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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교육 용어 사전 [우리 교육 사전_250403]

#1237 편집실, <교육 제4의 길> 편집진 2025.03.31

250403판에는 표제어 1개(‘교육격차’)가 새롭게 추가되었습니다.

 

‘교육격차’

(위의 용어를 ‘클릭’하면 해당 용어로 바로 이동합니다.)


 

 

<사전 만드는 취지와 참여 안내>

 

교육을 이야기하며 사용하는 용어는 교육 현실을 드러내기도 하고 교육 현실을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공정한 수능’이란 말이 수능이 중대한 ‘인생 게임’이라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고, 수능을 ‘공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과 그것에 이끌리는 여러 제도나 조치를 불러오듯이 말입니다.

 

‘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이 독자와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교육 용어 사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우리가 쓰고 있는 교육 관련 용어들을 짚어 그 뜻을 새삼 살피고 정리하면서, 우리의 통념을 깨닫고 새로운 교육 이야기를 지어 갈 수 있길 바랍니다.

 

교육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배어있는 용어이면 어떤 것이든, 표제어로 삼아 나름의(또는 ‘세상의’) 뜻풀이를 적어 보내 주십시오. 사전에 이미 등록된 표제어에 토를 달거나 수정 보완해 주셔도 좋습니다. 사전 만들어 가는 과정이 유쾌하기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때로는 ‘관제’ 용어를 풍자하며 정책을 질책할 수도 있길 바랍니다.

보내주시는 모든 내용은 편집실에서 정리하여 꾸준히 사전 업데이트에 반영하겠습니다. 거듭 새로워지는 사전의 ‘현재본’은 항상 ‘교육을바꾸는사람들’ 홈페이지 상단에 올려두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보내실 곳: gyobasa@21erick.org
• 보내주시는 내용에 존함과 연락처도 적어 주십시오. 업데이트 의논과 사례에 이용하겠습니다.

 

* 아래 표제어는 ‘가나다순’으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 이번에 새롭게 등재한 용어 및 수정보완된 용어는 ‘청색’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공부’

 

학생의 경우에는, 시험 점수를 얻는 데 효험이 있을 인지적 활동을 가리킨다. 훌륭한 사람이 되는 데 도움이 되는 ‘공부’ 이야기가 없지 않지만, 그런 이야기에서 ‘공부’는 대체로 위선적인 뜻을 품는다. 어른들은, 다른 집 아이들을 위해서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하라고 충고할지 모르지만, 자기 자녀에게는 그런 공부를 공부가 아니라며 말릴 것이다. 학생이 좋아서 또는 궁금해서 ‘공부’할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본인은 공부라 우기겠지만, 적어도 부모님이나 선생님은 공부가 아니라고 지적하기 십상이다. 특히 시험을 앞둔 시기에는, 지금이 어느 땐데 그런 헛된 짓을 하고 있느냐고 핀잔할 것이다.

 

 

‘공정 교육’

 

교육 기회가 배분되는 사태를 상정하여 종종 사용하는 용어로, 어떤 특혜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이의제기 여지가 없도록 교육 기회를 나누는 상태를 가리킨다. 현실에서는 보통 배분 규칙을 모든 대상에게 똑같이 적용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한편, ‘교육 기회’라는 개념에 ‘교육 결과(성취)’의 의미까지 암암리에 포함해 이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때 ‘공정 교육’은 교육 결과(성취)가 교육과정(敎育過程)이 부당해서 차이 나는 일이 없도록 보장하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이때 교육과정이 부당한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일에 대해서는 입장이 분분하다.

 

이상과 같은 의미로 ‘공정 교육’을 사용할 경우, 그 뜻에 합당한 ‘교육’이라고 해서 정의롭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배분되는 교육(기회이든 결과/성취이든)에 대한 의미 규정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입시 위주 교육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이 되지 못한다면, 입시 위주로 돌아가는 학교 교육을 아무리 공정하게 배분하더라도 그런 ‘공정 교육’은 비교육적인 것으로, 정의롭지 못하다.

 

 

‘교과서’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국가가 정한 교육과정을 자세하게 풀어 정리한 교육자료이다. 학생들이 그 내용을 얼마나 습득하게 되건, 학기별로 처음부터 끝까지 수업 진도는 완결되어야 한다. 적지 않은 학생이 배움에서 처지고 결국 포기하게 되지만 진도는 나간다. 교육정책은 교과서에 포함하면 내용은 가르쳐진다고 전제한다.

