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읽기 – ② ‘레토릭 과잉’의 경위
| 논란 중인 고교학점제가 2010년대 후반에 비롯된 정책으로 얘기되지만, 사실 그 역사의 골은 깊다고 이야기한다. 짧게 살펴도 1990년대부터, 30년 이상 교육정책 테이블에 떠돌던 아이디어라고 정리한다. 정부가 정책 수사(修辭)에 거듭 재활용해 왔는데, 떠벌리기만 했을 뿐 실속을 채우지는 않았다고 시사한다. 고교학점제가 본디 실패를 함축한 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
고교학점제는 올해 비로소 논란에 휩싸였는데
고교학점제 논란이 올해 격렬해졌다. 2025학년도부터 ‘일반계’ 고등학교에 적용되기 시작하면서다. 이전에도 우려나 비판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국지적이고 산발적이었다. 소수의 개인이나 단체가 ‘이해(利害)’를 반영해 의견을 표시하는 데 그쳤고 반향은 미미했다. 지금 논란은 거국적이라 할 만하다. 고교학점제는 대입의 경로를 깊숙이 건드린다. 대입이 ‘존재 이유’인 일반계 고등학교에 적용되기 시작하자, 절대다수의 학생과 학부모에게 그것은 ‘발등의 불’이 되었다. 불똥은 교사들에게도 당장 꺼야 할 현실로 튀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고 ‘현장’이 일어섰다. 좀체 합의하는 데가 없는 교원단체들이 합심하여 고교학점제를 성토했다. 학생들까지도 제도 폐기 민원을 내고 있다. 현재 상태로는 제도의 취지를 살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운영 자체가 불가능하다고들 외친다. 교육부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듯하다. 부랴부랴 자문위원회를 꾸려 대책을 제안받겠다고 나섰다. 올 하반기에 해결책을 내놓겠다고 공언했다.
대선 ‘1호 공약’로 거창하게 내걸렸지만 역사적 이면에는 큰 약점
바야흐로 문제가 잔뜩 불거진 고교학점제는 문재인 정부에서 제도로 성안시켰다.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고교학점제 도입을 ‘1호 교육 공약’으로 내걸었고, 정부가 들어선 후에 그것은 자연스럽게 최우선 국정과제가 되었다. 공약으로서 고교학점제는 “교실 혁명을 통한 공교육 혁신”이란 구호 아래 띄워졌었다. 당시 공약 발표를 보도한 기사들을 보면 이 제도에 대한 대선 캠프의 수사(修辭)는 호방했다.
고교학점제를 “고등학생도 대학생처럼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수강할 수 있게 하는 제도”라 소개했으며, 이 제도로 “보다 민주적이고 유능한 미래 시민으로서의 역량을 가진 학생들을 길러낼 수 있을 것”이라고 추켰다. 당시 열거했던 ‘기대효과’들을 살펴보면, 고교학점제가 어째서 ‘1호 공약’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질적인 ‘문제’라고 일컬어져 온 거의 모든 교육 현안을 싸잡아 해결해 낼 수 있을 묘책으로 고교학점제를 띄웠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호언이었다. 고교학점제가 시행되면,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 희망, 적성, 역량에 맞춰 학습할 수 있게 되고 잠자는 학생들이 사라질 것이다. 원하면 학교 밖 프로그램으로도 학점을 이수할 수 있게 될 터라, 일반고나 특성화고의 경계를 넘나드는 진로도 택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이 선택 수강하는 과목에 따라 평가 방식도 다양해지면 사교육 시장에선 대응 상품을 내놓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마침내 사교육비도 낮출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뿐 아니다. 고등학교 서열화 문제도 해소되리라 낙관했다. 일반고에서도 다양한 진로와 적성 그리고 수준에 맞는 수업이 가능해지면서 특목고나 자사고에 진학할 이유도 사라질 것이란 말이었다. 더 일반적으로는, 학생마다 달리 선택하는 교과 수업에서 ‘성취 중심’의 평가가 이루어지고 또 그 결과가 대입에 반영되면서 학생부 중심의 대입제도가 정착될 테고, 궁극적으로 학생마다 고유한 ‘성공담’을 써 갈 수 있으리라고 장밋빛 미래도 그렸다.
