생 3,000여 명은 경북도청 앞에서 교원노동조합 합법화를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28일 경북고, 경북여고, 대구상고 학생 시위와 농성 그리고 대구농고, 능인고 수업 거부에 이어 29일에는 대구상고, 영남중·고등학생 등 14,000여 명이 ‘스승 없는 학원 없다’는 구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고 대구역 광장에서 노천학습을 하는 등의 지원투쟁을 하였다.27 이는 4·19 이후 최대의 학생시위였다.
민주교육을 위해 교사와 학생이 뜻을 같이 하고 광장에서 만나 함께 투쟁하는 놀라운 ‘사제동행(師弟同行)’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선에서 밤낮없이 뛰어다니는 교조원들은 그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가장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교사들이었다. 사실 그랬기 때문에 투쟁이 격렬하여질 때 어린 제자들의 적극적인 성원을 받을 수가 있었다.”28
경북교원노조의 사흘 간에 걸친 단식농성에 참여한 노조원 수는 6,270명, 그 과정에서 졸도한 교원 1,161명, 심지어 중태자 426명, 입원자 33명에 이르는 처절하고도 장절한 투쟁이었다.29 결국 정부가 9월 29일 교원노조법 개정안을 폐기하기로 하자 9월 30일 상오 6시를 기해 전국 교원노조원들의 단식이 중단되었다.
이상과 같은 합법화 투쟁 외에도 교원노조는 검인정교과서 공급문제 지적, 부당한 폭리의 원천인 방학책거부운동, 교원들에 대한 법정수당지불 촉구운동, 학생종합예술제전 개최 등의 활동을 구상하고 전개했다. 한편, 1961년에 접어들어 장면 정부가 ‘반공임시특례법’과 ‘데모규제법’ 등 이른바 ‘이대악법’ 제정을 시도하자 4월부터 이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에 교원노조도 동참하게 되었다. 결국 이 두 법률의 입법은 좌절되었으나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거의 그대로 도입되었다.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자를 알고도 신고하지 않은 죄를 처벌하는 불고지죄’를 국가보안법 안에 도입하는 구상도 이 장면 정권 하에서 등장했다.30
4월혁명 이후의 혼란 속에서 쿠데타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군부 세력이 마침내 1961년 5월 15일, 군사정변을 일으키면서 대한민국은 또 한번 거대한 역사적 변전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5·16 이후의 사태를 간단히 살펴보자면, 5월 17일부터 민주적인 인사들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었으며 삼천여 명의 검거된 인사들 중 약 1,500명이 교원노조 관련 교원들이었다. 그중 교원노조 간부 8명이 최종 기소되었으며, 군사재판에서 경북교원노조 위원장 김문심은 종신형, 앞서 언급한 『한국교원노동조합운동사』의 저자 이목은 5년이 선고되는 등 잔혹한 탄압이 뒤따랐다. 사월혁명이 만들어낸 시공간 속에서 탄생한 교원노조는 결국 군사정변의 암초를 만나 와해되었고, 그와 함께 한국 교육의 민주화라는 과제도 좌절되었다.
교원노조의 탄생은 1950년대 이승만 체제 하에서 어용단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었던 대한교육단체총연합회, 즉 대한교련에게는 시련이자 새로운 변모의 기회이기도 했다. 그러나 4월혁명 이후 대한교련의 행보는 그다지 신뢰할 만한 것은 못되었다. 대한교련의 기관지였던 『새교육』 1960년 8·9월에 실린 교련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교련은 어용단체에 지나지 않다는 비판에 대한 교련의 답) 교련 산하의 도교육회 또는 시군 교육회는 그 활동이 어용기관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교원들이 중앙의 교련과 직접 접촉하는 일은 적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것은 직접 소속되어 있는 시군교육회나 도교육회이기 때문에 그 연합체인 교련에 대하여 그런 비난을 하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교련은 지방 교육회를 감독할 권한은 없었다.31
교련의 산하단체인 도교육회나 시군교육회가 행했던 어용적 역할 자체를 부인하지는 못하면서도 그것이 대한교련 탓은 아니라고 하는 전형적인 책임회피론이었다. 4월혁명 이후에도 대한교련은 스스로를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교원단체로 재탄생할 의지도 역량도 없었다. 교원노조의 등장으로 인해 만들어진 교련의 존립 위기 상황은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단번에 역전되었다. 교원노조가 사라지고 난 후, 대한교련의 독주 체제가 복원되었고 그와 함께 그것의 어용단체적 성격도 한층 강화되었다.