 

‘인공지능 디지털교과서(AIDT)’

한국 교육부가 세계 최초로 만들어 채택하겠다는 교과서이다. 교육부장관의 말로는 모든 학생에게 맞춤교육이 이루어지게 할 ‘교실 혁명’의 열쇠라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런지는 숨겨져 있다. 그렇게 대단한 교과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어떻게 1년도 안 되는 ‘학습’ 시간에 모든 학생에게 맞춤의 ‘교육’을 실행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해지게 되었는지 설명해 주지 않으며, 세계 유례없는 맞춤교육의 도구라면서, 그 맞춤(알고리즘)이 어떤 표적을 향하는지도 말해주지 않는다. 짐작건대, 곧 나오는 AIDT는 옛날의 ‘전과’와 ‘완전학습 참고서’를 묶어 디지털화한 정도일 것이다. ‘개념과 원리’에 대한 제법 자세한 설명과, 학생이 수준을 높여가며 풀 수 있도록 문제를 제시해 주는, 말하자면(‘디지털’이므로) 매우 ‘두터운’ 참고서라고 상상하면 될 것이다. 물론, 디지털 기술이 제공하는 ‘VR’의 매력을 갖추었을 텐데, 그 매력은 곧 퇴색할 것이다. 화려하지만 내용에 대한 진정한 호기심을 키우지는 못할 교과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교사’

 

학교에서 교육의 일을 맡는 사람이다. 스승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도 쓰였었지만 그런 뜻은 거의 죽었다. 교사들 스스로 그렇게 부르지 말아달라 청원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특히 정책적으로는, ‘교육 공급자’라고 불린다. 공급자로서 그들은 교육 수요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학교 단계가 올라 갈수록 그들의 직무는 학생들의 진학 경쟁력을 키우는 일로 귀결한다. 정부나 학부모의 수요가 그렇기 때문이다. 문제 풀이 수업의 수요가 매우 강해서 이에 부응하는 것이 주된 사명이 된다.

 

 

‘교육’

 

교육¹

사다리 타기 게임이다. 어떤 출발 지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종점에서 얻는 이익이 달라진다. 그러나 사실 출발점 선택을 스스로 할 수는 없다. 어디에서 어떤 가정에 태어나 자랐느냐에 따라 올라가는 경로가 달라진다. 올라가는 중간에, 돈이나 권력 같은 게 있다면, 알음알음으로 경로를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밖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올라가는 능력에 따라 길을 달리 잡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승패는 일찍이 결정되어 있는, 게임 아닌 게임이다.

 

교육²

꼰대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다. 대체로 지루하지만, 잘 기억해야 한다. 들은 것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시험에서 보여주지 못하면 머저리 취급받게 된다. 부모가 많은 재산을 물려주거나 스스로 떼돈을 벌면 그런 취급에서 면제될 수는 있다. 그렇지 않으면 대학 수준까지는 들어야 사람 취급받으며 살 수 있다. 그러했다는 증서는 취업이나 결혼에도 요긴하다.

 

교육³

학교 교육과 비슷한 말로, 학교 제도를 바탕으로, 국가가 국민을 통솔하고 국가 경쟁력의 재료인 ‘인적자원’을 개발하려는 과업이다. “저출산 시대에 교육이 더욱 중요하다”는 흔히 듣는 말에 그런 뜻이 담겨 있다. 인구가 줄어들면 개개인을 ‘일당백’으로 ‘교육’해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이 ‘평생학습’이란 용어에 복속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교육은 이제 국민 스스로 평생 인적자원으로서 값을 유지하려고 애써야 하는 과제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교육⁴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행동이다. 인류 역사를 문화 축적의 역사라고 볼 때, 그 축적은 가르치고 배우는 인간의 행동으로 가능했다. 그렇게 한 세대가 앞선 세대들이 집적해 놓은 문화 바탕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인류문명은 이룩되었다. 교육은 바로 이 문명화 과정에 핵심으로 작용했다.

 

 

‘교육격차’

 

‘교육격차’란 교육에서 집단을 비교할 때 나타나는 차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때 집단 비교에는 모종의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서로 견주어지는 집단(들) 사이에서(흔히, 계층, 인종, 성 등에서) 차이가 일어나선 안 된다는 ‘정의론’이 바탕에 있다. 비교 대상이 특정된 맥락에서는 용어가 더 구체화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학업성취도를 얘기할 때는 ‘성취(도) 격차’, 계층 간 차이를 얘기할 때는 ‘계층 격차’, 기대 수준과 실제 학습 수준을 얘기할 때는 ‘학습 격차’ 등의 용어를 쓴다. 격차를 지시할 때 영어에서는 주로 ‘gap’이란 단어를 쓰지만, ‘디지털격차’(digital divide)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매체나 자원 등이 새롭게 생겨나면서 일어나는 차이를 가리킬 때는 ‘divide’란 단어를 쓴다.

