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우리는 공공보다 시장을 더 신뢰하게 되었을까
| “수돗물을 믿고 마실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듯이 공교육에 대한 신뢰는 그 사회의 건강을 재는 척도가 될 수 있다.” / “공공 자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문 발췌) |
수돗물과 공교육
동서양을 막론하고 교육은 오랫동안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것이었다. 동양의 전통적인 6예가 양반 계급을 위한 것이었듯이 수사학과 음악 등 7자유교과를 가르치는 서구의 교양교육은 유산계급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었다. 도제식 교육은 중간 계급을 위한 것으로 생산 현장에서 무급으로 일하며 장인으로부터 기술을 전수받는 것이다. 하층민들은 7살 무렵이면 성인들의 세계에 편입되어 각종 노동을 하며 한 사람 몫을 해야 했다. 오늘날처럼 노동과 분리된 보편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이후다.
도제식 교육의 장점이 없지 않지만 현대사회에서 도제식 교육을 한다는 것은 도시에서 상수도 대신 우물을 고집하는 것과 다름없다. 물맛이 아무리 좋아도 수많은 도시민들이 우물가에 줄지어 서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다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수공업 체제에서 유효했던 도제제도로 공장 노동자를 길러낼 수는 없는 일이다. 전통적인 마을 단위의 배움터였던 서당이 현대사회에는 맞지 않은 이유도 같다. 각지에서 모여든 아이들에게 표준화된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공교육 제도는 상수도 시스템 같은 것이다. 상수도가 검증된 수질의 물을 모든 가정에 공급하듯이 공교육은 국가수준에서 검증한 보편교육을 제공한다.
도시가 발달하면서 상수도 시스템이 만들어졌듯이 근대국가가 성립하면서 공교육 제도가 도입되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보편급수와 보편교육은 비슷한 철학에 기반하고 있다. 모든 수돗물은 잔류 염소(Cl) 기준치가 0.2ppm을 유지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듯이 모든 학교는 국가가 정한 국민공통 기본교과를 가르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다. 상수도 시스템은 각 지자체가 관리하지만 지자체별 상수도사업본부는 수돗물 수질에 관한 법규를 지켜야 한다. 교육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국민공통 교과는 공통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과 유사하다.
수인성 전염병이 유행하면 염소 투입량을 늘이듯이 청소년 범죄가 발생하면 인성교육을 강화하는 정책이 도입된다. 문제는 인성교육 강화 같은 정책이 염소처럼 효과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염소의 살균 효과는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하지만 아이들의 정신세계는 투입과 산출이 비례하지 않을뿐더러 검증도 힘들다. 인성교육진흥법 같은 해괴한 법률이 제정된 것은 국민을 대표하는 의원들의 수준이 그만큼 낮기 때문이다. 한때 국민들의 치아 건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수돗물에 불소를 첨가한 것처럼 국가가 아이들의 정신건강을 위한다며 학교교육 속에 일방적으로 뭔가를 집어넣으려 할 때 그런 교육을 거부할 수 있어야 민주국가다.
공교육처럼 공급자 중심의 시스템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지만 시민들이 깨어 있으면 막을 수 있다. 2천년대 초반에 불소의 유해성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면서 수돗물 불소화가 결국 폐기되었듯이, 박근혜정부가 국민들의 역사의식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했지만 국민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 교과서, 더욱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가져올 전체주의적 교육에 대한 시민들의 우려를 국가 권력이 누를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진척되었음을 확인시켜준 사건이다. 2천년대 초반, 수돗물에 대한 불신과 공교육에 대한 불신이 오버랩되면서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세상에 물이 수돗물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교육이 꼭 학교교육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학교가 아니면 교육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마치 들판에서 자라는 꽃을 비닐하우스 안에 옮겨다 놓고서 수돗물을 주면서 유세를 떠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탈학교운동을 벌이며 했던 말이다. 적절한 비유가 아니었다. 수돗물을 폄하한 것도 적절치 않았고, 공교육을 비닐하우스에, 또 아이들을 들꽃에 비유한 것도 적절치 않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들판에서 자라는 꽃’이 아니다. 그런 아이들도 드물게 있지만, 그 아이들이 들꽃처럼 건강한 것도 아니다. 사실 들꽃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다 건강하진 않다. 