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 논설] 교육을 바루기 위한 사회적 숙의를 요청한다
| 한국이 어떤 교육을 추구할 것인지, 진정 민주적으로 숙의하기 시작할 계기일 수 있는 해이길 바랍니다. 숙의는 꾸준히 혼란스럽고 더디겠지만, 지속한다면, 한국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교육 전통으로 토착할 것입니다. |
이재명 대통령은 교육 문제에 대해 말을 아끼는 듯했다.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댔다고 한다.
교육 문제는 의도적으로 전면에 얘기 안 한 측면이 있다. 해결도 안 되면서 논쟁만 촉발하고, 자칫 잘못 건드리면 이념 투쟁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국가교육위원회가 정상화되면 거기서 논의하면 좋겠다. 어차피 저는 교육 전문가가 못되니까.
대통령의 판단과 처신은 수긍할 만하다. 학교 교육을 둘러싼 갈등은 해소되기 어렵다. 정치에서 양극화가 깊어진 오늘날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거의 모든 사안에서 날 선 ‘당쟁’이 일상적이며, 그런 상치(相馳)를 해소할 방도는 가까이 없어 보인다. 간혹 ‘소통’을 위한 멍석이 깔리지만 상대의 말에는 귀 닫은 채 트집과 비난만 주고받기 일쑤다. 소통이 마치 ‘내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란 식의 행태가 예삿일이다.
대통령은 국가교육위원회에 일말의 기대를 거는 듯하다. 그러나 국가교육위원회가 지난 3년 어떻게 움직였는지 되돌아보면 그런 기대는 공허하다. 정치의 양극화는 법률로 마련된 공론의 장에서마저 극단의 대치를 지속하도록 만들고 있다. 교육을 중장기적으로 논의한다지만 위원들은 눈앞의 당리당략으로 프로그램된 로봇과 다름없이 행세한다. 그런 위원회에서 정략적 흥정은 이루어질지언정 공동선을 지향한 합의가 모색되긴 불가능할 것이다.
국가 수준에서만 문제가 아니다. 올해에는 교육감 선거도 치러진다. 벌써 ‘출마설’들이 떠돌고 있고, 이미 선거 운동에 돌입한 양 움직이는 ‘후보’들도 있다. 교육감 선거 후보는 정당의 배경을 공식적으로 내세울 수 없지만 행태들은 오히려 정치색을 드러내는 데 기울어 있다. ‘진영’마다 ‘후보 단일화’를 당연한 절차라 여기며, 단일화 후보로 선택되려면 당파적 선명성이 필수 조건이다. 양극의 대립을 넘어서 교육자치의 공분모를 이뤄갈 여지는 이미 닫힌 듯하다.
교육의 담론이나 의제가 극단으로 정치화하면서 학교 교육의 발전은 한 발짝의 진전도 이루기 어려워졌다. 교육정책은 교육을 앞으로 밀기보다 오락가락하도록 흔들기만 한다. 정권의 진영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책은 계승되고 다듬어지기보다 한시바삐 치워야 할 애물로 전락한다. 학교 교육은 바닷가 ‘모래성’ 같은 형국에 처한다. 밀썰물이 오가는 동안 쌓이고 허물리기만 되풀이될 뿐 구축되는 건 하나 없는 양상이다.
학교 교육을 둘러싼 갈등은 피할 수 없다. 구성원마다 다른 특질과 자아의 꿈은 교육에 대한 사회 속의 이해관계를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다름을 포용하는 개방된 민주사회에서라면 갈등은 상수로 여겨야 한다. 특정 ‘이념’으로 갈등을 일소할 수 있을 듯 달려든다면 반(反)민주이다. 민주주의는 정책의 칼을 ‘색깔’대로 휘두를 세력을 다수결로 결정하는 체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본령은 사회가 총체로 수긍하는 지혜로운 선택을 이루는 데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학교 교육 문제에 절망해 왔다. ‘교육 고통’이란 말이 뜬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픔은 깊어지고만 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보았다’ 여길 만큼 ‘교육 개혁’에도 인이 박여 정부 정책을 향한 사회적 기대는 이미 접혔다. 교육 문제에 대해 언급을 삼가고 마음을 사리게 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 방임해서 될 일도 아니다. 더는 오락가락하지 않고, 더디더라도 한 걸음씩 나아갈 교육 발전의 방도를 찾아야 한다.
교육을 바루기 위해 지금 갖추어야 할 요건은 ‘계획’이나 ‘목표’가 아니라 바른 숙의(熟議)이다. 이제까지 정책은 확신에 찬 해결책들로 채워졌다. 문제가 지목되면 곧 그 해결을 보장한다는 대책들이 줄을 이었다. 과정은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합리에 종속되지도 않거니와 특정 정책(해결) 목표를 위한 결사(結社)도 아니다. 민주사회는 정해진 길을 가기로 한 사회가 아니라 갈 길을 찾는 양식(樣式)에 합의한 사회이다. 서로 이해(利害)를 달리 하지만 공분모를 찾으며 공존하기로 전제한 사회이다.
