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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을 바꾸는 사람들은 전 능률교육 대표 이찬승 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교육개혁 연구와 실천운동을 하는 공익단체(NPO)입니다.

사교육 톺아보기⑥ – ‘사교육 고통’ 아닌 사람의 삶을 이야기하자

#1079 강태중,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2024.07.02
사교육 대책은 오히려 사교육을 조장했고, 공교육(학교 교육)마저 죽였다고 이야기한다. 이제까지와 같은 정책으로는 학교와 교육을 거듭 나쁘게 몰아가게 될 뿐이라 말한다. 근본적으로 ‘사람 됨됨이’에 대한 우리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개천의 용’ 이야기, ‘메리토크라시’ 이야기, ‘공정성’ 이야기 등을 모두 정리해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사교육 대책으로 공교육 빈사 상태

 

50년은 족히 넘었다. 사교육과 씨름한 정책의 시간 이야기이다. ‘사교육 대책’은 아직도 버젓하니, 씨름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 여길 것이다. 얼마 전에도 교육부 장관은 ‘디지털교과서’ 같은 혁신적인 무기를 곧 얻게 되면 전세가 크게 호전될 것이라 입찬소리했다. 이제까지 어떤 싸움(정책)을 해 왔는지, 어떤 싸움이었어야 했는지도 깨닫지 못한 흰소리이다. 전쟁으로 치면, 적(敵)이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싸웠다는 얘기이다.

 

전쟁은 일단락 난 지 오래다. 참담한 패배였다. 적을 몰랐으니 당연한 결과다. 지켜냈어야 할 공교육의 보루는 벌써 무너졌다. 사교육은 학교를 점령했다. ‘학원’과 학교에서 ‘서비스’는 이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은 만큼 학교가 사교육의 식민지이다. 지난번 글에서 쓴 대로, “우리나라에서 사교육은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라 학교 교육 본체가 되었다.” 여전히 전쟁 중이라 호들갑 떤다면 가당찮은 노릇이다.

 

교육부가 여전히 ‘사교육 대책’이라며 내놓긴 하지만, 거기에선 사교육과 맞서고 있지 않다. 사교육을 옹호하고 있다. 사교육을 ‘공공’ 서비스로 포장해 파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정부는 사교육 시장의 유력한 업자이다. 사교육 업자들과 시장 점유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교육부 말로 하면, “사교육 수요의 공교육 내 흡수”를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국민의 사교육비 부담’을 낮추겠다는 일념에 매달리고 있다. 충직한 ‘에이전트’로 학교와 EBS를 동원한다. ‘싸고 질 좋은’이라는 구호 아래 사교육 서비스를 생산 유통하고 있다.

 

앞선 글들에서 거듭 이야기했듯이, 사교육(과외) 정책은 당초에 그것을 ‘근절’하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그것은 사교육을 몰아내기 위한 싸움이었다. 대체로 입시 위주 교습이었던 사교육은, 학교 안에서는 물론 학교 밖에서도 나돌아선 안 될 악습으로 여겼다. 교육 당국은 금지하거나 사그라뜨리려고 애썼다. 1980년의 ‘7.30 교육개혁’에서만 해도 이렇게 을렀다. “어떤 형태의 과외 공부도 금지한다.” 현실적이지도 않고 민주적이지도 못했던 엄포였다. 하지만 당시 인식만은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사교육은 ‘절대 금지’해 마땅한 것이라 여겼다.

 

‘사교육 척결’의 인식은 이제 간곳없다. 지난 30년여의 사교육 정책이 상식을 뒤집었다. 그동안 정책은 비용(부담)을 낮추는 데 골몰했다. 사교육은 국가가 나서서 마련해 주어야 하는 서비스라 여겼다. 사교육 시장 서비스가 비싸다니, ‘값싸고 질 좋은’ 서비스를 정부가 내놓아 가격을 잡으려고 했다. 비축했던 상품을 싸게 풀어 물가를 잡으려는 ‘민생 정책’과 다름없었다. 학교를 사교육 시장에 내몰았다. 사교육 상품 내놓고 점유율을 높이라고 거듭 몰아쳐 왔다. 이제 학교는 웬만한 학원 못지않다. 기출과 모의고사 문제 풀이, EBS 수능 특강, 심층 면접 훈련, ‘세특’과 각종 ‘활동’ ‘컨설팅’ 등, 사교육 시장에 있는 서비스이면 학교에도 있다.

