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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제1부: 사람들은 교육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1) 우화와 현실 : 교육의 허구성

#1309 이종태, 건신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2025.06.18
이 시리즈는 지난번에 언급한 대로 프락시스적 관점에서 교육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한 글로서, 교육에 대한 기존의 생각(1부), 그러한 생각의 형성 과정(2부), 새로운 관점(3부)의 순서로 기술될 것이다. 제1부에서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교육’이라고 생각해 온 것들을 세 가지(통념, 신념, 개념)로 나누어 살펴볼 예정인데, 오늘의 글은 그 서문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교육이라는 이름의 관행과 제도가 갖는 허위와 기만성을 간략하게 짚어보고자 한다.

 

 

우화에 대한 기억

 

벌써 10여 년 전 일이다. 어쩌다 공립 고등학교의 교장이 된 나는 운 좋게 교장 연수차 유럽 몇 나라를 순방할 기회를 얻었었다. 아마 덴마크의 한 공립 초등학교로 기억되는데, 아침 수업을 시작하기 전 전체 학생과 교사들이 모여 어떤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설명을 들어보니 우리나라 대안학교들이 대부분 매일 하고 있는 ‘아침 열기’와 같은 시간이었는데, 그날은 때마침 학생들이 안데르센의 동화 ‘벌거숭이 임금님’ 연극을 시연하고 있었다. 엉성하게 차려입은 임금님 복장의 어린이를 몇 명이 호위하여 학생들 사이를 행진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자리에 앉아 그들을 향하여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덴마크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으니 어떤 이야기들이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행히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읽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남아 있어서 대충 내용은 짐작되었었다. 아마도 대열에 있는 아이들은 왕의 행차를 칭송하고, 관전하는 아이들은 우스꽝스러운 왕의 가식을 보면서 저마다 한마디씩 했으리라. 아이들이 뭐라고 했을까가 궁금했지만, 아쉬움을 안고 다음 견학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이 장면을 회상하면서 문득 나는 어린 시절 그 우화 수업에서 그 무엇을 배웠었나를 생각해 보았다. 당시 선생님이 하신 말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고, 나 혼자서 어렴풋이나마 그저 참 이상한 어른들이구나, 어떻게 장사꾼의 말에 그렇게 홀딱 속아 넘어갈 수 있었다는 말인가, 그 신하들을 혼내주어야 하지 않았을까 등의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결국, 우화가 말하고자 하는 교훈은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야 조금씩 되새기게 된 것 같다.

 

사실, 우리나라 교실에서는 너무 오래도록 교과서 내용을 현실과 적극적으로 대면시켜 아이들이 다양하게 생각하도록 이끄는 노력에 소홀해 왔었다. 아니, 소홀했다기보다는 일부러 외면하거나 적극적으로 외면을 유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과서 내용은 아이들에게 그냥 던져진 이야기일 뿐, 아이들은 그저 글자 그대로의 의미만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달리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았었다. 그건 역사를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하여 권력을 독점한 당시의 독재 정권이 집요하게 획책한 교육과 사상 통제의 실상이었다. 그 결과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교실과 그 안에서의 배움은 거의 모든 게 현실과는 무관하게 추상화된 것들이었다. 교과서 이야기는 아이들의 삶과 동떨어진, 절대적 진리이거나 알쏭달쏭한 신화로 제시되었고, 그 안에서 아이들은 자기 견해나 관점을 형성해 볼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생경한 현실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교실은 달라져 있을까.

 

 

우리의 교육 현실

 

며칠 전 읽은 한 페친의 글이 한동안 가슴을 후벼팠다.

 

“선생님이 된 이후 처음으로 학교가 가기 싫어졌어요. 인간으로서 갖추어야 할 아주 기본조차 없는 아이들이 너무 많은데, 담임도 아닌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몰라 손을 놓게 됩니다. 욕설, 비아냥, 거짓말, 폭력, 조롱, 빈정거림이 가득한 정글 속에서 … 가르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회의가 듭니다. … 요즘은 제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수준보다 한참 이하의 학부모도 많은 것 같습니다. 아이가 교실이나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면 교사들이 왜 지도를 허술하게 하냐고 따지는 부모가 있다는 게… 교사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

 

또 한 명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보니 가슴이 더 답답하네요.”