혁명인가 의거인가
4·19로 흔히 통칭되는 제 사건과 과정들은 어떤 이름으로 불러야 마땅한가. 그것은 지금껏 때로는 ‘혁명’으로, 또 때로는 ‘의거’로 불리어 왔다. 이 역사적 사건의 명명이 전환되는 과정을 한 일간신문은 1962년 4·19 이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4월혁명’이라고 신문이 재빨리 명명한 것은 4월 27일 이대통령 하야 뒤였다. ··· ‘5·16’도 처음엔 ‘군사쿠데타’나 ‘군부쿠데타’로부터 시작하여 ‘군사혁명’을 거쳐 ‘5·16혁명’으로 바뀐 것은 ‘군사정부’라는 호칭이 ‘혁명정부’로 바뀐 것과 때를 같이 한다. 혁명정부는 이번에 ‘4·19의거’란 용어를 쓰고 있다. 박의장 담화나 송수반 담화가 모두 그렇게 되어 있다. ‘5·16혁명은 4·19의거의 연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32
학생들의 시위에서 시작된 저항이 이승만의 하야라는 거대하고 엄청난 정치적 변혁을 이루어낸 이후 4·19는 ‘4월혁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혁명’을 ‘의거’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었다. 실제로 박정희는 4·19 이주년 기념일에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자격으로 발표한 기념사에서 권력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명명했다.
4·19의거는 또한 순결한 정의감의 발로요, 불의와 부조리 불합리에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인 것입니다. ··· 그러나 불행히도 4·19의거는 주체세력과 조직이 없음으로 해서, 그 정신을 구현하지 못한 채 민주주의를 가장한 새로운 부패세력에 의해 횡취된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읍니다. ··· 5·16혁명은 4·19의거의 연장이며, 조국을 위기에서 구출하고 멸공과 민주 수호로써 국가를 재생하기 위한 긴급한 비상조치였던 것입니다.33
‘순결한 정의감의 발로’였던 4·19는 ‘주체세력도 조직’도 없었고 또 새로운 ‘부패세력’으로 인해 그 정신이 ‘횡취(橫取)’된 ‘의거’에 불과했고, 자신들이 일으킨 5·16이야말로 그 정신을 실현한 ‘혁명’이라고 하는 박정희의 이 논리는 이후 관제 이데올로기로 작동하여 국가에 의한 역사 서술을 지배하기 된다.
‘문교사’에서 그것을 뚜렷이 확인할 수 있다. 최초의 본격적인 문교사인 1974년의 『문교사』에서 4·19 관련 서술은 이렇게 되어 있었다.
··· 1960년 3·15부정선거를 계기로 하여 4월 혁명인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민주당 정권은 이와 같은 학생혁명을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부문의 혁명으로까지 발전시켜 민족의 중흥을 이룩해야 했었다. ··· 그러나 4월 혁명의 벅찬 과업 속에서 출범하게 된 민주당 정권은 이 과업을 완성시킬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 이러한 상황 아래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것이다.34
1974년의 문교사는 그 논리나 서술에서 박정희의 1962년 기념사를 반복했지만, 그럼에도 그때만 해도 아직 ‘4월 혁명인 학생의거’라는 표현에서처럼 4·19의 명명에서 ‘혁명’과 ‘의거’가 애매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의 문교사 『한국교육삼십년』에서는 동일한 논리를 여전히 반복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4·19의거’ ‘5·16혁명’이라는 이분법적 명명을 굳힌다.
민주당 정권은 4월 의거를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부문으로까지 발전시켜 민족중흥을 이룩해야 했었다. ··· 그러나 4월 의거의 벅찬 과업을 짊어지고 출범한 민주당 정권은 이 과업을 완성시킬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 이같은 어려운 시국상황 아래에서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35
이 논리는 그로부터 8년 후인 1988년의 『문교40년사』에서도 거의 그대로 답습된다.36 여기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은 1998년의 문교사 『교육50년사』에서였다.