 

학교에선 공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마련이다. 사교육이 들어차면서 공교육은 크게 위축되었을 테다. 얼마나 쪼그라들었는지 알 길 없다. 쪼그라드는 걸 걱정도 안 했으니, 정부는 가늠도 해보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으레 공교육이 활발하다 믿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공교육은 빈사 상태이다.

 

 

‘개천의 용’ 신앙이 키우는 사교육 수요, 타락은 필연

 

사교육은 몰아내야 하는가? 싸잡아 그렇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때로 사교육은 요긴하다. “내가 사람이 된 건 학원 선생님 덕분”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사교육을 내치려고 드는 게 능사가 아니라고 수긍하게 된다. 더욱이 학교는 수많은 학생을 소외시킨다. 이들에게 사교육은(대안교육을 포함해서) 없어선 안 될 기회다. 기회가 물론 필요한 학생마다 주어지지는 않는다. 사교육 시장은 늘 가난한 사람에게 박절하다. 그렇더라도, 사교육을 무조건 없애자고 하긴 어렵다.

 

‘사교육’이란 말의 모호함을 그대로 두고 가타부타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사적인 수요’에 부응하는 것이란 점에서, 사교육을 공적인 사업으로 용인할 수는 없다. 입시 위주 계략인 교습이나 컨설팅 같은 것 얘기이다. ‘커트라인’ 통과 경쟁에 눈 박고 있는 것들이다. 이런 사교육은 몰아내는 게 낫다. 교육부의 사교육 대책처럼, 학교를 사교육 사업에 내몰아서는 도저히 안 될 일이다.

 

정부가 충족시키겠다 달려드는 ‘사교육 수요’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적인 욕망이나 동기로 빚어진다. 생존이나 ‘성공’을 겨냥할 것이다. 부와 권세와 명예가 걸려있는 ‘학벌’, 곧 대학 졸업장을 노릴 것이다. ‘학벌주의’는 그런 ‘수요’를 집합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사교육 수요에 부응하겠다는 정부는 말하자면 교육을 학벌 경쟁의 수단으로 앞장세우겠다는 것이다. 정부에게 학교 교육은 입시라는 개천을 거슬러 등용(登龍)하는 수완이다. 그런 학교를 만들겠다고 공언 중이다.

 

정부가 나서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교육은 벌써 개천의 용을 내는 일이다. 이 믿음이 사교육 수요를 낳는다. 입시 위주 교육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학교 교육은 입시 등용문을 뚫어내는 용역에 불과하다. 교육의 표적이 된 입시는 교육을 짓밟기 마련이다. ‘입시 위주’로는 교육을 이룰 수 없다.1 숱하게 지적되어 온 바이다. 입시의 폐해를 새삼 정리한다면, 세 가지로 묶어 얘기할 수 있다.

 

첫째, 입시는 교육을 편협하게 만든다. 수업이나 학습은 입시에 포함될 법한 문제(주제)로 좁아 든다. 그리고 입시에서 비중 큰 과목으로 좁아 든다. 입시 범위 밖 과목이나 주제는 당연히 배제한다. 교육의 총체성은 부서지기 마련이다.

