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수상자 보유국’이 되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되돌아봅니다
| “학교 교육에서 모든 노력이 반드시 정답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면, 그런 정답을 기억하는 개수에 따라 학생을 상벌하는 게 교육상 공정하고 정의롭다면, 그것은 교육이기보다는 폭력에 가까울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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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가 한강이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입니다. 이 소식은 한글날 이튿날 저녁에 터졌습니다. 이후 내내 우리 사회는 흥분해 있습니다. “한강 신드롬”이란 표현까지 나왔습니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카뮈의 수상 이래 가장 젊은” 작가가 받게 된 데는 세계도 놀란 듯합니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를 영역한 Deborah Smith는 한국인이 노벨상에 집착하는 게 특이하다고 했답니다. 자신이 번역한 작품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면서, 한국 독자들로부터 노벨상 가능성 질문을 많이 받은 듯합니다. 사실, 삶이야 남의 평판에 신경 씀 없이, 자기 가치대로 오롯이 살아가면 그만일 마련이지만, 우리는 종종 그러지 못합니다. ‘선진국’에서 인정해 주지 않으면 스스로 자긍하질 못하는 습성이 우리에게 없지 않은 듯합니다. ‘국제 순위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다고 우리 스스로 비웃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노벨상 수상자 보유국’이 아니란 자격지심을 앓아 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나지 않는 이유’도 때마다 설왕설래했습니다. 4반세기 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았지만, 노벨상을 향한 우리의 갈구는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평화상이 다른 부문의 노벨상과 성격이 좀 다르기 때문이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더 ‘지적인’ 성취 경쟁에서 국제적 인정을 바라 온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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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이야기가 나오면 학교는 으레 욕을 듣습니다.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되곤 합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마는, 학교가 학생의 창의성을 죽인다는 비판이 흔합니다. 호기심을 죽인다는 말도 많이 합니다. 우리나라 현실에 좀 더 특정해서는 ‘입시 위주 교육’이 문제라는 말을 유독 많이 합니다. ‘단편적 지식 중심’의 ‘암기 위주’ 교육이고 ‘정답 주의’ 교육이라 지적합니다. 그런 교육이 탐구심을 북돋고 깊은 생각을 자극할 수 있겠느냐, 그래서 노벨상 받을 뛰어난 학자나 작가를 키워내지 못하는 것 아니겠느냐 개탄해 왔습니다.
이상하게도 요즘엔 ‘입시 위주 교육’ 이야기를 거의 들어볼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학생들 입시 대비만 시켜서 문제라는 말은 일제 식민지 때부터 있었고, 80년대까지도 유행어처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이야기가 잦아들었습니다. 아니, 이제는 이야기가 뒤집혀 있습니다. 교육부 장관을 비롯한 정책 결정자들은 오히려 학교가 입시 준비를 학원보다 더 잘 시키지 못해서 문제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입시 교육에 충실해지는 것이 ‘공교육 내실화’의 길이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합니다.
EBS 강의와 수능을 ‘연계’하는 정책만 봐도 이상한 게 보입니다. ‘입시 위주’의 구태(舊態)라고 비난받는 가운데서도 이 정책은 15년 넘게 유지되고 있습니다. EBS에 수능 대비 강의를 시키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는 그 강의 내용을 반영해(심지어 교재 지문을 그대로 써서) 수능을 출제하도록 규제합니다. 학교에서는 그런 강의 영상이나 교재를 수업에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도 정책이 권장하는 바입니다. 말하자면 교육정책은 이제 입시 위주 교육을 막는 게 아니라 독려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경에서 학교가 입시 준비를 시켜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생뚱맞은 짓이 될 것입니다. 적어도 정부 주변에서는 그런 비판이 나올 리 없습니다. 교육계나 언론 또한 늘 정부의 언어를 따라가기 때문에, 입시 준비 교육에 대한 비판은 ‘자연스럽게’ 사그라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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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에 대한 미련이 말라버렸던 것 같지도 않고 학교 교육에 대한 불만 또한 누그러지지 않았던 듯한데 ‘입시 위주’라는 비판은 왜 사라졌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입시 위주 행태는 더욱 기승하고 그래서 학교 교육은 거의 무너진 듯한데도, 그런 현실을 묵인하기에 이른 경위가 어떤 것인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짚이는 요인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지난 20여 년 사이에, 우리는 학교 교육이 ‘수요자 중심’이어야 한다는 말을 심상히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교육은 학생과 학부모가 원하는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변한 데는 정부의 공이 큽니다. ‘역사적’이라 평가되는 ‘5.31 교육개혁’에서, 이를테면, 핵심적인 ‘개혁’ 캠페인은 “공급자 중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였습니다. ‘군관(軍官) 중심’의 억압에 넌더리를 쳐오던 우리 사회에서 그런 캠페인은 주효했습니다. 당시 ‘문민화’와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생활세계의 모든 부문은 ‘시장’으로 넘겨지고 수요자 중심으로 가야 마땅할 듯 여겨졌습니다.