공약 언설의 논리를 곧이 받아들인다면 고교학점제는 과연 묘방이고 제도로서 무리한 구석이 없어 보인다. 학생 모두가 자기 진로(흥미)와 적성에 맞는 수업을 받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이루는 성취를 인정해 주는 ‘내신 평가’를 받으며 성장하고 그 연장에서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게 되면, ‘명문고’를 찾고 사교육을 구매할 이유도 사라질 것이다. 드디어 학생들이 무의미한 점수 경쟁의 굴레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기대하는 건 벅찬 만큼 공허하다.
사실 고교학점제 논리는 이전에도 결국 빈말이 된 대책들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곤 했다. 그렇게 내세워진 정책들은 으레 말뿐이었던 ‘한탕 개혁’이었다. 교육부가 그럴듯한 자리를 만들어 거창하게 발표했던 정책들 가운데는 학점제 아이디어를 우려 넣은 것들이 꽤 있었다. 지난 10년 가까이 고교학점제가 개혁 담론의 ‘용 머리’(龍頭)로 떠오르고 결국에는 ‘뱀 꼬리’(蛇尾)만도 못한 사태로 떨어진 데는 그럴 만한 ‘역사’가 있다. 교육개혁에 진실했다면 미리 짚을 수 있었던 실패 이력이다.
꽤 오래 ‘재활용’되어 온 고교학점제 아이디어
지금의 고교학점제는 말하자면 제도 진화의 소산이다. ‘학점제’라는 아이디어는 교육부가 이런저런 대책에 꽤 오래 재활용해 왔다. 이미 얘기했듯이 그 재활용 대책들이 제대로 성과를 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문서상의 합리성이 쓸모 있었던지, 교육부는 그 아이디어를 거듭 이용해 왔다. 현재 논란되는 고교학점제에는 몇 가지 핵심 요소가 있고 또 제도상 전제해야 할 점들이 있다. 그런 구색을 갖추게 된 역사를 되돌아보기 위해 먼저 정리해 보자.
① 고교학점제를 적용하려면 고등학교는 교과를 선택하여 수강할 수 있는 교육 단계로 규정되어야 한다. 학교 교육의 ‘기초과정’ 즉, ‘기본 공통 교육과정’(필수과정)을 이수한 후 밟게 되는 교육 단계로 자리 잡아야 한다. 고등학생은 생애 진로에 대한 모종의 전망을 이미 지녀야 하고, 그 전망에 따라 교과를 선택하여 이수해야 한다고 전제된다.
②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선택권을 교육과정 거의 전면에 걸쳐 인정한다. 학생의 요구(수요) 관철을 고교 수업 편성의 우선 요건으로 삼는다. 학교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사실상 학생이 결정하도록 권한을 준다. 학생이 필요하다면 학교는 학교 ‘밖’에서라도 과정을 만들어 이수할 수 있게 보장해야 한다. ‘학생 중심’ 또는 ‘선택권 확대’가 고교학점제의 핵심 구호이다.
