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철의 한국현대교육사(7) – “한국전쟁과 교육”
| 한국전쟁의 교육적 영향에 대한 논의는 전쟁이 초래한 정치, 사회, 문화적 변화가 지니는 교육적 의미를 포착하는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하며, 이를 국가의 교육정책, 그리고 민의 교육행위라는 두 맥락에서 고찰합니다. |
작가 이청준은 소설 「소문의 벽」(1971년)에서 한국전쟁기 남쪽 산간마을의 한 장면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 밤중쯤 되자 느닷없이 밖에서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났고, 어머니와 저는 그 발자국 소리에 놀라 잠을 깨고 말았어요. 눈을 뜨자마자 백지 창문이 덜컹 열리면서 눈부신 손전등 불빛이 가득히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어요. 눈을 뜰 수도 없을 만큼 강한 불빛이었지요. 한데 그 불빛 뒤에서는 사람의 모습도 보이지 않은 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만 울려 오는 것이었어요. … 아주머니는 누구 편이냐, 사정없이 추궁을 하고 들지 않겠습니까. …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농사나 지어 먹는 사람이다, 누구를 따라간 일도 없고, 누구의 편이 된 일도 없다, 무식한 죄로 그러는 것이니 제발 허물을 삼지 말아 달라 … 이 아주머니 정말 반동이구먼, 누구의 편이 아니라니 그런 반동적인 사상은 용서할 수 없다, 전짓불 뒤에서 비로소 그런 소리가 들려 왔어요. 겨우 전짓불의 정체가 밝혀진 것이었지요. … 늦게나마 정체를 알아낸 어머니의 애원으로 우리는 겨우 화를 면할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날 밤 사이 마을에는 또 많은 새 희생자가 생겨나고 있었어요. 끔찍스런 전짓불의 강요에 못 이겨 그 전짓불 뒤에 숨은 사람의 정체를 점치려다 실패한 사람들이었지요. 사람들은 좀처럼 그 전짓불의 정체를 알아맞힐 수가 없었던 거예요.1
한국전쟁을 가장 통절하게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바로 그 ‘전짓불공포’다. 하루밤이 지나면 마을에 내걸리는 깃발이 또 바뀌곤 하던 상황에서 느닷없이 전짓불을 들이대며 ‘누구 편이냐’고 사납게 몰아대는 자들이 ‘국가’였고, 그 전짓불에 무력하게 노출된 채 생사의 기로에 놓였던 이들이 ‘민’이었다. 이 ‘전짓불공포’로 끔찍하게 상징되듯, 한국전쟁은 태어난 지 채 2년도 되지 않은 신생 국가―그것이 ‘대한민국’이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건―와 그 구성원인 민의 관계를 극히 폭력적이고 전횡적으로 규정짓는 한국현대사 최대의 사건이었다.
그 관계는 다른 사건에서도 확인되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 이후에도 직장과 학교를 ‘사수’하라는 남한 정부의 방송만 믿고 있다가 한강 인도교의 폭파로 피난 시기를 놓친 채, 세 달 동안이나 적의 점령 통치 하에 놓이게 된 백만 명이 넘는 서울 시민들―이들은 당시 ‘잔류파(殘留派)’로 불리었다―이 있었다. 이들은 요행히도 한강을 넘어 남으로 피난 갔다가 9월 28일의 ‘서울수복’ 이후에 돌아온 소수의 사람들―이들은 당시 ‘도강파(渡江派)’로 불리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돌아온 국가에 의해 이후 억울하게 고초를 당하게 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교수였고 서울에 남아 적군의 통치를 겪은 ‘잔류파’에 속했던 김성칠은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 어리석고도 멍청한 많은 시민(서울시민의 99% 이상)은 정부의 말만 믿고 직장을 혹은 가정을 ‘사수’하다 갑자기 적군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고 천대받고 밤낮없이 생명의 위협에 떨다가 천행으로 목숨을 부지하여 눈물과 감격으로 국군과 UN군의 서울 입성을 맞이하니 뜻밖에 많은 ‘남하’한 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이 애국자이고 함몰 지구에 그대로 남아 있는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이다” 하여 곤박이 자심하니 고금천하에 이런 억울한 노릇이 또 있을 것인가.2
여기서 잔류파들이 몸으로 겪은 것도 국가와 민의 폭압적이고 전횡적 관계였다. 한국전쟁기에 교실 밖에서 이루어진 그러한 정치 학습은 한국 사회의 형성 및 한국인의 삶과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고, 그 영향으로부터 교육 세계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이후 한국의 교육제도·정책과 민의 교육인식·행위를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이와 관련하여 먼저 한국전쟁이 교육 세계에 미친 일차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으로 전쟁이 초래한 물적 파괴와 인적 손실에 대해 어떠한 대응이 이루어졌는가를 밝힐 필요가 있다. 한 가지 놀라운 점은 단기간에 벌어진 학교교육에서의 막대한 파괴와 인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민관의 노력을 통해 놀라운 속도와 규모로 빠르게 복구되고 재건되었으며 정상적인 궤도를 회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과 교육 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한국전쟁의 교육적 영향을 단지 그와 같은 파괴와 복구의 맥락에서만 포착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한국전쟁의 교육적 영향에 대한 논의는 전쟁이 결과적으로 초래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변화가 지니는 교육적 의미를 포착하는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국가의 교육정책, 그리고 민의 교육행위라는 두 맥락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한국전쟁기의 교육 상황
