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수능’이 정의롭지 못하다면?
| 대입제도를 바루기 위한 핵심 과제가 ‘공정 수능’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대통령부터 역설하고 있다. 이 글은 그런 생각이 심각한 교육관 전도(顚倒)를 품고 있다고 지적하며, 그런 관점을 관철하려는 정책은 필경 학교 교육 자체를 뭉개리라 경고한다. 대입제도의 공정성은 학교 교육의 정의(正義)를 옹호하는 한에서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고 얘기하며, 이 점을 간과한 공정 수능 이야기는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
관건은 공정성?
정권이 바뀌고 대통령의 통치 경향도 크게 달라졌지만, 대입제도 이야기는 여전하다. ‘문제는 공정이야!’라고 거듭 외치고 있다. 뉘앙스가 일관하지는 않지만, 모두 ‘공정성’이 좋은 대입제도의 요체라고 입을 모은다.
윤석열 대통령은 얼마 전 교육부 장관에게 수능을 ‘공정하게’ 만들도록 지시했다고 알려졌다. 지시 자체가 적절했는지 구설에 오르면서, 그 내용이 분명하게 확인되지는 않았다. 공식적으로는 아래와 같이 얘기한 것으로 정리됐다.1
공정한 변별력은 모든 시험의 본질이므로 변별력은 갖추되 교육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는 수능에서 배제하라. …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아예 다루지 않는 비문학 국어 문제라든지 학교에서 도저히 가르칠 수 없는 과목 융합형 문제 출제는 처음부터 교육당국이 사교육으로 내모는 것으로서 아주 불공정하고 부당하다.
대통령의 지시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부가 대책을 내놓았다. 대책 발표문은 대통령이 어떤 지시를 내렸었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발표문에는 “공정한 수능을 실현하겠다”고 목표를 잡은 대책이 맨 앞머리에 배치되어 있고, 그 내용은 아래와 같이 부연되어 있다.2
공교육 과정에서 성실하게 학습한 학생들이 수능에서 공정하게 평가받을 수 있도록 변별력은 갖추되,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으로 사교육에서 문제풀이 기술을 익히고 반복적으로 훈련한 학생들에게 유리한 소위 ‘킬러문항’은 핀셋으로 제거한다.
대통령은 수능에 ‘킬러문항’을 출제하지 말도록 지시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문항을 배제하는 것이 공정한 수능(대입제도)을 만드는 요체라고 본 듯하다.
지난 정권에서도 대통령의 얘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교육회의 구성에 즈음해서(2017년 12월) 아래와 같이 ‘공정’의 조건을 달며 대입제도 개편의 운을 뗐다.3 정권 초기에 ‘절대평가’를 확대하려던 수능 개편 시도가 여론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대입제도 개편을 1년 뒤로 미뤄놓은 상황에서 나온 주문이었다.
새 대입제도가 갖춰야 할 조건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인 학생과 학부모 입장에서 볼 때 무엇보다 공정하고 누구나 쉽게 준비할 수 있도록 단순해야 한다는 것…
위와 같은 주문이 있고 2년 가까이 지난 2019년 10월에는, ‘공정하고 단순한’ 대입제도가 어떤 것을 뜻하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했다. 당시는 ‘학생부종합전형’이 ‘특권 대물림’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기도 했는데,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대입제도와 관련해 아래와 같이 계획을 밝혔다.4
국민들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는 것이 교육에서의 불공정 … 최근 시작한 학생부종합전형 전면 실태조사를 엄정하게 추진하고 … 정시 비중 상향을 포함한 ‘입시제도 개편안’도 마련하겠다.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있고 한 달 남짓 지나서(2019년 11월 28일), 교육부는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 방안’이란 이름으로 제도 개편안을 내놓았다. 이때 이목이 쏠렸던 세안은 “수능 위주 전형 확대”였다. 대입제도가 공정해지는 데 수능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뜻을 지녔다. 특히, 학생부종합전형의 비중이 컸던 16개 대학을 지목하여 수능 위주 전형의 비중을 키우도록 요구했는데, 이는 수능 전형이 상대적으로 더 공정하다고 여기는 통속의 경향을 수용한 것이었다.
수능은 어떻게 공정의 아이콘이 되었을까?
