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학교’는 한국교육에 무엇을 남겼나?
2020년 1월에 EBS에서 방송했던 교육대기획 10부작 ‘다시, 학교’는 한국의 초·중·고교육에 잔잔하지만 깊은 울림을 던졌다. 제 1부 ‘가르치지 않는 학교’에서부터 제 10부 ‘글을 못 읽는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교육적 갈등이자 과제가 되었던 주제를 다룬다. 특히 그동안 여러 언론매체가 간헐적으로 ‘시험’, ‘창의성’, ‘수학을 포기한 학생’ 등을 다뤘지만 실증적이지 못해 격론만 벌어졌는데 이 프로그램은 어떤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만 학습효과를 크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 구체적이고 깊게 성찰하도록 했다.
그 기획이 주목받았던 까닭은 2015 역량중심교육과정이 시행되고 각 지역교육청이 재구성한 ‘새로운 학력’이라는 교육과정이 교육정책의 핵심을 이루었지만 초중고 현장의 교사들마저 효과를 미심쩍어 했고 기초학력미달자의 증가에서 드러나듯이 학력저하 현상마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학교현장에는 ‘지식은 낡은 생존도구’이고 ‘역량이 미래 학력의 키워드’라는 담론이 무성했는데 역량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했기 때문이다.
제 1부 ‘가르치지 않는 학교’는 지난 몇 년 동안 유행했던 ‘활동중심수업’을 다뤘다. 교사주도의 강의수업과 학생주도의 활동학습을 이분법적으로 대립시켜 ‘전자를 구시대적인 낡음’이라고 규정하고 후자를 ‘미래교육의 핵심’이라고 규정할 경우 이것이 학습에는 비효율적이라는 점을 보여줬다. 즉 경직적으로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활동학습보다는 교사의 강의와 학생의 활동이 적절하게 어우러지고 특히 교사가 학생에게 각 단원의 핵심개념을 교수하고 학생이 그에 따라 활동할 경우에 역량중심교육과정이 추구하는 여러 역량을 성취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제 2부 ‘교사의 고백’도 충격적이었다. 그동안 한국교육에서 선망의 국가였던 핀란드, 역량중심교육과정을 도입했다가 개정했던 영국, 4차 산업혁명에 부응한다는 교육과정을 따랐던 미국, 이들의 학교는 우리의 기대와 너무 달랐다. 핀란드의 평범한 초등학교인 ‘바사 초등학교’의 교실수업은 활동중심이었지만 핀란드의 역량중심교육과정을 설계한 까리 교수조차도 “학습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게다가 영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교실에서 익숙했던, 새로운 학력 측면에서 비판받았던 교사가 주도하는 수업의 형태가 중심을 이뤘다. 미국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4차 산업혁명에 맞춘다고 활동수업을 고수하던 교실에는 더 이상 아이들이 없었다.
제 3부 ‘시험을 시험하다’도 기존의 교육프로그램이 시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시각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한다. “시험을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즉 “인간은 시험을 통해 고등사고력을 기를 수 있고 그 점이 인간의 고유성을 실현하는데 효과적이라고 설명한다.” 학생들을 하나하나 줄을 세우는 평가는 부정적이지만 시험 자체가 지식이든 역량이든 학습하는데 긍정적 학습도구라고 지적한다. 즉 시험은 외부로부터 수용되어 장기기억에 저장되는 정보의 양을 많게, 그리고 그 질을 높게 할 수 있으며 더구나 이미 기억한 선 개념이 오류인지를 검증하고 수정하게 하는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
제 5부 창의성의 발견은 창의연구의 대가인 미하이 교수를 통해 어떤 방법으로 창의성을 학습할 수 있는가에 맞춰져 있다. 미하이 교수는 창의성의 기반은 ‘지식’이라고 강조하며 어떤 지식이든 창의성에 기여한다고 설명한다. 창의성은 ‘지식’, ‘호기심’, ‘몰입’이 서로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길러지는데 인간에게 고유한 전두엽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부연한다. 즉 창의성은 세계를 다각적으로 관찰하여 새로운 시선과 앎이 생기는 영역 전이적 사고인데 그 절대적 기반은 장기기억에 저장된 지식이라고 강조한다.
제 7부 수학이 불안한 아이들도 인상적이다. 학생들에게 수학적 사고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는 덴마크 수학시험과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정답을 찾기에만 급급한 우리나라의 현상을 비교하여 설명한다. 즉 교사가 어떤 방식으로 수학을 가르칠 경우에 학생의 수학적 흥미를 끌어낼 수 있는가를 찬찬히 설명한다. “교사가 학생의 수준에 맞는 수업과 적절한 문제를 제시하고 수학적 핵심개념에 대한 이해와 시험에서 평가 지점을 정답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며, 부족한 학습을 과정중심평가로 피드백하면 수포자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암시한다.