 

페이스북의 글을 통해서만 접한 분이지만, 이분은 아이들을 위한 일이면 물불 안 가리는, 아주 열정적이면서도 용기 있는 교사이다. 그런 만큼 때로 상처를 입을 때도 있지만, 이내 극복하고 수업과 학생 지도에 열과 성을 다해 온 분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처음으로 학교에 가기 싫어졌다’라고 한다. 오죽하면 그런 심정일까. 그를 지치게 만드는 교육 현실이 안타깝다.

 

위 페친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꽤 오래전부터 우리의 교육 현실이 과연 교육적일까 하는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교육’을 무엇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의미를 무엇으로 보든지 간에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교육 현상’은 분명 교육과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었다. 이미 대표적인, 아니, 거의 유일한 교육기관이라고 하는 학교가 참된 배움의 장이 되기보다는 국가 권력의 제도적 보장 아래 교육과는 별 상관없는 승자독식을 위한 경쟁의 장이 된 지 오래이지 않은가. 그나마 그 안에서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의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 삶의 이치와 도리를 배우는 게 시험과 서열화를 위한 도구로서의 지식 교육을 보완하는 실낱같은 버팀목이었는데, 이제 그것마저 이처럼 무너졌다면 더 이상 학교를 교육기관이라고 할 근거가 아예 사라진 것 아닌가.

 

하지만 이런 현실에서도 우리 사회는 외견상 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엄청난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한다. 대다수 가정이 자녀 교육비를 지출의 1순위로 꼽고 맹자 어머니가 무색할 정도의 지극정성으로 세계가 경악할 만큼 높은 사교육비를 지출한다. 국가적으로도 교육부 장관에게 사회부총리를 맡기고 매년 내국세의 20.79%를 지방 교육 재정으로 배정할 정도로 교육을 우대한다. 80~90년대까지만 해도 과밀학급 과대 학교가 한국 교육의 수식어였지만, 이제는 통계적으로 오히려 선진국을 앞설 정도이다(물론 그 이면에 저출산의 아픔이 있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관심과 투자는 기실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것은 교육과 무관한 두 가지 다른 목적에 의해 추동되고 있다. 그 하나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좋은 학교 진학이나 사교육 열풍은 계층 상승을 위한 노력, 즉 더 잘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해석되었었다. 물론 그것이 교육적으로 바람직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교육을 통한 계층 상승은 근대교육을 이끈 보편적 이념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계층 상승 여력이 사라진 지금은 좋은 학교 진학과 사교육 경쟁이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이 되어버린 중상층의 현상 유지를 위한 독점 수단이 되어버렸다. 유치원 과정에 대학 등록금보다 많은 돈을 투자하는, 이른바 ‘7세 고시’ 열풍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제 상황이나 계층구조가 악화할수록 이러한 극단적 경쟁 양상은 심화하기 마련이며, 그 과정에서 대다수 중하층은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교육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국민 여론과 표를 얻기 위한 정치권력의 개입이다. 특히 진학 제도와 사교육 정책은 국민의 관심을 끌기 위해 정치권력이 즐겨 개입해 온 대표적 영역이다. 60년대의 ‘무즙 사건’과 ‘창칼 파동’으로 이른바 일류 중학교를 없애고 중학교 무시험 입학제도를 도입한 일은 널리 알려진 바다. 대학교 입학제도를 대학별 시험에서 일제 예비고사와 본고사, 학력고사, 수능시험 등으로 수십 번이나 바꿔 온 것은 전적으로 여론에 떠밀린 국가 권력의 작용이었다. 공정성 확대라는 명분으로 수능 정시 비중을 확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입 정책 결정은 교육적 특성을 무시하고 표를 얻기 위해 권력이 교육정책에 개입한 대표적 사건이라 할만하다. 당시 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대입 전형의 대세로 자리를 잡았던 ‘학생부종합전형’은 교과 지식만이 아니라 학생들의 다양한 능력 함양을 자극했고 이를 통해 일부나마 고등학교 수업을 정상화하는 순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교육적 측면은 ‘조국 사태’라는 정치적 수세 국면과 대도시 중산층의 여론 악화라는 정치적 부담 앞에서 여론 수렴이라는 허울을 쓰고 헌신짝처럼 버려졌다. 더구나 수능 정시 확대 정책은 문재인 정부의 유일한 업적이 될 뻔했던 고교학점제 정책에도 역행하는 것이었다.