 

어떤 경우이든, 교육 담론에서 격차라는 개념은 본디 정의나 공정을 추구하는 견지에서 생겨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개념을 적용하는 논의나 정책은 근본적으로 정의롭지 못할 위험을 품고 있다. ‘격차’는 으레 실증적으로(‘점수’로) 확인되는 간극을 증거로 문제가 되며, 그것에 대한 논의는 그 확인된 틈을 메울 대책을 찾는 쪽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계량화된 논변은 결국 교육을 매우 편협하게 왜곡한다. 이를테면 교육 성취를 표준화된 시험의 점수와 마찬가지로 취급하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OECD의 PISA가 그렇다. 언어, 수학, 과학 등의 시험 점수 차이로 다양한(계층, 성, 국가/지역 등에서의) 격차를 이야기하는데, 그런 담론이 교육을 점수 올리기로 인식하게 만들며 세계 교육 정책을 흔들고 있다.

 

 

‘교육평가’

 

본디 교육의 시작 전부터 마무리까지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점검 행위를 가리켰다. 어느 수준에서 시작할지, 과정은 제대로 흐르고 있는지 그리고 의도한 성과는 얼마나 거두었는지 알아보려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이런 뜻은 증발해 버렸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점수(‘라벨’)를 붙이며 변별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절대평가’

점수대별로 다른 등급을 매기는 방식의 평가이다. 시험을 쉽게 또는 어렵게 출제함으로써 수험생이 받는 등급을 임의로 조절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고무줄 잣대’의 평가이다.

 

‘상대평가’

한 집단에 속하는 학생들 사이의 순위를 기준으로 점수(등급)를 매기는 평가이다. ‘나’의 실력보다 같이 평가받는 다른 학생의 실력이 내 점수를 좌우하는 이상한 평가 방식이다.

 

 

‘경쟁 교육’

 

‘경쟁’이 뒤에 오는 ‘교육’을 수식한다고 보면, 이 조어는 교육 자체가 경쟁을 위해 있는 사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명료하게 정리된 바는 없지만, 우리나라 교육이 온통 경쟁에 휩싸여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짐작된다.

 

엄밀하게 보면, 이 용어는 말이 안 된다. 자체 모순이다. 교육의 여러 종류 가운데 하나로 ‘경쟁 교육’이 있다는 맥락을 전제하는데, 교육은 본질적으로 협력을 전제한다. 협력이 전제되지 않은 것은 본질상 교육이 못 된다. 교육 실제에 경쟁이 잠입하는 것은 제도 탓이지 교육 자체의 속성 탓이 아니다. 이 점에서 ‘경쟁 교육’은 교육의 성질을 깊이 숙고해 내놓은 말이 아니라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교육 제도가 과열 경쟁을 낳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한 수사용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맞춤교육’

 

맞춤교육¹

기성복이 아닌 맞춤복처럼 학생마다 맞춰 제공하겠다는 교육을 뜻한다. 정보 기술(IT)이니 인공지능(AI) 기술이니 하며 ‘에듀테크’가 유행하면서 교육부가 정책 구호로 채택해 적극 퍼뜨리고 있는 용어이다. 최근에는 ‘AI 디지털교과서’가 ‘대전환’ 맞춤 도구라며 채택하겠다고 열 올리고 있다. 그렇지만, ‘교과서’ 자체가 이미 맞춤이 아니라 모두에게 강제하는(똑같은) 기성복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어떻게 맞춤의 도구가 된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맞춤교육은 결국, 유니폼을 학생 개인 치수에 맞게 만들어주는 것과 같은 식으로, ‘똑같지만 모두에게 똑같지는 않은’ 교육이다.

 

맞춤교육²

국가 교육과정과 그것에 일관된 표준 교과서가 제도로 정착된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 ‘맞춤교육’은 진도를 학생의 학습 속도에 맞추는 교육을 뜻한다. 위 풀이(1)는 이런 교육 프로그램을 교과서가 획일적이라는 이유로 맞춤교육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편협하다. 교과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생기지 않도록 예방하는 뜻에서라도, 맞춤교육의 풀이는 더 열려야 한다. [이미 등록된 풀이(1)에 대해 ‘극복하는 힘’ 님이 이의제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추가한 것입니다.]