③ 고교학점제는 학점을 누적하여 졸업 자격을 갖추도록 요구한다. 자연스럽게 졸업 자격이 설정된다. 이제까지 유명무실했던 학년말의 진급 또는 졸업의 사정(査定)이 엄격해지게 된다. 요건인 성적이나 학점 수를 갖추지 못한 학생은 유급해야 한다. 정부에서는 이 요소를 ‘최소 학업성취 수준 보장’의 장치라 언명했다. ‘책임교육’의 의지라고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④ 고교학점제는 ‘학년제’를 대체한다. 교육의 흐름이 학년 진급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학점 취득을 따라 이루어진다. 이수 경로와 속도 그리고 수준이 학생마다 달라진다. 이런 속성은 ‘맞춤형’ 교육을 보장한다고 홍보된다. 이 가능성을 들어, 고교학점제가 ‘평준화된’ 학급의 이질성 문제를 해결하고 ‘일반고 황폐화’를 낳는 서열화 양상도 누그러뜨릴 것이라 장담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이어졌던 학점제 활용
위와 같이 정리하게 될 만큼 고교학점제가 제법 틀거지를 갖추고 나서게 된 것은 문재인 정부에 들어와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2017년 대선에서 ‘1호 공약’으로 부상하고 ‘공교육 혁신’의 핵심 대안으로 다듬어지게 되기까지에는 꽤 긴 세월의 정책적 곡절이 있었다. 거슬러가 보면, 우선, 고교학점제 이야기는 바로 전해(2016년)에 교육부가 발표한 “지능 정보사회에 대응한 중장기 교육정책의 방향과 전략”이란 이름의 시안(試案)에 들어 있었다. 거기에선 학사제도를 유연하게 바꿀 필요가 있다며 ‘학점제’를 대안으로 거론했다.
당시 발표에 나섰던 교육부 차관은 그 학점제 제안을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지능 정보사회’에 대비해] 창의·융합적인 사고를 키우려면 우리 아이들이 흥미와 적성에 맞는 분야를 마음껏 배울 수 있도록 하는 교육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
학년제로 묶여있는 교육과정의 경직성을 극복할 필요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학생의 수업 선택권을 확대하고,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온라인 교육 등을 통해 다양한 학습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학사제도를 유연화하겠습니다. … 구체적으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학점제’로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할 계획입니다.
박근혜 정부에서 내놓았던 위와 같은 구상은 사실, 그 7년여 전에, 이명박 정부에서 이미 써먹었던 논리이다. 2009년 ‘미래형 교육과정’을 구호로 내걸며 교육과정을 개정했을 때 일이다. 이때 개정 초점 가운데 하나는 고등학교 과정을 온통 ‘선택 교육과정’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런 조치는 당시 이른바 ‘고교 다양화 정책’(자사고 등의 확대 정책)과 연계되어 있었고, 일반고에 대해서는 “교육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하다고 정당화했다.
2009년 12월에 당시 교육과학기술부는 ‘고등학교 선진화를 위한 입학제도 및 체제 개편 방안’을 내놓았다. ‘자율화·다양화’의 구호 아래 특목고와 자사고 등의 위상을 공고히 하면서, ‘일반’ 고등학교에서도 ‘수월성 교육 강화’를 도모하겠다고 표방한 대책이었다. ‘무학년제·학점제’라는 이름을 달아 대안을 내놓았는데, ‘일반계 고등학교 교육력 제고’가 초점이었다.
이때 학점제에서는 ‘진로에 따른 선택’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았다. ‘수준’에 맞추는 데 주력했다. “우수 학생은 수월성 교육이 최대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학습을 지원하고 뒤처지는 학생은 최소 수준에서 맞춤형 교육[을] 실시”하겠다고 표방했다. 말하자면, 특목고나 자사고(자율고) 등에서는 ‘속진’도 가능하도록 기회를 열고, 다른 일반 고등학교에서는 “최소한의 성취 수준”을 보장하겠다는 뜻이었다. 이런 다분히 차별적이었던 취지 아래에서, ‘고등학교 졸업 요건’, ‘교과 교실제’, ‘대학 과목 선수 이수제도’ 등의 조어도 당시 함께 등장했다.
