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읽기 – ① 머리글
| 고교학점제 논란이 격하다. 으레 그래 왔듯이, 논란은 가라앉을 테고, 제도는 고비를 우회하여 살아남을 것이다. 그 여생은 고교학점제라 불리기에 미흡할지 모르고, 어쩌면 명패를 갈아 달지도 모른다. 마침내는 요란했던 정책 과정에 대한 기억은 사라질 것이고, 여전히 교육정책들은 ‘한국적’으로 굴러갈 것이다. 이런 전철을 벗어나기 위해 고교학점제를 찬찬히 들여다보자고 제안한다. |
‘고교교육의 혁신 방향’에 놓였던 고교학점제
2018년 8월 17일 당시 교육부장관은 ‘고교교육 혁신 방향’을 발표했다.1 거기에는 ‘고교학점제 도입’이 ‘핵심 정책’으로 들어 있었다.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이 발췌 정리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교학점제는 학생 스스로 교육과정을 선택・이수하게 하여 모든 학생에게 맞춤형 교육을 제공할 수 있도록 하는 문재인 정부의 핵심적 과제입니다. … 2022학년도부터 고교학점제를 부분 도입하되, 교육과정과 평가의 개선은 점진적으로 해 나겠습니다. … 2025학년도부터 본격적인 학점제를 시행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 총론을 전면 개정 고시하고, 성취평가제의 대입 반영을 전 과목으로 확대합니다. 지금부터, 학점제형 새 교육과정이 본격 적용되는 2025학년도 고1이 대학에 진학하는 시점까지 약 10년에 걸쳐서 고교학점제를 완성해 나가겠습니다.
제도가 행정상 진척되어 온 시점들에 관한 한, 위 발표문의 약속은 얼추 지켜져 온 셈이다. 올해, 2025년부터, 고교학점제는 최종적으로 일반계 고등학교에도 도입되었고, 이대로라면 현재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대학에 진학하게 되는 2028학년도에 제도의 첫 매듭을 보게 될 것이다. “10년에 걸쳐서”(2018년에 시작하여 2028년까지) 완성하겠다던 계획이 대체로 밟아져 가고 있다.
도입 첫 해, ‘현장’에서 반기(反旗)가 들려
한편, 고교학점제가 일반계 고등학교에 도입된 올해 첫 학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교사들은 제도 “전면 개선”을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 8월 18일 ‘교원 3단체’가 시위에 뭉쳤다.2 ‘공동 토론회’를 가졌는데, 이 행사에 즈음한 보도자료는 “고교학점제, 보완 넘어 전면 개선 필요”라는 표제 구호를 첫머리에 빨갛게 인쇄해 놓고 있다. 좀체 합의에 이르는 법이 없던 교원단체들이 모처럼 의기투합한 양을 보면 고교학점제에 대한 교사들의 불만은 널리 팽배한 듯하다.
토론회에서는 고교학점제의 ‘실태’ 이야기에서부터 ‘개선 대안’ 제안까지 세 단체가 갈라 맡아 ‘발제’했고, 학생, 학부모, 교육부 고교학점제 담당자 등이 ‘토론’에 참여했다고 한다. 보도자료에 근거하면, 토론회에서는 대강 아래와 같은 주장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전국 고교 교사를 대상으로 실태를 조사한 결과, “고교학점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90%로” 압도적이며, “제도의 주요 뼈대를 건드리지 않는 한 개선은 요원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근본적인 수술이 필요하다.” 고교학점제는 “교사에게는 교육자로서의 무력감을, 학생에게는 ‘미도달 학생’이라는 낙인을 찍어 학교 밖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고 있다.” “출결 처리 권한을 담임교사에게 부여하고, 학생부 기재 분량을 축소·차등화하며, 최소 성취 수준 보장제와 미 이수제는 폐지하고 실질적인 학습 지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중장기 교원 정원 확대 계획 수립”도 필요하다.