가물 때면 말라죽기도 하고, 씨앗을 제대로 맺지 못하는 들꽃들도 많다. 아이들을 들꽃처럼 방치한다면 그중 제대로 씨앗을 맺을 아이들이 얼마나 될까. 다행히 대부분의 인간사회는 아이들을 들판에 방치하지 않는다. 가족과 마을, 학교 등 다양한 장치를 통해 아이들을 돌보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자라도록 돕는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의 아이들은 들꽃처럼 저마다 알아서 자라기보다 텃밭의 작물처럼 세심하게 관리된다. 사회가 안정될수록 관리도 촘촘해진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아이들 대부분은 어린이집을 다니거나 학교에 들어가 의무교육 과정을 거친다. 어떤 학교는 노지 텃밭처럼 운영되고 또 어떤 학교들은 비닐하우스처럼 관리된다. 아마도 등록금이 비싼 사립학교일수록 비닐하우스에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스마트팜처럼 ‘과학적인’ 농장의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는 유리 온실에서 시간 맞춰 영양분을 공급받는 작물들처럼 아이들도 치밀하게 관리된다.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
생수와 대안교육
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므로 상수도 시스템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시스템 중 하나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수돗물을 미심쩍어 하면서 생수를 사먹거나 정수기를 들여놓는다. 유난을 떠는 이들은 값비싼 수입 생수를 사먹기도 한다. 사실 이런 일은 각자도생 사회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이지 공동체적인 해법이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까닭은 수돗물에 대한 과도한 불신과 정수기 업체의 막강한 마케팅 전략 때문일 것이다.
수돗물을 불신하는 이들이 생수를 사 먹거나 값비싼 정수기를 설치하듯이 공교육을 불신하는 이들은 사립학교를 선택하거나 해외유학을 떠난다. 홈스쿨링과 대안학교도 그런 선택지 중 하나인 셈이다. 대안교육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지향했지만 의도치 않게 각자도생의 신자유주의 흐름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 누구는 수돗물을 마시고 누구는 수입 생수를 마시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당연한 모습이라고 치부한다면 계층사회를 인정하는 셈이다. 사실상 우리 사회는 부지불식간에 그런 사회가 되고 있다.
수돗물을 믿고 마실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퍼지면서 생수업체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정수기가 불티나게 팔리는 것처럼 공교육에 대한 불신을 발판으로 다양한 교육업체들이 제 세상 만난 듯 활개를 치고 있다. 학교는 뒷전으로 물러나 있고, 학교보다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한다는 온갖 학원과 학습지 업체들이 이제는 학교교육을 대신하기에 이르렀다. 홈스쿨링을 앞세운 교재 회사들, 대안이란 간판을 건 사이비 대안학교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상표가 품질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대장균이 우글거리는 생수가 있듯이 ‘대안’이란 간판을 걸고 있다 해서 모두가 대안성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교육자의 탈을 쓴 장사치들은 대안교육 현장에도 있다. 되는 장사에는 사기꾼들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문제는 교육판에서는 누가 사기꾼인지 분명치 않다는 것이다. 사기를 치면서도 스스로는 교육자의 길을 가고 있다고 믿는 이들도 있다. 공공의 잣대가 작동하지 않다 보니 저마다 안테나 감도를 높이는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생수가 한국인들의 일상 속으로 파고든 계기는 1991년에 일어난 낙동강 페놀 오염 사건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생수는 국내에서 외국인 대상으로만 유통되었는데, 1994년 대법원에서 생수 판매 금지가 국민의 행복추구권에 위배된다는 판결이 나면서 그동안 내국인들에게 암암리에 팔리던 생수를 합법적으로 팔 수 있게 되었다. 이명박정부의 4대강 공사 이후 녹조가 급증하자 생수 시장이 확대되면서 물장수들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렸다. 따라서 정수기 시장도 급격히 확대되었다. 렌탈 방식의 정수기 판매 전략이 주효하게 먹히면서 오늘날 전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정수기 물을 먹기에 이르렀다.
수돗물에 대한 공포가 과장되었듯이 생수가 몸에 좋을 거라는 믿음은 사실상 과장되어 있다. 국내에서 유통되는 생수 중 상당수가 수질 부적합 판정을 받고 있다.2 오랜 유통과정에서 직사광선에 노출되는 경우도 많아 환경호르몬 우려도 심각하다. 최근 생수병에 녹아 있는 미세 플라스틱이 문제가 되면서 생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1리터에 무려 24만 개의 미세 플라스틱 입자가 들어 있다니, 이제는 생수 포비아가 생겨날 판이다. 게다가 생수는 수돗물과 달리 잔류 염소가 없어 세균에 쉽게 오염된다. 결코 안전한 물이 아닌 셈이다.