1990년대부터 떠돌았던 학점제 이야기
‘수월성 교육’이라는 조어도 그렇고 ‘맞춤’이나 ‘속진’이란 용어 같은 것도 이명박 정부에서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 관련 아이디어는 2000년대 이전부터 교육정책 논의에 오르내렸다. 특히 1980년대 말 1990년대 초반, ‘88 올림픽’ 등의 계기로 ‘국제 비교’가 유행하고 평준화 정책에 대한 비판이 고개를 들면서 고등학교 교육에 대해 ‘다양화’ 대안들이 부상했다. ‘교실 붕괴’라는 말이 유행하고, 민주화의 진전으로 교육의 중앙집권적 경직성을 성토할 여건이 마련됐던 점도 물론 한몫했다.
당시 경향은 제6차 교육과정의 총론에서 명문적으로 확인된다. 제6차 교육과정으로 가는 개정 작업은 1990년부터 시작됐고, 최종안은 1992년 9월에 고시되었다. 비교적 긴 시간의 논의와 기초 연구 과정을 거친 셈이라, 그 총론은 당시 교육 담론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사료가 된다. 이를테면, 그것은 “고등학교 교육 내용의 조직과 운영 면에서 많은 변화”가 요구된다며, 아래와 같은 개정을 시도했다고 적고 있다.
교과목은 능력의 수준과 진로의 전망에 따라서 선택이 가능하도록 다원화하여야 한다. 새 교육과정에서는 이수 과정을 다양화하고 선수 학습의 정도와 진로를 고려하여 적합한 과목을 선택, 이수하도록 하였다. 또, 학교와 학과의 특성에 따라서 계열과 학과에 구애 없이 다양한 전문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고등학교 교육이 대중화하여 이제는 “옛날과 달라 최종 교육으로서의 성격을 탈피”하여야 한다는 당시 시대 판단을 반영하는 개정이었다. 이와 같은 교육과정 담론은 바로 학점제에 가 닿는다. 제6차 교육과정이 전면 적용되는 1990년대 후반에 가서는 실지로 ‘학점제’를 적용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1995년 6월 10일에 교육부는 ‘조기 진급 및 조기졸업에 관한 규정안’을 입법예고 했는데, 이때 규정은 학점제를 전제했다. 조기 진급을 위해서는 ‘무학년제’가 필요하고 그 제도 안에서 과정 이수는 ‘학점제’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실지로 당시 예고했던 규정은 학교가 교육과정을 학점제나 무학년제로 편성할 수 있게 허용하는 조항을 담고 있었다. 여기서 무학년제는 “중·고교에서 학년별로 정해진 교육과정을 이수토록 한 현행 학년제 대신 학년 개념 없이 전체 교육과정에서 능력이나 희망에 따라 과목을 이수하게 한 뒤 전체 교육과정을 이수하면 졸업시키는 대학 교육식 제도”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학점제(무학년제)는 이미 1990년대에 교육과정의 편성과 운영의 유력한 아이디어로 떠돌고 있었다. 이런 추세는 일본에서 건너온 ‘개혁 동향’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1993년 초 일본에서는 고등학교 단계에 ‘종합학과’를 설치하는 안을 추진했다. 기존 ‘보통과’(일반계)와 ‘전문학과’(직업계)와 별도 트랙으로 도입해 ‘학점제’를 적용하도록 구안했다. 기존 과정의 이수가 경직됐던 것과 달리, 종합학과에서는 “학생이 장래의 진로 구상이나 흥미에 따라 필요한 과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하여 ‘진로 맞춤형’의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기획한 것이다. 이때 학점 이수는 학년제에 구속되지 않으며, 졸업 요건을 채우면 졸업할 수 있도록 했다.
고교학점제의 기반은 ‘5.31 교육개혁’이 마련한 셈
학점제를 위한 제도의 기반은 이른바 5.31 교육개혁이 차려 놓았다고 하겠다. 그 개혁 주체였던 교육개혁위원회는 1996년 2월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개혁’ 방안을 내놓았다. ‘신 교육과정 편제’와 ‘수준별 교육과정’을 도입한다는 계획이 거기에 들어 있었는데, “진로와 능력 수준에 맞는 교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 체계를 바꾸는 방안이었다. 그 요체는 ‘국민 공통 기본 교육 기간’을 10년으로 설정하고, 이후에는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하도록 길을 트는 데 있었다.