 

 

‘미래’

 

일반적으로 ‘앞으로 올 때’를 가리키는 뜻으로 쓰이지만, 교육 이야기에서는 ‘불확실해서 두려운 때’라는 뜻이나 ‘살아남기 위해 지금 단단히 준비해야 할 때’라는 뜻으로 더 쓰인다. ‘일자리’와 ‘먹거리’를 거론하며 특히 그렇게들 쓴다. 미래란 지금 있는 일자리들이 대부분 사라지는 때를 이르며, 그렇게 일이 사라지는 상황에 적응하고 또 먹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애써야 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때 먹거리는 개인의 생존과 국가의 경쟁력을 아울러 가리킨다. 미래는 불확실하다고 하면서도, 어떤 점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그 정해진 듯한 상황에 대해서 지금 ‘미래 역량’을 쌓으며 대비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런 모순적인 이야기가 특히 ‘교육 개혁’을 위해 태연스럽게 소통된다.

 

 

‘미래 교육’

 

‘앞으로 올 때를 준비하는 교육’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그냥 좋은 교육’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있는 일자리가 대부분 사라질 미래를 대비해서 교육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할 때 ‘미래 교육’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한국판 뉴딜을 외치며 학교를 ‘그린스마트스쿨’로 짓거나 고치면서도 미래 교육을 추구한다고 했었다. 특히 교육부에서는 미래가 불확실하다고 종종 강조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미래를 알고 준비(교육)할 수 있게 되는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오늘과 미래는 사실상 붙어 있고 또 오늘 우리의 의논과 결정이 미래 우리 삶의 형편을 결정할 텐데, 왜 잘 모르는 미래를 그리면서 그 허구의 상황에 대한 적응 훈련을 해야 하는지도 설명하지 않는다. 교육부나 교육청은 종종 새롭게 발진하는 정책을 ‘미래 교육’ 정책이라 칭하면서 그냥 교육을 발전시킨다는 듯이 이야기하기도 한다. ‘미래’를 ‘좋은’이라는 뜻의 형용사로 쓰는 셈인데, 역시 ‘불확실한 미래’를 팔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든다.

 

 

‘미래 역량’

 

미래에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망라해 가리키는 말이다. OECD 같은 국제기구에서 유행시켰고,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세계 여러 나라가 받아 쓰고 있다. 교육이 그런 역량을 키워야 한다며 구체적으로 그 역량을 정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정의는 동어반복이다. 예컨대,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창의적인 역량’이 필요하다면서, 창의적인 역량은 불확실한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이야기하는 식이다. 수백만 년 전을 포함해서, 창의적인 능력이 필요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기나 했는지 따져보면, OECD의 정의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PISA 프로젝트 같은 데서는 미래 역량을 평가하는 시험도 시행한다. 미래의 핵심적인 속성이 불확실성이라면서, 미래 역량은 어떻게 알아내서 평가까지 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결국 그 시험은 전통적인 교과에 대한 학업 성취를 평가하고 있는데 말이다.

 

 

‘미래 학교’

 

앞으로 변화해 있을 학교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시설이나 설비 등이 ‘그린화’하고 ‘디지털화’했다는 신식 학교를 선전할 때도 이 말을 쓴다. 2000년대라는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그리고 2001년 OECD에서 학교 교육이 미래에 어떻게 변할지 예견하는 시나리오를 내놓으면서, 우리나라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미래 학교를 그리는 작업이 유행했다. 많은 시나리오는 공통되게 미래에는 학교가 사라지리라 예견한다. 학교 다니지 않아도 학습할 수 있는, 그리고 그 ‘자기주도’ 학습을 도울 수 있는, 다양한 기술이 생겨나기 때문이라는 근거에서이다. 기술이 마치 교육과 학습이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이끌 것처럼 말한다. 인류의 역사를 기술이 전부 결정해 왔다는 듯이 안이하게 예언하는데, 기술이 있다고 모든 기술이 쓰이는 건 아니란 사실은 그런 ‘기술주의’ 언사를 믿기 어렵게 만든다.