정부 수립 이후 50년의 정치사는 정치 민주화의 역사이다. 한국교육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권위주의 정치체제의 급격한 변화 시기마다 정치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들의 저항을 정치 세력화하는 장을 제공하였다. 정부 수립 후 10여년간 지속된 일인독재체제는 1960년 4월 학생혁명으로 붕괴된 이래 학생운동은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이끈 중심 세력이었다. 모처럼 성취한 정치 민주화가 1년도 못가 이듬해 5·16 군사정부로 인해서 독재체제로 퇴행하고, 이어 유신체제가 등장하였을 때 대학은 이에 대한 유일한 비판 세력이었다.37
1962년 이후 1998년에 4·19가 마침내 ‘혁명’의 이름을 되찾기까지 30년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시간으로서의 삼십 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의 6월 민주화항쟁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운동이 없었다면 4·19는 ‘혁명’이라는 이름을 그렇게 공식 역사에서 되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4·19가 ‘혁명’이라는 이름을 갖기 시작한 계기인 이승만의 하야 성명 발표일 1960년 4월 26일은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38이었고, 그것의 혁명적 성격은 4·19 1주년을 맞아 서울대에서 발표된 「4월혁명 제2선언문」의 내용 속에 ‘지금 이 땅의 역사사실을 전진적으로 변혁시키기 위해서는 반봉건, 반외압세력, 반매판자본 위에 세워지는 민족혁명을 이룩하는 길뿐’39이라는 선언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 바로 그런 점에서 그 혁명이 추구하는 과제들이 아직도 실현 과정에 있다는 점에서 4월혁명은 ‘미완의 혁명’으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4월혁명과 교육사
4월혁명은 오늘날 ‘학생혁명’으로 흔히 간주되지만 그것을 주도한 것이 ‘대학생’이라는 것은 과장된 이미지다. “대학생이 시위에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은 4월 19일 이후다. … 하지만 4월혁명의 발단부터 가장 격정적으로 참여했던 세력은 중고생과 하층 노동 청소년이었다.”40
1950년대 이승만 체제의 교육정책을 대표하는 ‘도의교육’이라는 이념적 교화와 ‘학도호국단’이라는 통제와 동원의 대상이었던 중고생들이 4월혁명의 주역으로 정치적 사회적 광장의 한복판에 등장했다고 하는 사실41은 교육사가 단지 ‘교육하는 자의 의도’, ‘지배하는 자의 의도’의 역사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미묘하고 때로 극적이기까지 한 인간의 형성 과정임을 보여주는 웅변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물론 그와 동시에 4월혁명 과정에서 전개된 학생운동에서 엿보이는 일종의 ‘엘리트의식’의 발로라는 측면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기성 엘리트와 달리 오직 정의와 진리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순수한 젊은이라는 의식도 함께 갖고 있었다. ··· 명백한 독재와 부정선거 앞에서 학생들이 공유하던 ‘순수한 엘리트’로서의 동질적 인식은, 그들이 4·19 혁명의 거리로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기본적인 명분을 제공했다.”42 여기에 더하여 학생운동이 학교 단위로, 또 학교의 위신과 관련된 행동으로 여겨져 서로를 경쟁적으로 의식하며 이루어지는 측면이 있었다. 이른바 “학교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시위를 촉발하기도 했다. 특히 오랜 역사를 가진 ‘명문’ 학교 학생은 학교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43 이런 측면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이른바 ‘중학무시험제’와 ‘고교평준화정책’이 실시되어 학교차가 만들어질 기반이 사라진 후, 중등학생의 저항운동이 사실상 궤멸에 가까울 정도로 위축되어간 사실을 반대쪽에서 비추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월혁명이 근본적으로 그 이전에 우리 사회가 축적해 온 민주적 역량의 산물이었다고 하는 사실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1948년 5월 10일의 제헌의회 선거는 숱한 파행을 동반하면서도 기본적으로 평등, 자유, 비밀, 직접이라는 원칙에 입각해 치러졌는데 이후 주기적으로 반복된 선거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 학습의 과정이었다. 4월혁명에 참여한 학생들은 해방 후에 학교에 들어가 우리말로 한글을 배우며 교육받기 시작한 ‘한글세대’였고, 거기서 그들은 불완전하나마 민주주의의 개념과 원리를 배웠다.44