‘선택 중심’에서 ‘선택’은 ‘수준별 교육과정’이 뒷받침하도록 맞췄다. 그렇게, 적어도 고등학교 수준에서는, “학생의 능력, 흥미 및 장래 진로를 반영하는 선택과목 위주의 교육과정 체제”가 세워졌다. 이 체제로 교육개혁위원회는 고등학교에서의 과정 구분을 해체하고자 했다. 특히 “일반계 고등학교 2~3학년에서 적용하던 인문 과정, 자연 과정, 예·체능 과정, 직업과정의 구분을 폐지하고, 다양한 유형의 학생 개인별 교육과정이 가능하도록” 의도했다. 결과적으로 오늘날 고교학점제가 시도될 수 있는 제도적 골조가 세워졌던 셈이다.
5.31 교육개혁의 기조는 이후 여러 번의 교육과정 개정에서도 유지되며 진화했다. 제6차 교육과정의 선택 지향 기조는, 5.31 개혁의 취지를 받든 제7차 교육과정에서 더 일반화되었고, 이후 2009년과 2015년의 개정에서도 ‘학생 중심’의 ‘맞춤형’의 선택이 가능하도록 거듭 강화되었다. 2022년에 이르러선 교육부가 “고교학점제를 위한 교육과정 개정”이란 구호까지 내걸었다. 현재 논란에 휩싸인 고교학점제는 바로 이런 ‘진화’의 산물이다.
과잉된 ‘레토릭’ 합성이었던 고교학점제에는 치명적인 난점도 스며
고교학점제는 30년 이상의 정책 담론과 제도의 진화 과정을 거쳐 교육 부문 최우선 국정과제로 부상했다. 그런 과제에는 진화에 작용했던 대대로의 정책 숙원(宿願)들도 자연스럽게 잠입해 들었다. 이를테면, 평준화로 ‘평둔화’(‘교실 붕괴’)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고 아우성쳤을 때나 고등학교 서열화로 경쟁과 사교육 부담이 과중해졌다고 원성이 자자했을 때도, 사태는 상반됐지만, 대책 강구는 으레 ‘학점제’ 쪽으로 모아졌다. ‘학생 중심’의 ‘선택’ 그리고 ‘수준’과 ‘진로’에 상응하는 ‘맞춤형 교육과정’을 보장하겠다는 말은 최소한 ‘합리적으로’ 들린다.
진보네 보수네 정권이 바뀌었대도 학점제의 기조는 종종 정책의 바탕에 살아남았다. 내세우는 명분만, 때로는 교육의 ‘내실화’(‘책임교육 실현’)로 때로는 ‘다양화’(‘수월성 교육’)로 오락가락했을 뿐이다. 고교학점제는 한 세대 이상 교육정책 논의에 오르내렸던 ‘묘안의 밈’들이 기회에 맞춰 합성된 제도인 셈이다. 체계적이고 복합적인 외양에 맞게, 고교학점제에는 ‘1호 공약’이란 야심을 실을만했을 것이다. 그러나 합성 과정에선 말(‘레토릭’)에 붙어 다니던 문제들도 함께 스몄을 터이다. 문제들은 고질적이었을 마련으로 치명적인 난점이 잠입했을 것이다.
고교학점제는 10년에 걸쳐 단단히 준비해 시행한다고 떠벌렸었다. 제도에 잠재한 난점들을 참작하면 준비 시간 10년이 긴 게 아니었다. 그리고 긴 시간보다는 제대로 된 준비가 필요했다. 이미 ‘레토릭 과잉’이었던 고교학점제는 웬만해선 성공할 수 없을 형세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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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