수돗물은 공공이 관리하기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드러나고 시정되지만 생수나 정수기 물은 개인과 업체가 관리하다 보니 문제가 제때 드러나지도 않을뿐더러 제대로 시정되지도 않는다. 역삼투압 방식으로 정수된 물은 미네랄까지 걸러져서 몸에 좋은 물이라고 하기 어렵다.3 잔류 염소가 걸러진 물이 저수조에서 오염될 우려가 제기되면서 최근에는 직수형 정수기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이도 정기적으로 관리하지 않으면 수질을 장담하기 어렵다. 사실상 생수나 정수기 물보다 수돗물로 끓인 보리차가 몸에 좋을 가능성이 더 높다.
수돗물을 믿고 마실 수 있는 사회
수돗물을 믿고 마실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듯이 공교육에 대한 신뢰는 그 사회의 건강을 재는 척도가 될 수 있다. 2010년 이후 혁신학교들이 생겨나면서 대안학교 지원자가 줄어든 것은 대안교육의 내실에 대한 의구심과 함께 공교육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나라 공교육의 수준은 나쁘지 않다. 최고 수준의 인재들이 교사가 되고 있고, 학교에 투자되는 예산 또한 적지 않다. 아이들의 학력 수준도 세계적으로 낮지 않다. 다만 지나친 입시 경쟁으로 인해 공교육이 사교육에 휘둘리면서 공교육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착시 현상이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문제가 없지 않지만 공교육 전체를 매도하는 확대해석은 삼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수돗물 수질은 결코 나쁘지 않다. 화강암 지대여서 원래 수질이 좋은 데다 상수도 설비도 잘 관리되고 있는 편이다. 각 지역 상수도사업본부는 매달 상세한 수질 검사 결과를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있고, 취수 원수 수질에 대한 간략한 정보는 실시간으로 공개되고 있기도 하다. 사실 어떤 생수업체도 상수도사업본부만큼 수질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이 공장에서 생산해 시장에서 유통하는 물을 공공이 투명하게 관리하는 물보다 더 신뢰한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어쩌다 공공보다 시장을 더 신뢰하게 되었을까.
공인들이 공공에 대한 신뢰와 책임감을 갖고 있지 않은 것도 큰 이유일 것이다. 각 지자체 상수도사업본부 본부장은 수돗물을 마실까? 교육부장관을 비롯해 고위 공직자들은 자녀들을 공립학교에 보낼까? 아마도 대다수는 사립학교를 보내거나 해외유학을 시키고 있을 거라고 국민들은 짐작할 것이다(이는 사실이기도 하다). 교육부장관을 임명할 때 자녀의 출신학교를 검증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주호 장관 자녀의 경우 외고 출신으로 이중국적 논란까지 불거졌지만, 두 번이나 교육부장관이 되는 데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선출직인 교육감의 경우 선거 과정에서 자녀 출신학교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지만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지는 않았다.4
올초 프랑스 교육장관으로 임명된 여성은 세 자녀를 모두 사립학교에 보낸 것이 알려지면서 한 달 만에 전격 경질되었다. 공공에 대한 신뢰를 깎아내리는 사람을 공직자로 인정하지 않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5 한국사회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자사고 폐지’를 추진한 문재인 정부의 장관 18명 중 13명이 자녀들을 자사고와 외고, 또는 해외유학을 보낸 것으로 보도되었다.6 “내 자식은 되고 남의 자식은 안 된다는 위선 정권의 위선 교육 정책”이라며 “내로남불 정권”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했다. 공교육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바란다면 고위 공직자들부터 공립학교에 자녀를 보내야 한다. 이런 책임감 있는 자세를 갖고 있지 않다면 공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4대강 공사 이후 녹조 현상이 심해지면서 수돗물에 대한 불신이 더 깊어졌지만 수중보를 개방한 이후 4대강 수질은 많이 개선되었다. 염소와 유기화합물이 결합해 생기는 총트리할로메탄이 발암물질로 알려지면서 불안감이 확산되었는데, 물을 끓이면 휘발되므로 그다지 걱정할 일은 아니다. 수돗물의 염소 성분은 우리 몸에 필요한 미네랄이기도 하다.7 냄새가 정 거슬린다면 받아서 한두 시간 두거나 끓여 마시면 된다. 환경호르몬이나 미세 플라스틱보다는 개인이 쉽게 제어할 수 있는 물질들이다.