전쟁 발발 이후 첫 일년 남짓한 기간 동안, 전선이 남으로는 낙동강 방어선까지 내려갔다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선이 압록강으로까지 다시 북진했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전선이 남쪽으로 다시 후퇴하면서, 마치 등사판의 롤러가 위아래로 왕복하듯이 전화가 한반도의 거의 전역을 휩쓸었다. 전투와 폭격, 살육과 납치, 파괴와 피난으로 점철된 일년 동안 일상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데 1951년 중반부터 전선이 중부 지역으로 고착되자 전쟁 상황 속에서도 일상이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들 중 하나가 이른바 ‘노천교실’의 등장이었다. 전쟁으로 파괴되거나 아니면 군부대에 의해 전용된 학교 교실 대신에 노천에서 수업이 실시되고 학생들이 배우는 장면들이 남한의 곳곳에서 펼쳐졌다. 1951년 6월 8일자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는 그 장면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 기아와 추위 질병으로 수십만 명이 희생당했던 가장 끔찍한 겨울에도 남한 정부와 유엔은 많은 아동들의 학교교육을 지속할 수 있는 수단을 찾았다. 이제 대부분의 학령 아동들은 정규 수업을 받고 있다. … 농촌에서는 학생들이 나무 기둥에 박아 매단 칠판 아래서 공부를 계속하고 있으며 종이를 묶어 만든 책을 함께 보며 공부한다. 예닐곱 명의 아동들이 한 권의 책을 보면서 교사가 하는 말을 받아 적는다.3
[그림 1] 노천교실 (자료: 국가기록원)

이와 같은 ‘교육의 복원’을 정부는 일찍이 1951년 2월 16일에, 「전시하교육특별조치요강」(문교부령 제19호)을 통해 정책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즉 “교실이 없으면 공부를 못하고 책이 없으면 공부 못한다는 관념을 근본적으로 타파하고 노천에서라도 교육하라는 것이었다. 이 대방침을 선포하는 동시에 피난 학생은 그 소위 지방 학교에 등록하여 학업 계속을 권장하였다.”4
그러한 교육 복원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이른바 ‘전시연합대학’의 운영이다. 부산전시연합대학이 1951년 2월 18에 합동 개강한 이래, 5월 4일에는 「문교부령-대학교육에 관한 전시특별조치령」이 공포되었으며 최규남 문교부차관 겸 서울대총장과 유진오 교수회단장 겸 고대총장이 공동 운영 책임을 맡고 이에 10개 대학이 참여한 것이다.5
‘교육의 복원’은 단지 나무그늘 아래나 천막 교실에서 혹은 피난지의 대학이나 학교에서 수업을 재개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학교 시설의 복구와 재건에 부모와 학생들이 직접 나섰다. 한국전쟁 당시 각급학교의 시설 자원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자료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문교사’의 서술을 확인해 보자. “6.25 사변 전에 보유한 교실 총수는 대학을 포함하여 42,478개 교실이었는데 전파가 약 23%인 10,018개 교실, 반파가 약 11%인 4,969개 교실, 기타 파손이 약 30%인 13,971개 교실이나 되었다. 이 외에 실업 교육에 관계된 제반 시설은 전국적으로 약 85%가 파괴된 것으로 추산”6되었다. 파괴된 교실을 복구하기 위해 부모와 학생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스스로 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기부하고 후원하고 노력 봉사했다. 그 재건의 모습을 다시 한번 외국인의 증언을 통해 확인해 보자. 1952년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이다.
남한의 모든 곳에서 가혹한 경제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녀를 교육시키려는 민중의 열의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열의는 무엇보다도 학생들 자신에게 가장 뚜렷하다. 방방곡곡에서 부모와 학생들이 교사와 손을 잡고 학교를 보수하고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흙바닥에 심지어 한 교실에 백 명씩이나 앉아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그러한 조건 하에서 공부할 기회를 갖게 된 것에 행복해한다. 부모들은 교사에게 봉급을 줄 수 없다고 하지만 교사들은 다음 날의 수업을 위한 자료를 준비하느라 규정 시간을 넘어 헌신하고 있다(-Mr. Roy B. Bowers). 맨바닥에서 이루어지는 대학의 수업들, 천막이나 버려진 창고에 모여든 초등학생들, 기울어진 성당의 지하실에서 이루어지는 고등학교 과학 수업, 마을의 학부형들이 착수한 임시 가교사 건축을 위해 무거운 통나무를 지고 나르는 중학교 학생들, 혹한의 야간 교실에 모여들어 양초불 밑에서 공부하는 나이를 넘긴 아동들, 한글 첫걸음을 배우는 문맹의 징집병 학급, 하늘을 지붕삼은 노천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수업들, 봉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교사들이 밤늦게까지 수업하는 모습들. 모든 곳에서 일군의 학생들이 엄청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기꺼이 용기 있게 학교를 오가고 있다. 이것이 궁극적인 미래의 성공을 확신하는 한국 교육의 정신이다(Mr. Robert M. Hager).7
여전히 전선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고 물적, 인적인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비상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재건하기 위한 한국의 민과 관의 이런 노력은 외국인의 눈에도 경이로운 것으로 비쳤다.
한국전쟁기 정부의 적극적인 교육 진흥 정책 중에 논란을 불러일으킨 정책의 하나로 ‘전시학생증 및 학생징집보류’ 정책이 있었다. 정부는 1950년 12월의 「국민방위군설치법」에 따라 국민방위군으로 징병제를 실시하면서 그와 병행하여 「학교군사훈련실시령」을 공포하여 재학생들이 징집 보류를 받을 수 있는 제도를 도입했다. 대학에서 시작해, 사범학교, 고등학교 등의 학생에게 징집 보류 증명서 역할을 하는 이른바 ‘전시학생증’을 배부하여 그들이 계속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교육 진흥 나아가 미래의 엘리트 자원의 보호라는 정부의 정책 의도와는 달리, 이 ‘전시학생증’은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빚어낼 가능성이 컸다.
백년대계를 위해 학생을 아껴두는 ‘전시학생증’의 뜻도 모르고 공부와는 담을 싼 한심한 청년들도 합법적으로 떳떳하게 군대를 빠지는 구멍으로 알고서 ‘전시학생증’ 주위에 많이도 꾀었다. 대학의 간판이 붙고 전시학생증만 준다면 학생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전쟁에 안 나가려고, 아들을 ‘사지’에 보내지 않으려고 자식과 부모는 다 함께 머리를 싸맸다. 소 팔고 땅을 팔아서도 대학에 넣으려고 애썼다. 훗날의 ‘우골탑’은 전란에서 그 기초가 다듬어졌고 학원모리배의 반석이 굳어진 것도 이때다.8
전시기에 대학 진학을 중심으로 펼쳐진 한국인의 교육열의 밑바탕에는 일부일지라도 ‘전시학생증’과 징집 유예에 대한, 나름으로 절실하나 학습 욕구라고는 하기 어려운 욕망이 작동했을 것이다.