한국의 교육정책은 썩 민주적이지 못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모종의 ‘이념’(당론)을 내세운 환상이나 다름없는 개혁 프로그램들이 사회와 학교에 부과되어 왔다. 정책은 으레 실패이거나 흐지부지되곤 했고, ‘개혁 피로감’은 만연해졌다. ‘구조적인’ 변화 외에 달리 길이 없다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문제 해결을 장담하는 또 다른 ‘확고한’ 대책은 더 이상 대책일 수 없을 터이다. 문제가 ‘구조적’이라면 대응은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어야 한다.
‘합리적인 묘안’을 찾고 공약하여 국정과제로 추진하는 식의 정책으로는 정치적 진자운동을 초래할 뿐이다. 교육의 근본에 대해서 논란하며 공분모를 찾고, 그 위에서 발전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숙의가 필요하다. 이전에 정치적인 제스처에 그쳤던, 정부가 내민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고르면 다수결로 결정하겠다는 식의, 숙의를 말하는 건 물론 아니다. 숙의를 통해 사회 구성원은 지혜롭고 건전한 판단의 바탕을 갖추어 갈 수 있게 되고, 포용적인 논의로 공분모에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민주적 숙의는 으레 혼선을 빚고 성과를 보이는 데 더뎌 ‘소모적’이라 포기되기 십상이다. 숙의를 하자면 ‘당장 눈앞 문제’는 어떻게 하느냐는 반문이 바로 돌아올 테다. 목전 문제를 덮어둘 수는 없다. 국정의 어느 측면에서건 ‘땜질’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숙의를 요청하는 것은 그것마저 멈추자는 게 아니다. 땜질의 루틴이 ‘뜻’을 지니도록 하자는 말이다. 이때 뜻은 바로 민주적으로 합의하게 되는 공분모이고, 교육에 대하여 우리가 선택한 정의(定義)가 될 터이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어떻게 논의하자는 제안인가? 중요하고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시작하는’ 숙의를 제안하면서 그 물음에 ‘구체적으로’ 답할 수는 없다. 답이 없다고 여기거나 마음에 둔 대안이 없다는 게 아니다. 더 구체화하는 것은 근원적인 숙의를 제의하는 이치에 어긋난다. 주제를 잡는 것, 논의 양식을 결정하는 것 등 모든 선택에는 모종의 전제가 함축된다. 원리상 진정한 숙의는 그런 전제의 ‘영점(零點)’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학교 교육에서 일어나는 경쟁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후보 주제가 될지 모르겠다. 이런 주제를 택하는 순간, 교육에는 경쟁이 있기 마련이라거나 아니면 교육에 경쟁은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이미 깔린다. 숙의는 이렇게 암암리에 깔리는 전제에 대해서도 점검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마치 교육에 대하여 아는 바 없었다는 듯이 모여 이야기하는(그렇게 성숙해 가기도 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전제의 영점’인 논제를 과연 논리적으로 짚어낼 수 있기나 한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숙의는 논리로 헤치며 결정하기보다 모여 이야기함으로써 합의에 이르려는 양식이다. 영점이라 의견이 모이면 그것이 영점일 수 있도록 숙의하려는 실천이 관건이다. 이런 숙의는 반드시 영점을 찾아 출발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주제에서 시작하든, 숙의가 제대로 된다면, 그 주제가 품은 전제를 검토하는 데서 출발하기 마련일 터이며, 궁극적으로 영점에 가 닿아야 매듭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숙의를 위해 하나 더 유의할 게 있다면 전문가에 의존하는 타성이다. 대통령도 “교육 전문가가 못되”기에 발언을 삼갔다지만, 그런 버릇에서 벗어나야 한다. 숙의는 전문가에게 답을 청하는 장이 아니다. 숙의에서 ‘답’(결정)은 전문가에 의지해 고르는 게 아니라 구성원들이 의논하여 생성하는 구성물이다. 구성의 과정에서 전문가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면 그것은 답을 제안하는 데 있지 않고 숙의 과정에서 건너뛰어선 안 될 질문을 제기하는 데 있을 것이다.
2026년은 여러모로 정치의 해가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새 정부의 각오도 각별할 것이고, 교육감 선거 등의 과정을 거치며 교육 공론의 장도 활기를 띨 것이다. 한국이 어떤 교육을 추구할 것인지, ‘처음부터’ 그리고 진정 민주적으로 숙의하기 시작할 계기일 수 있는 해이다. 숙의는 꾸준히 혼란스럽고 더디겠지만, 지속한다면, 한국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하는 교육 전통으로 토착할 것이다. 민주주의도 그 전통의 자양으로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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