교육부도 문제를 인정
교육부에서도 고교학점제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듯하다. 문제가 불거지자, 지난 7월, “전문가와 학생, 학부모 등이 참여하는 ‘고교학점제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위원회가 제안하는 대안을 토대로 올 하반기에 개선안을 내놓겠다고 비난 진화에 나섰다. 이때 교육부 담당관은 이런 첨언도 했다고 한다. “이번 고교학점제 개선 논의를 통해 학교의 업무 부담과 학생•학부모의 불안을 해소해 나가겠다. 기본 취지는 살리면서도 현장의 어려움을 적극 반영해 제도를 개선해 나가겠다.” 으레 듣게 되는 매듭 말이지만,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고하지는 않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최근 한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고교학점제 자문위원회가 권고안을 내놓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교육부가 개선안을 만들어 ‘의견 수렴’에 들어간 듯하다. 개선안에는 ① 학점 이수 기준을 학습성취율이 아닌 출석률로 바꾸고, ② 학교생활기록부 기록 분량을 줄이며, ③ 출결 관리는 과목 담당 교사가 맡을 수 있도록 한다는 등의 대책이 들어 있다고 한다. ‘현장’에서 그동안 지적해 온 문제들을 일단 ‘들어내고 보자’는 대응이라 이해된다.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던 움직임이다. ‘40점 이상’이어야 한다는 이수 기준을 고집하면 유급이나 자퇴 등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니 그 기준을 없애겠다. 학교생활 기록이 학년이 아닌 학기별로 이루어져야 하는 데다가, 한 교사가 담당해야 하는 과목 수도 늘어나게 되어 그 부담이 과중하다니 기록량 기준을 낮춰 주겠다. 학생들이 교과 교실을 돌며 수업하게 되면서 담임교사와 교과 담당 교사 사이에 출결 관리상 혼선이 빚어진다니 교과 담당 교사들이 관리할 수 있도록 지침을 바꾸겠다. 말하자면 이런 식의 개선책이다.
고교학점제는 일단 유지될 텐데
고교학점제는 유지될 것이다. 적어도 그 이름과 중요한 제도적 부속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교원단체들이 요구하는 ‘전면 개선’은 사실상 불가능하다.3 전면적으로 흔들기에는 고교학점제도가 다른 제도나 프로그램과 엮인 고리들이 너무 단단하고 또 그 체제가 복합적이다. 당장 대입제도와 고교학점제는 뗄 수 없게 연결되어 있고, 대입제도는 ‘미래’(2028학년도)를 겨냥하여 예고된 지 오래다. 이 상태에서 고교학점제를 과격하게 바꾸는 것은 무리이다. 더 근본적으로, 2022 개정 교육과정이 올해부터 비로소 (일반계 고등학교를 포함하여) 모든 학교에 적용되었는데, 고교학점제는 이 교육과정을 얻기 위한 개정의 이유였다. 고교학점제를 뿌리째 뽑는 건 교육과정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셈이다. 이제 막 도입한 교육과정을 버릴 수는 없을 테다.
뒤늦긴 하지만 교육부가 부산하게 대책 마련에 나선 사실도 제도가 지속되리라고 짐작하게 한다. 위에서 보았듯이, 교육부는 “현장의 어려움을 적극 반영해 제도를 개선해 나가겠다”고 했다. 정책의 고비에서마다 정부가 으레 구사해 온 언사이다. 관료주의적 권위가 달린 사태에서, 더욱이 (‘국정과제’와 같이) 정치적인 뒷배가 있는 경우에는 더욱이, 이미 굴리던 정책을 정부가 포기하는 법은 거의 없다. 문제가 근원적으로 심각해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결국 공허하게) ‘양해’를 구하며 당장의 ‘비’만 피하면, 논란은 흐지부지되고 제도는 굴러가곤 했다.
고교학점제, 찬찬히 깊게 들여다볼 필요
고교학점제는 어디로 갈까? 앞날을 걱정하며 대안을 내놓는 시도도 중요하지만, 이번엔 되돌아보는 일이 더 중요하리라 여긴다. 원했거나 바람직한 사태는 아니지만, 지금 고교학점제의 형국은 ‘자연스럽게’ 우리 교육정책의 실상을 성찰할 계기를 이루고 있다. 고교학점제가 지금 왜 이렇게 되었는지 찬찬히 깊게 살핀다면 우리 교육정책의 전형적인 모습(고질적인 문제)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점에서 이런 가능성을 본다.