수능은 왜 공정하다고 여겨지는가? 일차적으로 그 인식은 ‘국가관리’에 대한 상대적 신뢰에서 온다. 1960년대 말 대입 ‘예비고사’가 정부 관리 아래 시행되기 시작한 이래 반세기 이상, 국가시험은 큰 차질 없이 운영되어 왔다. 부정이나 비리에 대한 단속이 만족할 만하게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시험의 질도 대학(학교)이나 연합체가 시행하는 시험에 비해 일반적으로 낫다 평가되어 왔다. 특히 수능은, 지난 30년 같은 이름으로 유지되어 오면서 그 시행에 대한 공신력이 비교적 굳건하게 쌓인 셈이다.
국가가 관리하는 시험으로서 신뢰를 얻어 온 수능은, 대입제도에서 그것과 쌍벽을 이루는 학생부에 비해서도 더 공정하다고 여겨지는데, 그것은 수능의 세 가지 성질 탓인 점이 크다.
우선, 수능은 국가 수준에서 단일한(획일) 잣대를 제공한다. 말 그대로 전국 모든 수험생을 한 줄로 세우는 시험이다. 학교별로 또는 국지적으로 생산되는 다양한 전형자료는 ‘공약수’(公約數)를 지니지 못하는 만큼, 그것에 근거한 사정(査定)에는 이견과 잡음이 일기 마련이다. 수능의 획일성은 그런 ‘불공정’ 시비를 잠재워줄 수 있다.
다음으로, 수능은 공개된 원칙과 절차에 따라 운영된다. 출제나 채점의 과정이 공식적으로 정해진 규칙과 방식으로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각 대학에서 그 점수를 적용하여 당락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숨겨질 수 있는 구석이 사실상 없다. 이와 같은 ‘투명성’은 ‘깜깜이’ 전형이란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는 학생부종합전형과 수능이 극명히 대조되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수능은 ‘객관적인’ 점수를 제공한다. 수능 문항이나 정답에 대한 시비는 사전에 가려지며, 채점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진다. 한 수험생에 대한 채점 결과(점수)를 놓고 이견이 생길 수 없다. 게다가 점수는 숫자로 간명하게 제시된다. 이런 수능의 ‘객관성’은 당락 결정에 대한 왜곡이나 이의 제기 여지를 없앤다.
국가가 엄청난 자원을 들여 관리함으로써 수능은 획일성, 투명성, 객관성 등의 덕목을 갖추게 되었다. 그 덕에 수능은 공정하다고 인정받는다. 대입 경쟁은 ‘인생’이 걸려 있는 만큼 치열하다. 수능이 그런 경쟁에 대한 결판이 객관적으로 투명하게 이의 없이 이루어지도록 만들고 있다면, 그 점에서는 수능이 공정한 제도 수단이라 할 수 있다.5
공정해 보이는 수능의 외면(外面)이 감추고 있는 폐해
수능이 공정하다는 인식은 외면의 절차와 기능만 볼 때 그럴듯하다. 앞에서 정리했던 대로, 수능은 대입 지원자 모두를 획일적으로 평가하여 누구나 확인할 수 있게 숫자로 순위를 매겨 한 줄로 세워 놓는다. 이런 절차의 엄정함과 명료함이 말하자면 수능이 공정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바탕이다.
실지로 이런 절차를 채택함으로써 대입제도가 공정해진 점이 있다. 지난 반세기 이상의 시간에, ‘예비고사’, ‘학력고사’, ‘수능’ 등 이른바 국가 고사를 통해서, 과거 대입제도에 기생했던 부정과 비리들을 꽤 말끔하게 정리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 공정성을 확보하는 일은 거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희생시킨 교육의 가치는 결코 무시해선 안 되는 수준이다. 이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를 불문에 부치고 수능의 공정성을 역설하는 것은, 교육에서 어쩌면 반역에 가까운 일일지 모른다.
수능과 같은 시험이 공정성을 인정받게 되는 역사에서 교육의 가치가 어떻게 희생되는지, 두 가지 경로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 수능은 교육의 가치를 냉소한다 |
첫째, ‘흑막’이 없는 투명한 절차를 거쳐 누구나 납득할 수 있게 객관적인 점수를 수험생에게 부여하기 위해서는 평가의 타당성을 희생시켜야 한다. 교육을 위해서라면 반드시 평가해야 할 요소이더라도, 객관적인 점수로 수험생들을 줄 세우기 위해서는, 평가에 포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잘 알려진 얘기이다. 이를테면 ‘수학능력(修學能力)’에는 흥미나 동기와 같은 이른바 정의적 요소가 핵심적이다. 그러나 정의적 측면을 점수로 드러내는(측정하는) 일은 쉽지 않고, 설사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객관성을 띠기(이의제기를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수능과 같은 시험에서는 정의적 측면을 배제한다.