 

둘째, 입시 문항도, 문항들의 답안을 종합하는 총점도 타당하지 못하다. 재려고 하는 지식이나 실력을 제대로 표시하지 못한다. 어떤 문항에서 오답을 골랐다면, 그 점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믿을 만하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정답을 골랐다고 해서 안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모르거나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도 정답을 맞힐 가능성은 넓게 열려 있다. 선다형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요즘 입시정책이 기웃대는 논·서술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득점 요령은 무궁무진하게 개발된다. 게다가, 입시는 으레 문항들의 표집이다. 궁극적으로 우연의 소산이다. 문항의 조합은 그때그때 다르다. 이 우연성은 총점의 우연성을 얘기한다. 수험생 누구에게나 총점은 그때그때 다를 마련이다. ‘실력’을 일관되게 표시하지 못한다.

 

셋째, 입시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점수를 높이는 데는 ‘교육적인’ 준비보다 ‘전략적인’ 준비가 효율적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이런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그렇게 믿게 된다. 입시 위주 서비스의 ‘공급자’도 ‘소비자’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교육과 윤리의 가치는 없다. 가치를 버리는 사례는 허다하게 볼 수 있다. 입시에 걸린 이익이 클수록 부도덕과 부패는 심각해진다. 입시 위주 전략의 타락은 필연이다.

 

 

입시 위주 교육에는 죄가 없다는 상식

 

입시 위주 경향은 우리 교육에서 ‘고질적’이다. 근대 학교 교육의 역사 내내 따라온 ‘그림자’의 병이다. 갖은 처방을 해 왔지만 못 고쳤다. 그런 고질(痼疾)에 이제는 적응하고 무신경해진 듯하다. 우리 사회는 병을 안고 살기로 작정한 모양새다. 언제부턴가 입시 위주 학교 교육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학교가 으레 그런 곳이려니 여기게 됐다. 정부가 사교육을 학교에 흡수시키겠다 했을 때도 펄쩍 뛰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대책이 늦은 감이 있다고 여기기까지 했다. ‘국민 고통’인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려고 학교를 동원하는 정책은 말하자면 아주 상식적이었다.

 

이와 같은 자포(自暴)의 상식이 우리 교육정책 저변을 흐르고 있다. 공교육이건 사교육이건, 입시 위주라서 ‘문제’라는 이야기는 이제 들어보기 어렵다. 시중에서만 그런 게 아니다. 정책 포럼이니 협의니 하는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이 입시 위주인 점을 문제 삼지 않는다. 입시 위주이면 안 된다고 이의 제기하면 생뚱맞다 괄시 받기 십상이다.

 

입시 위주인 걸 교육의 기정사실로 여기게 되면서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문제는 교육이 아니라 입시에 있다고, 생각 틀을 뒤집게 됐다. 이를테면 이렇게 얘기하는 게 상식이 됐다. “교육이 달라지려면 내신 평가나 대입 수능도 오지선다형이 아닌 논·서술형으로 개편해야 한다.” 올해 초에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이 한 발언이다.2 교육이 입시 위주여서 문제가 될 것은 없단 얘기다. 교육은 입시 위주이어야 하되, 다만, ‘오지선다형 위주’가 아니라 ‘논·서술형 위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교육이 좇아가야 할 ‘입시’가 오지선다형이어서 문제이고, 논·서술형이 아니어서 문제라는 논리이다. 입시만 바로 잡으면 교육은 따라서 ‘정상화’된다 힘주어 말하고들 있다.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만의 얘기가 아니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교사, 심지어 교육학자들까지 똑같은 이야기들을 한다. “입시를 개혁해서 교육을 바로잡아야 한다!” 이런 통설은 입시 위주 교육에 면죄부를 준다. ‘죄’는 입시에 있지, 입시를 좇는 교육에 있지 않다 믿게 한다. 정책으로 사교육 서비스를 버젓이 학교 안에 들어 앉힐 수 있었던 통념이다. 학교 안의 ‘공교육’이 어차피 입시 위주인 마당에, 사교육을(입시 위주 서비스를) 학교에 흡수시키는 것은 대수가 아니었을 테다. 어느 것이든, 입시만 제대로 손보면, 다 바람직한 교육으로 거듭날 것들이라 생각하고 있다.