우선, 고교학점제에는 교육정책의 맥락에서 우리가 꽤 오랫동안 만지작거렸고 또 적용하려고 시도도 했던 아이디어가 담겨있다. 이미 상식이 되어 있어서 쉽게 여론의 호응도 얻을 수 있는 아이디어인 셈이다. 이름하여 ‘맞춤형’이라는 아이디어이다. ‘공장 모형’이라는 학교의 표준화(획일성) 문제나, ‘이질적인’ 학급을 낳는 평준화(‘평둔화’) 문제, 그리고 “모든 학생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시켜야 할 상황”이라는 인구 감소 현실에 대한 대응 등등, 시대마다 부각하는 문제를 따라, 그 아이디어는 다양한 이름의 제도로 변신했다. ‘학생 맞춤’, ‘수요자 중심’, 또는 ‘선택권 확대’ 등 따라붙은 구호도 직관적으로 대중에 어필했다. 고교학점제도 이런 진부한 흐름을 탄 것 가운데 하나이다.
둘째,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이른바 주요 정책은 종종 ‘정치적인’ 의제에서 온다. 흔히 대선 공약으로 부상하여 국정과제로 채택된 대안이 ‘대통령 재임 기간 안에 완성되어야 할 교육개혁 과제’가 된다. 모든 난관을 뚫고 이행되어야 할 과제가 되는 것이다. 과감한 개혁 과정에 무리가 따르는 것은 피할 도리가 없다. 그런데도 다양한 우회 조치를 거치며 ‘개혁’은 모종의 결실을 보기에 이른다. 물론 중간에 좌초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런 사실은 기록으로 남을 만큼 분명하지 않다. 아직 결말을 보지 않았기에 장담할 수는 없지만, 고교학점제 역시 이런 사례에 낄 듯하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이전 개혁 시도와 달리, 고교학점제는 ‘종합적’이고 ‘장기적’으로 구안해 추진되었다. 적어도 정부의 언어와 논리로 보면 그렇다. 교육과정과 대입제도 그리고 학교의 공간 등 관련된 여러 요소를 함께 고려하여 안이 만들어졌고, 시범 또는 연구 학교 등을 운영하면서 부작용을 살피며 10년을 들여 완성하는 계획을 따라 시행되었다. ‘조변석개’라 비아냥거려져 온 정책의 구태를 벗어나려는 시도가 고교학점제에는 스며 있었다.
고교학점제는 말하자면 우리 사회의(사실은 세계적인) 통념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에 두고 있으며, 정치적인 지원 아래 강력하게 추동되었고, 고질적인 정책 문제인 조급성을 벗어나려는 노력까지 함축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제도의 생명이 과연 어떤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제대로 살펴볼 수 있다면, 우리는 교육정책에 관한 새로운 이해와 안목을 얻을 수 있고, 아울러 정책의 낡은 껍질에서 벗어날 길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고교학점제 문제에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답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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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장관 발표문의 표제는 “2022학년도 대입제도 개편 방안 및 고교교육 혁신 방향”이었다. 이전 해에 예정했던 ‘대입제도 개편’을 1년 유예한 후 ‘공론화’ 과정을 거쳐 결정하고 내놓는 것이었고, ‘고교교육 혁신 방향’이 여기에 포함된 것은 유예한다고 발표할 때 “종합적인 교육개혁 방안을 제시하기로” 약속했었기 때문이다.
- 토론회를 공동으로 주관하여 고교학점제를 성토한 단체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교사노동조합연맹, 그리고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다. 제도는 특성화 고등학교 등에 이미 도입되어 있었는데 ‘현장’에서 그동안 문제 제기가 없었던 점은 흥미롭다. 학교 안에서나 교사들에게서나 그리고 사회에서나, ‘문제’는 대학 진학과 관련해서만 감지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 ‘전면 개선’이라는 조어는 그 자체로 모순인 데가 있다. 고치는 게 전면적이라면 ‘개선’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 완전히 뜯어고치자는 뜻이라면 ‘개혁’이나 ‘혁신’ 등의 단어를 선택하는 게 낫다. 발언 맥락상 교원단체들의 요구는 근본적인 혁신에 있었다고 보인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