4월혁명에 참여한 세대에 속한 한 인물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4·19는 상징적으로는 ‘한글세대’가 주축이 된 겁니다. 모든 국민이 참여했지만 대학생이 특히 3학년이 주축이 되었으며, 당시 3학년은 ‘한글세대의 첫 주자’들이었기 때문이죠. 4·19 이후의 통일운동이나 민족자립경제를 위한 학생운동, 신생활계몽대 같은 것들이 다 그런 정신에서 나온 겁니다.45
그들은 일제의 식민교육을 받지 않은 세대였다. 그들이 이승만 체제 하에서 갖게 된 교육적 경험 속에는 식민교육의 잔재가 여전히 강하게 그림자를 드리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받은 교육의 피동적 수용체에 머물지 않았다. 4월혁명에 고교생으로 참여했던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재일교포 북송반대 데모에 우리들을 이용한 그들이, 학생들은 정치에 간섭하지 말라고 말했다. … 정부의 실정의 쌓이고 쌓임과 그 가혹한 탄압정책의 반항인 동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할려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정의를 배웠다. 그래서 실천하는 것이다.46
설사 일방적인 훈화의 형식을 띤 덕목의 주입일지라도 ‘학교에서 정의를’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인간 형성 과정이다. 그 과정이 언제나 사람과 세상을 바꿀 만큼 전능한 것은 아니지만, 동시에 그 과정이 없다면 세상 바꾸기를 꿈꾸는 것조차 힘들다.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는 경구처럼 교육은 늘 배우는 자가 가르치는 자의 한계를 넘어설 가능성을 담지한 영위인 것이다. 여기서 4월혁명의 교육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끝으로 우리 역사 속에서 4월혁명이 놓인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에 언급한 신동엽의 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시인의 노래에서처럼 1960년 4월에 하늘은 ‘검은 구름짱을 찢고’ ‘잠깐 빛났’다. 오래지 않아 다시 하늘은 가려졌고, 이 땅의 많은 이들이 ‘먹구름 그걸 하늘로 알고 일생을 살아’47가게 된다. 허나 그 하늘은 마땅히 언젠가는 다시 열릴 것이었다. 그날을 맞이하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그 먹구름 아래에서의 교육사의 궤적을 두손으로 더듬어 가며 추적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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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申東曄 (1976), 『申東曄全集』, 創作과批評社, 123쪽.
- 한홍구 (2020), 『4·19혁명』, 창비, 10쪽.
- 김정남 (2004),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5쪽.
- 김정남 (2004),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7-21쪽.
- 李在五 (1984), 『해방후 한국 학생운동사―1945년부터 1979년까지』, 形成社, 160쪽. 재인용.
- 李在五 (1984), 『해방후 한국 학생운동사―1945년부터 1979년까지』, 形成社, 161-162쪽.
- 최병덕 (2023), 「4월혁명기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의 현실 인식과 실천」, 『대한정치학회보』, 31(3), 222쪽.
- 김선미 (2015), 「4월혁명 시기 부산지역 고등학생의 현실인식과 실천」, 『한국민족문화』, 55, 부산대학교한국민족문화연구소, 121쪽.
- 오유석 (2001), 「4월 혁명과 피의 화요일」, 이병천, 조현연(편), 『20세기 한국의 야만』, 일빛, 366-368쪽.
- 오유석 (2001), 「4월 혁명과 피의 화요일」, 이병천, 조현연(편), 『20세기 한국의 야만』, 일빛, 371쪽.
- 「아뭇소리 안해도 童心이 안다」 『朝鮮日報』 1960.4.23.석간.(3).
- 조은숙 (2022), 「4월혁명과 어린이 시민성의 발견」, 『역사비평』, 141, 역사비평사, 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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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얼마전 딸 아이의 역사 수업이 있어서 4.19 민주묘역과 근현대사기념관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희생자 중에서는 초등 5학년도 있었대..이야기를 듣고 천천히 관련 글들을 읽고 있었는데 참 여러모로 안타까웠습니다. 역사는 고칠수 없지만 반복은 막을 수 있겠죠. 그러려면 바른 역사 알기가 우선일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