인지적 요소가 그나마 측정하기 쉽다고 여기고, 이 측면에서는 수능이 그래도 충실한 평가를 해내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면에서도 ‘객관적인’ 시험은 엄연한 한계를 지닌다. 역시 잘 알려진 얘기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특히 공정하기 위해서, 수능은 ‘객관식 시험’이어야 했다. 그런 시험은 ‘주관식’ 평가로라야 포착할 수 있는 ‘심층적인’ 능력을 측정해내지 못한다. ‘표면적인’ 학업 능력을 평가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흔한 말로, 시험은 ‘단편적인 지식의 암기 능력’만을 재게 된다. 수능이 그래도 질 높은 시험이어서 제법 심층적인 부분까지 잰다고 변명할지 모른다. 물론, 문항의 질에 차이가 있고, 그 차이가 측정의 깊이를 다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항의 질로 ‘객관식 시험’의 한계를 극복할 수는 없다.
요컨대 수능과 같은 시험은 공정이라는 편의를 위해 교육의 심오함을 부인하는 방편에 불과하다. 교육을 통해 길러야 할 인간 내면의 가치 대부분을 무시하고, 객관적인 지필시험으로 잴 수 있는 한도 안에서 교육의 성과나 미래 수학능력을 숫자로 표시하고 만다. 그 숫자가 ‘12년 교육’의 성취를 드러내는 모든 것이라 우기는 셈이다. 그렇게 해서 교육의 진정한 가치를 ‘같잖은’ 것으로 내몰아버린다.
| 수능은 교육 자체를 부패시킨다 |
둘째, 수능은 ‘대학수학능력’을 잰다고 표방하면서 대입전형 자료의 결정적인 위치를 점하게 된 순간부터 줄곧 교육을 왜곡하고 부패시켜 왔다. 이점은 오래전부터 ‘Campbell의 법칙’이라는 이름으로 경고되어 왔다.6
Campbell(Donald T. Campbell)이 처음 한 말은 이런 것이다. “숫자로 표시되는 어떤 사회지표가 사회적인 의사결정에 사용될수록 그 지표에 대한 부패의 유인은 거세지고, 결국 그 지표는 그것이 표시하려 했던 사회적 과정 자체를 왜곡하고 부패시키게 된다.” 그의 경고를 수능과 같은 시험의 상황에 대입하면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된다. 수능 점수에는 막대한 이권(high stakes)이 걸려 있어서 수능이란 평가 체제는 부패할 수밖에 없다. 걸린 이권이 클수록 수능 대비에 온갖 ‘지름길’ 방편이 동원되고, 그래서 수능 점수는 타당성을 잃게 되며, 그것을 바탕으로 내리는 결정 자체가 의심스럽게 된다. 사실 이런 결론 역시 수십 년 전에 교육측정 전문가(George Madaus)가 내렸다.
수능에 관련된 우리 교육 현실은 Campbell의 법칙이나 Madaus의 지적을 뒷받침하고도 남는다. 수능뿐만 아니라, 대입 당락을 좌우하는 모든 시험에 대해서 ‘부패한’ 대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를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일타강사들이 조언하는 수능 대비책, 대입 관련 사이트마다 올려져 있는 등급 향상의 체험적 비결, 심지어 학교까지 나서서 조장하는 기출(예상) 문제 풀이 연습 등, 우리 사회에서 이제는 심상한 현상이지만, 이것들은 생각해 볼수록 어이없는 낭비이고 비교육적인 부패 행태들이다. 수능은 이런 부패를 이끌고 있으며, 수능 점수는 그런 부패가 낳은 산물이다.
수능이 교육의 가치를 뭉개버리는 사태를 두 경로에서만 살펴보았지만, 그 진상은 참담하다. 요컨대 교육이 더 이상 교육일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수능은 ‘객관식’ 문항으로 잴 수 있는 것만 추려 그것들이 교육의 전부인 양 둔갑시킨다. 그렇게 둔갑한 점수마저도, 그것에 걸린 배당이 지나치게 커서 득점을 위한 온갖 편법이 끼어들기 때문에, 이제는 무엇을 나타내는 숫자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이란 간판 자체가 무색하다. 수능은, 대입에 연루된 다른 모든 시험과 함께, 학교 교육 자체를 황폐시키고 있다.7
공정 수능 이야기에 앞서 교육의 정의(正義)를 돌봐야
공정 수능을 외치는 것은 적어도 교육상 무의미하다. 수능이 학교 교육을 부패시키고 또 더 이상 대학수학능력을 잰다고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점수를 내는 절차가 범국가적이고 투명하며 객관적인 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공정한 수능을 이야기하는 것은, 수능이 무슨 짓을 하며 어떤 결과를 내놓는지 불문에 부치면서, 오직 그 절차가 어느 쪽도 편들지 않도록 갖추어지게만 만들면 정의로운 처사가 되는 것이라 떠벌리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수능의 절차적 공정성은 수능 자체의 교육적 타당성 또는 정의로움을 떠나 얘기할 수 없다.