한강 물을 정수한 서울 수돗물의 수질은 믿고 마셔도 될 만큼 안전하게 관리되고 있다. 한편 북한의 대동강은 오염이 심해 평양 수돗물의 수질이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김정은 위원장을 비롯한 북한의 권력자들은 낭림산맥 지대에서 길어 올린 생수를 가져다 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권력자들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생수를 사다 먹고 있을 것이다. 수돗물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을 불식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통령과 각 지자체장들부터 수돗물 먹는 모습을 보이는 것일 게다.
상수도와 공교육은 보편적인 제도인 만큼 급수 과정에서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공교육의 어떤 독소가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더 힘을 쏟아야 할 이유이지 기피할 이유가 될 수 없다. 공직자라면 더욱이 그렇다. 부모가 중심을 잡고 있다면 웬만한 독소는 중화시킬 수 있다. 우리 몸이 스스로 항체를 만들어내고 정화 작용을 하듯이 아이들의 정신 속에는 회복탄력성이 잠재되어 있다. 자녀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겠지만 얼핏 나쁜 것처럼 보이는 것들도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수돗물과 공교육 같은 사회의 기초가 되는 공공 자산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 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 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 검인정 역사교과서 중 뉴라이트 사관에 근거한 교학사 판본이 사회적 문제가 되면서 이를 채택한 일부 학교의 동문들과 학부모, 학생들의 반대로 결국 취소되었다. 이에 황우여 당시 교육부장관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가 박대통령 탄핵과 함께 없던 일로 되었다.
- 2021년 기준으로 60여 개 생수 브랜드 중 1/3이 부적합 판정을 받았을뿐더러 심지어 반복해서 부적합 판정을 받고 있는 브랜드도 계속 판매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 번도 부적합 판정을 받지 않은 브랜드는 삼다수가 유일하지만 유통기한이 24개월로 가장 긴 편에 속한다. 페트병에 담긴 채 1년 이상 지난 물을 사먹을 확률이 꽤 높은 셈이다.
- 직수 방식과 역삼투압 방식의 장단점을 둘러싸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역삼투압 정수기로 거른 물이 ph5.6~6정도의 산성을 띠며, 미네랄까지 걸러진 증류수에 가까운 물인 것은 분명하다. 음용수로 적합한 물은 아닌 셈이다.
- 김상곤 전 경기도교육감의 경우 오산의 한신대학교에 근무할 당시 강남 8학군에 거주하며 대치동에 있는 초중고에 자녀를 보낸 것으로 보도되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자녀는 외고를 다녔다.
- 영국과 이탈리아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교육부장관의 자질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다.
- 2019년 7월 당시 자유한국당 전희경 의원실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보수 언론들이 보도했는데, 문재인 정부를 ‘내로남불 정부’로 깎아내리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유은혜 교육부장관이 거기에 들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 염소는 위산의 주요 성분으로 우리는 주로 염화나트륨 곧 소금의 형태로 염소를 섭취한다.
교육 매체 계간 《민들레》 발행인. 저서로는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이 있고, 《대안교육 20년을 말하다》, 《재난의 시대, 교육의 방향을 다시 묻다》 외 여러 권을 함께 썼다. 옮긴 책으로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사람》, 《소통하는 신체》(공역) 등이 있다.

현병호 선생님께.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글쓴이가 선생님임을 알고 몇 번을 더 읽었지요. 필자를 보지 않고 읽었다면 쉽게 ‘현병호’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을 것도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낯설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고 제기할 반론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 건 아마도 저 역시 이미 그러한 문제의식에 몸을 상당히 적시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길고 깊었을 고민들을 작심하고 세상에 내보이신 것 같더군요.
저는 현장을 떠난 지 몇 년 되었지만 가끔 만나는 현역의 교사들에게서 두 가지 엇갈린 모습을 보곤 했습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게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대안교육이었나?” 하며 푸념하지만 시원하게 이야기할 데가 마땅치 않아 가끔 술자리 한탄 정도만 할 뿐 그냥 그러고 있는 젊은 교사들과, “스스로 예전의 역동적인 대안교육을 추억하는 몰핀을 투여하며 그나마 얻어낼 수 있는 현실적 지원의 확보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 조금은(?) 지친 리더교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떻게든 지금 이 진영의 부진을 학령인구 감소와 정권과의 부조응 등을 이유로 면피해보려 해보지만 아마도 스스로 개운치 않음을 발견하곤 하겠지요.