 

위 페친이 마지막 문장에서 언급한 ‘뉴스’는 이와 같은 반교육적 교육 현실을 좀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뉴스를 처음 접했을 때 나도 엄청난 분노와 함께 ‘도대체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할 것인가…!’하고 장탄식했었다. 벌써 몇 번째이고 몇 명째인가! 그런데도 교육 당국과 학교 관계자들의 발언과 반응은 어찌 그리도 똑같은가. 고작 할 수 있는 게 일이 벌어진 다음에야 진상을 조사하고 책임을 묻는 일밖에 없단 말인가. 밝혀야 할 진상이라는 게 고작 매뉴얼 준수 여부라는 말인가. 참으로 실망스러운 점은, 사건을 수습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일 어디에서도 진심 어린 교육적 고려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교육을 위해 헌신하던 교사가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그 길을 마감했는데도, 그 근원적인 이유와 대책 대신 지엽적인 일들에만 온갖 에너지를 다 쏟는 형국이다. 이는 서이초 사건에서도 그랬고 그 이전과 이후 모든 사건에서도 한결같았다.

 

 

비교육적 현실의 연원

 

이러한 비교육적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이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이 시리즈의 제2부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교육에 대해 잘못 알고 그릇되게 생각을 해 온 탓일까? 우리가 못된 일제 식민지 교육을 물려받았기 때문이었을까? 우리 국민이 유달리 남보다 잘 살려는 욕심을 가진 탓일까?

 

찬찬히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교육 경쟁이나 시험의 부작용, 혹은 정치권력의 개입을 통한 교육 왜곡 등은 다른 선진국 사회에서도 낯선 현상은 아니다.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러한 비교육적 요소들은 어느 사회에서나 존재한다. 그렇게 보면 이런 일들로 우리 사회의 비교육적 현실을 한탄하고 나무랄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육을 자기 일로 여겨 고민하는 이들이 이를 스스로 괜찮다고 자위하거나 어쩔 수 없는 일로 포기할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나는 근본적인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하여 교육의 시원(始原)과 제도의 발달 과정을 간단하게나마 돌아보자. 교육학자들은 흔히 교육 행위 또는 교육이라는 현상은 ‘교육’이라는 말이 있기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말한다. 주로 갓 태어난 아이가 부모나 연장자를 따라 배우는 현상이나 원시 부족 공동체에서 다양한 형태로 시행되었던 성년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들을 ‘교육’이라고 부를 때, 그것이 목표로 했던 것 또는 그러한 행위를 통해 추구한 가치들은 오늘날 우리가 ‘교육’이라는 용어에 담고자 하는 것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추측하건대 아마도 그것은 다른 모든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열악하고도 위험한 환경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살아남는 일, 즉 생존을 추구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특정한 행위를 ‘교육’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이를 어느 정도 형식을 갖추어 시행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인류가 정착 생활과 문자를 사용하게 된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인류가 지배 집단과 피지배 집단으로 이원화됨으로써 교육 행위는 지배 집단의 전유물이 된다. 이때부터 교육은 공동체 구성원의 생존을 위한 일보다는 지배 집단의 권력 유지를 주된 목적으로 삼게 된다. 고대와 중세 국가들의 교육 제도와 그 내용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이러한 성격을 띠고 있다. 따라서 이 시기의 교육 목표나 내용, 방법을 보면 오늘날의 교육에서 중시하는 학습자의 행복이나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교육은 단지 특정 계층의 어린 세대에게 기성세대의 지식과 가치, 행동 양식을 전수하는 강제적 행위였을 뿐이다. 다만, 역사적으로 보면 아주 드물게 추상적이나마 이러한 교육 관행과 목표를 비판하고 세태와 다른 주장을 하는 선각자들이 출현하기도 했다.