이런 마당에서 학생과 학부모가 학교에 바랄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성적을 높여 주는 것, ‘좋은’ 학교에 진학시켜 주는 것일 터입니다. 입시(진학)에 성공케 해주는 것이 단연 으뜸의 ‘수요’가 되고, 그 수요를 충족시키는 게 학교의 최우선 사명이 되리라는 것은 번연합니다. 정부는 이 사명에 충실하도록 꾸준히 학교를 몰아댔습니다. 그렇게 입시 위주 교육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칭송받을 일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사회적 수요가 압도적이라 하더라도, 입시 위주 교육의 악성(惡性)을 감안하면, 그것에 대한 비판이 쉬이 잦아들 리 없어 보입니다. 필경 다른 힘이 작용했을 듯합니다. 또 다른 구호, ‘공정’이 그 악을 가린 듯합니다. 입시 위주 교육의 실상에 대해 눈감게 만드는 데 공정이란 구호가 현혹의 힘을 발휘한 듯합니다.
학교가 입시에 깊숙이 연루되면서, 교육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기보다 경쟁 그 자체이자 경쟁 관리 사업이 되어버렸습니다. 교육 경쟁은 치열합니다. 다른 어떤 덕목보다 공정이 요구되는 사태입니다. 선거 캠페인마다 들어서는 정권마다, 공약과 정책에서 으레 공정이란 기치를 쳐들었습니다. 교육의 성질에는 관심 두지 않습니다. 교육이 경쟁인 만큼, 공정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취급했습니다. 국민도 물론 공정을 바랍니다. 공정의 깃발이 휘날리는 이면에서 학교 교육은 온전히 입시 위주가 되어도 무방하게 되었습니다.
교육정책에서 공정의 의미는 ‘객관적이고 투명한 관리’입니다. 이런 ‘공정’은 사실 공정한 결과를 낳지 않습니다. 입시라는 게임 규칙은 고착되어 있고, 게임의 내막을 ‘해킹’해 낸 ‘기술자’들이 생겨난 지 오래입니다. 이 기술자들로부터 ‘득점 요령’을 돈 주고 사는 게 이기는 전략이 된 지도 오래입니다. ‘컨설턴트’의 훈수 따라 학생부를 조직하거나 ‘일타강사’의 지도 밑에 ‘수능 모의’ 훈련을 할 수 있는 학생이 단연 유리한 게 입시라는 게임입니다. 이런 게임을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관리’한다고 해서 공정해질 리 없습니다. 이제 입시는 ‘있는 집 아이들’의 합격을 돕고 정당화하는 ‘루틴’이 되었습니다.
입시는 선발 제도로서도 불공정하지만, 우리가 비판해 온 바 더 근원적으로, 학교 교육 자체를 뭉갬으로써 공익을 훼손합니다. 공정의 이름으로 입시 위주 교육을 눈감는 정책들은 결국 우리 사회의 근본을 좀먹고 있습니다. 공익에 등돌린 정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앞세우고 ‘나’의 수요 충족을 국가에 요구합니다마는,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 무엇이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입시 위주 교육이 이 본질을 거스르는 한, 어떤 정책 어떤 구호로 미화해도 공정해질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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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 교육이 입시 위주라면, 그래서 학생을 창의적이며 깊이 탐구하도록 이끌지 못한다면, 한강과 같은 작가는 어떻게 컸을지 헤아려 보게 됩니다. 그와 같은 작가를 학교가 키웠다고는 말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이전에 했던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살펴보아도, 학교에서 무엇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다행히 학교 교육이 그의 성장을 크게 가로막지는 않았나 보다 여기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한강 작가는 중학교 3학년 때 소설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임철우 작가의 ‘사평역’이라는 소설을 읽었을 때 그런 결심이 섰다고 했습니다. 요즘 학교에서는 진로 지도에 열성입니다. ‘자유학기제’니 ‘고교학점제’니 하면서, 적어도 정부는 그렇게 하도록 밀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때 진로 지도는 다분히 ‘진학’ 지도입니다. 특히 고등학교 단계에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대입 전략상 학생부 ‘장래 희망’ 난을 어떻게 채울지 결정하는 문제와 다름없었습니다. 진로 지도마저 입시 위주인 셈입니다. 나는 무엇인가? 어떻게 살까? 이런 문제를 오직 진학(직업)에 비추어서 궁굴리게 만드는 학교에서라면, ‘잠재적인 노벨상 수상자’인 학생이 어떻게 ‘적응’할지 자못 궁금합니다.