수능이 교육제도의 한 요소라면, 그것은 교육에 대해 정의로워야 한다. 교육의 본질적인 가치를 훼손한다면, 그것이 아무리 효율적이고 편의로워도 의미 없다. 수능은 어쩌면 제도적 성가심을 피하는 데 소용이 커서 살아남고 있을지 모른다.
교육의 가치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학교 교육의 과정이나 대입전형에서 주관적이고 불투명한 진단이나 평가가 불가피하다. 그런 진단이나 평가는 사실 일반적으로 모든 전문 분야에서 해당 전문가가 보여야 할 실천 양식과 다름없다. 그러나 대입제도와 관련해서는 그 실천에 따라붙는 이해관계가 심각해서, 그것의 ‘주관적이고 불투명한’ 성질 자체가 큰 말썽의 소지가 되어 왔다. 평가나 입학 사정에 관련된 수많은 부정과 비리의 사례들이 그런 성질을 악용했던 점이 있다. 대입제도는 이 점을 해소하는 데 치중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의 본연을 살리기 위해서 전문적인 판단의 개입이 필수적일 터임에도 불구하고, 대입 제도에서는 그것을 주관적이고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배제해 왔다. 제도에 대한 원성과 항의가 일어날 소지를 줄이는 데 급급했다. 제도 대안을 모색할 때 늘 ‘정성적 접근’보다 ‘정량적 접근’을 우위에 두었고, 전자가 불가피하다면 따라올 이의 제기에 대비한 근거를 객관성 있게 마련하도록 장치했다. 이렇게 객관과 투명을 추구해 온 제도사가 지난 30여 년 수능이란 시험을 지탱시켜 왔다.
수능이 긴 역사를 버텨 온 탓일까? 이제 사태는 뒤바뀌었다. 수능이 교육의 ‘안방’을 차지해 앉은 꼴이 되었다. 한때 입시는 교육을 왜곡시키고 타락시키는 주범으로 지탄받았지만, 이제 수능은 학교 교육의 길을 지시하는 기준이 되었다. 대통령부터 모든 정책결정자가 더 이상 학교 교육의 진정한 가치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직 수능의 공정성을 이야기한다. 특히, 학교의 일차적인 책무는 사교육의 필요가 없게 수능 대비를 시켜주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공정 수능’은 또한 “공교육 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내용”을 배제함으로써 구현될 수 있다고도 강조한다. 이 맥락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흥미로운 지시를 내렸다. “과목 융합형 문제 출제는 처음부터 교육 당국이 사교육으로 내모는 것으로 아주 불공정하고 부당하다.” 그러므로 배제하라고 했다. 그런데 수능을 도입하며 당초에 내건 핵심 취지는 “특정 교과목시험이 아니고 통합교과적 소재를 활용하여 출제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시험이라야 “암기 위주의 교육을 탈피하고 사고력을 신장하여 고등학교 교육의 정상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지시는, 말하자면, ‘교육 정상화’의 노력이 수능의 ‘공정성’을 해친다면8 그 노력을 버리라는 것이다. 수능의 공정성을 확보하려는 대책은 교육의 정상성을 해치지 않는 한에서만 운위되어야 마땅하지만, 대통령은 이 가치 위계를 뒤집었다. 수능의 절차적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제대로 된 교육이 어떤 것인지는 고려하지 않아도 좋다고 얘기한 셈이다. 무지의 표출이었는지 아니면 우리 사회의 교육관 전도(顚倒) 양상을 그대로 반사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런 탓에 ‘공정 수능’의 이야기는 권력을 업고 핵심 정책으로 번안되고 있다. 입시 위주 교육을 지양해야 학교 교육이 바로 선다는 주장이 정론(正論)이라면,9 공정 수능의 담론은 그 정론에 대한 반역이다. 이 반역이 거의 성공에 다가서고 있다.