제 8부 ‘잠자는 아이들’도 인상적이었다. 적절한 수면은 뇌의 정보처리용량의 한계로 뇌가 버려야 할 정보와 기억해야 할 정보를 구분하는 과정으로 정보를 장기기억에 저장해야 하기 때문에 긍정적이며, 잠자는 아이들의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지만 교사가 다양한 교수법으로 학생에게 접근하면 어느 정도나마 개선가능하다는 사례를 보여준다.
제 10부 ‘교과서를 못 읽는 아이들’은 충격적이었다. 학교교실에 간단한 어휘에서부터 문장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상당하며 심화되는 현상을 지적한다. 충격적인 장면은 학생이 교과서를 읽지 못하니 수업시간에 교사와의 의사소통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단원별 핵심개념에 대한 이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영상 매체에 길들여진 학생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이전의 학제나 지금의 교육과정에서 꼭 알아야 할 어휘의 의미를 모르고 있거나 어휘를 문장에 적용하여 해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지금 학교에는 교과서조차 읽지 못하는 학생들이 있으며 공교육에서 그 학생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라는 사회적 문제의식을 제공한다.
‘다시, 학교’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지식’이다. 지식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중요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 동안 그 의도야 어찌되었든 한국의 교육과정에서 암묵적으로 소홀하게 여겼기 때문에 깊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더구나 초·중·고 교육에서 학생들에게 미래 학력으로 ‘역량’을 키우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그 바탕은 ‘지식’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이처럼 사회병리현상이 일어나게 만든 심각한 인식론적 오류는 ‘역량’에 대한 맹신적 추종에 있거나 교육을 이끄는 선도적이고 지배적인 집단이 그에 기대어 다른 가치를 추구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즉 한국에서 학생이 주도하는 활동학습에는 역량이라는 학력이 있고, 그 기원은 OECD 12개 국가가 1997년부터 2003년까지 7년간 수행한 ‘DeSeCo(Definition and Selection of Competences, 핵심역량의 정의 및 선정) project’가 있는데 그 프로젝트가 한국의 초중고 교육과정에 일방적으로 해석되어 수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를 키웠다고 본다. 물론 지금까지도 역량에 대해 세계적으로 구체적으로 합의된 정의는 없고 합의될 가능성도 적다. 지난 1970년대 이래 선진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생산과정에 위기가 오자 역량의 중요성에 공감했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추세지만 국가마다 새로운 능력인 역량의 구체적 개념이나 수용과정이 그 사회의 경제적 성숙도나 사회문화적인 배경에 따라 상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 표현도 학자마다 조금씩 달랐다. 역량의 가치나 필요성에 대하여는 일치했지만 국가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언어적 표현과 해석이 이루어졌다. OECD, 뉴질랜드, 싱가포르 등에서는 ‘competency’로, OECD 국가지만 유럽에서는 ‘competence’로, 스코틀랜드에서는 ‘capacity’로, 미국은 ‘skill’로 표현했다. 이처럼 각 국가에서 역량에 대한 표현과 그에 따른 해석이 달랐지만 세계가 경제, 문화, 정치 등 다양한 측면에서 상호 의존하면서 삶의 공간이 국경을 넘어 확대되는 세계화의 흐름에서 OECD는 역량의 뜻을 명료하게 밝히고 21세기 미래 사회의 청소년과 성인이 갖춰야 할 역량으로 각 국가가 공통적으로 추진해야 할 핵심역량을 선정해야 했다. 어찌되었든 DeSeCo 프로젝트에 의하면 “역량은 지식, 기능, 태도까지 아우르는 복잡한 고도의 능력이다.”
지난 수 년 동안 교육청은 역량교육의 빛만 역설했기에 아쉬운 측면이 많다. 역량교육이 한국의 아이들에게 그 빛을 살려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자 등대로서 그 역할을 다하려면 어떤 대상이든지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갖고 있는 객관적 상황을 숙고했어야 했다. 즉 그동안의 교육청의 정책을 보면 초·중·고 교육이라는 한계에서 ‘일반역량’과 ‘특수역량’의 관계에 대한 심층적 성찰이 부족했고 초·중·고 교육에서 특수역량을 무시하고 일반역량을 키우는데만 주력했기 때문에 ‘다시, 학교’에서 지적하는 문제가 새로이 발생하거나 기존의 문제를 심화시켰다.
일반역량과 특수역량의 관계를 규정하는 모습은 나라나 주마다 다르다. 가령 호주, 뉴질랜드, 싱가포르, 캐나다, 퀘백 주는 초중고 학교에서 교과를 통해 학생에게 주어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능력인 노동자들의 직무역량인 일반역량을 키우는데 주력한다. 즉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역량중심교육과정의 배경인 경제적 포스트포디즘이 지향하는 노동자의 노동 능력을 구현해 나가려고 한다. 이에 비해 미국, 캐나다 온타리오 주는 일반역량을 추구하기보다는 교과 특수역량(교과 특수역량은 초중고의 교과에 나오는 핵심개념 위주의 역량을 말한다.)을 구현하는데 더욱 초점을 두고 있다. 교과 특수역량을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설계하는 나라에서는 일반역량과는 별도로 교과별 역량을 개발하여 이러한 교과 특수역량을 통해 일반역량이 성취되도록 한다(소경희 홍원표 송주현, 2013).