중학교 때가 아니라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도, 대부분 학생에게 진로 계획은 흐릿한 상태에 있다고 듣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1학기를 지내고 학생부에 어찌어찌 장래 희망을 적도록 하고, 그 희망을 최소한 대입까지 밀고 나가도록 조언하는 것이 진로 지도의 대강이라 합니다. 학생의 성적이 다행히 좋다면 으레 의대에 지원하겠거니 여기고 그렇게 유도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취직이 어렵다는 이유로, ‘문과’는 ‘죄송한’ 진로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흔히 듣습니다. 한강 신드롬으로 작가의 꿈을 지탱해 보려는 학생들이 늘어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이 지금과 같은 진로 지도 풍토에서 얼마나 살아남을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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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계에서는 벌써 “제2의 한강 키운다”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답니다. ‘독서교육’을 내실화한다고들 하고, 독서교육 우수학교를 공모해 지원하겠다고들 한답니다. 독서교육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마는, 어쨌거나 그런 프로그램이 훌륭한 작가를 키워낼 거라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어떤 교육청에서는 작년에도 한강의 작품을 ‘유해도서’로 분류해 폐기하도록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교육청은 강제하지 않았고 학교가 알아서 그랬다 변명했다지만, ‘금서 정책’을 썼다는 것 자체로 본색은 이미 드러낸 것입니다. ‘위’에서는 ‘아래’에서 무엇을 어떻게 읽힐지 당연히 간섭해야 한다고 믿는 교육체제에서 진부한 ‘도덕’ 관념을 넘어설 독서교육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하물며 글 읽기라고는 시험 정답을 찾기 위한 ‘지문’ 읽기가 대종인 교육 현실에서라면 더욱 그러합니다.
보도에 따르면, 한강 작가는 열세 살 때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 사진첩을 보게 되었고, 인간의 본질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목숨을 걸고 이웃을 돕듯) 숭고하면서도 (온갖 만행을 저지를 만큼) 포악할 수 있는지 헤아릴 길 없다 느꼈다고 합니다. 깊은 질문에 빠졌다고 합니다. 결국 이 질문은 노벨상 수상에 이르게 만든 작품 가운데 하나로까지 이어졌다고 듣습니다. ‘소년이 온다’는 그 질문을 뚫고 지나가지 않으면 더 작품을 이어갈 수 없을 듯해서, 고통 중에 썼다고 작가는 얘기했답니다.
열세 살 소녀에게 광주 참상의 사진첩은 ‘교육상’ 해롭다 여겨질 만합니다. 작가의 집안에서도 그 사진첩은 겉으로 알아보지 못하게 책장에 거꾸로 꽂혀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소녀는 그것을 접했습니다. 결과를 알고 이야기하는 터라 어색하긴 합니다마는, 그런 ‘도서’는 과연 유해했던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교육이라면, 읽기를 막기보다, 무엇이든 ‘읽어 낼 수 있게’ 키우는 데 힘써야 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계는 ‘어린이’에게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으로 가득합니다. 그것들을 보지 못하게 막을 도리는 없어 보입니다.
나이나 성별 그리고 종교 등 어떤 범주로든, 어떤 공부나 독서를 무조건 금지하는 것은 교육적이라 보기 어려울 듯합니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세상 ‘온통’에 대한 것이어야 할 터입니다. 그 온통을 어떻게 다룰지는 선생과 학생의 전인적 교감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 않을까 느낍니다. 그렇게 믿고 놓아둘 수 있는 조건이 우리 학교 현실에서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 역정 낼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가능한 일일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열린’ 정신을 버릴 수는 없으리라 여깁니다. 조건을 갖추기 위해 진력하는 게 먼저일 것입니다. 지레 세상의 일부를 가리고 ‘접근 금지’해서는 진정한 교육으로 다가갈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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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는 일에 대해 한강 작가는 질문에서 질문으로 이어지는 과정이라 이야기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한 작품에서 다음 작품으로 이야기가 이어지느냐는 질문에 아래와 같이 답했습니다.