 

서양 근대사회가 형성되면서 이러한 교육 관행과 형태는 크게 달라졌다. 우선 신분 질서가 무너지면서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교육의 문호가 누구에게나 개방되었고, 근대국가 체제가 성립하면서 근대 공교육 제도가 정착되었다. 교육 내용 역시 지배 계급의 통치를 위한 지식과 덕목에서 모두에게 필요한 실용적인 지식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선각자들에 의해 이전에 간혹 언급되던 이야기들이 교육의 목적과 가치, 혹은 아동을 존중하는 교육 방법으로 구체화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가 수준에서 시행하는 교육, 즉 공교육 제도의 성격과 목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교육은 근대국가를 유지하는 핵심적인 도구로 남아 있다. 한편, 이 무렵부터 교육을 하나의 독자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교육학)이 성립하였고, 이를 통해 교육 현상의 저변에 깔린 교육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노력도 병행되었다. 사실상, 교육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본질적으로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명제는 선각자들의 힌트를 기반으로 이 과정에서 구체화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마지막의 ‘교육의 의미를 탐구하는 일’은, 비록 교육학자들이나 일부 교사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기는 했으나, 교육에 관한 생각과 실천을 훨씬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다양한 교육 행위 중에서 ‘교육인 것’과 ‘교육 아닌 것’을 구분하고자 했고,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행위가 ‘교육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근대사회는 점차 이들의 주장을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타당하다고 받아들였으며, 근대국가는 다양한 제도와 문서를 통해 공교육 제도가 그러한 원칙을 따르는 것처럼 포장하였고, 결과적으로 대다수 국민은 그렇다고 믿게 되었다.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그렇게 하는 게 정책과 제도의 정당성을 획득하는 길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또 그것은 새롭게 등장한 교육학과 교육학자들이 노력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들은 근대교육이 형성, 정착, 발달해 온 지난 300년 동안 착실하게 교육의 개념과 원리, 가치, 방법 그리고 실제 적용의 결과와 제도 운영 방법 등을 나름 학문적 체계로 갖추어 놓았다. 그 맥락에서 보면 현실의 교육, 달리 말해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교육 행위는 모두가 ‘교육’이 되었다. 즉, 교육학자들이 애써 구분하고자 한 ‘교육인 것’과 ‘교육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고 어느덧 모든 것을 ‘교육인 것’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의 교육이 본래 교육학자들이 규정한 교육의 개념과 일치하거나 근접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현실의 교육은 여전히 개인과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데 반하여, 대외적으로 공표되는 교육의 개념은 개별 인간의 존중이나 자아실현 또는 보편적 가치의 구현을 강조한다. 이 점에서 보면 실제의 교육 현실에서 교육학자들이 추구하는 교육적 가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얻으려는 것’과 다름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오늘날의 공교육 제도를 성립시킨 동인과 그 실제 과정은 교육학자들이 생각하는 교육의 개념이나 목적과 전혀 관련이 없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근대 공교육 제도는 산업혁명 과정에서 양질의 노동력이 필요한 산업자본가들과 안정된 국가 체제를 구축하려는 근대국가 권력의 이해관계가 서로 결합하여 성립되었을 뿐 그 과정에 어떤 교육적 가치나 원리가 고려된 게 아니었다. 의무교육 제도와 관련하여 일찍부터 강조된 아동 노동 금지의 실제 의미는 아동 자체의 존중이라기보다는 장래의 노동력 손실 방지였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오늘날 민주화된 정부라 하더라도 막대한 인력과 재정이 소요되는 교육 체제의 운영에서 교육적인 원리의 실현보다 산업사회의 요구와 정치적 유불리를 우선하여 고려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다.