그런 불안감 때문일까요? 대안교육의 이름을 내걸고 교사들이 모이는 장에서는 방향의 전환을 위한 성찰과 모색보다는 공교육과의 차별화에 각광받았던 과거 대안교육 개척시대의 철학과 헌신적인 노력들이 더 자주 소환되고 있지 않은가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그런데 리더들의 이런 모습들이 도리어 날카로운 자성과 시대 변화에 맞는 비젼을 기대했던 젊은 교사들의 발길을 멀어지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지는 않을런지요… 시대가 변하고 새로운 세대의 교사들이 유입되면서 우리 이름 앞에 붙은 “대안”이 무엇에 대한 “대안”이었는지가 헷갈리고 있는 지금은, 과거의 영광을 소환하는 “정명”이 아니라 앞으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재정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물론 공교육과 대안교육을 수돗물과 생수에 비유한 것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공교육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마치 우리의 과업처럼 여겨지는 것에 반감을 가진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듣고 싶고 논의되었으면 하는 목소리는 대안교육 1세대의 영웅담을 알지 못하거나 거기에 크게 관심 없어하는, 새로운 세대의 현장 교사들이 지금 우리 대안교육에 대해 갖고 있는 솔직한 성찰과 비젼입니다. 우리가 낙후될지 변화할 수 있을 지는 결국 그분들의 의지와 역량에 달린 일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이미 현장과 한 발 떨어져서 있는 저로서는 선생님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게재하셨을 지 제대로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만, 많이 회자되고 토론되어서, 수면위로 올라오지 않았던 젊은 교사들의 답답한 마음들과 현장을 지켜왔던 리더들의 무언가 찝찝한 마음들이 날카롭고 치열하게 드러나고 성찰되고 재정의되는 시작이 되었으면 합니다.
좋은 글, 용기있는 글, 감사드립니다.
반갑습니다. 도시속작은학교에서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것이 벌써 20년도 더 전이네요.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지금은 아름다운학교도 후배교사들에게 맡기시고 뒤로 물러나 계신 줄 압니다. 많은 1세대 선배들이 일찌감치 현장에서 물러난 것이 한국 대안교육 현장의 특징 같기도 합니다. 장기독재를 경험한 세대여서 그럴까요. 우린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심리가 배경에 깔려 있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말씀처럼 “과거의 영광을 소환하는 정명이 아니라 앞으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재정의가 필요해 보인다”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대안교육의 미래는 2세대 현장 교사들의 역량에 달려 있겠지만 1세대 선배교사들의 역할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라떼는 말이야’ 식이 아니라 우리가 펼쳤던 교육운동의 방향이 적절했는지를 짚어보고 뭘 놓쳤던가를 살피면서 이를 공론화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새로운 정명 작업은 공동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염병훈 샘이 이런 글을 올리신 것도 그런 일이라고 보구요. 이 작업은 단순히 대안교육 정명 작업을 넘어서 우리 교육의 방향을 찾는 작업이라고 봅니다.
공교육은 국가수준의 교육이고 그 때문에 개인수준의 교육과 충돌하는 지점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지요. 2010년대에 혁신학교를 시작으로 개별성 교육을 강화하는 움직임이 공교육 안에서 생겨나면서 대안교육의 차별성이 줄어들고 그것이 학생 모집에 반영되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보편성과 개별성, 공공성과 자율성을 조화시키는 것은 공교육의 본질적인 과제이고 이는 대안교육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지각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 것이 많은 대안학교들의 현실이지요. 정명 작업은 이런 문제를 짚은 작업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안교육운동이 활발했던 시기는 90년대 후반~2010년의 시대흐름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개발독재 시대에 지친 사람들이 생태주의와 노자의 무위 사상에 솔깃한 것처럼 교사중심, 교육과잉의 시대에 지친 사람들이 ‘교육이 아닌 배움’이라는 패러다임에 끌렸던 시대였지요. 이제는 교육과 교사의 역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시점이라고 봅니다. 국가주도 교육이 놓치는 지점을 짚으면서 전위적으로 치고 나가는 역할을 할 수 있어야만 대안교육의 존재 의의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한 논의의 장이 만들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