“저에게 소설들은 계속해서 이어지는 어떤 것입니다. 이야기가 이어진다기보다는 질문들이 이어지는데요, 어느 시기에든 골몰하는 질문이 있고, 그 질문을 진척시켜 보는 방식으로 소설을 쓰게 됩니다.”
계속해서는, 질문이 이어지는 게, 대답을 찾아서 새로운 질문을 하게 되는 게 아니라, “[앞의] 질문의 끝에 다다랐다고 느낄 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게 [된다]”고도 이야기했습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어렸을 때 한 소설을 읽고, ‘답을 찾아서만 글을 쓰는 건 아니구나. 답을 갖지 못해도 글을 쓸 수 있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렇게 소설을 쓸 용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과업은 ‘선생님은 욱여넣고 학생은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모든 선생님이 다 그렇게 가르치고, 모든 학생이 다 그렇게 수동적이라는 뜻은 물론 아닙니다.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모두 ‘개인차’를 지니고 있지만, 정책적이거나 문화적인 기조로 보면 우리 학교 교육의 ‘그림’은 그렇다 여겨집니다.
수능과 같은 입학시험이나 ‘학교 내신’ 시험을 떠올립니다. 학생들에게 어떤 ‘내용’을 가르치려 들 때 우리 정책은 그것을 시험 과목(범위) 안에 욱여넣습니다. 국사를 공통 필수로 지정한 것이 그 예입니다. 내용을 ‘교육하는’ 결정적인 방안입니다. 입학시험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교육과정(敎育課程)은 교과서대로 진도와 범위를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이 진도를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학기 안에 교과서 끝까지 갑니다. 시험은 ‘배운 범위’에서 출제되어, 역시 ‘교육’의 힘은 관철됩니다.
학생들에게는 ‘정답’이 전부입니다. 점수가 곧 교육받은 증명인 터에, 학생이 교육받은 결과로 질문만 얻는다면, 질문이야 생길 수밖에 없더라도 그것에 대한 답을 시험 전까지 찾지 못한다면, 학교에 다녔어도 교육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학생은 시험 출제자나 교과 선생님이 ‘강조하는’ 내용을 귀 기울여 듣고 두말없이 수용해야 합니다. 교육받는 과정에서 질문(문제)을 숱하게 만나지만, 그것들은 질문이 아닙니다. 품을 가치를 지닌 게 아닙니다. 그것에 매달린 정답을 거두고는 바로 버리게 되는 덩굴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학교에 다녀서 뼛속 깊이 얻게 되는 버릇은 모든 문제에 답이 있으리라는 직관입니다. 일거수일투족에서 힘을 발휘하는 직관입니다.
두말할 나위 없겠습니다마는, 학생들이 얻거나 캐낸 정답은 진실이 아닙니다. 노벨상을 받게 되는 작가가 몇 년을 목숨을 들여 쓰는 작품에서도 답은 찾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하게 만든 질문에서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끊겼다고 느낄 때 그 작품을 매듭지을 뿐이랍니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질 뿐이랍니다. 한강 작가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삶의 진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에 다가가려 애쓰기 때문이란 이유만으로 ‘진실’은 진실인 듯합니다. 그것에 다가가려는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가지를 쳐 번져갈 뿐입니다. 우리는 진실에 다다를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정답이 모든 것’이라 가르친다면, 그런 교육은 어떤 삶을 살도록 이끌지 모르겠습니다.
학교 교육에서 모든 노력이 반드시 정답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면, 그런 정답을 기억하는 개수에 따라 학생을 상벌하는 게 교육상 공정하고 정의롭다면, 그것은 교육이기보다는 폭력에 가까울 것입니다. 한강 작가는 운 좋게도 그런 폭력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교육이라면, 읽기를 막기보다, 무엇이든 ‘읽어 낼 수 있게’ 키우는 데 힘써야 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 (본문 내용 발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을 읽으면서 마음 속에 질문이 생겨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