여기서 1950년 6월에서 1952년 6월까지 2년간 국가가 추진한 주요 교육정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다음은 1952년 6월 18일에 「국무총리에 제출한 문교부 시정 4년간 업적보고서(발췌)」의 주요 내용이다.
(1) 동란하의 교육: ① 노천수업에서 시작해 가교사수업으로. ② 중등교 피난학생에 대한 조치: 1951년 1월 이후 피난학교에서의 교육 재개. ③ 대학 피난 학생에 대한 조치: 전시연합대학, 전시대학 운영. (2) 파괴 손실된 교사 복구: ECA 원조자재로 가교사 건축. (3) 대학교육에 관한 중요시책: 1도1교정책(충남,전북,전남,경북에 국립·공립대학교 신설). (4) 국가고사 실시: 1951년도부터 중학교 입시 국가고사 실시.9 (5) 교육자치제의 확립: 1952년 5월 지방 총선거와 교육위원회 위원선거 실시를 통해 도교육위원회 및 중앙교육위원회 성립. (6) 성인교육 실시상황: ① 문맹일소(공민학교 및 국문보급반 운영. 징병 대상 장정 교육 우선) ② 공민학교 교육 ③ 계몽교화 (7) 국민사상 지도원: 1951년 3월부터 전문위원 및 사무국 설치. 사상지도서적 배부, 강연회 개최 등. (8) 학도호국단을 통한 학생자치 훈련: 1950년 12월부터 학생자치 조직으로 개편.10
위의 여덟 가지 항목에 이르는 전시기 교육정책 중에서 (1)과 (2), 그리고 (7)이 응급적인 비상조치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면, 나머지는 평상시에 구상되고 집행되었을 법한 ‘정상적인’ 교육 조치에 가까운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도 1도 1교 방침에 따라 지방에 국립종합대학을 설치한다는 구상은 전시기의 비상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이례적일 정도로 적극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의 문교부장관 백낙준이 1951년에 이른바 ‘1도1교의 국공립대학설치’ 구상을 발표하자 국회는 재정 상의 이유로 반대 입장을 보였다. 이에 대해 백장관은 “우리는 고려 때 팔만대장경을 간행한 것으로 역사에 문화민족으로 기록되는 것과 같이 오늘날 피란 중에 다수의 국립대학을 설립한 것으로 다시 문화민족으로 역사에 남을 것”11이라 역설하여 계획을 통과시켰다고 한다.
전시기에 이러한 정상적인 조치들이 구상되고 집행되었다는 것은 정부와 민간이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혼란의 비정상에서 벗어나 매우 빠르고 기민하게 정상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러한 정부의 정상적인 교육정책을 대표하는 것이 6·3·3·4 학제 제정이다. 1951년 3월 20일, 부산에서의 피난 국회에서는 법률178호로 「교육법」을 개정하여 일 년 반 전에 제정된 학제를 6·3·3·4제로 개편·확정지었다.
한편, 1953년 4월에는 「교육공무원법」을 제정하여 교원의 법적 지위를 확립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교육공무원법」에서 사립학교 교원도 국가공무원에 준하는 위치로 자리매김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국가의 중앙집권적인 교원 통제 정책이 반영되어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공사립 교원에 대한 차별 대우 철폐를 원하는 사립학교 교원들의 요구도 반영되어 있었다. 이항녕의 다음과 같은 증언을 보자.
6.25 사변이 나면서 관직에 있던 사람들은 피란도 하기 쉬웠고, 또 피란 중에도 여러 가지 특전을 입었다. 그런데 무위무관의 자리에 있던 일반 서민들은 피란하기도 어려웠고, 또 피란살이 자체도 여간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전시 중에 같은 교원이면서도 국·공립학교에 근무하던 사람들은 봉급과 배급이 있었지만, 사립학교에 근무하던 사람들은 배급은 고사하고 봉급조차도 못 받는 것이 예사였다. 부산 피란 시에 공무원들에게는 광목이나 밀가루 따위의 배급이 더러 있었다. 어느 때 국·공립학교 교원에게 밀가루 배급을 주는 것을 보고 사립학교 교원들이 부러워하며 문교부에 가서 자기네들도 배급을 달라고 하였더니 공무원이 아니라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들도 어떻게 공무원 대우를 받을 길이 없나 생각하고 있던 때, 교육공무원법이 제정된다고 하여 이에 찬성하였다는 것이다.12
전쟁이 낳은 역설 중의 하나인데 한국에서의 사학이 지닌 관학지향적 특질이 아래로부터의 사학의 요구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한편, 한국전쟁기의 교육정책을 다룰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미국으로 대표되는 외국의 교육원조 정책이다. 교육원조의 주요 기구를 보면, “한국전쟁 직후 일반적인 부흥원조의 중심이 된 기관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이었으며, 미국의 교육원조의 중심이 되었던 기관은 미국대외활동본부(FOA: United States Foreign Operations Administration)였다. 1952년에는 국제연합총사령관 산하 경제조정관실(OEC: Office of the Economic Coordinator for Korea)이 「경제조정협정」에 의해 설치되어 한국에 대한 미국 원조를 계획 조정하며, 한국경제의 안전과 발전에 관해 미국 측 제안을 건의하는 역할을 하였다.”13 이들 기구를 통해 제공된 교육원조의 규모를 보면 “해방 후 미국이 제공한 무상 증여 원조는 총 금액으로 환산하면 31억 3,730만 달러에 달했는데 그 가운데 약 56%에 달하는 17억 4,390만 달러가 1953년 8월부터 1961년 9월까지 FOA/ICA를 통해 제공되었다.”14
한국전쟁기 교육 재건 나아가 교육 팽창의 기반 마련에서 이러한 교육원조가 기여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와 동시에 수업료 지불을 넘어서서 학교교육 운영을 위한 재정 부담을 주저하지 않았던 한국 민중들의 지원이 결정적이었다. 수업료의 조달 외에 민중의 주된 지원 내용은 이른바 ‘사친회비’ 조달이었다. 미국의 PTA(Parent-Teacher Association)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 ‘사친회(師親會)’는 한국에서는 실질적으로 학부모들이 학교 운영의 자금을 조달하는 단체로 작동했다. 예컨대 “1953년도 중등교육 재정 수금표를 보면 사친회비가 전체 재정 가운데 평균 53%를 차지하고 있었다. 공립의 경우는 약 52%, 사립은 약 56%가 사친회비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사친회의 지원이 없었다면 학교 운영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초등학교를 비롯한 각급 학교의 급격한 팽창은 이처럼 학부모의 사부담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다.”15