 

말하고 보면 당연한 얘기이다. ‘입시 위주 교육’은 입시를 바꾸어도 여전히 입시 위주이다. 오지선다형에서 논·서술형으로 바꾼다고 입시 위주라는 성질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사교육이 학교에 들어앉았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학교라는 공적 공간이 사교육을 공교육으로 세탁해 주지 않는다. 사교육은 어디에서나 끈덕지게 입시 위주일 터이다. 입시 변화에 민감한 책략은 늘 따라붙을 테고, 거기에 공공성이 비집어 들 여지는 없다.

 

 

학교의 공공성 갉는 ‘메리토크라시’

 

학교는 사교육이 들어설 자리가 아니다. 적어도 역사로는 그렇다. 학교는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생겨나지 않았다. 학교는 사회의 역학(필요)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공성이 전제된 기관이다. 사회는 구성원의 응집과 공동체적 정체성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 그래서 학교는 생겨났다. 학교의 공적(사회적) 속성은 인류 역사를 관통해 흘러왔다. 초기 부족사회의 성년식도 오늘날 학교의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날의 학교 제도는 물론 우리가 독자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았다. 유럽에서 근대 민족국가가 생겨나는 과정에 맞물려 생겨났다. 나라마다 ‘국민’을 양성하려고 제도를 갖췄다. 그런 역사적 관념을 수입하여 우리도 ‘근대적인’ 학교 제도를 갖게 되었다. 이런 역사 맥락에서 학교 교육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개인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의무이다. 사회(국가) 구성원으로서 져야 하는 의무이다. 개인이 구매해 소비할 상품(서비스)이 아니라는 점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학교 교육의 본연이 이런데도 ‘사적 수요’가 ‘공적 존립 이유’를 압도하게 된 데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란 규범 탓이 크다. 흔히 학벌주의라고 부르는 관념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사회 지위는 핏줄이나 연줄이 아니라 실력에 따라 주어져야 한다는 믿음이 그 바탕에 있다. 유럽의 역사를 두고 본다면, 그런 믿음은 중세에 생겨났다.3

 

중세를 거쳐 근대로 오면서, 도시들이 생겨 커지고 민족국가도 생겨났다. 사회 분업이 복잡해지면서 과거에 없던 ‘자리’들도 생겨났다. 그 자리들을 추구할 ‘개인’들도 중세 말부터 탄생해 있었다. 봉건에서 풀려나 ‘개인’으로서 ‘구원’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자리 이동에는 지식이 필요했다. 초기에 지식은 대학에서 구할 수 있었다. 차차 그 밑 단계 ‘학교’들도 생겨났다. 결국 대학과 학교가 하나의 체제로 엮였다. 이 체제에 지식과 자리 배분의 기능도 모아들었다.

 

근대를 지나며 학교 교육 체제는 국가의 필수 제도가 되었다. 학교 교육으로 지위 배분을 정당화하는 문화도 보편적으로 번졌다. 메리토크라시라는 말은 이 보편성을 가리키려는 것이었고, 그 보편화의 위험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메리토크라시라는 신화가 교육을 부패시키고 필경 사회마저 위기로 몰아갈 것이라는 예견은 말을 만든 이유 안에 이미 들어 있었다.4

 

메리토크라시의 신화에 기대는 정도는 나라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더 기댈수록 그 나라 교육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우리나라는 거의 극단에 속한다. 진학이나 취업의 ‘진로’는 학교(대학) 교육이라는 사다리로 조립되어 있다. 그것을 타고 오르는 경쟁은 늘 미세한 점수 눈금으로 변별해야 할 만큼 조밀하고 치열하다. 일생의 관건이 학력(學力, 성적)이고 학력(學歷)이다. 신화에 대한 사회적 회의가 보이긴 하지만, 메리토크라시의 관성은 강고하다.