교사들이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처럼 역량을 구현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모든 나라에서 교과의 지식 및 기능을 포함하여 교과별 역량을 추구하는 일은 공통적으로 소홀하게 하지 않는다. 즉 일반역량을 키우는 교육과정이라고 해도 교과역량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나라는 한 나라도 없다. 각 교과의 핵심개념인 기초기본지식이 왜 중요한가를 말해주는 것으로, 이 점에 대해서는 일반역량을 강조하는 전문가들도 모두 동의하는 사안이다. 그런데 한국교육에서 그동안 그 점을 소홀하게 다뤘다는 점이 문제이다. 즉 “역량을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가 아니라 역량에 대한 과도한 맹신이 문제였다.” “마치 보수인가 진보인가가 아니라 얼마나 디테일하게 추구하는 가치를 이끌어 가며 국민의 행복과 공동체의 유지에 기여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선결되었어야 하는가와 비슷하다.” 즉 일반역량이 그 자체로 다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교과 특수역량을 통해 온전히 성취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을 경시했다.
Resnick과 Klopfer(1989) 역시 기능을 강조하는 일반역량은 구체적인 지식의 맥락 속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이들은 21세기의 교육은 학문영역을 토대로 모든 학생이 지식을 깊이 이해하는 것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사고력 교육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사고력 교육과정이란 모든 학생이 풍부한 지식의 기반과 의미 있는 맥락 속에서 지식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인지, 메타 인지적 기능, 전략을 개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사고는 학교 교육과정의 전 영역에서 수학, 역사, 과학, 예술 등 모든 교과에서 교과의 지식과 분리되어 길러질 수 없다. 또한 학교교과는 문제해결 및 추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사고의 내용과 기능은 동시에 가르쳐져야 한다. 즉 21세기 일반역량적 기능은 구체적인 교과를 통해 길러지는데 교과의 역할을 무시한다면 이는 형식주의적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일반역량에는 창의력, 비판적 사고력 등 일반적인 능력이 포함되며 이러한 일반 능력을 강조하는 교육이 기존의 주입식 지식 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과연 이러한 능력들이 교과 내용과 무관하게 길러질 수 있는지는 의문으로 교과 특수역량을 바탕으로 일반역량을 기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왜 이러한 착각이 있었을까? 그것은 초·중·고 학제에서 키워야 하는 역량에서 ‘일반역량과 교과 특수역량의 관계’를 분석할 때에 ‘주요역량’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오래된 고전이지만 모택동이 쓴 ‘모순론’에 의하면 당면한 과제이자 갈등적 구조인 모순은 ‘기본모순’, ‘특수모순’, ‘주요모순’이 있는데 주요모순은 특수모순이나 기본모순 모두가 될 수 있다. 가령 자본주의의 경우에 기본모순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대립이며 특수모순은 생산과정의 성장 과정이나 그 이외에서 나타나는 대자본가 및 독점자본가와 소자본가의 대립이나 국가와 외국 간의 정치적 대립 같은 모순인데 그 사회의 역사적 사회적 발전단계에 따라 특수모순이 우선일 수도,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일반모순이 우선일 수도 있다. 즉 어떤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경우에 갈등의 중심인 주요모순은 그 사회의 사회적, 역사적 문화적 발전단계라는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기반에 따라 규정해야 하는데 한국은 초·중·고 교육에서 무조건 ‘일반역량을 주요역량’이라고 규정하고 ‘교육과정 및 수업 평가의 일체화’로 구조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기초기본 학력의 바탕 없이는 역량교육은 성장할 수 없다.
이처럼 역량주의 교육관에서 비추어 볼 적에도 지금 한국교육에서 필요한 일은 교과 특수역량의 강화이다. 그런데도 일각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제작한 ‘다시, 학교’를 ‘구성주의’와 ‘학문주의’의 대립으로 이해하려는 의도는 의도적으로 현실을 왜곡하거나 정치적일 뿐이다. 물론 올해 들어와 전남교육청과 대구교육청이 ‘초등 문해력’과 ‘기초학력’ 향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기로 한 교육정책 전환은 매우 바람직하다. 더 늦기 전에 한국의 초·중·고 교육은 기본교육과 학습과학으로 돌아가야 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일반사회교육을 전공하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예탁결제원에서 10년 동안 근무한 뒤 전주 완산고등학교에서 사회 교사로 재직 중이다. 전북 교육청 사회문화 집필 위원, KDI 경제교육교재 집필 위원, 중앙일보 공교육 논술자문단, 충남 지방공무원 임용시험 출제위원, 전북 및 전남 교육연수원 강사, 전북대학교 교사 연수 강사, <새전북신문>, <열린 전북>, <전북교육신문>, 인문 웹진 <아홉시>, 네이버 비즈니즈 블로그 <인터비즈>에서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지금은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의 교육저널인 「교육 제4의 길 」에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 <미래 교육의 불편한 진실, EBS, 2021>, <학교 속 문해력 수업, EBS, 2022>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