그렇다면 한국전쟁기에 교육의 양적 추이는 어떠했을까. 각급학교 별 학생 수의 추이를 보면 국민학생은 1949년의 2,771,078명에서 1952년에는 2,525,369명으로 취학규모가 일시적으로 약간 줄어든 반면에 중등학교(중학교, 고등학교, 사범학교) 학생 수는 1949년의 348,540명에서 전후 직후인 1954년에는 496,570명으로 142% 가량 늘어났으며 대학생의 수는 1949년의 29,401명에서 1954년에는 62,663명으로 213%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16 1950년 6월의 한국전쟁 발발 이후 첫 1년간의 카오스 상태가 지나면서, 적어도 학교 취학자의 규모 면으로 볼 때 한국 교육은 전쟁 이전의 정상을 회복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중등 및 고등교육의 수준에서는 단기간에 급격하게 팽창하는 양상까지 보였던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한 표면적인 요인으로는 앞서 언급한 외국의 교육원조와 민들의 교육재정 조달 요인을 들 수 있으나 그것 이외에도 한국전쟁기 중등 및 고등교육의 팽창이 주로 사학의 증설에 의한 것이었다는 요인도 간과할 수 없다. 사립의 비중이 매우 적은 국민학교를 제외하고 1953년과 1954년 두 해의 학급수를 비교해 보면, 중학교의 경우 공립은 3,250교에서 3,213교로 오히려 약간 줄어든 반면, 사립은 1,285교에서 1,444교로 더 늘어났다. 고등학교의 경우에도 공립은 2,173교에서 2,025교로 약간 줄어든 반면, 사립은 432교에서 717교로 늘어났다.17 한편, 같은 기간에 국공립대학은 서울대학을 제외하고 전쟁기에 전남, 전북, 경북, 충남 등에 4교가 증설되는데 불과했으니 나머지는 모두 사립의 신설이었던 것이다. 1954년 7월 현재 학생 수로 볼 때 사립의 비중은 중학교가 324,114명 중 100,124명으로 30.9%, 고등학교가 160,266명 중 46,221명으로 28.8%, 대학교가 62,63명 중 33,423명으로 53.3%를 차지했다.18 이후 이 경향은 더욱 강화되어 중등 및 고등교육에서 사립의 비중은 현격하게 늘어나게 된다.
한국전쟁과 국가의 교육정책
총체적으로 볼 때 한국전쟁의 과정은 김동춘에 따르면 “미국의 한반도 개입사이자 국가의 탄생사이며, 국민의 형성사이고 사회운동과 계급 갈등의 강압적 소멸사”19로 규정된다. 한국전쟁의 결과가 지닌 정치적 의미에 대해서는 예컨대 전상인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정착된 한국 사회의 ’높은 국가성(high stateness)‘과 ’낮은 계급성(low classness)‘은 민주주의의 형식 속에서 사실상의 권위주의적 실천을 초래했다. 한편으로 ’부르조아 없는 민주주의는 무망‘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조아 지배에 저항하는 피지배계급의 조직적 세력화도 부재했다.20
달리 말하여 한국전쟁으로 인해 우리 정치에 ‘민주주의의 형식’ 속에서 ‘권위주의적 실천’이 야기되어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약체화된 국가가 출현하는 동시에 그것을 견제하고 때로 저항할 수 있는 계급운동이 부재한 독특한 사회구조가 탄생한 것이다. ‘높은 국가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영역 중 하나가 교육이었다.
또 한편으로 전쟁은 거대한 파도처럼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었다.
일제에 의해 1935∼45년 사이에 시작된 한국 국민의 대대적인 이산은 민족분단으로 말미암아 더욱 심화되었으며, 한국전은 이를 완결지은 셈이었다. 모든 계급의 한국인들은 이제 토착적인 뿌리에서 완전히 뽑혀 나온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사회적 보금자리 바깥으로 송두리째 떠밀리거나, 밀려나거나, 내던져졌다.21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모든 계급의 한국인’이 뿌리에서 뽑혀 나와 자신의 보금자리 바깥으로 떠밀리고 내던져지는 대대적인 ‘이산(diaspora)’이 일제 말기에 시작되어 해방 후 분단으로 심화되었고, 한국전쟁에 의해 그것이 ‘완결’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거대한 인구이동, 사회이동은 우리 사회의 기본적 성격을 바꾸는, 혁명에 필적할 만한 구조적 변화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야기한 정치적, 사회적 영향으로부터 교육 세계도 자유롭지 않았다. 먼저 국가의 교육정책 변화를 보자. 한국전쟁은 이념 갈등을 수반하는 ‘내전(civil war)’의 성격이 짙은 전쟁이었고 그것이 만들어낸 정치적인 산물은 전상인의 표현을 빌자면 ‘무적의 국가’였다. 전쟁 과정에서의 국가 테러리즘의 만연과 일상화22와 반공주의의 심화는 “‘국민의 국가’가 아니라 ‘국가의 국민’을 만들어냈고, 사회는 사실상 국가의 피조물에 불과했다.”23 다만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의식은 일방적으로 강요된 공포의 산물만은 아닌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전상인은 또한 지적한다. 그 이중의식의 “하나는 전쟁 상황이 국가의 중요성을 체감시킴으로써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고양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국가에 대한 불신과 공포가 동시에 성장하였다는 점이다.”24
한국전쟁이 탄생시킨 이러한 이중의식의 대상으로서의 국가는 이후에 ‘반공주의’를 교육의 기본적인 이념 원리로 새롭게 정착시켰다.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전시기에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교과서다. 예컨대 1952년의 국민학교 사회과 6학년 교과서 『우리나라의 발달』의 다음 대목을 보자.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사변의 돌발: 한편 북한에서는 공산 제국주의 소련이 그 앞잡이 김일성을 내세우고 대한민국을 마저 삼켜 보려고 5개년 동안 오로지 이를 위하여 백성을 혹사하며, 온갖 물자를 소련에게 바치게 하고 그 값으로 무기를 가져다 동족 상쟁의 내란을 꾸미게 하였다.25
이러한 반공주의적 서사는 반드시 ‘국정’ 교과서에만 국한한 것은 아니었다. 전시기 검인정 교과서로 발행된 『반공독본』 안에서도 일관되게 반공주의적 서술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1954년 발간된 검인정 교과서 4학년 『반공독본』의 한 대목이다.