 

지위가 교육 성취에 달려있다는 믿음은 견고하다. 교육제도나 정책도 그 믿음을 거듭 강화한다. 대통령들부터 공공연히 학교 교육을 계층 이동 사다리라 불렀다. 교육 공정성은 오직 시험(수능)을 통한 변별에 달렸다고도 얘기해 왔다. 교육정책에선 으레 실력을 점수로 귀결시켜 왔다. 점수 경쟁을 관리하는 데 예사로 학교를 동원해 왔다. 학교생활기록부를 가지고 진학하도록 만든 제도는 학교 교육 자체를 입학 경쟁 프로그램으로 둔갑시켰다.

 

이런 ‘생태계’에서 개인의 교육 원망(願望)은 점수와 학벌을 겨냥하지 않을 수 없다. 입시 위주 교육을 벗어날 길은 없다. 개인의 소망을 이루려는 것인 한, 사교육은 입시 성공의 책략일 수밖에 없다. 이런 서비스를, 정부가 발 벗고 나서서, 교육의 이름으로 독려하고 있다. 공교육 기관인 학교까지 동원하여 ‘서빙’하고 있다.

 

 

국가 정책이 사회 존립 흔들어

 

사교육 정책은 이른바 ‘후기 복지 국가’의 허영을 드러내고 있다. 국가의 사명이 국민의 모든 편의를 보아주는 데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다. 이 착각 속에서 사익마저도 공적으로 보장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권력층’은 “내게 유익한 서비스를 달라”고 요구하고 관철할 자원을 가진 집단이다. ‘목소리 큰’ 그들에게 사교육 정책은 일방적으로 봉사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 모두를 위한다는 언어로 포장되지만, 사교육 정책의 열매는 대부분 사익을 챙길 수완을 가진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불평등을 줄이겠다는 사교육 정책은 교육 기회와 성취의 격차를 오히려 벌린다.

 

사교육 정책이 불평등을 키울 위험만 지닌 게 아니다. 교육의 공공성을 위축시키고 심지어 증발하게 만든다. 결국 학교 교육에 의존해야 하는 사회적 자양(滋養)마저 구할 길 없게 만든다. 사회의 존립을 흔들게 된다.

 

어느 나라에서나 구성원의 사회화는 학교에 크게 의존한다. 학교 교육이 그래서 ‘의무’이다. 사회 질서가 무너지지 않도록, 미래 구성원들이 관습과 규범 그리고 법제 등에 익숙해지도록 이끄는 것이 학교의 중요한 책임이다. 학교 안에 사교육 행태가 만연해지면서 이 책임은 이행되기 어려워졌다.

 

의문의 여지 없게 입증된 바는 아니지만, 사회화는 명시적이기보다는 암묵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점이 크다. 그리고 경쟁보다는 협력의 경험에서 강화된다. ‘코로나 사태’에서 학생들의 사회성 발달이 심각한 문제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입시 위주 교육(사교육)에서 얻을 사회화의 소득은 거의 없다. 입시 위주 전략에서는 명시적인(언어적이고 개념적인) 기억과 이해에 치중해야 한다. 학교 일상이나 ‘활동’도 급우와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전제로 꾸리게 된다. 암묵적인 연대 의식이나 협력의 체화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사교육의 식민지인 학교에서 사회화 기능은 퇴화할 수밖에 없다.

 

더 나아가, 학교 교육이 사회화 기능만 앞세운다면 소극적이며 전제적이다. 사회를 앞세워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고 묵종하는 개인들만 용인한다면, 학교 교육이 위험하기까지 하다. 사회 속에서 개인은 질서를 지키며 사는 데 그치지 말아야 한다. 사회의 한계나 부조리에는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개인들의 선도적 공헌에 힘입어 사회는 발전하게 된다. 그렇잖으면 답보나 퇴보밖에 없다. 학교 교육은 학생을 사회에 순응하면서도 저항할 수 있게 키우는, 말하자면 모순적인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학교 교육에서 북돋워야 할 저항이란 사익을 움켜쥐려고 사회에 맞서는 행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공공선을 위해 사회적 구각(舊殼)을 부수려는 진취성을 담은 것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자유)를 충실하게 인정하면서 자신의 권리도 누리려는, 주체성을 진정으로 발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사회의 공영을 추구하며, 고유한 인격(자아)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개인들을 구성원으로 키워낼 수 있어야 비로소 사회는 안정(질서) 속에서 다양성을 피울 수 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학교 교육이 사적인 수요에 종속되고 입시 위주로 흐른다면, 사회화도 주체적 인격의 함양도 바라기 어렵다.