 

 

‘사고’

 

학생을 ‘사고’하게 만드는 일은 교육 행위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국어사전에서 제시한 ‘사고’의 첫 번째 뜻은 ‘생각하고 궁리함’이다.
한국의 교육 현실은 사고하도록 이끄는 것이 아니라, ‘계산( 計算)’하도록 훈련시킨다. 이 계산은 수학이나 과학에서 요구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예상하거나 고려하고’, 그 기준은 대부분 ‘값(이득)’인 계산이다. 한국 사회는 학생들에게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점수를 받을지 ‘계산’하게 만들고, 입시에서 어떤 전략을 짜면 유리할지 계산하도록, 심지어 어떤 친구를 사귀고 가까이해야 이득이 될지를 계산하게 한다. 오늘의 나를 계산해서, 내일의 더 나은(이때 무엇이 더 나은 것인지는 따져보아야 할 테지만) 내가 되도록 기획하고 계산한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나도 값이 매겨진다. 지금과 내일의 내가 되는데 이득이었는지, 손해를 끼쳤는지를 따진다. 학교생활의 순간과 일상에서 이 같은 계산과 멀리 떨어진 친구들도 있을 테다. 하지만 12년의 학교생활을 마무리할 때 이 ‘계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학생은 없으리라.
아이들이 처음부터 스스로 계산했을 리는 없다. 사고 혹은 생각을 ‘계산’으로 착각하는 어른들의 세상에 물들었을 테다. 학교부터 사고(思考)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baram 님의 풀이

 

 

‘수포자’

 

‘수학을 포기한 자’의 준말이다. 흔히 수학 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기로 작정한 학생을 가리킨다. 그러나 학생들은 수학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서 포기하기도 하지만, 수험 과목으로 수학을 선택하지 않기로 입시 전략을 세우면서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포기한다’고 해서 수학의 능력이나 흥미가 없다는 뜻이 되지는 않는다. 입시 제도와 문제 풀이 위주 수학 교육 때문에 생겨나는 ‘포기자’인 셈이다. 따라서 ‘잘못된 수학 교육으로 생기는 부수적인 희생자’(‘수부자’)라고 해야 더 적확할 것이다. 수능에서 수학을 선택해 만점 받는 수준의 학생도 수학을 싫어해 더 이상 공부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학생들이 있는데, 이 경우에는 ‘수포자’라고 부르지 않고 오히려 ‘능력자’ 취급한다. 기묘한 일이다.

 

 

‘입시’

 

본디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치는 시험을 일컬었지만, 학생 선발에 이제는 시험 외에 다른 여러 방법이 사용되므로 그 모든 과정이나 절차를 뜻하기도 한다. 진학 경쟁이 사실상 대학으로 올라가는 단계에 몰린 현실에서는 종종 대학입시와 같은 말인 듯이 쓰인다. 입시 논란이 주로 ‘인서울’ 또는 ‘스카이’ 수준에서 일어나므로, 그 개혁은 사실상 ‘상위권’ 진학 희망자들만 염두에 두고 이루어진다. 특성화고등학교 학생이나 일반계 고등학교의 하위권 학생들은 입시 이야기에서 대체로 ‘투명 인간’ 취급된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대학 입학 전형의 정시 전형에서 주로 사용되도록 정부가 시행하는 시험이다. 수시 전형의 ‘최저 기준’으로도 쓰이며, 대학생 사회에서 ‘실력의 층’을 구분하는 근거로도 쓰인다. 이런 쓰임새를 보면, 이름 그대로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을 갖췄는지 가늠하는 시험인 듯하다. 한편, 대학에서의 성취가 이 시험 성적과 거의 무관하다는 연구 결과도 많고, 이 시험 성적을 높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자율적인 공부보다는 모의고사 훈련이라는 경험적 증거들도 많다. 이런 점을 보면 대학 수학 능력을 잰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기도 하다. 30년 이상 쓰여온 용어인데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아직도 고유명사인지 보통명사인지 모호한 채 남아 있다.

 

 

‘학교 폭력(학폭)’

 

낱말의 뜻으로만 보면 학교가 행사하는 폭력을 가리키는 용어인 듯하지만, 정책 용어로서는 학교 안팎에서 학생들 사이에 일어나는 폭력만을 가리킨다. 학교 자체가 폭력적인 현실이나 교원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가리키는 용어는 따로 없다.

※ pphl님의 지적에 따른 수정

 

 

‘학점’

 

일반적으로는 대학에서 받는 점수를 일컬었었는데 ‘고교학점제’라는 제도가 들어오면서 고등학교에서도 쓰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뜻은 다르다. 대학생에게는 이수한 과목에서 얻은 성적을 나타내지만, 고등학생에게는 이수한 과목의 주당 시간 수를 가리킨다. 졸업하기 위해 정해진 수준 이상으로 채워야 한다는 점에서나, 창의적이기보다 순종적이어야 탈 없이 나온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실력의 척도로서는 고등학교와 대학교 어디에서도 크게 인정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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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제4의 길> 편집진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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