※ 본 칼럼은 필자의 고유의견이며 ‘교육을바꾸는사람들’의 공식견해가 아닙니다.
각주
- 대통령실 홍보수석 서면 브리핑(2023년 6월 16일).
- 교육부 보도자료(2023년 6월 26일). 사교육 경감대책.
- 서울신문(2017년 12월 28일). 문대통령, “새 대입제도 공정하고 단순해야.”
- 경향신문(2019년 10월 22일). 시정연설 전문-문 대통령 ‘공정’ 위한 ‘개혁’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
- 최근 불거진 이른바 ‘킬러문항’ 논란은 수능이 획일성, 투명성, 객관성과 같은 성질을 확보하고 있더라도 문항 난도(難度)가 적절하지 못하면 불공정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난도가 지나치게 높아 고액의 사교육을 받은 수험생들만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게 된다면, 과연 수능이 공정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바로 이 점을 지적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지적이 합당했는지는 아직 결론 낼 수 없다. 제대로 검토하려면, 우선, 킬러문항이 실지로 사교육 도움 없이는 풀 수 없는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학교에서도 그런 문제 풀이를 연습하고 있고 또 그 연습의 효과가 없지 않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울러, 킬러문항으로 인한 사교육이 대통령 말대로 대입제도의 공정성을 총체적으로 위협하는 ‘문제의 핵’인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대통령의 지적은 수사적인 과장이자 정치적인 책략일 수도 있다. 문제가 복잡해서 좀체 풀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 문제를 단순하게(킬러문항이 공정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왜곡 정의(定義)하고 그 정의에 맞춰 시책을 펴고 성공한다면, 마치 본디 문제를 해결해 낸 것처럼 업적을 과시할 수 있다. 이런 점을 노린 통치술인지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수능이 지녔다고 여겨지는 ‘공정’의 속성들은 ‘부정과 비리’를 견제하는 힘을 지닌 만큼, 수능이 다른 전형 방식에 비해 ‘외부 요인’의 영향을 덜 받는(‘공정한’) 것이 되도록 하는 점이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갖춘 수능도 대입제도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해 변전하게 되면서 뒤틀리고 부패해진다. 말하자면, 사교육(좀 더 일반적으로 ‘가정 배경’)과 같은 외부 요인(부패 전략)의 손아귀에 포획되어 갈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조금 더 얘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측면에서의 수능 불공정성은 차라리 사소하다고 보아, 이 글에서 비중을 두어 논의하지는 않는다. 수능 성적이 사교육 영향을 받는다 아니다, 수능 위주 전형에서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 유리하다 아니다 등과 같이 논란되는 문제가 논의할 가치가 없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이 글에서는 다만, 그런 측면의 수능 불공정성을 거론하기에 앞서, 수능이 무엇보다도 학교 교육 자체에 불의하다는 점을 들어 그것의 불공정성을(정의롭지 못함을) 고발하는 일이 먼저 이루어져야 마땅하다고 본 것이다.
- Campbell이 한 것과 같은 지적은 사실 비슷한 시기에(1970년대에) 다른 학자들도 했다. 그만큼 그 지적이 타당하고 널리 수긍된다는 뜻이 될 것이다. Marilyn Strathern이라는 인류학자는 그 법칙을 이렇게 요약하기도 했다. “어떤 점수가 일단 목표가 되어 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좋은 ‘값’이 될 수 없다.”
- 시험이 어떻게 학교 교육을 황폐시키는지 이미 얘기해서, 여기에서 다시 풀어놓지 않는다(2023년 2월 16일 ‘교육 제4의 길’에 올려진 칼럼, ‘교육과 시험의 본말전도’ 참조).
- 앞에서 논급했듯이, 이때 공정성은 물론 ‘절차’의 공정성에 불과하다. 교육적 타당성을 지니지 못하는 시험에서 절차만의 공정성은 무의미하다.
- 이런 입장 역시 앞에서(주 7) 언급했던 ‘교육과 시험의 본말전도’에서 어느 정도 피력했다.
‘교육사회학’ 선생으로 일했다. 부족했던 점을 성찰하며, 조금이라도 메우기 위해 더 공부하고 있다. 한 사회가 교육과 학교에 대해 어떤 신화(상식)를 만들고 품는지, 그리고 그런 신화는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분석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다. 인류 역사와 사회의 구분을 따라, 교육의 관습과 제도로 드러나고 또 변전해 온 신화들을 캐며 비교하고 있다.