덕재: “공산당은 그렇게 비밀 비밀하고 감추어 두면 국민이 가만히 있나요?”
아버지: “민주주의 나라에서는 온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지만, 공산당들은 공산당이란 정당이 주장이 되어, 온 국민을 기계나 짐승처럼 부리고 있단다.”26
민주주의 대 공산주의라는 이분법적 대립항을 축으로 하는 반공주의적 교의는 비단 전시기만이 아니라 이후에도 1980년대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공인된’ 서술로 교과서 내에서 재생산되었다. 교육에서의 ‘반공주의’는 국가의 장학 방침에서 시작하여 ‘반공도덕’이라는 독립적인 교과의 출현은 물론, 교과외 교육의 영역에서도 ‘반공웅변대회’, ‘반공백일장’, ‘반공포스터대회’, ‘반공궐기대회’, ‘반공강연’ 등으로 다양한 형식으로 전개되어 간다.
다만 주의할 것은 한국전쟁 이후의 반공주의가 단지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국민들에게 강요된 지배 이데올로기로만 볼 수는 없다는 점이다.
… 냉전적 반공주의는 한국인들 개개인에게 전쟁의 사회심리적 상처를 치유하고 후유증을 최소화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효과적이었던 만큼 냉전적 반공주의는 한국인들의 의식세계에 깊이 내면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27
이러한 지적이 시사하듯이, 한국인들의 전쟁에 대한 상처 입은 기억을 치유하는데 반공주의가 효과를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전후 교육에서의 반공주의 재생산은 민들의 자발적 동의를 상당한 정도로 확보해 낼 수 있었다.
한편, 한국전쟁은 반공주의와 함께 친미주의라고 하는 새로운 이념 원리를 교육계에 도입하는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학교교육에서의 친미주의의 등장을 다시 교과서를 통해 엿보기로 하자. 위에서 인용한 『반공독본』의 후반부에는 「위대하신 반공 지도자」라는 타이틀로 대통령 이승만의 미국의회 연설 장면이 재현되어 있는데 그 한 부분을 보자.
“… 거짓말 잘하고 짐승 같은 공산당과 이야기하며 평화를 의논하는 것은 마치 호랑이와 의논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공산당은 저의 이익이라고 생각할 때에는 어떠한 나쁜 일이라도 합니다. 우리는 자유의 힘으로 공산당을 쳐부숴야 합니다.” … 이 말씀에 흥분한 의원들은, “와아!” 소리 지르며 이 대통령의 말씀이 옳다고 또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 “나는 여러분의 귀한 자녀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비싼 피를 흘리어 우리나라를 구하여 준 것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들의 죽음은 자유 세계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자유는 우리 사람에 있어서 큰 생명입니다.”28
위의 교과서 서술에서 ‘짐승 같은 공산당’을 쳐부숴야 한다고 하는 반공주의와 ‘우리나라에 와서 비싼 피를 흘리어 우리나라를 구하여 준’ 미국에 감사하는 친미주의는 하나로 이어져 있다.
한국전쟁기에는 사회과 교과서 내에서 미국이라는 국가로부터의 원조 자체가 기대할 만한 것으로 서술되기도 했다.
… 우리는 현재 큰 곤난과 파괴 속에 살지마는 우리의 앞 길은 미국을 비롯한 민주주의 국가의 따뜻한 원조를 크게 기대할 수가 있으며, 장래는 험하고 곤난은 많지마는 광명에 차 있다.29
실제로 이 교과서의 제일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헌사가 한글과 영문으로 공히 실려 있었다.
이 교과서의 종이는 미국 사람들이 자유아시아위원회를 거쳐 대한민국 학교 어린이들에게 보낸 선물이다. 미국 사람은 사람의 자유와 나라의 독립을 굳게 믿는다. 이런 굳은 신념을 가졌으므로 그들은 한국의 어린이들이 자유롭게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이 책과 또 수백만 책의 교과서를 찍어낼 종이를 대한민국 문교부에 부쳐 준 것이다. 대한민국 문교부장관 백낙준 [COMMITTEE FOR A FREE ASIAN INC. This textbook is a gift of the American people presented through the American Committee for a Free Asia to the school children of the Republic of Korea. The American people firmly believe in human freedom and national independence. Because of this sincere belief they have given the paper for the printing of this and thousands of other school books to the Ministry of the Republic of Korea so that the children of Korea may continue to study in freedom. Paik. Minister of Education. Republic of Korea] (1952년 1월 31일 발행).30
실제로 교과서를 찍어낼 종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 원조를 받기 위하여 백낙준장관이 1951년 중반에 직접 미국을 방문해 호소했고 그 결과 확보한 종이로 전시기 교과서가 제작되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1953년부터는 UNKRA의 종이 원조로 교과서 제작이 계속된다. 이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은 즉물적으로 미국의 원조를 체험했을 것이고, 그것은 단순한 이념 선전 이상으로 고마운 나라 미국의 이미지를 그들의 의식 속에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림 2] 국민학교 교과서 「우리 나라의 생활 4-1」 (1953년 3월 31일 출판) 뒷면.