 

 

우리가 ‘사람’(삶)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사교육은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키우려는 정성에서 나온다. 인류 본연의 모습이다. 공교육(학교 교육)도 그 연장에 있다. 입시 위주로 흐르게 되는 것은 사회의 됨됨이 탓이다. ‘실력대로’라는 신념 아래, 획일적이고도 천박하게 서로를(사람을) 대우하는(줄 세우는) 사회 탓이다.

 

실력은 한 잣대로 가늠할 수 없다. 학력(學力)과 학력(學歷)만으로 가늠될 리 없다. 구성원 모두는 다양한 실력으로 사회를 떠받치고 있다. 그만큼 개개인의 실력을 대등하게 존중할 이유가 있다. 얼마나 대등하게 인정하느냐에 따라 실력대로라는 원리는 다른 사회를 만든다.

 

학교를 계층 이동 사다리라 여기면 교육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과정으로 변질된다. 학교 교육이 그렇게 되고, ‘그림자’인 사교육이 따라 그렇게 된다. 메리토크라시의 통념은 이런 변질을 조장하고 키웠다. 입시 위주 행태는 그 변질의 외양이다. ‘메리토크라시의 공정(公正)’을 내세워 교육의 변질을 막을 수 없다. 사회 총체의 사안인 만큼, 학교나 교육제도만 건드려서 바꿀 수는 더욱 없다.

 

교육이 사람 됨됨이에 관한 것이라면, 사회가 그 됨됨이를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달렸다. 교육은 우리 이야기대로 선다. 메리토크라시 신화나 학벌주의 믿음 같은 것으로 교육을 바룰 수 없다. ‘실력’이나 ‘점수’로 됨됨이를 이야기해선 사람을 키울 수 없다. 교육으로 키우려는 ‘사람’을 그렇게 이야기해서 될 리 없지 않은가. 사교육 정책은 지금 그런 이야기에(신화와 믿음에) 빠져 있다.5 학교와 교육은 악화일로 위에 있다.

 

 

[이전 칼럼]

• 사교육 톺아보기⑤ – 사교육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잃은 것

• 사교육 톺아보기④ – 사교육이란 ‘그림자’가 학교 교육의 본체를 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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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이때 입시는 물론 ‘고부담’이다. 그 성적에 보상(stakes)이 크게 걸려있다. 그렇지 않다면 ‘교육’이 입시 위주로 흐를 리 없다.
  2. 이데일리, 2024년 1월 31일 보도.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 신년 특별 인터뷰 내용 참조.
  3. ‘실력 본위’의 믿음은 서양보다 동양에서 먼저 생겨났다고 할지 모른다. 과거제도가 그런 믿음의 표출이라 본다면 일리 있다. 생물의 세계가 본디 실력 본위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진화 자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요인(실력)을 인정하는 과정이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세를 메리토크라시의 원점으로 지목하는 것은 오늘날의 학교 교육 체제가 중세 대학의 발생에서 비롯했다는 생각을 따르는 것이다. 학교라는 기관이 실력을 인증하는 에이전트로 기능하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다. 학교 체제가 메리토크라시의 경향을 낳을 소지를 안고 있었다는 이야기이고, 그렇게 된 시기가 중세인 듯하다는 이야기이다.
  4. ‘메리토크라시’는 Michael Young이 만들었다. ‘The rise of meritocracy’(1958)에서이다. 이 책은 메리토크라시가 결국 ‘실력’으로 출세한 엘리트에 대한 반란을 가져올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5. ‘이야기’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 문제라고 말할지 모른다. 일리 있다. 그러나 어느 게 먼저인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야기와 구조가 서로 뚜렷이 구분되거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강태중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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