 

둘째, 원시나 고대 혹은 중세에 비해 근대사회에서의 ‘생존’의 문제는 상대적으로 훨씬 덜 급박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정책 결정과 개인들의 투자 우선순위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사교육 열풍은 그만큼 개인들의 삶이 각박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후적 성찰을 통해 정립된 교육의 의미를 구현하는 일은 이해하는 사람도 드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급박성도 별로 없다. 대다수에게 그것은 시쳇말로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사안일 뿐이다. 그런 까닭에 공자 시대에 진정한 도를 받아들여 베푼 제후가 없었듯이 오늘날에도 학자들이 규정하는 진정한 교육의 길을 정책에 반영할 정치 지도자는 기대하기 어렵다. 정치나 국가 권력의 속성상 눈에 보이는 ‘생존의 길’은 지극히 당연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셋째, 근대 공교육 제도에서 실제로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이미 개별 교육자가 아니라 체제의 일부로서 존재하고 기능한다. 물론 그래도 상대적 자율성이 없을 수 없고, 또 국가 제도나 교사나 개개인의 특성에 따라 그 자율성의 범위가 커질 수도 있다. 이 점은 예외적인 교육 상황이 구현되거나 기대할 수 있는 틈새를 제공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런 일은 극히 드물며, 따라서 체제가 요구하는 교육적이지 못한 관행이 전체 교육 현실을 압도할 수밖에 없다. 일부 교사들이 개인적으로는 ‘이건 아닌데…’ 하는 의구심을 갖고 때로 저항할 수 있지만, 전체 교육 현실은 아이들을 재료 삼아 잘 팔릴 수 있는 상품으로 개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모든 교육 제도와 법규, 그리고 관행들은 교육에 대한 현실적인 욕구나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할 뿐, 그것들을 통해 실현해야 할 교육적 가치나 목표 등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럴 수가 없다. 그 주된 이유는 그것들이 교육학자나 교육자가 아니라 국가, 구체적으로 말해서 정치권력의 주도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민주적 의견 수렴을 거친다고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교육학자들의 말보다는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중시할 뿐이다. 따라서 실제 교육에서 교육적인 목표나 가치 등이 구현되지 않더라도 정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교육학자들의 문제 제기는 대중에게 하찮은 모기 소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은 거대한 사기다

 

이즈음에서 나는 도달하고 싶지 않은 결론을 말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교육은 바로 거대한 사기라는 것이다!

 

‘사기’란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일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고 하거나 그런 것을 아니라고 하는 것 모두가 사기이다. 실제가 교육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을 버젓이 교육이라고 부르는 현실, 그게 곧 사기다. 실제가 그렇지 못한데도 교육을 받으면 모두가 잘살게 된다고 하는 게 사기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한 현실 자체가 사기다. 실제로는 기운 운동장 위에서 경기를 벌이면서 공정한 입시라고 말하는 게 사기다. 제도와 정책 자체가 아이들을 훈련과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고 극심한 경쟁의 장으로 내몰면서도 미래를 위한 교육이라고 강변하는 모든 언설 자체가 곧 거대한 사기다. 때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를 ‘이상과 현실의 괴리’라고 하지만, 솔직히 사기에 훨씬 가깝다.

 

이렇게 볼 때 짐짓 진지한 체하며 오늘도 이어가는 모든 교육 행위와 정책들은 바로 서두에서 말한 ‘벌거숭이 임금님’과 다름없다. 어느 순진무구한 아이가 외치는 ‘에이, 거짓말이야. 그건 교육이 아니야!’라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쥐구멍을 찾아야 하는 신세가 아닐까.

 

변화는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은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고 잘못된 것을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기득권을 내려놓는 일이다. 불시에 찾아온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교육 대개혁’, ‘교육 대전환’의 구호가 흩날린다. 하지만 사기적 교육 현실을 그대로 둔 채 몇 가지 땜질식 처방을 제시하는 것은 대개혁도 대전환도 아닌, 그 자체가 또 다른 사기로 이어질 뿐이다. 사기꾼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사기 행각을 고백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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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신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 이종태

현재 건신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며, 서울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를 취득하였다. 이후 한국교육개발원 연구위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원장, 한울고등학교 교장, 이우학교 초대 이사장, 참여정부 교육혁신위원회 상임위원, 교육을바꾸는사람들 21세기연구소장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그 외에 '사회정책 제3의 길(2008), 대안교육 이해하기(2007), 현대사회와 교육의 이해(2004), 고등학교 교육학(2002)' 등 다수의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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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1. 푸른하늘 수정 삭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결국 누군가 “행동”을 해야 변화가 “시작” 될 수 있다고 보이네요.

    행동하는 척이 아닌 진짜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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