친미주의라는 이념은 초중등교육에서의 국민 형성의 원리로 작동한 것 이상으로 고등교육에서의 엘리트 형성에서 주요한 원리로 작동했다. 우선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 교육에 대한 미국의 문화적, 기술적인 원조다. 먼저, 한국전쟁을 계기로 하여 한국 교육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단지 물적인 수준에 그친 것이 아니라 교육사절단 활동을 통한 문화적 원조로 전개되었다.
미국의 유니타리안서비스위원회(Unitarian Service Committee)에서 파견된 교육사절단은 1952년에 제1차(메리 하비지(Mary Harbage) 여사 외 6명), 1953년에 제2차(멀홀랜드 박사(Dr. Vester M. Mulholland) 외 5명), 1954년에 제3차(벤자민 박사(Dr. Harold Benjamin) 외 12명)로 내한하여 각 10개월씩 한국에 체류하면서 광범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조지피바디사범대학(George Peabody College for Teachers)의 교수로 구성된 사절단도 1956년부터 내한하여 1961년까지 교사양성교육, 도서관교육 등에 관하여 기술적 조언과 원조를 계속하였다.31 이러한 미국 교육사절단의 방한 활동은 한국의 교육지도자들 안에 친미주의의 수용을 위한 정서적 토대를 만들었다.
미국 사절단의 활동 못지않게 엘리트 내에서의 친미주의의 확산에 기여한 것은 다름 아닌 유학이다. 1950년대에 문교부는 해외 유학 인정 선발시험을 통해 유학생을 선발하고 인정하였는데, 1953년부터 66년까지 인정한 해외 유학생 9,398명 중 6,368명(86%)이 미국에 유학했다. 그 외에도 미국경제원조회(USOM)가 주선한 교육교환계획을 통해 모두 2,464명의 한국인이 외국으로 나갔는데 그중 72%에 해당하는 1,774명이 미국행이었다.32 이러한 미국 유학을 통해 형성된 교육엘리트 집단의 이후 활동에 대한 평가는 한편에서는 ‘한국교육 내에 미국 교육문화를 이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33는 식의 부정적인 것도 없지 않지만, 또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1950년대에 미국은 세계 굴지의 문명국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이 미국에 대해 이른바 ‘문화적 해바라기 현상’을 나타낸 것은 당연하다. 즉 한국은 이 시기에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미국의 ‘우수한’ 제도와 문물의 장점을 흡수·섭취하려고 노력했다. … 이러한 노력을 통해 한국인은 미국 문명의 장점을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섭취·모방하는데 성공했다.34
요컨대,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는 한국전쟁 이후 국가가 교육정책의 이념 원리로 새롭게 도입한 이데올로기였다. 이 두 이데올로기는 1980년대 중반까지 이렇다 할 본격적인 의심이나 도전도 받지 않고 비교적 지속적, 안정적으로 권위를 누린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국전쟁의 영향력은 국가의 교육이념 영역만이 아니라 민의 교육행위라는 영역에서 더욱 심대하고 광범한 것이었다.
한국전쟁과 민의 교육행위
한국전쟁은 한국인의 교육관과 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전쟁의 총체적 파괴력이 빚은 이른바 ‘평준화’ 효과다.
한국전쟁은 무차별적으로 파괴한 총력전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파괴력 앞에서 견딜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직접적인 물리력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했다. 피난민 행렬 속에서 양반과 천민이 따로 있을 수 없었다. 거대한 폭력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사실이 체험적으로 각인되었음에 틀림없다. … 또한 한국전쟁의 무차별적 파괴로 초래된 빈민화는 사회적 지위에 따른 위세의 평준화를 수반한다. 다시 새로운 계급과 지위 서열이 생겨날 때까지는 누구나 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되는 셈이다.35
이 명제를 제출한 정진상은 한국전쟁으로 인한 모든 사람의 전층적인 ‘빈곤화 = 평준화’에 더하여, 전쟁 과정에서의 격렬한 계급갈등, 그리고 농지개혁으로 인해 농촌공동체에 기반을 둔 신분제 유제(그것은 예컨대 농촌 지역에서의 대지주와 그에 속한 머슴, 하인, 소작인들 간의 관행적인 위계를 의미한다) 및 그와 결합된 양반문화의 해체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36 “신분제 해체는 해방보다는 전쟁이었다. 전쟁 후에는 양반이 하인에게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37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전쟁은 말하자면 ‘혁명 없는 혁명적 변화’를 초래했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사회적 변화는 도시화다. 신분제 유제의 해체는 농지개혁이라는 제도적 변혁을 통해 기본적으로 실현되는 것이지만, 또 하나의 해체 과정은 예전의 유제적인 신분제적 구속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대거 도시로 이주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서구와는 달리 산업화를 전제로 혹은 매개로 하지 않은 채로 우리 사회에서는 해방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단기간에 급속하게 도시화가 전개되었다. “도시화율은 1949년에 17.3%였던 것이 1955년에는 24.5%, 1960년에는 28.0%로 급격히 증가했다.”38
이상과 같은 단기간의 급격한 사회이동과 계층구조의 재편은 교육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기존의 신분제적 유제의 해체와 인구이동이라는 요인이 반드시 그 자체만으로 필연적으로 교육열을 고조시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학교 진학이라는 교육적 경로만이 유일한 상향적 사회이동의 경로는 아니며, 노동자나 농민들의 계급운동을 통한 삶의 조건 개선이나 사회안전망의 구축 등과 같은 집단적인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측면에서도 한국전쟁은 또 하나의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탈계급화, 즉 “정치행위자 내지 주체로서의 계급(class as a political actor)의 소멸 내지 저발전”, 그리고 농민의 정치적 탈동원화, 즉 “국가의 정책결정과정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하고, 조직화를 방해하며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라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평가된다. 한국전쟁은 해방공간에서 사회 성원 중 상당수에게 강고하게 자리 잡았던 계급적 정체성을 ‘강압적으로’ 해체시키는 과정이었던 것이다.39
이처럼 전쟁 과정에서 계급적 정체성이 ‘강압적으로’ 해체되면, 이후에 ‘모든 집합적이고 저항적인 대안의 추구는 위험시’된다. 민들에게 유일하게 열려 있는 경로는 교육을 통한 개인주의적 상승이 되는 것이다. 김동춘에 따르면 “산업화가 본격화되기 이전인 50년대 한국 과잉교육열의 정치사회학적 유인구조”40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학력’ 자체가 지닌 특장이 전쟁 과정에서 더욱 매력적으로 부상했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전시기에 시행된 ‘학생징병유예조치’ 등은 학력이 생명줄이 될 수 있음을 민들에게 각인시켰다. 동시에 교육을 통해 취득하는 학력 자체가 “어떤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도 안전하고 보장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쟁체험을 통해 체험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전쟁을 겪는 과정에서 가옥이나 재물은 쉽게 파괴되고 손실되지만, 교육의 성과는 그 어떤 경우에도 가장 안전한 필생의 보고가 된다는 사실을 경험한 것”41이다. 더구나 그 교육의 경로는 주로 도시에 몰려 있었다. “… 1955년 당시 전국 85개의 초급대학 이상 대학교육 기관 중 29개가 서울에 소재해 있었고 전국적으로 9만 명 수준의 대학생 중 50%에 해당하는 42,666명이 서울에 집중해 있었다.”42
한국전쟁으로 인해 농촌공동체 내의 신분제적, 양반문화적인 유제의 권위가 한꺼번에 무너진 후 그로부터 축출되거나 스스로를 해방시킨 이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도시에서는 누구도 서로의 출신이나 가문, 배경을 따지려 하지 않았다. 난폭할 정도의 수준으로 평준화된 익명의 엄청난 다수 대중들이 새로운 출발선에 다시 서서 사회적 지위 획득의 경쟁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그들을 출발선에 동일하게 세운 거대한 힘이 바로 한국전쟁이었으며, 그 경쟁의 트랙은 다름 아닌 학교교육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출발선에 서서 경주를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이 갑자기 엄청나게 늘어나게 되었다. 이른바 ‘베이비붐’의 출현이다. “‘아기 붐’ 현상은 전쟁 중의 출생률 저하와 사망률 상승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 때(1955년〜1960년 사이)의 출생률은 평상시보다 10%를 웃돌게 됨으로써 전쟁 때와 비교하면 20%의 증가를 보였다. 이는 60년대 이래 70년대에 이르기까지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취학 적령기 아동의 증가, 취업을 해야 하는 젊은이의 증가, 가임 여성의 증가 등 사회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43 요컨대 한국전쟁은 사회계층의 거대한 전면적 재편 과정을 초래하며 한국인들을 동일한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난폭하게 평준화시켰고, 그들의 새로운 지위 획득 경쟁은 ‘교육’을 가장 주된 장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교육열의 전계층적 발흥의 계기는 역시 한국전쟁이 유발한 사회변화였던 셈이다.
끝으로 한국전쟁기에 만들어진 국가의 교육정책과 민의 교육행위 양자 간의 ‘관계’의 특질에 다시금 주목해 보자. 학교교육의 목적과 내용은 국가에 의해 배타적, 독점적으로 규정되면서도 그 학교교육의 운영과 팽창이 민의 전면적인 후원과 기부를 통해 확보된다고 하는, 학교교육에서의 국가와 민의 불균형한 ‘관계’가 그것이다. 이런 특질의 ‘관계’가 한국전쟁기에 새롭게 탄생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식민지기에 형성되어 해방 이후의 한국 교육에 남겨진 말하자면 식민지적인 유산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45년 해방 이후에 우리 사회는 그 유산을 청산하는데 실패했거나 혹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청산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전쟁 이후 새롭게 형성된 국가와 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보다 본격적으로 정착되고 확대재생산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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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이청준 (1995), 『소문의 벽』, 한국문학소설대계 53권, 동아출판사, 213-215쪽.
- 김성칠 (2009), 『역사 앞에서―한 사학자의 6ㆍ25일기』, 창비, 266쪽.
- Greg McGreggor, “Education Pushed by South Koreans Despite Destruction of Many Schools,” New York Times, June 8, 1951.
- 白樂濬 (1954), 『韓國敎育과 民族精神―庸齋 白樂濬 博士 選集』, 韓國敎育文化協會, 284쪽.
- 박선영, 김회용 (2008), 「한국전쟁기 대학상황의 이해―부산지역을 중심으로」, 『한국학논집』, 37,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353-354쪽.
- 文敎40年史編纂委員會 (1988), 『文敎40年史』, 文敎部, 133-134쪽.
- Civil Education Section (1952), “Education in the Republic of Korea”, Staff Section Report, United Nations Civil Assistance Command, Korea, p.53.
- 「말따라 노래따라 哀歡 30年 (12) 戰時學生證」 『東亞日報』 1975.9.1.(4).
- 1951년 7월 31일에 실시된 중학교 입시 국가고사는 전국 154개 시군 중에서 140개 시군에서 91,684명의 수험생들이 수험을 치렀는데 이는 당시의 졸업학년 재적자의 약 24%, 즉 4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沈泰鎭 외 (1994), 『師友文選』, 교문사, 124-125쪽).
- 大韓民國國防部政訓局戰史編纂會(편) (1953), 『韓國戰亂二年誌』, 國防部, C205-C207쪽.
- 李恒寧 (2011), 『작은 언덕 큰 바람-소고 이항녕 선생 유고집』, 나남, 126쪽.
- 李恒寧 (2011), 앞의 책, 131-132쪽.
- FOA는 1955년 7월 국제협조처(ICA: International Cooperation Administration)로 개편되었다. OEC는 국제연합 산하의 기구였으나 1955년부터는 워싱턴에 있는 ICA 본부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아 국제협조처 원조 관련 업무를 관할했다. 1959년부터는 OEC가 주한미국활동처(USOM: United States Operations Mission to Korea)로 개편되면서 미국의 대한원조 전반을 관장하게 되었고, ICA도 1961년에 국제개발처(AID: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로 개편되었다(김명진 (2009). 「1950년대 고등교육 협력에 관한 연구―서울대 미네소타 프로젝트 사례」, 서울대학교 대학원 교육학박사학위논문, 21쪽).
- 김명진 (2009), 앞의 논문, 23쪽.
- 김기석, 강일국 (2004), 「1950년대 한국교육」, 문정인, 김세중(편),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선인, 544쪽.
- 1949년 수치는 문교부 (1949), 『대한민국교육개황』, 미출판간행물, 6-10쪽. 1948년 및 1952년 수치는 大韓民國國防部政訓局戰史編纂會(편) (1953), 『韓國戰亂二年誌』, 國防部, D53쪽에서, 그리고 1953년 수치는 大韓民國國防部政訓局戰史編纂會(편) (1954), 『韓國戰亂三年誌』, 國防部, D54쪽에서, 1954년 수치는 大韓民國國防部政訓局戰史編纂會(편) (1955), 『韓國戰亂四年誌』, 國防部, D62-D67쪽에서 추출하였다.
- 수치의 출처는 주 16과 동일하다.
- 大韓民國國防部政訓局戰史編纂會(편) (1955), 앞의 책, D62-D67쪽.
- 김동춘 (2000), 『전쟁과 사회―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돌베개, 59쪽.
- 전상인 (2001), 『고개숙인 수정주의』, 전통과현대, 183-184쪽.
- 커밍스, 브루스 (2001), 김동노 외(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작과비평사, 422쪽[Cumings, Bruce (1997),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New York: W.W, Norton & Company].
- 조사에 따르면 1952년 4월까지 한국 민간인 희생자는 99만 명이나 되고 그중 43만 명은 정치적 보복 및 반보복 등 국가 테러리즘의 희생자였다고 한다(정진상 (2000a), 「한국전쟁과 전근대적 계급관계의 해체」, 『경제와 사회』, 46, 비판사회학회, 101쪽).
- 전상인 (2001), 앞의 책, 169쪽.
- 전상인 (2001), 앞의 책, 173쪽.
- 문교부 (1952), 『우리나라의 발달 6-2』, 문교부, 121쪽.
- 한국교육문화협회 (1954), 『반공독본 5』, 박문출판사, 29쪽.
- 강인철 (1999), 「한국전쟁과 사회의식 및 문화의 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7―한국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 백산서당, 233쪽.
- 한국교육문화협회 (1954), 『반공독본 5』, 박문출판사, 63쪽. 이는 1954년 7월 28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워싱턴 국회의사당에서 행한 연설을 각색하여 교과서 내용으로 실은 것이다.
- 문교부 (1952), 『우리나라의 발달 6-3』, 문교부, 118쪽.
- 문교부 (1952), 『우리나라의 발달 6-3』, 문교부.
- 金鍾喆 (1967), 「韓國의 敎育制度와 敎育行政에 미친 美國文化의 影響」, 『亞細亞硏究』, 10(2), 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93-106쪽.
- 정성호 (1999), 「한국전쟁과 인구사회학적 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7―한국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 백산서당, 40쪽.
- 이진이 (1989), 「1950년대 미국의 대한교육원조에 대한 연구」, 교육출판기획실(편), 『분단시대의 학교교육 1』, 푸른나무, 221쪽.
- 유영익 (2006), 「거시적으로 본 1950년대의 역사」, 박지향 외(편),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2』, 책세상, 439쪽.
- 정진상 (2000a), 앞의 논문, 107-108쪽.
- 김준형, 정진상 (1999), 「양반문화의 해체과정과 잔존양상」, 『경남문화연구』, 21,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소, 352.
- 정진상 (2000b), 「해방직후 사회신분제 유제의 해체」, 지승종 외, 『근대사회변동과 양반』, 아세아문화사, 205.
- 정진상 (2000a), 앞의 논문, 107쪽.
- 강인철 (1999), 앞의 책, 203쪽.
- 김동춘 (1999), 「한국의 근대성과 ‘과잉교육열’」, 박영은 외, 『한국의 근대성과 전통의 변용』,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24-125쪽.
- 정성호 (1999), 「한국전쟁과 인구사회학적 변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편, 『한국현대사의 재인식 7―한국전쟁과 사회구조의 변화』, 백산서당, 47-48쪽.
- 강인철 (1999), 앞의 책, 266쪽.
- 정성호 (1999), 앞의 책, 21쪽.
서울교육대학교 명예교수이며, 식민교육사 및 교육역사사회학, 동아시아근대교육의 비교사회사에 관해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식민지 초등 교육의 형성』(교육과학사, 2000), 『근대 동아시아의 학생문화』(서해문집, 2018), 역서로는 야나기 하루오의 『학급의 역사학』(교육을바꾸는책, 2026), 가리야 다케히코의 『대중교육사회의 형성』(학지사, 2023), 고마고메 다케시의 『식민지제국 일본의 문화통합』(공역, 역사비평사, 2008) 등이 있다.

요즘 5학년 딸아이 읽으라고 사준 책을 가끔 제가 읽습니다. 어른의 책은 너무 어렵고, 청소년 문고는 쉽고 술술 읽힐것 같아 읽어 보았습니다. [큰 애기 복순이]라는 책인데 보도연맹도 나오고 빨치산 등등도 나오는 전쟁 소설인데 교수님의 글에서 그 시절 교육에 대한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궁금이 님의 댓글 반갑게 읽었습니다.
너무 어렵지 않게 읽으셨다니 고마운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가독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현대교육사를 집필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